ㅡ강동구 천호동ㅡ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곡교리의 일부로, 1936년 광진교를 놓을 때부터 마을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동명은 이곳이 인가 수천호가 살만한 지역이라는 풍수지리설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본래 천호동은 광나루로 인해 형성되기 시작한 도진촌락이다. 광나루는 신라시대부터 이미 북독이라 하여 중사를 행하였고, 고려시대에는 양진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하사로 받들었으며. 이때부터 광진이라 하였다. 광진은 서울에서 광주로 통하며, 뱃길로는 멀리 충주를 거쳐 동래도 또는 원주를 지나 동해안으로 가는 요충지였다.
1936년도에는 광진교가 놓임으로써 천호동과 서울과의 길이 육로로 바뀌었고, 성동구쪽의 도시화의 물결이 광진교를 건너서 천호동쪽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또 한강의 범람으로 인한 질좋은 진흙으로 만든 벽돌과 옹기, 곡식과 채소 또는 경기도 광주군지역에서 모여든 산물들이 날씨에 구애없이 쉽사리 한강을 건널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천호시장 등 비롯하여 천호동에 자리잡은 여러 시장들은 이곳이 상업의 중심지적 역할을 보여준다.
자연마을과 지명유래는 다음과 같다.
- 곡교리(곡교, 곱은다리, 가운뎃말) : 마을 앞에 굽은 다리가 놓여 있으므로 굽은다리 또는 한자명으로 곡교라고 하였으며, 여러마을 중에 한 가운데에 있었으므로 가운데 마을이라고도 함
- 당 말 : 마을 뒤에 신당이 있었으므로 당말 또는 한자명으로 당촌이라고 한다.
- 벽동말 : 벽오동 나무가 있었으므로 벽동말이라 하였다.
● 강동구 상일동의 유래
- 게가 많았던 게내천의 윗마을
게내 마을은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일부였는데, 1914년 3월 1일 경기도 구획 획정에 따라 게내의 위쪽과 아래쪽을 나누어 상일리와 하일리로 나누어 불렀다. 현재의 상일동上一洞은 게내 마을, 게내 안말과 동자골童子谷의 일부 등 자연 마을을 병합하여 부른 이름이며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현재의 상일동이 되었다.
게내 마을의 현 위치는 상일동 20번지 일대이다.
게내는 게가 많이 있어 게내 또는 한자명으로 해천蟹川이라 부르는 게냇가에 있는 마을로서 게내가 변하여 겨내가 되었다. 게내는 이 지역의 주요 하천으로서 현재의 고덕천을 말하다.
상일동은 인근 하일·명일·고덕동과 같이 서울 외곽 지대의 전형적인 농촌으로 잔존 되어 온 지역이다. 상일동의 농촌 지역적인 성격은 이곳에 남아 있던 씨족 마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옆 하일동과 함께 서울의 마지막 씨족 마을인 셈이다. 게내 마을에는 임씨 마을이, 동자골에는 조씨 마을이 남아 있을 때까지만 해도 이들 씨족 마을은 연중 대행사를 매년 9월에 길일을 택해 산에 치성제致誠祭를 올리는 것이 전통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남아있던 씨족 마을도 상일동이 고덕 지구로 개발 사업에 포함된 뒤 주민들이 광주군으로 이주하였다.
상일동에는 아직도 자연 촌락의 명칭과 옛 지명이 남아 있는데 게내 마을과 고덕동 편에서 밝힌 동자골 이외에도 게내 안쪽에 있는 게내안말과 예전에 닥을 많이 심는 밭이 있었던 산이라 해서 불린 닥밭재가 있다. 상일교上一橋는 상일동 앞에 있었던 다리이며, 찬우물고개는 닥밭재 오른쪽에 있는 고개로서 그 밑에 찬 우물이 있으므로 찬우물고개 또는 한자명으로 냉천현冷泉峴이라 하였다.
● 강동구 하일동의 유래
- 게가 많았던 게내촌의 아랫마을
하일동下一洞은 오늘날 강일동江一洞으로서 중심이 되는 마을은 가래 여울인데 가래울로 불리었다. 1914년3월 1일 경기도 구획 획정에 따라 능공, 벌말, 말우물, 강매터, 가래울을 병합하여 게내의 아래쪽이 되므로 하일리라 하였다.
가래울은 서울의 외곽 지대로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었다. 또한 평촌, 능곡 마을 1백여 세대는 청송靑松심沈씨의 마지막 씨족 마을이었다. 이들 가운데 중심 마을이라 할 수 있는 평촌 마을을 중심으로 주위에는 심씨 성을 가진 주민이 많이 살고 있다.
심씨촌의 연중 대행사로는 매년 음력 7월 3일에 산에 치성제를 올리는 것이 전통화되어 있다.
이 산신제를 위해서 마을 남쪽 안산 꼭대기에 소머리를 제단에 올리고 집집마다 추렴한 쌀로 떡과 술을 빚어 산신령께 마을의 평안과 풍년을 빌었다. 이날이 되면 타 지역으로 나가 살던 심씨 일가가 모두 돌아와 재회의기쁨을 나누기도 하였다. 이 청송 심씨 마을 이외에도 강매터의 이씨 마을' 가래여울의 문씨 마을 등의 씨족 마을이 남아 있었으나 1982년 7월 인근 고덕 지구 개발 때문에 경기도 광주군으로 대부분 이주하였다.
강일동에는 아직도 예전의 자연 마을 명칭이 남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가래울은 가려울 가리울 또는 추탄이라고 불리었는데, 한강 여울가에 있는 마을로 강가에 가래나무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며 백제 때부터 요새지였다. 벌말은 마을이 벌판 한가운데 있으므로 위와 같이 불렀으며 여러 마을 중에서 가장 큰 마을이라 하여 큰말이라고도 하였고 또는 평촌이라고도 불렸다. 건너말은 벌말 건너에 있는 마을이며, 강매터(강매지江梅址)는 인조 때 강매란 사람이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구석말은 마을이 구석진 곳에 있어, 능골은 능을 모실 만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말우물은 네모져서 구식 말(斗)의 모양과 같이 된 우물(井)이 있었으므로 말우물 또는 한자명으로 두정곡斗井谷이라 하였다.
하일동은 대부분 농경지로서 주민들도 대부분 농업에종사하였는데, 인근 고덕동과 상일동의 개발에 따라 함께 개발지로 변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