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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마지막 재회(再會)
슬몃슬몃 오월이 지났다.
집주인 오다무네노리는 곤을 식탁에 올릴 가축처럼 사육할 작정이라도 한 것일까? 저택에서 지내는 운신의 폭도 비교적 자유로워 과장하면 집주인이 빈객(賓客)의 대접을 베풀고 있는 것이다. 의도는 알 수 없지만 곤을 가르쳐 시야를 넓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까닭 없는 환대란 없다. 복중에 무슨 속내를 감추고 있어 곤을 시험대에 올려놓은 것일까.
고마꼬만 해도 그렇다. 틈만 나면 쫓아들어 뭐 필요한 것 있냐없냐 추궁하듯 캐묻는다.
의아하다면 곤에게 사람을 붙여 동북일대의 정세와 언어, 관습을 익히게 하면서 견문을 숙지시켰다.
정해진 시간이면 학식 깊은 만주인사범이 어김없이 나타났고, 곤은 그에게 동북의 풍습과 지형 등 많은 것을 학습 받았다. 두말할 것 없이 오다무네노리의 의도에 의한 일이다.
낙점(落點)하여 집주인의 뜻에 차지 않는다면 순식간에 모든 것이 끝장나고 만다는 것쯤 눈칫밥을 먹어온 곤이 모를 리 없다.
들어내지 않고 있는 숨겨진 꿍꿍이가 있지만 생존하려면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은 기본이다. 일정한 금액의 돈도 와다나베집사장을 통하여 지급 받고 있었고 대부분을 노모에게 보냈다.
“부산처럼 교오또오의 봄도 그리 길진 않구나...”
계절이 어느새 여름의 문턱으로 넘어가 있다.
“아! 고향의 들꽃이 생각나는 근사한 외출이 되겠구나.”
바람줄기가 시원한 초여름 어느 날 오후, 곤은 와다나베집사장에게 이미 외출허가를 받아놓고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바깥출입은 되도록 삼가고 있는 곤이지만 오늘만큼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앙큼하게도 그동안 연락 한 번 없던 하루꼬가 며칠 전 장문의 편지 한 통을 보내왔는데, 일상적 내용과 그녀의 응석 담긴 하소연에 이어 생각해 주는 척 미찌꼬에 관한 근황도 짤막하게 올려놓았다.
“그토록 큰 즐거움이 있다면 나에게도 좀 나누어주시지 그래요.”
“익크, 깜짝 놀랐잖아.”
곤은 불장난하다 들킨 아이처럼 화들짝 놀랐다.
“어머나! 저 큰 덩치에 놀라는 모양 좀 봐.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아이가 따로 없군요.”
살금살금 숨어온 고마꼬가 딴 곳에 정신이 팔려있는 곤을 뽀로통하게 비꼰다.
“무엇이기에 빼돌리며 숨기고 그래요? 어디 좀 내놔 봐요. 도대체 얼마나 중한 것이기에 내가 오는 줄도 모르고 정신이 거반 빠져 있는지 나도 좀 알게요.”
“뭐 별 대단한 것도 아니야.”
“어라! 더 감추고 있네. 그런다고 내가 그냥 넘어갈 줄로 생각한다면 정말 오산이에요.”
고마꼬는 사마귀처럼 앙칼진 손으로 곤이 한사코 뒤로 빼돌리려는 것을 강취하려 들었다.
“고마꼬, 이것은 단지 노모에게 보내는 안부편지일 뿐이야.”
“잘도 둘러대는군요. 가네모도상이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는 언제나 내가 부쳐 드렸잖아요. 만약 나 몰래 따로 숨기는 것이 있다면 나는 두 번 다시 가네모도상을 상대하지 않을 것이에요.”
고마꼬가 의외로 완강하다. 서운해 하는 눈에 이슬까지 맺힌다.
친오빠처럼 기대어온 고마꼬를 곤은 더 외면하여 따돌릴 수가 없다. 내미는 두 통의 편지를 고마꼬가 날카로운 부리로 모이를 쪼아 먹는 수탉처럼 낚아채 간다.
“이 한 통은 과연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가 틀림없군요. 하지만 이것은? 어머나! 미찌꼬라는 여자분, 이분은 또 누구에요? 아직 한 번도 말했던 적이 없었잖아요. 오호라, 이제 알겠어요. 이 미찌꼬라는 여자 에게 보내는 연서 때문에 한사코 숨기려 하였군요.”
고마꼬가 배신감을 느껴 억울한 표정으로 따져 묻는다.
“나에게 들킨 이상 사실대로 다 털어놔요. 조선에 있는 이 미찌꼬란 여자 분과의 관계를요.”
고마꼬가 죄인 문책하듯 다그치자 곤은 풀죽은 목을 움츠리며,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이상하게 부풀리네. 안 그럼 예쁘게 봐줄 텐데.”
펄쩍 날뛰는 고마꼬를 우선 살살 달래고보는 것이 상책이다.
새파란 고마꼬의 눈에 질려버린 곤은 변명 아닌 변명으로 타일렀다. “미찌꼬라는 여자는 언젠가 말했던 하루꼬의 친언니일 뿐이야. 신세진 것이 많아 오늘 그 동안 마음 두었던 안부편지라도 몇 자 적어 보내려는 것이지. 내용이랬자 내가 일본에서 지내는 근상(近狀)을 간단히 알려 보내는 정도에 불과해. 아직 봉하지 않았으니 내 말이 정 믿기지 않거든 지금 확인도 좋아.”
고마꼬가 새침하게 토라지며,
“고마꼬는 남의 편지 따위나 읽어보는 그런 고약한 여자가 아니랍니다. 가네모도상이 워낙 당황해 하는 바람에 나도 몰래 좀 요란을 떤 것 뿐이여요.”
“햐! 웬일로 오늘은 내말을 금방 다 믿어주는 것일까?”
“하지만 가네모도상과 그냥 단순한 관계가 아닐 것이라는 것쯤은 금방 짐작할 수 있어요. 여자라면 누구라도 그 정도야 간단히 알아버려요.”
말은 야멸치게 하면서 편지를 되돌려주는 너그러움도 보인다.
“고마꼬! 외출에서 돌아올 때 선물을 사다주고 싶은데 혹 마음에 생각해둔 것이 있다면 미리 귀띔 좀 해주면 안 될까?”
“어머나! 가네모도상이 선물을 다?”
고마꼬는 그 한마디에 벌써 감동하여,
“고마꼬는 가네모도상이 선물로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마음에 들어 할 것이에요. 물론 값나가는 것은 바라지 않고요.”
단순한 고마꼬라 금방 밝은 얼굴로,
“하지만 지금 막 생각나서 하는 말인데, 하루꼬라는 여자분을 만나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정히 이 고마꼬를 잊어버리지 않았다면요, 예쁜 장식용 머리빗 하나만 사다주어요. 너무 비싼 것은 말고요. 고마꼬는 그 빗이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가네모도상을 고마워하며 머리를 빗을 것이에요.”
곤은 자기가 누구냐며 힘주어 약속하고 외출하고 없을 동안의 일을 고마꼬에게 부탁했다.
“고마꼬씨, 그런데 나 없는 동안 제발 내 소지품 좀 뒤지지 말아다오.” 신신당부하고 약속된 장소로 찾아 나섰다.
시내에 있는 일식전문의 요리집으로 하루꼬가 미리 지정한 곳이다.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어 교오또오에선 상당히 알려진 명소의 한곳이기도 했다.
걸음을 옮기면서 곤은 하루꼬의 편지내용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형식을 갖춘 간단한 안부인사로 시작하였지만 갈수록 어수선한 그녀심경이 비쳐났다.
하루꼬가 곤을 불러낸 세끼요오야(夕陽屋)라는 일식집은 무로마찌아네고오지(室町姉小路)라 불리는 거리에 있다. 곤이 내린 전차역에서 걸음으로 약 이십분 정도의 비교적 가까운 거리다.
황실과 헤이안(平安=교오또오의 옛지명)신궁(神宮)이 있는 교오또오는, 동경으로 수도가 이전(移轉)되기 전 약 천년 동안 일본의 행정수도다. 북쪽으로 히에이산이 높이 솟아 있고 동쪽에도 히가시산이 균형을 잡아주는 모양으로 위치하는데 도시 한복판으론 혈관과도 같은 가모강이 흐른다.
걷다 걸음을 멈추고 눈에 띄는 전쟁독려문들을 읽어보기도 했다.
현재 일본의 전황(戰況)은 매우 절박한 상태다. 커다란 둑이 막 터지기 일보직전의 위태한 국면이다.
필리핀,타이,버마,월남,말레이,인도네시아 등 이런 지역을 비록 점령하여 있다고는 하나 보급로를 위협하는 미국의 반격에 갈수록 고전했다.
1942년 4월의 동경공습이라던가 미드웨이해전에서 패한 이후로 줄곧 수세를 벗어나지 못했고, 더 이상 합동전술을 구사할 수 없을 정도로 제해권과 제공권을 상실하여 있었다.
1943年 가을부터 미국에 의한 본토공습이 숨 돌릴 틈 없이 극심해지자 일본의 전시경제는 하루가 다르게 파탄으로 빠져들고, 보충인력도 태부족이라 사십대 이상의 노병들이 소집되었으며 대학생들도 전장으로 내몰렸다.
그러나 곁으로만은 아직까지 태연하다. 버드나무 그늘 밑에 앉아 한가히 쉬고 있는 사람들도 보인다.
교오또오는 버드나무의 도시다. 각양각색 건물지붕 위로 휘늘어진 가지를 드리우고 있는 풍경은 적어도 교오또오만큼은 일본이 전쟁 당사국임을 잊게 하여 도시 전체를 평화로운 궁궐처럼 감싸주었다.
일본이 전쟁을 도발하여 스스로 중병을 얻은 나라라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한정(閑靜)하고 평화롭다. 그러나 전쟁으로 억눌린 압박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상한 침묵이 흐른다. 탁하고 음울(陰鬱)한 정적이 도시전체를 휘감고 있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왜 감당하지도 못할 전쟁을 도발한 것일까? 설사 전쟁에 승리한다손 치더라도 짓밟힌 국가나 상대국민들의 괴로움은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필승 천황만세’ ‘전 국민 결사 응전’따위의 붉은 글씨가 새겨진 머리띠를 두르고 줄지어 지나가는 학도병들을 보았다.
곤이 근래 들어 느끼는 일이었지만 조용하기만 하던 오다무네노리의 저택에도 어떤 미묘한 변화가 일어, 출입하는 사람들의 수가 부쩍 늘었고 군복차림의 사람들도 간혹 눈에 띄었다.
곤이 모르는 무슨 일이 꾸며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데 오다무네노리의 의중을 도무지 헤아릴 수 없다. 뭘 어쩌자는 것일까?
숨기고 싶을만한 것도 있을 텐데 일본의 치부를 그대로 들추어 곤에게 낱낱이 보여주었다. 그 숨겨진 심계(心計)의 뱃속을 도시 들여다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시간적 여유가 있기에 곤은 여자들의 장신구를 전문으로 파는 가게를 찾아 들러, 고마꼬가 흡족해하기를 바라면서 물소 뿔로 만든 빗과 뚜껑에 거울이 붙어있는 작은 분갑을 샀다.
또 여자들이 좋아할만한 노리개 하나도 포장하여 잘 간직해 넣었다.
이제 하루꼬를 만날 시간이다.
좀 먼 거리였지만 세끼요오야 입구에서 동그란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젊은 아가씨는 틀림없는 하루꼬다.
“저 맹꽁이!”
곤은 하루꼬를 보자 번거롭던 생각을 일시에 날려 보내고 그리움의 환성을 질렀다. 초조한 행동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목을 빼고 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야호!”
하루꼬가 곤을 단번에 알아보고 주인을 기다리던 강아지처럼 쪼르르 달려온다.
작은 물고기를 입에 물고 날아오르는 물총새를 연상시키며 검은머리 휘날리는 저 젊은 얼굴에도 기쁨의 물결이 눈부시게 출렁였다. 그런데 하루꼬가 갑자기 못박인 것처럼 곤의 코앞에서 우뚝 서버린다.
“하루꼬! 오랜만에 만나놓고 이상하게 행동하지 마. 표정은 또 왜 그래? 이상야릇한 얼굴을 하여가지고서는. 여기까지 바쁜 사람을 불러 내놓고 또 나를 놀리려 작정하는 것이구나. 만나자말자 그러면 정말 화낼 거야.”
곤이 질려버린 표정을 짓자 하루꼬가 찬찬히 뜯어보며,
“당신 정말 풀무치오빠가 틀림없어요?”
“뭐야?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 쓰고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오랜만에 만나놓고 또 엉뚱한 말뿐이네. 그럼 이 자리에 나 말고 불러낸 또 다른 누가 있단 말인가? 나 참! 어처구니가.”
하루꼬는 변신된 곤의 모습에 정말로 놀라워하였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달라졌군요. 사람이 짧은 순간에 이렇게 확 바뀌어 보인다니 정말 놀라워요.”
곤은 씨-익 웃으며,
“요 미운 거짓말쟁이! 사람을 그토록 기다리게 만들고는.”
곤이 머리를 쥐어박는 시늉을 하자 하루꼬는 어색하고 겸연쩍은 웃음을 싣고서,
“오빠!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내 마음은 잠시도 오빠 곁을 떠나본 적이 없었어요. 분명한 사실이니 의심치 말아야 해요. 내말 믿어주는 것이지요?”
검은 눈망울을 솔솔 굴리는 변명에 곤이 불신의 눈빛으로 흘겨보자 왈칵 심통을 부리며,
“믿는다고 말해주지 않으면 나는 그냥 돌아가 버릴 테야.”
“그래. 믿는다 믿어. 누구의 말이라고 안 믿고 말겠어. 요 깜찍한 거짓말쟁이.”
“저 봐. 방금도 나를 거짓말쟁이라고 말했어.”
“앗차차! 나도 모르게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어요. 미안. 미안. 그대가 나만 보면 놀리려고 하는 데다 모처럼 만나고보니 반가움이 넘쳐나 그만 말이 헛 새어나왔네. 잘못을 인정하는 뜻으로 오늘은 내가 한턱 쓰지요. 하루꼬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시켜도 좋아.”
하루꼬가 의미 있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잘못을 시인한다니 이번은 덮고 넘어가겠어요. 그런데 오빠에게 무슨 돈이 있다고 허풍을 떨고 그래요?”
“그런 소리 마. 언제 내가 허풍을 떠는 것을 보았기나 한 것처럼. 원한다면 장차 하루꼬도 내가 먹여 살려줄게.”
“호홋! 큰소리 하난 늘었군요. 하지만 풀무치오빠는 내가 코끼리만큼 많이 먹는다는 것을 아마 잊었나보군요?”
“그 말이 으름장으로 들려 괜히 떠들었다는 생각이 드는 걸. 아니 들은 것으로 해주면 내가 가게 안으로 업어 모셔주지.”
“좋아요. 나의 잘못도 있으니 비긴 것으로 하여요.”
“하하핫!”
“호호호!”
둘은 입을 한껏 벌리고 웃었다. 이렇게 웃고 떠드는 와중이었지만 곤은 까닭 모를 어둠이 하루꼬의 얼굴을 가리는 것을 흘깃 보았다.
“가네모도상이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한결 마음이 놓여요.”
“하핫! 그렇긴 한데 오다님은 아마도 나를 내다팔 가축처럼 살찌울 작정이신가 봐. 아직까지 어떤 일거리도 맡겨주질 않으시거든. 그래도 매달 일정한 돈은 받고 있어.”
“호호! 잘 지낸다는 뜻으로 해석할게요.”
하루꼬가 곤의 손을 잡아끌며 세끼요오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자 중년 여종업원이 미끄러지듯 달려와 두 사람을 맞이하여 둘을 넓고 조용한 이층 어느 방으로 안내한다.
“아자 차!”
강아지처럼 방석 위로 홀짝 올라앉는 하루꼬의 모습이 퍽 활달하다.
창밖으로 시가지가 내다보이는 제법 전망이 근사한 자리다.
“세끼요오야에는 알려진 맛있는 요리가 많기도 하지만 그중에 복어회와 돔 뱃살을 썰어 얹힌 생선초밥이 가장 인기에요.”
거기에 조기로 만든 생선어묵 또한 빠뜨릴 수 없는 이 집만의 소문난 일미(一味)다.
둘은 마치 오늘로 세상이 끝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세끼요오야의 이름난 요리들을 눈에 집히는 데로 이것저것 시켰다.
“오빠는 술을 마셔본 적이 없지?”
“글쎄!”
곤의 아리송한 대답에,
“대답이 뭐 그래요. 하여튼 오늘 내가 특별히 가르쳐 줄 테니 잘 배워둬요. 장부가 어떠니 떠들면서 한심하기는.”
하루꼬는 곤이 손을 내젓는데도 자기 멋대로 마사무네(正宗=일본식 청주)라는 술을 주문했다.
지난 몇 개월에 곤만이 변한 것이 아니었다. 하루꼬도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어디로 보나 어른 티가 확연히 풍기는 성숙한 여성으로 탈바꿈해 보인다.
어깨 위로 닿을 듯 말 듯 단정하게 흘러내린 머리채가 상체를 움직일 때마다 물결치듯 출렁거렸다.
허리가 잘록하고 앞이 조금 파여진 하얀 브라우스의 곡선도 잘 발달된 그녀의 붕긋한 가슴을 매우 선정적으로 돋보이게 한다.
또 종아리를 감출 듯 말듯 자색빛깔 주름치마끝자락이 살짝 끄트머리를 들어 올릴라치면, 살집이 야물어 건강해 보이는 다리가 희멀건 빛깔로 사물사물 생기를 발산했다.
그러나 곤이 하루꼬에게서 느끼고 있는 변화는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맑은 하늘같던 얼굴 어딘가에 전에 느껴볼 수 없던 까닭 모를 먹구름이 서려있는 느낌이다. 자주 웃음을 보여 주곤 있지만 투명하지를 못했다.
말수가 줄었다는 것도 큰 변화 중의 하나다.
“하루꼬는 나더러 변했다고 말하지만 정작 변한 것은 하루꼬일 걸. 차분한 모양새와 정돈된 표정이 숙녀가 다 되어버렸네. 수작이라도 슬쩍 걸어 보고 싶은 매력이 물씬 엿보인다는 점이야. 어험! 이번에는 하루꼬가 나를 추겨 줄 차례겠지.”
“후훗! 듣기 싫지만은 않군요. 참 신통하게 들려요. 정말 나를 놀라게 하는군요. 하지만 말만 번지러하게 늘어놓지 말고 행동으로도 좀 나타내보시지 그래요.”
두 사람 앞에 턱 가로놓인 탁자가 없었다면, 성미 급한 싸움닭처럼 하루꼬는 틀림없이 곤의 가슴으로 뛰어들고 말았을 것이다.
이렇게 몇 마디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다행히 하루꼬도 예전의 그 환한 모습으로 되돌아와 새벽별처럼 깨끗하게 빛나고 있었다.
“우와!”
음식이 날라져오자 둘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번갈아 얼굴을 쳐다보며 장난기가 발동한 아이들처럼 낄낄 웃어댔다.
“이 많은 걸 누가 다 먹지?”
“걱정도 팔자군. 여기 먹보가 하나 있잖아.”
“흥! 나는 뭐 오빠에게 양보할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네.”
기분이 좋아진 하루꼬가 신이 나 음식을 잔뜩 입에 물고 떠들어대기 시작한다.
“오빠 덕분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다 먹게 될 줄이야. 이래서 사람은 오래 살고 봐야 한다니까요. 자, 우리 건배해요.”
맑은 청주가 하루꼬의 손에 의해 작은 사기술잔 안으로 잘금잘금 채워졌다.
“나는 오빠의 건강과 또 오빠의 모든 일이 원만히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며 마실 테여요. 오빠도 하루꼬를 위해 한 마디쯤 축원해 주어요.”
“그야 당연하지. 하루꼬의 미래, 하루꼬의 소망, 하루꼬의 상아탑, 여기 더하여 하루꼬가 더욱 예뻐지도록 빌어야겠다.”
“세상 모든 것을 다 기원해 주어도 아마 모자랄 걸요.”
한잔 마신 술 때문인지 하루꼬가 말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둘은 상대의 말을 도중에 막아 밀쳐내기도 하면서 그동안 쌓였던 저마다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냈다. 나중에 무슨 말을 하고자는지도 모르면서 떼쓰고 고집 부리며 웃고 마시고 신나게 떠들었다.
감흥이 일었는지 하루꼬가 곤의 앞으로 상체를 기울여 와 잔을 권하며,
“이번에는 가네모도상이 내 잔을 받을 차례여요.”
비 개인 날 촉촉한 흙을 비집고 돋아난 새순처럼 부드러운 흰 손을 불쑥 내민다. 저 작은 손바닥 위에 윤택이 찰찰 흐르고 태깔마저 녹녹해 보이는 술잔 하나가 살짝 바쳐져 있다.
술이 이끌어주는 나름대로의 고유한 멋을 부리며, 그 달콤한 향에 젖은 붉은 입술로 술의 감미로움을 가르쳐주는 젊은 처녀에게서 받아 마시는 술! 알면 얼마나 안다고 건방지게 술을 예찬하는지 모르지만, 곤은 하루꼬의 잔을 한 차례도 거부하지 않고 날름날름 다 받아 마셨다. 하루꼬가 약간 흐트러진 자세로 다시 곤에게 술잔을 건네 왔다.
“하루꼬! 나는 그 누구처럼 많이 마시지 못해.”
사실 허풍을 떨고 있는 하루꼬를 더 걱정하고 있었다.
“치이! 덩치만 커다래 가지고 바보처럼 몇 잔에 쩔쩔 매다니. 하루꼬를 실망시키지 말고 어서 빨리 잔이나 비워 돌려줘요.”
취했기 때문인가! 새뜻한 하루꼬를 앞에 앉혀 두어서 그런가! 술이란 것도 마셔 볼만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다.
이 야릇한 음료는 처음엔 혀에 닿는 것이 다르고 목안으로 흘러드는 느낌이 또 다르다. 하루꼬의 깊은 식견?을 따를 수밖에 없는 곤은 하루꼬가 부추기는 잔을 밀어낼 묘수가 퍼뜩 떠오르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을 유혹하는 미향(迷香)이 녹아 있음인지, 멋모르고 마신 한두 잔은 과연 갈증을 앉히고 긴장을 풀어주는 명약이긴 하다.
그 마력의 약효 때문인지 하루꼬의 말에 맞장구치며 곤은 평소와 달리 많은 말을 하였다. 속으로‘요 계집애가 술은 또 언제 배웠지’라는 의문도 들었지만 혹 하루꼬의 기분을 상해버릴까 접어두고.
“가네모도상!”
곤이 하루꼬를 쳐다보니 눈 주위가 제법 붉어 있다.
“바보같이. 이제야 미찌꼬언니가 왜 기를 쓰고 가네모도상을 바보라 탓하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아요.”
곤은 실컷 먹고 마시고 하던 하루꼬가 갑자기 정색하고 자기를 핀잔하자, ‘이 계집애는 잊을만하면 나타나서 또 사람 속을 뒤집는구나.’하고 자기도 한번 핍박을 줄 참이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전 같지 않은 하루꼬이기에 생각 얕게 함부로 대꾸할 수 없다. 창밖으로 흘러가는 가모강을 쓸쓸히 내다보는 하루꼬에게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직감하였다.
“하루꼬! 혹시 감추고 있는 혼자만의 걱정거리라도 있는 것 아냐? 사실이라면 나는 하루꼬를 섭섭하게 여기지 않을 수가 없네. 우리가 언제부터 가슴에 있는 것을 감추고 지내야하는 그런 사이가 되었지? 자꾸 뜸들이지 말고 이쯤에서 속 시원히 모두 털어 내놓지 그래. 끝까지 숨기려고 한다면 나는 하루꼬를 정말 서운하게 여기고 말거야.”
결국 곤이 먼저 꼬투리를 잡았다.
“오빠 눈에도 내가 걱정을 안고 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보여?”
“나 뿐만 아니라 여기 누구에게 물어봐도 그렇다고 대답할 걸.”
하루꼬가 아랫입술을 잘끈 깨문다.
더 이상 감추어 버티기가 힘든지 순순히 사정을 들추어 꺼내기 시작하는데 매우 놀라웠다. 이번 여름이 가기 전에 육군의무대(醫務隊)로 강제 입대케 될 것 같다며 고충의 서두를 꺼냈다.
“설마?”
곤의 가슴도 철렁 내려앉고, 경위를 말하는 하루꼬는 몸을 떨며 자신에게 불어 닥친 엄청난 불운의 충격을 감추지 못한다. 그녀자신은 말할 것 없고 가족들에 있어서도 이만저만 위극(危極)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오다무네노리의 집에 머물면서 누구 못지않게 현 정국(政局)에 안목을 틔운 곤이다. 일본은 곧 패전국(敗戰國)으로 전락하여 삼류국가로 추락할 것이 분명하였고, 조선에 생활기반을 가진 하루꼬의 가족은 생존자체를 위협받게 되는 것이다.
하루꼬마저 학업을 중단하고 육군의무대로 전선에 투입된다니, 이런 경우에 처하면 어느 집안이라도 감당키 어려운 난항에 놓인 것이다.
일본의 전쟁지휘부라는 것이, 군의 사기를 위한다면서 여성을 한낱 동물적 성적도구로 전락시키는 무지막지한 집단체가 아닌가! 여기 여성개개인의 존엄성과 사고는 전혀 허용되지 않는다.
요행히 살아남아 세상이 제 자리에 다시 앉았을 때 과연 그전처럼 본래의 위치로 되돌아 올 수 있겠느냐는 점도 의문스럽다.
일제에 희생된 다른 사람들처럼 그녀도 어두운 운명을 목전에 두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조선에 그대로 남아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냈더라면 몸서리치는 죽음의 대열에서만큼은 비켜날 수 있었을지도 몰랐지만.
하루꼬부친이 얼마 전 거제역에서 이웃한 동래역장으로 전보되었다는 것도 지금 들어서 알았다.
언니인 미찌꼬는 사범학교를 마친 후 당분간 집에서 쉬고 있다며 곁들여 말해주었다. 몇 학교에서 초청이 있었지만 미찌꼬가 망설인다는 것까지.
근자에 만나고 온 곤의 노모에 대해서도 빠트리지 않았다. 건강도 그전처럼 여전하시다며 곤을 안도하게 하였다.
입대가 기정사실로 결정되면 한 번 더 부산을 다녀 올 것이라 풀죽어 말한다. 갑자기 생각난 듯,
“참, 소학교(초등학교) 야스꼬선생님이 오빠에게 무척 서운해 하시던 걸.”
“아! 야스꼬선생님! 아마도 그러실 거야. 그분 선생님에게 도움을 너무 많이 받았는데...!”
“오빠도 그렇지. 나태하게 무심하면 나빠요.”
“그래. 내가 잘 못했어. 만약 다시 부산에 들리게 된다면, 꼭 좀 선생님께 안부 여쭙더라고 잘 전해다오. 당장 편지부터 부쳐야겠네.”
“잔이 비어 있잖아.”
분위기 쇄신을 위한 두 개의 유리잔이 젊은 남녀의 손바닥 위에 다시 놓여졌다.
“가네모도상! 우리 새로운 미래를 위해 건배해요. 물론 우리의 젊음과 청춘도요.”
하루꼬가 단숨에 마셔 비운다.
그 모습 물끄러미 지켜보던 곤도 따라 잔을 비울 수밖에 없었다.
“바깥 공기를 쐬고 싶어요. 우리 강변으로 나가 좀 걸어요.”
취해가던 하루꼬를 내심 걱정하고 있던 곤은 그녀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얼른 아래층 계산대로 내려가 값을 치렀다. 몰래 살펴보니 마셔 비운 양에 비해 흩어진 모습은 다행히 남아있지 않다.
“아! 시원해.”
하루꼬의 검은머리가 줄지어 널어선 버들가지처럼 출렁거린다.
그 머리카락을 나부키며 파릇한 풀밭을 사슴처럼 뛰어다니다 갑자기 곤의 곁으로 달려와서는,
“미찌꼬언니가 보고 싶지?”
마치 시비걸이를 찾는 건달처럼 비뚤어지게 말을 붙인다.
“하하! 미찌꼬는 나를 못 마땅히 여겨 지독히도 미워하였지.”
“설마하니 지금도 그렇게 생각지는 않을 테지요?”
“하루꼬도 알다시피 미찌꼬와 나는 기억을 다 못할 정도로 사사건건 헐뜯고 싸우며 지냈어. 얼굴만 마주치면 서로 상대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지.”
“실망했어요. 오빠가 미찌꼬언니를 생각한다는 것이 고작 그런 정도라니요. 바다 건너에서 속만 태우고 있을 미찌꼬언니가 어쩐지 가여워지는군요. 이제 알고 봤더니 풀무치오빠는 참 무정한 사람이에요.”
“나만?”
“저 봐. 하여튼 답답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이제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줄 때도 되었을 텐데도 말이에요. 솔직하게 자신을 내보여 누군가 먼저 양보한다면 얼마나 모양이 좋아요? 다 똑 같지만요.”
못마땅한 며느리를 앉혀놓고 꾸짖는 시어머니처럼 하루꼬가 곤을 나무란다.
“얼마 전에 부산을 다녀왔을 때였어요. 언니는 딱할 정도로 수척해 있었어요. 살고 있는 사람 같지가 않았지요. 무심한 척 말고 언니를 만나면 잘 대해줘요. 편지도 자주 보내고요.”
“그런 생각이 들었다가도 막상 미찌꼬의 얼굴이 떠오르면 아직도 무서운 생각이 먼저 드는 걸.”
“이런! 바보처럼. 이러니 미찌꼬언니가 마음에 병을 얻을 수밖에.”
“아하하핫!”
“오호호홋!”
둘은 서로를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젖혔다.
“오빠로 인해 모처럼 내 가슴을 홀가분히 비우고 웃어보았어요. 오빠 곁에 있으니 마음이 흐르는 물처럼 청량해져요. 항상 이런 느낌으로 나날을 지낼 수 있다면 우리 인생이란 것이 그야말로 참으로 살맛나고 근사할 텐데 말이에요.”
“나는 항상 그런데.”
“오만하게 말하지 말아요. 세상은 변화하고 있어요. 우리 일본도 패전국으로 전락하고 말날이 그리 멀지 않았어요. 말만 않고 있을 뿐이지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각오하고 있는 현실이지요. 오빠의 조국도 머잖아 광복을 마지하게 될 것이에요.”
전쟁의 결과를 예측하며 조국의 패전을 내뱉는 하루꼬의 눈에 눈물이 비쳐나고 있다.
“우리 일본이 오빠의 나라에 끼친 잘못된 일들을 하루꼬는 진심으로 사과해요. 이 전쟁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지요.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허물어져 말 다 못하도록 아파요.”
하루꼬가 손수건을 꺼내 젖은 눈시울을 훔친다.
“개인의 존엄성은 깡그리 짓밟혔고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어두운 그늘에서 희생되고 있어요. 나의 눈에는 온 세상이 통째로 미쳐 날뛰는 것만 같아요. 때가 되면 누군가는 죄값을 치러야할 테지만요.”
나란히 걷고 있는 둔치 저지대의 한쪽 편으로 넓은 갈대밭이 펼쳐보인다. 바람에 갈라져 눕는 갈대를 바라보는 하루꼬는 그 유적(幽寂)함에 몹시 감상적이다. 곤은 하루꼬 가슴에 이는 아픔을 곧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갈대숲 사이 햇살바지에 피어난 붉은 저 들꽃! 하루꼬의 가슴에 피려든 미래의 꽃인가. 일제가 자초한 과오의 대가가 그녀자신에게 분담된 것을 두고 예견된 어느 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곤을 바라보는 눈길이 외로움으로 떨며,
“하루꼬는 무서워요. 가슴이 어스러지도록 오빠에게 안겨보고 싶어요.”
하루꼬가 눈물을 보인다. 그 눈물이 곤은 가슴을 열게 하여 강아지처럼 뛰어드는 하루꼬를 감싸듯 받아주었다.
“아! 오빠가슴이 이처럼 안온하고 편안할 줄이야.”
허리를 휘감은 두 팔을 다시는 풀어놓지 않을 것처럼 쪼여오며,
“오빠를 만날 수 없을까봐 불안하였어요. 오빠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냥 돌아가게 된다면 어쩌나하고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몰라요.”
곤의 가슴에서 떨며 입술이 내려앉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자신을 맡겨오는 젖은 입술이 무엇인가를 갈구하며 보챈다.
두터운 입술 하나가 포개어 얹혀 지고 하루꼬는 죽어도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거칠게 곤의 목을 휘감아 매달린다.
“아! 이 시간이 이대로 영원히 정지되었으면 좋겠어요.”
물 밖으로 내던져진 숨찬 물고기처럼 곤의 입술 아래서 팔딱거리다 또 거세게 달려들며 잠시라도 도망가지 못하도록 야멸치게 항거한다.
“이대로라면 하루꼬는 지금 당장 죽어도 좋아요.”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눈물이 나려한단 말이야.”
“정말? 매정한 풀무치오빠가 하루꼬를 가엾게 여겨 눈물을 흘려준다니, 아! 이 보다도 더 멋진 이별의 선물은 없겠네요.”
뜨거운 입술이 지쳐 떨어지는가 하면 다시 앙탈로 달라붙는다.
보리 싹 같이 파아란 둘에겐 세상 태어나 처음으로 경험해보는 황홀하고 뜨거운 입맞춤이다. 야속케도 마지막 입맞춤이었지만.
하루꼬는 어두운 운명의 노예가 되어 두 번 다시 살아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배에 실려 가야했다.
“오빠! 우리 다음도 분명 만날 수 있는 것이지?”
“바보. 그걸 말이라고 물어.”
“고마워. 그런데...”
“그런데 라니? 뭘 또 망설이는 거야. 어서 말하지 않고서.”
하루꼬가 까닭 없이 허물어지며 어설프게 웃더니,
“오늘 밤만...오빠 곁에서 꼭 붙어 지냈다 가면 안 될까?”
“이야! 좀은 충격적인 걸. 그 말 누가 들었다면 나는 이 자리에서 파묻혀 죽고 말아요. 사람 하나 살려주는 샘치고 이젠 나를 보내다오.”
“내가 또 오빠를 놀렸던가? 겁쟁이 같으니라고.”
하루꼬는 더 이상 치근거리지 않았다.
천근의 추를 매단 발걸음으로 곤을 떠나갔다.
“오빠, 떨어져 있더라도 낙심 말고 잘 지내고 있어요. 내가 다시 찾아올 때까지요. 그때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야 해요. 이제 하루꼬는 가요. 사요나라! 사요나라...”
“하루꼬야, 그럼 조심해서 잘 가. 행운을 빌어줄 게. 또 만나. 안녕.”
“걸음이 잘 떨어지질 않네요. 마지막은 분명 아닐 텐데요. 오빠가 먼저 돌아서요.”
“아니야. 하루꼬 뒤를 내가 지켜봐 줄 게.”
멈춰 돌아보는 하루꼬의 얼굴에 망망한 슬픔의 물결이 출렁인다.
돌아보고 가다 또 서서 돌아보더니 우두커니 서있는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며 하루꼬는 이렇게 곤의 곁을 떠났다.
“하루꼬야! 어디 있어. 안 돼. 가면 안 돼. 가지 마. 제발.”
쫓아내듯 돌려보낸 하루꼬의 자취가 다 사라진 뒤에야 곤은 가버려 보이지 않는 하루꼬를 찾아 들개처럼 방황했다.
“하루꼬! 하루꼬야! 내가 잘 못했어. 용서해 다오. 숨어 있다면 제발 모습을 다시 보여 다오. 나의 하루꼬야.”
훗날 허무하게 떨어져버린 그녀의 외로운 죽음을 알고서, 이날 하루꼬를 몰아세워 돌려보낸 것을 두고 얼마나 가슴 찢어냈는지 모른다.
하루꼬는 여름날 소나기에 두들겨 맞은 들꽃처럼 가녀린 모습으로 빙빙 곤의 곁을 맴돌다 증발하듯 가버렸다.
죽음이 손짓하는 이별의 망각에 휩싸여 영영.
그저 심심풀이로 풍걸
첫댓글
오~ 우~ 곤
하루꼬 미찌꼬 고마꼬
풍걸행님
숨도 못쉬고 읽었 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체질을 못 이겨 깜빡 내일 중요한 날임을 그새 잊고...그래도 4 시간 뒤 발딱 일어나 우당당 둘러치고 달려 나갈 정열은 충분하니 내일의 조우를 분명 약조합니다. (며칠 전부터 빈대들한테 집회선전 하느라 목이 좀 쉬었습니다.)
대단하십니다.웅쾌한 필력을 갖고 계셨군요
일송정님껜 그저 면목 없는 글짓기에 불과한 것이기에 부끄러울 뿐입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아고 ..풍걸님~~
장문의 마무리글 쓰셨군요
늦게 확인합니다
여기 부산시청광장에서 엽서팀에서 모두 기다립니다
어디계신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