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825. 묵상글 들 (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는. 등 )
----------------------------------------------------
210825.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는
지난주 구약 판관 시대 주변 이방인들이 왕을 두고 있는 것을 부러워하여
자기들도 왕을 세우려고 하는 이스라엘에 대해 얘기를 하며
왕이란 필요악이라는 취지로 강론한 적이 있지요.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치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 중에 누가 더 필요악일까요?
물론 둘 다 나쁜데 그 경우 누가 더 나쁘냐는 것이지요.
제 생각에 왕보다 성직자가 더 나쁘고 더 악입니다.
정치 지도자는 백성을 이 세상에서 불행케 하는 데 그치지만
종교 지도자는 이 세상에서부터 저 세상까지 불행케 하기 때문입니다.
그저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당대 종교 지도자들을 꾸짖으시며
자기도 천국에 가지 못하고 남도 천국 가지 못하게
문을 잠가버리는 자들이라고 하셨는데
이것보다 더 혹독한 꾸짖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실 이런 성찰을 저를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 한다면
자기가 그런 존재라는 것이 두려움을 느낄 것이고 그래서
자기 직분에 합당한 선과 성스러움이 없음을 뉘우치며
겸손하게 고백할 것이고 위선은 꿈도 꾸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직자들에게 자기 직분에 대한 겸손한 성찰과 두려움이 있다면
바오로 사도가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한 것처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대 종교 지도자들이 무거운 짐을 사람들 어깨에 올려 놓고
자기들은 손도 까딱않으며 염불에는 관심없고 젯밥에만 관심있다고
나무라시는 데 비해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선포하면서도 폐가 되지 않으려고
손수 일하였다는 얘기를 여러 차례 하였지요.
사실 신자들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아는 성직자라면
신자들 어깨에 짐을 더 올려놓지 않음은 물론
자기를 위해서 이런저런 요구를 하지 않을 것이며
할 수 있는 한 가난하고 수고하며 살려고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또 자기와 동료들이 경건하고 의롭게
또 흠 잡힐 데 없이 처신하면서 아버지가 자녀들을 대하듯
신자들을 대했다고 자기들의 경건하고 점잖은 처신에 대해서도 얘기합니다.
이런 바오로에 비해 저를 포함한 많은 성직자들이 신부 곧
신적인 아버지로서의 품위를 생각지 않고 세속화된 세상에
똑같이 세속화된 사제로서 살아가고 있음이 많이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가 그렇게 처신했기 때문이겠지만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다음과 같이 얘기하는데 신자들이 많이 부럽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날 사제와 신자들의 관계가 이런 관계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제들은 가난하고 경건하게 살며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고
신자들은 그것을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그래서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과 사도 바오로의 복음 선포에 비춰
저를 성찰하고 부끄러워하면서도 바오로 교회를 부러워하는 오늘 저입니다.
----------------------------------------------------
210825.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알맹이가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꾸중을 하였습니다.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겉은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듣고 그 회칠한 무덤이 바로 저라고 생각했습니다. 신부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한다고 성덕이 출중한 것도 아닙니다. 그에 상응하는 마음가짐과 정성을 담지 않으면 거룩한 것을 더 많이 접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불경한 잘못을 범하고 맙니다. 알면 아는 만큼 더 잘 살아야 하는데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사실 신부이기 때문에 더 많은 위선을 떨고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자들에게는 기도를 많이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을 하지만 최소한의 의무인 ‘성무일도’조차 거르고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성체조배는 물론 묵주기도를 하는 것은 기본이거늘 일반 신자보다 더 많이 기도한다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이러저러한 인간적인 욕망에 대해서도 절제 있는 기쁨을 누리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닌 척 하고 목을 빳빳이 세우고 다닙니다. 이런 모습에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생각하면서도 몸은 여전히 육정을 따르고 맙니다.‘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를 얘기 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내 눈 안에 들보를 지닌 채 남의 눈의 티를 빼주겠다고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 백성은 말로만 나와 가까운 체하고 입술로만 나를 높이는 체하며 그 마음은 나에게서 멀어져 간다”(이사29,13). 하였고, 주님께서도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 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하신 말씀이 새롭습니다. 아무리 겉이 화려하더라도 실속이 있는 것은 알맹이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삶을 봅니다. 그는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즐기는 가운데 마니교( 3세기경에 페르시아인 마니가 창시한 이원론적 종교입니다. 마니교는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불교, 바빌로니아 원시 신앙 등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마니교의 교리는 세계를 선과 악, 광명과 암흑으로 구분하는 이원론을 핵심으로 합니다. 이와 같이 선과 악이 뒤섞인 세계에서 광명과 암흑으로부터 분리하기 위한 사자로서 마니가 왔다는 것입니다)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모니카 성녀의 간절한 기도와 희생,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영향으로 회개하고 입교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는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나이다.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나 밖에서 님을 찾아 당신의 아리따운 피조물 속으로 더러운 몸을 쑤셔 넣었사오니! 님은 나와 계시건만 나는 님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 당신 안에 있잖으면 존재조차 없을 것들이 이 몸을 붙들고 님에게서 멀리 했나이다. 부르시고 지르시는 소리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이시고, 비추시고 밝히시사 눈멀음을 쫓으시니, 향내음 풍기실 제 나는 맡고 님 그리며, 님 한 번 맛본 뒤로 기갈 더욱 느끼옵고, 님이 한 번 만지시매 위없는 기쁨에 마음이 살라지나이다”(성 아우구스티노).
또 말합니다.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과거가 중요하지 않고 새 삶을 시작 한 날이 중요합니다. 신앙인에게 있어 과거는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입니다.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앞날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 드리며 주어진 오늘 이 순간을 사랑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말을 하고 저런 행동을 하며 위선과 허물로 누벼놓은 이날에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청합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의 허물을 용서하소서. 구원을 허락하소서. 아멘.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실속있는 것은 알맹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위선자’로 표현합니다.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겉은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위선자는 겉모습으로는 본래의 인격을 알 수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듣고 ‘위선자’, 그 회칠한 무덤이 바로 저라고 생각했습니다. 신부이기 때문에 저절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한다고 성덕이 출중한 것도 아닙니다. 그에 상응하는 마음가짐과 정성을 담지 않으면 거룩한 것을 더 많이 접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불경한 잘못을 범하고 맙니다. 알면 아는 만큼 더 잘 살아야 하는데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사실, 신부이기 때문에 더 많은 위선을 떨고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가면을 쓰고 살 때가 많습니다.
신자들에게는 기도를 많이 하는 것처럼 말을 하지만 최소한의 의무인 ‘성무일도’조차 거르고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성체조배는 물론 묵주기도를 하는 것은 기본이거늘 일반 신자보다 더 많이 기도한다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이러저러한 인간적인 욕망에 대해서도 절제 있는 기쁨을 누리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닌 척하고 목을 빳빳이 세우고 다닙니다. 이런 모습에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생각하면서도 몸은 여전히 육정을 따르고 맙니다.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성령께서 저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정화해 주시기를 갈망합니다. 습관적이고 피상적인 머리의 신앙이 아니라 따뜻한 사랑의 삶이 시작될 수 있기를 청합니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를 얘기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내 눈 안에 들보를 지닌 채 남의 눈의 티를 빼주겠다고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 백성은 말로만 나와 가까운 체하고 입술로만 나를 높이는 체하며 그 마음은 나에게서 멀어져 간다”(이사29,13). 하였고, 주님께서도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 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하신 말씀이 새롭습니다. 아무리 겉이 화려하더라도 실속이 있는 것은 알맹이입니다.
신앙은 구체적입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삶이 진실하여 주님의 마음에 들고 하늘이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210825.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고,~
오늘 <복음>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한 불행선언의 계속입니다. 곧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불행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섯 번째 불행선언’에서 그들 위선자들을 “회칠한 무덤”(마태 23,27)에 비유하십니다. 그것은 그들의 영혼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이 생명의 본성을 뿜는 것이 아니라, 무덤의 냄새를 뿜고 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19,16)에 따르면, 무덤에 닿으면 칠 일간 부정하기에 때문에 무덤을 회칠하여 표시함으로써 사람들이 불결해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러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회칠한 무덤과 같다’는 것은 부정을 타지 않도록 그들을 경계하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고, 겉은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마태 23,27-28)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악”보다 더 추악한 것은 “거짓된 선”, 곧 “위선” 입니다. 마치 “선”인양 자신의 얼굴을 꾸미고 사람들을 속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종교적 위선’이란 겉으로는 하느님을 위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기도나 자선이나 단식, 미사나 전례나 성사와 같은 종교적 행위를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기 위해서’ 한다면 그럴 것입니다.
나아가서, ‘위선’(ùποκρισισ)은 못된 속셈을 교묘한 방법으로 감추고, 자기 체면을 세우기 위해 오히려 상대방을 올가미에 씌우려 하기도 합니다(예레 18,18). 마치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했던 것처럼(마태 22,18) 말입니다. 또한, 자신을 완고하게 할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명을 자신의 탐욕과 방종을 위해 이용하며, ‘자신들이 의롭다고 여기고’(루카 18,9;20,20), ‘눈 먼 길잡이’(마태 15,3-14)가 되어 잘못된 가르침으로 ‘나쁜 누룩’(루카 12,1)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 먼 이들’이라고 부르십니다(마태 23,25-26). 다른 사람들을 속이려고 애쓰면서 자신의 모습에 눈을 감고 빛을 볼 수 없게 되어 오히려 빛을 핍박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위선자들을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째 불행선언’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예언자들의 무덤은 꾸미면서도 실은 그의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였듯이, 지혜이신 당신을 핍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듯 진실을 가려보지만, 진리는 어김없이 가리고 있는 허울을 벗기고 맙니다. 드러난 진실마저 덮고 조작하려 해도, 빛은 끝내 가려지지 않고 오히려 가림 막을 태울 뿐, 감추어진 탐욕과 위선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겉을 그럴싸하게 꾸미고 치장하고, 더러운 속을 감추고, 은폐하고, 기만하고, 심지어는 조작하기도 하는 우리의 위선을 하느님께서는 환히 아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위선의 껍데기를 벗게 하소서!
당신이 담아주신 마음 속 진리를 행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마태 23,31)
주님!
위선의 껍데기를 벗고 진리 편에 서게 하소서!
허물이 드러날까 두려워 얼굴을 가리고 있는 제 손바닥을 치우게 하소서.
감추어진 탐욕과 위선을 드러내소서.
핍박과 폭행을 당해도 물러서지 않게 하소서!
불의에 대한 무관심과 침묵으로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
210825.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의로움으로 거룩함을 추구하기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는 두 가지 부류의 인간형이 날카롭게 대비되고 있습니다.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은 율법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교우들한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한 바리사이들이 있는가 하면, 경건하고 의롭게 처신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바오로가 있습니다.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는 위선자들이 있는가 하면,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하느님을 전하면서 사도로 살아가는 바오로가 있습니다.
바오로도 바리사이 출신이지만, 그가 위선자로 지탄받는 동료들을 떠나 인생을 전환한 계기는 예수님 덕분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그도 열성적인 바리사이로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자였으나, 그 길에서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살아계심을 체험하게 해 주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리치는 번개 빛 때문에 눈이 멀게 되었고 양심에서 들려오는 벼락 소리 덕분에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진리이심을 깨닫게 되었고 진리를 향한 십자가 속에서 진정으로 살아있을 수 있는 부활의 신비를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테살로니카를 비롯한 그리스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공동체를 건설하던 바오로에게서 그 이방인들이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비결은, 바오로의 삶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살아계셨기 때문이고 그들은 바오로의 삶 속에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신성의 현존과 체험이 이토록 중요합니다.
사람에게는 하느님과 소통하는 양심이 있기 때문에 의로움이라는 가치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사람에게는 의로움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의로움을 겉으로만 흉내내면서 자신의 경제적 이익과 정서적 평안을 좇는 자들을 예수님께서는 가차없이 위선자라고 질타하셨습니다. 바오로는 예수님의 이런 말씀과 삶을 본받고자 배척받고 매 맞고 밤낮으로 노동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 이를 십자가로 승화시키고 거룩하게 변화되고자 무진 애를 썼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거룩하게 변화되고자 하는 의인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오늘날에도 위선자들이 많고 무신론자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이런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의인들이 적기 때문입니다.
----------------------------------------------------
210825.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조명언 마태오 신부님.
어느 순간부터 안경의 초점이 맞지 않아서 사물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내서 안경원을 찾아갔더니 저를 담당하는 안경사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좋은 소식이 있는데요. 눈이 좋아지셨어요. 그런데 나쁜 소식도 있는데요. 눈의 노화가 더 심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점이 맞지 않았던 거예요.”
다초점렌즈를 사용한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다초점렌즈가 일반렌즈보다 비싼데, 여기에 시력이 좋지 않아서 압축까지 해야 하니 렌즈 가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잘 보이지 않아 불편해도 안경 교체를 미뤄왔던 것입니다.
잘 보려면 자기 눈에 맞는 안경을 써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잘 보려면 자기 눈에 맞는 안경을 써야 할 것입니다. 이 안경이 바로 주님의 뜻이 담긴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의 실천 없이는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안경을 쓰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을 간직하면서 사랑의 실천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 불행선언을 선포하십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닌,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삶만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무덤의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불행선언의 주인공들은 겉으로는 아름답고 가장 올바르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마음은 가장 더러운 죄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행실을 고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불행선언을 들어도 행실을 고치지 않으면서 더 큰 악으로 나아갑니다. 결국 모든 세대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능력이 대단한 것처럼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자랑하고 내세운다면, 그래서 겉으로는 아름다운 것처럼 보이면서도 속은 각종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면 우리도 예수님께서 큰소리로 외치신 “불행하여라”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는 과거 위선자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할 가장 중요한 사랑의 실천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 딱 맞는 안경을 써야 합니다.
-----------------
자기만의 이야기를 갖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가장 용감한 일이다(브레네 브라운).
-----------------
꼰대처럼 늙지 않는 1,2,3,4,5 법칙
꼰대처럼 늙지 않는 1,2,3,4,5 법칙이 있다고 합니다. 창의 경영연구소의 조관일 대표가 이야기한 것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1) 일부러 자주 웃어라.
웃는 얼굴이 매력 있는 노년의 첫걸음입니다.
2) 이러쿵저러쿵 따지지 마라.
성숙하게 나이 든다는 것은 이해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3) 삼가라, 품격 없는 짓!
나이가 들수록 매너를 지켜야 합니다.
4) 사랑으로 충만하라.
옛추억에 사로잡혀 폼만 잡을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남을 돕고 살아야 합니다.
5) 오늘을 즐겨라.
오늘은 기적입니다. 지금까지의 세월이 오늘의 하루를 탄생할 수 있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 오늘을 즐기십시오.
다섯 가지 법칙의 앞 글자를 따서 1,2,3,4,5 법칙이었습니다. 꼰대처럼 늙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도, 이 법칙과 반대로 살면서 꼰대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
210825.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직장에서 존경 받는 상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상사가 존경을 받을까요? 똑똑하고 부지런한 상사가 있습니다. 멍청한데 부지런한 상사가 있습니다. 게으른데 멍청한 상사가 있습니다. 똑똑한데 게으른 상사가 있습니다. 똑똑하고 부지런한 상사가 있으면 회사의 실적은 오를 것입니다. 그런데 직원들은 직장 생활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상사의 뒤를 따라야하기 때문입니다. 상사가 매일 일찍 출근하면 직원들도 일찍 출근해야 합니다. 상사가 청렴하면 직원들도 청렴해야 합니다. 멍청한데 부지런한 상사가 있으면 직원들은 피곤합니다. 일의 방향이 자주 바뀌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일을 하는데 성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산만 낭비하기 때문입니다. 게으른데 멍청한 상사가 있으면 직원들의 몸은 편하지만 회사에서 눈총을 받기 쉽습니다. 다른 부서에 비해서 성과가 적기 때문입니다. 그런 부서는 없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똑똑한데 게으른 상사가 있으면 직원들은 몸도 마음도 편할 것입니다. 부서는 늘 일정한 성과를 내기 때문입니다. 자기 개발을 할 시간도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의 학자 정약용 선생은 ‘목민심서’를 저술하였습니다. '목민심서'는 목민관 이 갖추어야 할 자세와 알아야 할 지식을 다룬 책입니다. “목민관은 부임할 때부터 검소한 복장을 해야 하며,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나라에서 주는 비용 외에는 한 푼도 백성의 돈을 받아서는 안 되며, 일을 처리할 때는 공과 사를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마음가짐은 언제나 청렴결백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청탁을 받아서는 안 되며, 생활은 언제나 검소하게 해야 합니다. 지방에 부임할 때는 가족을 데리고 가지 말아야 하며, 형제나 친척이 방문했을 때는 오래 머무는 일이 없도록 합니다. 목민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임금의 뜻을 백성에게 잘 알리는 일입니다. 목민관은 자연 재해가 나지 않도록 항상 대비해야 하며, 재해가 생겼을 때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구호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목민관은 집을 잃은 백성들에게 쉴 곳을 마련해 주고, 재해에 대한 구제가 끝나면 백성들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벼슬에 연연하는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며, 떠날 때 많은 재물을 가지고 가는 것 또한 선비가 할 일이 아닙니다. 백성들이 목민관이 떠나가는 것을 슬퍼하고 길을 막아선다면 훌륭한 목민관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제생활 30년을 하면서 ‘목민심서’의 내용은 제게 큰 울림이 되었습니다. 특히 ‘목민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임금의 뜻을 백성에게 잘 알리는 일’이라는 내용입니다. 지난 30년 동안 예수님의 가르침과 하느님의 뜻을 삶으로서 충실하게 전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꾸짖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규정들을 이야기하면서 자신들은 열심히 율법을 지키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세례를 받았지만, 신앙인으로서 충실하게 살지 못한 사람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주일미사에 참례하지 못하는 사람, 본당에서 준비한 피정, 교육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데 인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하기 때문에 곧 신앙이 식어버리곤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주 근면하고 성실한 사도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뜨거운 열정도 있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우리가 신자 여러분에게 얼마나 경건하고 의롭게 또 흠 잡힐 데 없이 처신하였는지, 여러분이 증인이고 하느님께서도 증인이십니다.” 우리가 경제적인 풍요를 얻기 위해서 근면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오늘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복음을 위해서, 하느님께 나가기 위해서도 근면하고 성실해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매일 기도하는 사람, 좋은 말씀을 듣기 위해서 피정과 교육에 자주 참여하는 사람,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적극적인 사람들은 신앙생활에서도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들입니다. 나의 영혼과 이웃들을 위한 기도를 준비했다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들을 도와주는 봉사를 준비했다면, 우리는 삶의 마지막이 온다 해도 아무 걱정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이 그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
210825.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앞에서, 주님 중심의 삶
- 회개, 겸손, 진실 -
제1독서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1서 말씀과 마태복음 사이의 화답송 시편이 참 적절하다 싶습니다. 참으로 늘 깨어 주님 앞에서, 주님 중심의 회개, 사랑, 진실, 겸손의 삶을 살아야 겠다는 자각을 갖게 됩니다. 무지의 병, 무지의 죄, 무지의 악에 대한, 또 인생 허무에 대한 유일한 처방의 말씀이겠습니다. 화답송 시편은 139장 일부만 소개 되지만 1장1절부터 24절까지 읽을 때 마다 구구절절 공감이 갑니다.
“주여, 당신은 나를 샅샅이 보고 계시나이다.
앉고나 서거나 매양 나를 아옵시고,
멀리서도 내 생각을 꿰뚫으시나이다.
걸을제도 누울 제도 환히 아시고,
내 모든 행위를 익히 보시나이다.
---
당신 숨결 피해 어디로 가리이까.
당신 얼굴 피해 갈 곳 어디오리까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주님 계시옵고
지옥으로 내려가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
새벽의 날개로 이 몸이 친다하여도,
저 바다의 먼 끝에 산다 하여도
거기에도 당신 손은 나를 인도하시고,
그 오른손 이 몸을 잡아 주시리다.”(시편139,1.2.3.7-10)
일부만 소개했습니다만 전장 24절까지 써서 게시판에 붙여놓고 자주 묵상하면하느님 현존 안에 사는 영적훈련에 참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느님 시시티브이(CCTV)에서 벗어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삶에서 이런 하느님이 빠지면 말그대로 무지와 허무, 무의미의 어둠의 심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주님 앞에서 늘 깨어 있는 삶에는 위선과 거짓이, 허영과 교만이 끼어들 수 없습니다. 저절로 회개와 사랑, 진실과 겸손의 모범적 삶이 뒤따를 것입니다. 참으로 소중한 가르침이 이런 삶의 모범을 통한 가르침이요 이런 삶을 통해 말없이 보고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런 삶의 전형적 모범이 제1독서의 사도 바오로의 일행입니다. 얼마나 주님 앞에서 투명하고 진실한, 당당한 삶인지 사도 바오로의 진정성 가득한 고백에서 잘 드러납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경건하고 의롭게 또 흠 잡힐 데 없이 처신하였는지, 여러분이 증인이고 하느님께서도 증인이십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자녀들을 대하듯 여러분 하나하나를 대하면서, 당신 나라와 영광으로 여러분을 부르시는 하느님께 합당하게 살아가라고 권고하고 격려하며 역설하였습니다.”
그대로 ‘짐’이 아닌 ‘선물’같은 존재들이 바오로 일행입니다. 우리 자신을 비춰 회개로 이끄는,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안팎으로 하나된 언행일치의 진실하고 성실하고 절실한 모범적 삶이었기에 이들 바오로 일행이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대로 받아들인 테살로니카 신도들입니다. 바로 이런 언행일치言行一致의 삶이 참된 권위의 원천이 됩니다.
이와는 대조적인 삶이 오늘 복음의 일부 율사와 바리사이들의 안과 밖이 다른 표리부동表裏不同의 삶입니다. 세상에 표리부동하다는 평가보다 치명적인 것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불행선언중 마지막 여섯 번째 일곱 번째에 해당됩니다. 율사와 바리사이들에 대한 불행선언이 궁극으로 의도하는 바는 우리의 회개입니다.
바로 이들의 위선적 행태는 그대로 우리의 부정적 모습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깨어 있는 삶에서 떠난 업보가 이런 무지의 위선적 삶입니다. 말 그대로 자기를 모르는 무지의 죄입니다. 역설적으로 똑똑한 바보들입니다.
주님 중심의 언행일치의 진실하고 겸손한 삶일 때는 “행복하여라”라는 행복선언이 뒤따르겠지만 주님을 떠난 자기 중심의 눈먼 무지의 삶에는 저절로 “불행하여라”라는 불행선언이 뒤따르는 법입니다. 주님의 심판 선언이 아니라 스스로 자초한 심판이요 철저한 회개만이 무지의 죄, 무지의 악, 무지의 병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처방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까 불행선언은 우리를 향한 회개의 촉구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는 겉으로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그대로 때로 자신 안에서 이런 표리부동한 위선적 모습을 체험한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부단한 회개를 통한 주님 중심 중심의 삶으로 돌아가 진실과 겸손의 삶을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의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참 무지의 병이 깊은 위선자들입니다.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참된 예언자이자 의인인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박해하는 악습을 반복하는 참 모순적 무지의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요즘 회자되고 있는 ‘내로남불’이란 말을 아십니까?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을 줄인 사자성어가 내로남불입니다. 이런 자기에게 한없이 관대하면서 타인들에게 한없이 엄격한 이중 잣대를 들이대는 이런 위선적 행태 또한 우리의 보편적 모습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과 하나됨으로 우리의 표리부동의 위선적 무지의 병을 치유해 주시고 언행일치의 진실과 겸손의 삶을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결론하여 무지의 병의 최고의 치유제와 예방제가 바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입니다. 아멘.
----------------------------------------------------
210825.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우리가 안팎으로 그리스도인이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마음이 엿보입니다.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 23,28)
오늘도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혹독히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백성들 안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부와 명예와 잇권을 누리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위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스스로 가르치는 바를 솔선해 지키면서 내면부터 차곡차곡 정의와 사랑의 덕을 채워가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의롭게 되려고 하기보다 의롭게 보이려는 데에 더 많은 에너지를 써왔지요. 그런 이들 손에 쥐어준 율법은 사랑의 도구가 아니라 단죄와 심판, 소외의 무기가 되어 버립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가르치는 바를 실제로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 줍니다.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1테살 2,9)
"우리가 ...얼마나 경건하고 의롭게 또 흠 잡힐 데 없이 처신하였는지"(1테살 2,10)
바리사이였던 바오로는 예수님을 만난 후 새로운 길에 완전히 동화되었습니다. 그는 목숨을 바쳐 사랑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알게 되자 신분이 보장하는 명성이나, 허세, 겉꾸밈, 명예 따위를 쓰레기로 여기고 오직 예수님께만 올인했지요.
그런데 우리는 겉과 속이 일치하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걸 모르지 않습니다. 알고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사랑의 진리가 얼마나 많은지요! 또 타인에게 충고는 잘 하면서 자신의 편협한 마음 하나 건사하지 못할 때도 없지 않으니까요. 자신이 의롭고 사랑과 연민이 넘치는 그리스도인인지 자문하면서 부끄러움과 자괴감 사이를 오가는 우리에게 오늘의 말씀은 겉과 속의 간극을 줄여나갈 수 있는 좋은 길을 안내해 줍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되리라."(복음 환호송)
열쇠는 바로 "말씀"입니다. 전해 받은 주님의 말씀이 그 사람 안에 머물면 차츰 그 말씀으로 물들어 가지요. 말씀이신 분의 인격을 닮아가고 말씀께서 가리키시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말씀이 내가 되고 내가 말씀이 되는 일치로 나아가면, 내면에 차오른 말씀이 나의 눈빛과 말과 행동이 되어 밖으로 흘러나갑니다. 그러면 겉과 속이 점점 같아지게 되겠지요. "그 말씀이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1테살 2,13)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 각자가 걷고 있는 저마다의 인생길이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닮아가는 순례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화되고 성화되어 주님을 닮아가는 변형의 도가니이고 용광로이니 녹록하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마음으로도 사랑하고, 말에도 사랑을 담으며, 행동으로 사랑을 증거하는 찐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는 시공간인 셈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서슬 퍼런 꾸지람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를 알아듣고 깨닫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내면에 말씀을 품고 머물러 안팎 모두 참 그리스도인으로 영글어 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오늘 프란치스칸들은 성 루도비코 9세 임금 기념일을 지냅니다. 프랑스의 국왕이었으면서도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어준 찐 그리스도인이었던 그를 기리며 주보 축일을 지내는 모든 재속 프란치스칸들에게 축하를 보냅니다.
----------------------------------------------------
210825.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23,28)
'회개하자!'
오늘도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책망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위선'은, 겉과 속이 다른 모습입니다. 겉으로만 의인처럼 행동하고, 속은 의인이 아닌 모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자리에서 정의를 외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정의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은,
지금 우리의 위선, 나의 위선에 대한 강한 책망이기도 합니다.
위선에 대한 예수님의 강한 책망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저는 그것이 '회개'라고 묵상했습니다.
'위선은 죄'입니다. 그러니 얼른 '위선의 죄에서 돌아서라는 예수님의 간절한 호소'라고 묵상했습니다.
'회개'는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주님을 참으로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이고,
또한 나를 참으로 기쁘게 하는 일입니다.
오늘 '화답송'이 전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은 항상 우리를 살펴보고 계시고, 주님을 피해 달아나 숨을 곳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 당신은 저를 살펴보시고 잘 아시나이다. 당신 숨결을 피해 어디로 가리이까? 당신 얼굴을 피해 어디로 달아나리이까?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당신이 계시고, 저승에 누워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화답송)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순종의 죄를 짓고 달아나 숨어버린 아담을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부르신 그 하느님께서 우리를 늘 찾고 계십니다.
그러니 얼른 회개합시다!
그러니 얼른 자비로우신 주님께로 돌아가 우리도 이런 시편 기도를 드립시다!
"주님, 귀를 기울이소서. 제게 응답하소서. 당신 종을 구해주소서. 당신은 저의 하느님, 당신을 신뢰하나이다. 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입당송)
'오늘이 회개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날마다 오늘이 회개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210825.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겉은 아름다워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찬 회칠한 무덤 같은(마태 23,25.27 참조)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불행하다고, 빨리 회개하라고 촉구하십니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잘 설명해 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있습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로마 7,22-24) 그래서 저는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간에게는 두 개의 마음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창세 2,7)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숨이 바로 하느님의 생명이고 또한 성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과 육의 마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마음은 주는 마음이고, 육에서 온 마음은 받는 마음입니다. 주는 마음은 사랑하는 마음이기에 기쁨에 넘치고 또한 살리는 마음입니다.
반대로, 받는 마음은 타인으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으며, 더 가지려고 하는 마음이기에 늘 불안과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없을 때 분노하게 되고 큰 상처로 남습니다. 이 마음은 죽이는 마음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주는 마음이 살리는 마음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주는 마음보다는 받고 싶은 마음일 때가 많습니다. 그 받고 싶은 마음이 커져 탐욕과 방종으로 발전하고 끝내 불법을 저지르고 위선자가 되기도 합니다.
누가 이 비참함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로마 7,24)
----------------------------------------------------
210825.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책하시면서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27~28절)라고 하신다.
의인들의 몸은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언제나 하느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죄인들의 몸은 죽은 자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영혼이 죽어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 몸은 이미 죽은 몸이나 다름없다. 무덤은 닫혀있는 한 겉모양은 아름다울 수 있지만, 무덤을 열면 그 광경은 참혹하다. 위선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실체를 모르면 모두 칭찬받을 만한 이들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실체가 드러나면 그 모습은 역겹다.
위선은 선을 가장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선이 아니다. 죽은 뼈들과 같다. 이것은 의로움을 가장한 모든 것은 죽은 의로움이며, 전혀 의로움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느님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때문에 거짓으로 행하는 덕은 다 죽은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자신이 아니면서도 그 사람과 똑같이 하는 배우들이 하는 일이다. 이런 사람들은 속은 “죽은 이들의 뼈”로 가득 찼지만, 겉으로는 의로움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겉만 아름답게 보이는 회칠한 무덤’이 된다.
회칠한 무덤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의 경고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보이는 행동이 아니라, 참사랑이 담긴 진정한 주님의 자녀로서의 삶의 자세를 항상 가질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일 것이다. 겉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속이 썩어있다면 그것은 죽음만이 있는 것이 아닌가? 주님께서는 인간이 살아있는 것을 원하시지, 죽는 것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다. 주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는 그래서 주님의 참된 영광이 될 수 있는 삶이 되도록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불행 선언을 하신 것은 그들이 예언자들을 죽인 자들을 욕하는 척하면서 그들은 더 나쁜 짓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은 예언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살해를 정당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책망하신다. 그러나 그들의 기질은 의도를 숨기려 해도, 아무리 가장을 해도 나타나게 되어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31절)
그들은 결국 똑같이 사악한 짓, 아니 훨씬 더 사악한 짓을 벌이려고 한다. 그들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다.”(사도 3,15) 그리고 사도들까지도 죽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32절) 하신다. 우리는 회칠한 무덤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올바로 따를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
210825.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마태 23, 32)
더 나은
삶의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올바른 믿음이다.
믿음은
정직한 자유이며
충만한 행복이다.
행복은 우리가
하느님을 대하는
마음 자세에서
시작한다.
불행의 고리를
끊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믿어야 할 것은
우리의 조상이
아니라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에집트
종살이같이
과거의 노예가
되길 바라지
않으신다.
따끔한
삶의 경고를
받아들여야 할
은총의 때이다.
무분별한
환경파괴가
재앙을
부르고 있다.
뼈저리게
실감하게 되는
우리들 삶이다.
진짜 마음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시간이
왔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하느님께서
주신 이 삶을
이제 더는
파괴와
죽음으로
내몰았어는
안된다.
더 좋은
세상을 위한
방향이 우리
삶의 가치이다.
더이상
정신없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같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아는 삶으로
바뀌어야
악순환은
멈춘다.
삶의 기쁨과
행복은
복음처럼
삶의 가치를
이제 우리가
바꾸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응원하시고
하느님께서
힘이 되어주신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우리 삶의
가장 올바른
방향이시다.
그분을 향해
나가는 실천과
변화의 하루이다.
믿음의 시간은
과거의 시간과
달라야 한다.
이것이
새로운
기쁨이다.
----------------------------------------------------
210825.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회칠한 무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 23,27-28).”
‘회칠한 무덤’이라는 말은, 위선자들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여기서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이라는 말씀은
“겉으로 보기에는 거룩하게(깨끗하게) 보이지만”이라는 뜻입니다.
“속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 라는 말씀은
“실제로는 죄 속에서 살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불행하여라.” 라는 말씀은, “불행하게 될 것이다.”,
즉 “심판 때에 처벌받게 될 것이다.” 라는 경고입니다.
<그런데 무덤에 하얗게 회칠을 한 것은, 무덤이라는 것을 감추기 위한 일이
아니라, 그것이 무덤이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 표시는 무덤인 줄 모르고 접촉했다가 부정 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회칠의 원래 목적과 이유를 생각하면, ‘회칠한 무덤’이라는 표현은
위선자들을 가리키기 위한 표현으로는 맞지 않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덤에 회칠을 하는 관습을 모르는 외국인들은 그것이 무덤인 줄
모를 것이고, 하얗게 칠해져 있는 것만 보면서
아름답고 깨끗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경우에는 ‘회칠한 무덤’이라는 말은
위선자들을 가리키는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오로 사도는 ‘회칠한 벽’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바오로가 최고의회 의원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는 이날까지 하느님 앞에서 온전히 바른 양심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자 하나니아스 대사제가 그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바오로의 입을 치라고
명령하였다. 그때에 바오로가 그에게 말하였다. ‘회칠한 벽 같은 자, 하느님께서
당신을 치실 것이오! 율법에 따라 나를 심판하려고 앉아 있으면서,
도리어 율법을 거슬러 나를 치라고 명령한단 말이오?’(사도 23,1-3)”
여기서 ‘회칠한 벽’이라는 말은, ‘회칠한 무덤의 벽’이라는 뜻이고,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회칠한 무덤’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나는 이날까지 하느님 앞에서 온전히 바른 양심으로 살아왔습니다.” 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은, “나는 최고의회에서 재판을 받아야 할 죄를 지은 적 없다.”,
즉 “나는 무죄다.” 라는 뜻의 자기 변론입니다.
그런데 대사제는 바오로 사도가 감히 하느님을 언급하면서 ‘뻔뻔하게도’ 자기는
온전히 바른 양심으로 살아왔다고 말하는 것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바오로 사도의
말을 하느님을 모독하는 위선자의 말로 판단해서 입을 치라고 명령했습니다.
(입으로 죄를 지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입을 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대사제를 향해서 ‘회칠한 벽 같은 자’ 라고 말한 것은,
대사제가 바오로 사도의 입을 치라고 명령한 일은 율법을 지키기 위한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율법을 거스르는 일이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유죄가 확정되지 않은 사람에게 형벌을 가하는 것은
율법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와 대사제처럼,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을 위선자라고 비난하는
상황에서, 제3자의 입장에서는 누가 위선자인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위선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가 언제나
하느님 앞에서 온전히 바른 양심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하던 시절에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니아스라는 이름의 대사제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를 향해서 ‘회칠한 벽 같은 자’ 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가 위선자였나 보다.’ 라고 짐작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 7,1).” 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거룩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위선자인 사람도
있을 것이고, 위선자가 아닌데도 위선자라고 오해받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위선자들이라고 꾸짖으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사기꾼’이라고 말했습니다(마태 27,63).
위선자는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진실하고 겸손한 사람은 자기의 언행이 위선이 되지 않도록 늘 조심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마태 23,29-32).”
이 말씀은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조상들의 죄를 자손들에게 묻는 말씀이 아니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의 무덤을 꾸미면서, 예언자들과
의인들을 공경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예언자들과 의인들을 박해하고 죽이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옛날 예언자들과 의인들을 공경하는 것은
공경하는 척 하는 것일 뿐이고, ‘위선’일 뿐이라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이미 살해당했고,
예수님도 박해를 받는 중이었고, 죽음을 앞둔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서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라는 말씀은,
원문대로 번역하면, “너희 조상들이 남겨 놓은 일을 행함으로써
조상들의 죄를 완전히 채우게 하여라.”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죽여서 죄를 가득 채우라는 뜻인데,
‘역설법’을 사용하신 말씀입니다.
죄가 가득 차면 하느님의 심판과 벌이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고 싶다면
조상들이 덜 채운 죄를 완전히 채워라.” 라는 말씀이 됩니다.
그러나 실제 뜻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고 싶지 않다면,
조상들이 했던 그런 짓은 하지 마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면서
심판과 처벌을 예고하신 것은, 협박이나 으름장이 아니라,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해서 구원받아라.” 라는 호소입니다.
위선자라도 자기의 위선을 깨닫고 회개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위선자가 아니다. 그러니 회개할 이유가 없다.” 라고 주장하면서
회개하지 않겠다고 끝까지 고집부리는 사람은 멸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 말씀 뒤에는,
그렇게 고집부리는 사람들이 멸망을 향해서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마태 23,37-39).
----------------------------------------------------
210825.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인 순수함과 유연함을 품고
오늘의 시대는 순수한 신앙의 가치를 살아내기에 너무도 힘들고 강력한 도전들이 널려 있다. 순수한 마음으로 살다 보면 속고 바보 취급을 당하기 십상이다. 제아무리 진실한 마음과 바른 생각을 지녔다 해도 그럴싸하게 보이지 않으면 제대로 평가받지도 못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 겉은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23,27-28 참조)라고 하시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질책하신다. 율법을 형식적으로만 지키며 의로운 체하는 이들의 표리부동을 질책하신 것이다.
당시 길가에는 무덤들이 많았는데, 유다인들의 3대 명절 때는 순례자들이 붐벼 무덤에 몸이나 옷이 닿곤 했다. 그렇게 되면 불결해져서 축제에 참여할 수 없으므로 이를 막으려고 길가의 모든 무덤에 회칠을 해두는 것이 관례였다.
회칠한 무덤들은 맑은 날에는 하얗게 빛나 보였고 멀리서 보면 아름답게 보였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언자들의 신앙에 참여하고 예언자들이 당하던 박해를 보속하는 뜻에서 기념관과 같은 무덤을 짓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30절)라고 말한다.
실제는 어땠는가? 그들은 위선적인 행동으로 예언자들을 박해하던 이스라엘인들 편에 서 있었다. 그들은 구세사를 제 입맛대로 해석하고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쓰라린 대화를 곡해하였다. 그들의 이런 태도야말로 가장 위선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썩어가는 시체의 악취로 진동하고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찬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책망하신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문제는 영적인 유연함의 결핍이다. 영적으로 유연하다는 것은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며 인내로이 기다리는 태도를 말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다른 이들의 충고나 의견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독선은 영신 생활에 결정적인 걸림돌이다.
영으로 유연한 사람은 성 프란치스코가 가르치는 “어머니가 자녀를 사랑하듯” “사랑의 정신으로 자진해서 서로 봉사하고 순종하며”(인준받지 않은 수도규칙 5,14),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가슴 태우는 사람”(권고 9)이다. 그리고 형제의 죄 앞에 인내와 겸손을 지닐 줄 아는 사람이다.
위선에 빠지지 않으려면 영적인 허영으로 가득 찬 말을 중요시하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럴싸하게 보이는 성실은 쓸모가 없다. 화려한 언변이나 있어 보이는 외모나 옷차림, 명품 핸드백과 같은 것 때문에 다른 이에게 호감을 받거나 인정받을 수도 있다. 그런 것들은 자신의 내적인 불성실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진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행동은 참으로 경건했으나 그들의 내면은 교활했고 부패한 죄로 가득했다. 나 또한 속은 썩어 있고 미움과 탐욕, 절망과 부정적 시각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죽은 무덤을 실속 없이 화려하게 꾸미는데 열을 올리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영적 유연함을 잃고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는 아름다운 빛깔의 독버섯이나 회칠한 무덤처럼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
210825.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행에 있어 조금이라도 책잡히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고, 밤에도 대낮처럼 품위 있게 처신했습니다!
이른바 삯꾼들, 양의 탈을 쓴 이리들, 거짓 지도자들이 보이는 두드러진 특징이 한 가지 있으니, 입으로는 사랑이니 봉사니 거품을 물며 외쳐대지만, 절대로 자기 손으로는 궂은 일 한번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강론대 위에서는 갖은 미사여구를 늘어놓지만, 구체적인 삶은 조금도 뒷받침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 따로 행동 따로, 가르침 따로, 삶 따로의 이중적인 모습, 겉과 속에 철저히 다른 위선적인 모습이 그들의 솔직한 민낯입니다.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과부들의 궁핍함을 덜어주고 도와주고 위로해주지는 못할망정, 등쳐먹고 호의호식하며 그렇게 살아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강하게 질타하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삶이 바로 그랬습니다.
이런 면에서 ‘목자들의 목자’ 바오로 사도가 보여준 표양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는 이 부분에 있어서 얼마나 당당했는지 모릅니다. 부끄러운 구석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개석상에서 명확히 밝히기까지 하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테살로니카 1서 2장 9절)
바오로 사도는 그 부담스럽고 바쁜 복음 선포의 길에서도 신자들에게 손톱만큼의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생계를 위해 자신의 두 손으로 직접 천막 짜는 일을 했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이곳 저 곳 젖먹이 같은 초기 교회 공동체 신자들의 신앙의 성장을 위해 밤늦도록 사목서한을 썼습니다.
가는 곳마다 노골적인 적개심을 품고 달려드는 적대자들과 맞서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야 했습니다.
해가 떨어지면 온몸은 파김치처럼 녹아내렸을 것입니다. 스트레스가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저 같았으면 동료들을 모아 수고했다며, 고생 많다며 한잔 가득 포도주를 따라주며 회포를 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잠자는 시간까지 쪼개서 기도했으며, 언행에 있어 조금이라도 책잡히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고, 밤에도 대낮처럼 품위 있게 처신했습니다.
“우리가 신자 여러분에게 얼마나 경건하고 의롭게 또 흠 잡힐 데 없이 처신하였는지, 여러분이 증인이고 하느님이 증인이십니다.” (테살로니카 1서 2장 10절)
----------------------------------------------------
210825.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내 안에 족보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십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속이 썩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속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요? 바로 조상들이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위선적으로 착한 척하지 말고 빨리 자신들이 섬기는 조상들처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마태오에게는 ‘새로 태어남’이 새로운 족보에 들어옴과 같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족보에 들지 못하면 그리스도처럼 살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조상이 되셔서 사람들이 온전히 당신 자손처럼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영화 ‘오블리비언’(2013)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지구인을 위해 외계인과 싸운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를 만든 것이 외계인이고 그는 지구인을 죽이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겉은 지구인이지만 조상은 외계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우리 안의 조상을 모시고 삽니다.
그리고 그 조상이 산 대로 삽니다.
만약 ‘진화론’을 믿는다면 우리 조상은 누가 되겠습니까? 원숭이가 됩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원숭이처럼 모든 삶을 생존을 목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개구리가 되고 싶은 전갈이 있었습니다.
겉으로 참으로 착했지만, 소풍 가는 날 개울을 건널 때는
자신이 개구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선조도 전갈이고 자신도 전갈인 것입니다.
만약 이 전갈이 정말 개구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자신의 조상이 개구리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새로 태어나기 전에는 그런 일은 불가합니다. 그냥 믿으려고만 해서는 조상을 바꿀 수는 없는 일입니다.
조상이 그에게 자신들이 선조라는 것을 믿게 하려고 주었던 ‘사랑과 가르침’을 다시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엠빅뉴스’에 ‘개 젖 먹는 까치, 울음소리도 멍멍?’이라는 뉴스가 올라왔습니다.
호주 퀸즐랜드주 줄리엣 웰스라는 여성은 2020년 9월 어미에게 버려져 죽어가는 아기 까치를 발견하였습니다.
이를 불쌍히 여긴 줄리엣은 까치에게 ‘몰리’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동물 전문가 조언을 받아 정성껏 돌봐주기 시작했습니다.
반려견 페기 역시 엄마처럼 몰리 옆을 꼭 지켰는데, 일주일 만에 건강을 회복한 몰리는 숲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자신을 개라고 생각한 듯 개처럼 달리고 개처럼 짖어댔습니다.
함께 인형 놀이도 하고 누워서 장난도 치며 서로를 끔찍이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페기의 몸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새끼를 낳아본 적이 없는 페기의 몸에서 젖이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몰리는 페기의 젖꼭지를 쪼아대며 젖을 먹었습니다.
동물병원 전문의는 “강아지도 까치를 자기 새끼로 여기게 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몰리는 다른 동물들이 접근하면 페기처럼 짖어 페기에게 이 사실을 전했습니다.
둘은 하루 종을 껴안고 놉니다.
몰리는 까치들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페기는 다른 개와 함께 새끼를 낳을 수 있을까요?
그건 모르겠지만 몰리는 다시 까치가 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어미로부터 버려져 새로운 족보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사람 안에도 각자 족보가 있고 그 족보대로 살아갑니다.
마태오가 족보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조상은 누구입니까?
괜히 나의 조상을 원숭이, 혹은 인간이라고 하지 맙시다. 나의 조상이 나를 만들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나의 조상은 그리스도이고 교회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내어주심으로써 우리가 이 족보에 들 수 있음을 믿게 하셨습니다.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저절로 사랑의 소명을 수행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어떤 드라마에서 한 보통 사람이 머리를 다쳐서 자기가 사이코패스였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고 사이코패스로 살아갑니다.
그러다 다시 머리를 다쳐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우리의 주인이 우리 자신이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주인은 조상입니다.
내가 누구의 후손인지에 대한 믿음이 나를 만들 뿐입니다.
우리 각자 안에는 내가 믿는 조상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조상이 산 대로 살게 됩니다.
하늘에 영광을 얻으려거든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아 주신 하느님을 첫 조상으로 여겨야 합니다.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덤 맞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닌 성체 성혈로 그리스도께서 묻힌 무덤입니다.
----------------------------------------------------
210825.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옷을 두 벌 이상 입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겉마음과 속 마음을 따로 두지 말고
오직 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향하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는 유혹이 찾아옵니다.
특히 공동체를 이끄는 이들과
공동체 안에서 발언권이 있는 이들에게
쉽게 찾아오는 유혹이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유혹에 자주 빠지는 사람이 생길 때,
내가 잘 살지 못하더라도 지적해야 한다는 교만과
나도 살지 못하는데 그냥 두어야지라는 무관심과
어차피 다 지키지 않는데 규칙을 없애자는 나태함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계명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가이드라인이고
우리에게 주어진 체계와 조직은
신앙인들이 함께 도우며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계명과 조직의 의미를 잃었을 때,
교만과 무관심과 나태함에 빠졌을 때,
우리는 하느님을 따른다고 하지만
실상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공범들을 만들어 가며
더 많은 이들이 유혹에 빠지도록 인도하게 됩니다.
그럴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참된 행복을 발견했습니다.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자비에 의탁하기에
그분이 주심 계명을 지키며 공동체가 함께 성장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의로운 행동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며
우리가 하느님 말씀을 지키는 이유는
하느님 안에서 참된 행복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찾아오는 교만과 무관심과 나태함의 유혹을 이기고
성실한 자세로 하느님께 다가가
우리의 삶으로 이웃에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기를,
그리하여 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
210825.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우리는 살면서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할 때도 있습니다. 자기의 의도와 상관없이 할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 선의의 거짓말을 할 때도 있습니다.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거짓은 좋지 않습니다. 만약 상황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해야 할 상황이라면 지혜롭게 완곡하게 표현을 에둘러서 하는 방법도 하나의 방법일 것입니다. 몇 개월 전에 고해성사를 봤습니다. 그때 고해의 내용이 선의의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한 고해였습니다. 이걸 고해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엄청 고민을 했습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고해를 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고해를 할 정도의 죄도 아니였습니다. 설령 죄가 된다고 하더라도 보통 미사 때 자비송을 할 때 이런 정도의 경미한 죄는 충분히 사해진다고 했습니다.
책에서도 봤고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보고 사실 직접 신부님으로부터 들어서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였습니다. 고민을 했지만 그렇게 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만약 그것도 중죄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하다 보면 습관성이 될 우려가 있을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처음엔 저도 잘 몰랐습니다. 의도가 좋으면 그렇게 나쁠 리가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근데 어느 날 일반 책을 읽다가 이와 관련된 사람의 심리에 관한 내용을 봤습니다.
종교에 관한 심리 서적은 아니였지만 저는 종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종교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이 자체의 거짓말이 문제가 되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어떤 상황에 대해서 작은 소죄도 그런 게 습관성이 되면 죄를 합리화하려고 하는 성향이 발현될 확률이 높을 거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아마 무신론자인 것 같았습니다. 만약 우리 천주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분명 이런 내용을 언급했을 겁니다. 다만 이 저자는 일반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을 했지만 제가 봤을 땐 그게 신앙을 도외시하고 언급만 했을 뿐이지 사실 신앙적인 이야기였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들을 향해서 비판을 하십니다. 위선자라고 말입니다. 겉으로는 의인과 같은 행동을 하지만 그 속에는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고 하십니다. 저는 가끔 한 번씩 제가 하느님 앞에 갔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곤 합니다. 칭찬 받는 것보다 세상을 살면서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삶을 산 것에 대한 책망을 듣게 되는 것을 상상해 봅니다. 누군가는 왜 그런 상상을 하느냐고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세상적인 표현으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미리부터 걱정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저는 조금 달리 생각을 합니다. 물론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나중에 천하만민 앞에서 최종 공심판 때 부끄러움과 수치를 덜 당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해봤습니다.
우리 사람은 평소에 아니 매일의 삶에서 얼마나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삶을 사는지 냉철하게 되돌아보면 부끄럽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우리의 마음에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그걸 다른 사람들이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드러나지 않는 것은 말입니다. 물론 드러나는 것도 있긴 합니다만 보통은 그걸 의도적으로 숨기려고 하기 때문에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왜 이게 다행일까요? 다들 보통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런 것이 조금도 허락되지 않는 의인들이나 하느님과 같은 무결점의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간다면 부끄러워서도 얼굴을 들고 살기 힘들 것입니다. 나약한 인간이라 그렇습니다. 그런 것을 언제까지나 나약한 인간이라는 변명으로 면책이 될 수는 없을 겁니다. 언젠가는 그 한계를 뛰어넘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러지 않으면 평생을 신앙생활을 했다고 해도 의미 없는 신앙생활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몇 분 신부님들의 유튜브 강론에서 몇 번 언급된 내용이 있었습니다. 저도 예전에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세상적인 일을 다 하고 난 후에 세례를 받았더라면 하고 말입니다. 인간적으로는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을 겁니다. 근데 요즘은 그런 생각이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달리 생각을 해보면 일찍 신앙생활을 하는 게 어찌 보면 손해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겠지만 한편 다르게 생각해보면 자기만 자신을 잘 관리한다면 이 세상에서 더 빨리 자신을 하느님이 원하는 몸인 거룩한 몸으로 바꿀 시간을 담보할 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고 생각한다면 절대 손해보는 느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일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연옥 교리를 믿는 종교입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 같은 분도 잠시 연옥을 거쳤다는 강론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심지어 오상을 받으신 분도 아무리 잠시라고는 하지만 잠시 연옥을 거치셨다고 한다면 우리와 같은 사람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어찌 된다는 것은 불을 보듯 당연할 것입니다. 연옥을 가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혹자는 고통스러운 곳이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힘들지만 고통을 참고 견디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옥보다는 안심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닐 것입니다.
역으로 생각한다면 지옥으로는 가지 않지만 그 고통은 지옥과도 같은 고통과 같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만 영원한 지옥이라는 곳으로만 가지 않는다는 게 보장이 될 뿐이라는 사실이라면 그렇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얼마나 보속을 많이 해야만 연옥의 고통을 그만큼 덜 받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본다면 오상을 받으신 신부님도 그러할진대 우리와 같은 사람은 정말 처절하게 자신과 싸우는 보속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회칠한 무덤과 같은 곳에서 지내게 될 운명이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서 회칠한 무덤과 같은 삶을 살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만큼 우리의 영혼은 천국 문 앞에 가까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사실을 미리 자각하는 사람은 현명한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삶을 살지 않고 진실된 삶을 살도록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르톨로메오에게 한 말씀처럼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고 할 정도의 삶을 살기만 한다면 천국의 문은 우리의 영혼에 아주 가까이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
210825.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제1독서(1테살2,9~13)
"우리는 또한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13)
테살로니카 1서 2장 13~16절은 테살로니카 1서 2장 1~12절까지 계속되어 온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복음 전파 활동에 대한 회상의 연속이다.
복음에 대한 테살로니카 신자들의 진실한 자세를 회고하며, 이에 대해 감사하는 내용에서 '끊임없이'라는 의미의 '아디알레입토스'(adialleiptos; without ceasing)와 '감사를 드립니다'라는 뜻의 '유카리스투멘'<eucharistumen; thank; '유카리스테오'(eucharisteo)의 직설법 현재 동사>은 테살로니카 신자들로 인한 사도 바오로와 그의 동역자들의 감사가 잠시라도 끊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해 준다.
복음 전파자들에게 근심과 염려가 되었던 코린토 신자들(1코린4,18~21)과 달리 복음 전파자들에게 감사의 제목이 되었던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모든 시대의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요소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1테살1,3).
히브리서 13장 17절에는
'지도자들의 말을 따르고 그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하느님께 셈을 해 드려야 하는 이들로서 여러분의 영혼을 돌보아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탄식하는 일 없이 기쁘게 이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들의 탄식은 여러분에게 손해가 됩니다.'라는 말씀이 있는데,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복음 전파자들로 하여금 기쁜 마음으로 일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날마다 감사가 끊어지지 않게 했으니, 그들의 영혼은 영적으로 많은 유익을 덧입었던 것이다.
테살로니카 1서 2장 13절의 두번째 구절은 이유 접속사 '호티'(hoti)로 연결되는데, 사도 바오로와 그 동역자들이 테살로니카 신자들에 대해 하느님께 끊임없이 감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하느님의 봉사자들로부터 선포되고 가르쳐지는 말씀의 권위는 사람의 권위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권위이다.
하느님 대전에 겸손한 자들이라면, 이러한 하느님의 봉사자들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의당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게 마련이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봉사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원래 그대로, 때로는 상세히 해설하여 전하는 중개자들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들 자신도 자신이 전하는 말씀이 자기 것인 양 주장할 수 없고, 그 말씀을 받는 자들도 당연히 그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느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에 그 말씀의 권위에 복종하여 하느님 나라와 영광에 참여할 수 있으며 (1테살2,12), 그 말씀이 자신 안에서 역사(役事)하시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한편, 여기서 '말씀'('로고스'; logos; the word)을 '받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단어가 두 개이다.
첫째는 '들을 때에'로 번역된 '파랄라본테스'(parallabontes; when you received)라는 부정 과거 분사이고, 둘째는 '받아들이지'로 번역된 '에덱사스테'(edeksasthe; you accepted it)라는 직설법 부정 과거 동사이다.
전자는 객관적이고 외부적인 수용을 뜻하고, 후자는 환영과 찬성을 동반하는 주관적이고 내적인 수용을 뜻한다.
즉 전자는 귀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듣는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서 사람의 입에서부터 흘러 나온 말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들린다는 사실과 관련되며, 후자는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이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것으로서 사람에 따라 그 반응의 형태가 달라진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사도 바오로 일행의 입에서 나온 복음을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반드시 순종하고 지켜 행해야 할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사도 바오로가 전한 복음을 테살로니카 신자들이 사람의 말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이유가 사도 바오로의 언변이 탁월하고 좌중을 압도하는 능력이 있어서였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코린토 2서 10장 10절에는 '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차지만, 직접 대하면 그는 몸이 약하고 말도 보잘 것 없다.'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보더라도 테살로니카 신자들이 사도 바오로가 전한 복음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것은 감동시키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었기 때문이며, 사도 바오로가 개인적 사상이 아닌 하느님의 진리를 전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사실 그대로'로 번역된 '카토스 에스틴 알레토스'(kathos estin allethos; as it is in truth; as it actually is)는 직역하면 '그것은 진실로 그와 같다'이다.
이것은 '너희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은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은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이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사도들로 부터 전파된 하느님의 말씀이 갖는 본질적 가치를 알고 있었으며, 또한 복음에 대해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 당연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신자 여러분 안에서'라는 표현은 '믿음의 형제들'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사도들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는 여러분들'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말씀이 아무리 객관적으로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그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도대체 역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활동(역사)하고 있습니다'로 번역된 '에네르게이타이'(energeitai; is at work; effectually works)는 현재 직설법 동사인데, 여기서 현재 시제는 두 가지 의미를 나타낸다.
첫째로, 그리스어에서 직설법 현재형은 진리나 격언 및 변함없는 진리를 나타내는 '격언적 현재'(Proverbal Present)로 쓰인다는 점에서 이것은 변함없는 진리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즉 증거되는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 믿는 자들에게는 언제 어디서나 그 말씀이 역사하는 것은 불변의 진리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영적 원리로 정해 놓으신 일이기 때문에, 이러한 조건만 충족되면 이 역사는 언제나 어디서나 일어나는 것이다.
둘째로, 그리스어에서 직설법 현재형은 과거에 시작되어 현재까지 계속되는 동작을 나타내는 '지속적 현재'(Durative Present) 용법으로 쓰인다는 점에서 테살로니카 신자들의 당시 영적인 삶에 그 역사가 나타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사도 바오로가 말씀을 전하던 때 뿐만 아니라, 본 서간을 쓰고 있는 현재에도 그와같은 역사가 믿는 이들 안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활동(역사)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원형 '에네르게오'(energeo)는 죽은 자의 영이 다른 사람 안에서 되살아나 '운동하다'(마태14,2) 또는 무법의 신비가 '작용하다'(2테살2,7)라는 의미로 사용된 동사이다.
즉 운동력있게 활동함으로써 능력을 발휘한다는 의미이다.
본절에서 이러한 활동의 주체는 '하느님의 말씀'인데, 이것은 즉각적으로 히브리서 4장 12절을 연상시킨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즉 하느님의 말씀이 믿는 이들 안에서 운동력있게 활동함으로써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에제키엘 예언자도 체험한 바가 있다(에제37,1~14).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은 그것을 그분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의 심령에 역사하여 자신의 죄악된 실체와 직면하게 하며, 그로 인해 그 죄스런 생각과 본성을 변화시키고, 자신에게만 이기적으로 집중하던 관심을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열게 하며, 그들의 삶 전체를 하느님께로 향하도록 바꾸어 놓는 것이다.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이다.
(마태23,27-32)
27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28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29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30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31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 구원은 인간의 지혜 그 길(계명)이 아닌 하느님의 지혜의 길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하느님의 길, 그분의 뜻을 믿었던 의인들과 예언했던 예언자들을 죽였던 것이다.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길은 그들을 살리시기 위한 하늘의 죽음이신 무지개 계약인 것이다.
노아의 홍수 후~
(창세9,15-16) 15 나는 나와 너희 사이에, 그리고 온갖 몸을 지닌 모든 생물 사이에 세워진 내 계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물이 홍수가 되어 모든 살 덩어리들을 파멸 시키지 못하게 하겠다. 16 무지개가 구름 사이로 드러나면, 나는 그것을 보고 하느님과 땅 위에 사는, 온갖 몸을 지닌 모든 생물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계약을 기억하겠다.”
= 무지개- 레인보우(활) 활은 무지개처럼 하늘을 향해있다. 하늘이 화살을 맞아 대신 죽어 다시 살리시겠다는 하느님의 영원한 계약이 무지개 계약인 것이다.
또 하나(여러번 묵상했듯이~) 나무 하나의 희생 그 계명이 있다.
(탈출15,25) 25 모세가 주님께 부르짖으니, 주님께서 나무 하나를 보여 주셨다. 모세가 그것을 물에 던지자 그 물이 단 물이 되었다.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백성을 위한 규정과 법규를 세우시고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백성을 시험하셨다.
= 나무 하나, 곧 예수님의 십자 나무, 그 대속의 죽음으로 쓴물(죄인)이 단물(의인)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의 규정, 법규, 진리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이 구원, 곧 생명의 길이요 진리이신 것이고 그 당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수 없다(요한14,6)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그 하느님의 규정과 법규를 무시했고 그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던 의인, 예언자들을 모두 죽였던 것이다.
32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 하느님의 무지개 계약이며 구원의 규정 법규 진리이신 예수님 당신을 죽이는 일을 마저 하라는 말씀이신 것이다.
(마태20,18-19) 18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19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히브7,27) 27 그분께서는 다른 대사제들처럼 날마다 먼저 자기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치고 그다음으로 백성의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으십니다. 당신 자신을 바치실 때에 이 일을 단 한 번에 다 이루신 것입니다.
=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한 그 헛된 신앙으로 하느님의 규정과 법규, 그 하느님의 뜻인 십자가의 복음, 그 약속의 말씀을 저버리고 곧 십자가의 길을 구원의 진리로 의지하는 신앙을 살지 못한다면 하느님과 예수님의 뜻을 죽이는~ 그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큰 살인, 죄인 것이다.
(마르7,13) 13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 많은 사람들이 그 헛된 신앙을 살고 있다는 말씀이신 것이다. 우리 교회는 그 많은 사람들 속에 들어있는 것은 아닌지요~~
천주의 성령님 저희 많은 죄인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소서. 아멘♡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복음(마태23,27~32)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27~28)
마태오 복음 23장 27절과 28절은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한 여섯번째 저주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유다인들이 부정하게 여겼던 무덤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무덤'으로 번역된 '타포이스'(taphois; tombs)의 원형 '타포스'(taphos)는 '매장하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탑토'(thapto)에서 유래한 명사이다. 원래는 '장례 의식'(funeral rites)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다가 후에는 '묘'(tomb)라는 의미로 널리 사용되었다.
유다의 무덤은 초기에 동굴 위주였으나 후기로 오면서 '토굴'(crypt) 위주로 바뀌었다. 그리고 '회칠한'으로 번역된 '케코네아메노이스'(kekoniamenois; whitewashed)의 원형 '코니아오'(koniao)는 '석회로 바르다', '회반죽을 바르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이다.
여기서는 수동태 완료 분사로 쓰여서 '석회질이 된'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타포이스 케코니아 메노이스'(taphois kekoniamenois)는 '석회질이 된 무덤들'이라는 의미이다.
유다인들은 유다력으로 아다르월(월력12월; 양력3월) 15일에 무덤을 회칠하는 관례를 가졌는데, 이것은 무덤을 잘 띄게 함으로써 거기를 지나가는 순례자들이 실수로 무덤을 밟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무덤에 몸이 닿은 이는 이레 동안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민수19,16).
마태오 복음 23장 27절과 병행 구절인 루카 복음 11장 44절에 의하면,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은 알지 못한다' 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드러나지 않는'이라고 번역된 '아델라'(adela)라는 단어는 '숨겨져서 보이지 않는'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표현은 마태오 복음의 기록과는 다르다.
루카 복음사가는 일반 사람들이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더러운 내면의 세계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의미로 그들을 '드러나지 않는 무덤'이라고 했고, 마태오 복음사가는 마음 속은 온갖 부패한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깨끗한 '회칠한 무덤'처럼 깨끗한 체하는 그들의 이중적인 삶을 강조하기 위해 '회칠한 무덤'이라고 한 것이다.
한편, '같기'로 번역된 '파로모이아제테'(paramoiazete; you are like)는 '닮았다'는 의미를 지닌 원형 동사 '파로모이아조'(paromoiazo)의 복수 2인칭 현재형이다. 따라서 이것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회칠한 무덤을 닮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회칠한 무덤 같다'는 비유는 실제 내용물은 시체나 말라 비틀어진, 가득찬 뼈들과 진동하는 부패한 냄새인데, 겉포장은 희고 깨끗해 아름다우므로 겉과 속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이 회칠한 무덤을 닮았다는 것은 그들의 외적 행위는 깨끗하고 아름다워 보여도, 그들의 실상인 도덕적, 영적 상태는 썩어 냄새나는 것이라는 사실, 즉 위선의 극치를 가리키는 것이다(마르7,1~23참조).
'겉은 ~의인으로 보이지만'
'의인으로'로 번역된 '디카이오이'(dikaioi; righteous)의 원형 '디카이오스'(dikaios)는 '합법적인', '옳은', '의로운'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차디크'(tsadiq)에 해당하는 단어로서 '의로운', '하느님과 인간의 법을 준수하는'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보이지만'으로 번역된 '파이네스테'(phainesthe; appear)의 원형 '파이노' (phaino)는 '빛나게 하다', '비추다' 또는 '나타나다'를 뜻하는 동사로, 여기서는 복수 2인칭 수동태로 쓰였다. 이것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사람들에 의해 그렇게 보여진다는 뜻이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외적인 경건한 노력과 지나칠 정도로 엄격한 율법 준수의 모습을 보고서, 그들이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 의롭고 올바른 사람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