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전후, 한 독일 기자는 서울 빈민촌 가운데 하나인 하월곡동을 취재했다. 귀국 후 그가 쓴 기사에서 하월곡동을 표현한 단어는 ‘Moon Valley’. 이 때부터 우리나라 언론에서도 빈민촌을 ‘달동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서울에 남은 마지막 달동네인 하월곡. 주소로는 월곡3~4동 일대. 하지만 재개발의 매서운 바람은 여지없이 그곳에도 불기 시작했다. 산등성을 휘감은 하월곡동 달동네는 내년 이맘때쯤이면 그곳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만 남게 될 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전체660여 가구 가운데 이미 150여 가구가 떠났다. 남은 이들은 아직 앞날을 모른 채 산비탈을 타고 오르는 모진 겨울 칼바람을 견디고 있었다. 그곳에 멈춰 있는 풍경과 그 속에 몸 담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담았다. 그들의 작은 바람까지도. |
"허리디스크가 심하면 발목까지 저려와. 처음에는 진통제 2알로 4시간은 버텼어. 그런데 이젠 아무리 먹어도 듣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취제 삼는 거야"
20년 동안 하월곡에서 살아온 김태환(72)씨. 허리디스크와 심장병, 기관지 천식 등으로 그는 일주일에 한번씩 그를 방문하는 도우미 없이는 생활이 힘들다. 거동이 자유롭지 않은 그에게는 술과 가끔 찾아오는 술친구(사진 오른쪽)가 유일한 낙. 이혼 이후 주욱 혼자 살아왔고 그나마 간간히 연락이 됐던 딸마저 5년전부터 소식이 끊겼다. '외로움'은 그에게 또 다른 나쁜 친구.
김씨는 "삶에 미련 없어. 다만 조금만 더 건강했으면 할 뿐이야"라며 밭은 한숨과 같은 새해 소망을 말했다. 그는 이 곳이 철거되면 불편한 몸으로 마땅히 갈 데도 없어 보였다.
폐지와 공병을 판 2000~3000원으로 시장에 다녀오는 박경애(82, 가명)씨의 발걸음이 힘겨워 보인다. 박씨는 "가끔 잘하면 하루에 5000원까지도 해. 그럴 땐 김(태환)씨에게 반찬도 좀 사다주고 그러는 거지 뭐". 그는 오늘도 김씨를 위해 솜바지 두 벌을 슬며시 방에 놓고 갔다. 단지 "자기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기 때문에".
전세 500만원에 살고 있는 그의 식구는 아들과 손녀 둘. 그 역시 재개발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 보상금을 받더라도 마땅히 이사할 곳이 없다. 그래도 그는 "설마 어찌되겄소. 죽으려는 팔자는 아니니깐 별 걱정은 안해"라며 웃고 말았다.
일명 '스카이차'를 운전하는 김일생(46)씨에게 이 동네는 '제2의 고향'이다. 67~68년쯤 동네가 형성될 때부터 이곳에 정착했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으며 삶을 꾸려왔다. 내년이면 떠날 수도 있는 상황이 그에겐 큰 아쉬움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 그는 "막상 떠나려니 억울한 생각만 든다"며 "나라가 없는 사람에게만 이리가라, 저리가라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1년치 주민세 6000원을 못 내면 지자체에서 수십번씩 찾아오지만 모 방송프로그램 등을 보면 탈세 기득권층이 너무 많아서 허탈하다는 것. 그런 그는 "이미 당한 사람들은 그렇다고 해도 앞으로 다른 사람들은 '당하지 않고' 사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고 새해 소망을 밝혔다.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엄마..."를 외치다가 곧이어 "누나, 누나, 누나..."를 외치는 한 아이. 엄마보다는 누나가 집에 있을 확률이 높다는 것을 너무 쉽게 알아버린 아이. 아이는 어느새 좁은 골목길 사이로 사라졌다. 그처럼 마을도 내년이면 슬그머니 사라질지도 모른다.
"새해? 정치나 잘 하라고 해. 맨날 쌈박질이나 하고 말야. 우리같은 영세민이 안중에나 있겠냐만 해도 너무해. 가방끈 길수록 더한 도둑놈이라더니만..." 기자가 신년의 바람을 묻자 한복자(71)씨는 대뜸 화부터 내고 봤다. "머리에 피터지도록 싸우라고 국민들이 세금 냈어? 돈 없는 사람들도 살게 해줘야 할 거 아냐" 그는 이 한마디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갔다.
매서운 겨울 바람 가운데 우뚝 선 '원거주민 이주 안내공고'가 길을 지나는 이들을 더욱 움츠리게 한다.
월곡1구역은 아직 재개발사업승인이 나지 않았다. 지난 21일에야 'ㄷ'건설에서 재개발사업 승인신청서를 성북구청에 제출했을 뿐이다. 하지만 동네주민들은 당연히 내년 안에 철거에 이은 재개발이 뒤따를 것으로 알고 있다. 이미 서울의 다른 지역들도 결국 원거주민들의 이주와 철거, 재개발의 순서로 진행됐었기에...
다만 이곳은 노후된 거주환경과 위험한 집들을 이유로 재난민안전관리기본법에 따라 '선이주'라는 혜택 아닌 혜택이 주어져 있을 뿐이다. 원거주민들 대부분이 떠난다는 결론은 변함 없어 보인다.
사진 왼쪽에 아파트를 짓고 있는 곳이 재개발 월곡3구역. 이를 반으로 갈라 나머지 위쪽 마을이 월곡1구역이다. 아파트는 점점 마을을 압박해 올라오고 있었다. 사업자들에게 '남은 땅'으로 보이는 월곡1구역은 대부분의 땅이 국공유지이기 때문에 공원부지의 확보문제 등으로 오히려 재개발 사업이 늦춰지고 있을 뿐이다.
병풍처럼 둘러싼 아파트에 포위된 듯한 마을. 원거주민이 떠난 어느 빈집에 버려진 쓰레기가 멀리 보이는 아파트 앞에서 마치 자신의 내장을 드러낸 듯 하다.
마을 주민들에게는 낯익으면서도 낯선 풍경. 이제 마을 대부분의 주택들은 내년 언제쯤, 한동안 쓰레기와 폐건축물 더미로 몸살을 겪을 것이다.
사람은 겨울에 옷을 더 껴입는다. 파란 천막을 덮은 이 집도 마찬가지일까.
창문 틈으로 침범하는 날선 바람을 잡는 방법으로 창틀에 마치 치약처럼 무언가를 짜서 둘러놓은 모습(사진왼쪽). 요즘 날씨에 바깥에 빨래를 널어놓는 집이 많지 않으련만, 이곳은 넉넉하지 않은 주거공간 때문에 주로 외부에서 빨래를 말리고 있었다.
예년에 비해 기름보일러를 설치한 집이 많아졌다고 해도 이 동네에서 연탄은 여전히 주된 겨울철 난방수단이었다. 연탄값은 마을 어귀는 330원, 동네의 꼭대기로 갈수록 20원, 50원씩 비싸진다. 마을에는 이마저 살 돈이 없어 하루이틀 건너 연탄을 태우는 집이 많다고 구멍가게인 '강호네' 박소영(62, 가명)씨가 전했다.
"서울 여기저기서 재개발이 마구 일어나기 전, 타지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 5년쯤 전까지만 해도 우리 마을이 얼마나 좋았는데요. 그저 겨울철 이 시간쯤 되면 삼삼오오 모여 막걸리 한사발 들이켜고, 동전을 서로 모아 겨우겨우 그 값을 치루는데 혹시 모라자면 '내일 줄게요'로 은근슬쩍 넘어갔던 시절..." 마을의 초기 맴버라고 자부하는 김일생씨의 말. 이제는 날이 갈수록 동네가 뒤숭숭해진다며 한탄하는 그의 말끝에는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
어느덧 해는 저물고 마을에는 별이 내렸다. 한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기약하며. 확실한 미래를 다짐하긴 쉽지 않아 보이지만 그들 모두의 마음 속 어딘가에는 희망의 별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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