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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47) 바치챠의 ‘예수 이름의 승리’
예수님이 비추는 찬란한 황금빛이 모두에게
- 바치챠, ‘예수 이름의 승리’(1685년), 예수 성당 내 중앙 본당 천장, 이탈리아 로마.
트렌토 공의회는 여러 면에서 교회 생활의 변화를 가져다줬다. 공의회 이후에 선출된 교황들의 개혁 의지도 교회가 쇄신하고 변화된 생활을 하는 데 동력이 됐다. 우선 성 비오 5세(재위 1566~1572)는 1569년 잘츠부르크 지역 시노드 소집을 독려했고, 「로마 교리서」를 출판했으며 「성무일도서」를 통합하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까지 사용한 「미사 경본」을 개정했다. 그레고리오 13세(재위 1572-~1585)는 로마를 비롯한 교구 신학교 설립을 장려했고, 교황 대사에게 더욱 교회다운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개혁의 수단이 되게 했다. 특히 설립한 지 얼마 안 된 예수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예수회 인재들의 지원을 받아 교회 개혁의 동력으로 삼았다. 식스토 5세(재위 1585~1590)는 1908년까지 유효했던 보편 교회와 교황청의 중앙 행정을 개혁하고, 주교들에게 앗리미나(ad limina, 사도좌 방문)를 의무화했다.
그레고리오 13세 교황과 예수회
오늘 주제와 연관해 그레고리오 13세 교황과 예수회 관계에 주목해 보기로 하겠다. 그레고리오 13세는 1576년 루뱅대학교 교수로 있던 예수회 로베르토 벨라르미노(Roberto Bellarmino, 1542~1621)를 로마로 불러 콜레지움 로마눔 부설 교황청 학원재단 변증학회 회장직을 맡겼고, 2년 후(1578년)에는 예수회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를 초대해 달력 개혁을 준비했다. 독일인 수학자며 콜레지움 로마눔 교수로 있던 예수회 크리스토퍼 클라비우스(Christopher Clavius, 1538~1612)와 시칠리아 출신의 의사며 수학자, 천문학자였던 주세페 스칼라(Giuseppe Scala, 1556~1585)의 연구를 토대로, 1582년 가톨릭 국가들의 제후와 대학교수들의 동의를 얻어 달력 개혁을 단행하는 교서 「중대한 일 가운데(Inter Gravissimas)」를 발표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태양력인 ‘그레고리오 달력’이다.
그 시기에 그레고리오 13세의 정책도 예수회도 크게 진일보했다. 교황은 콜레지움 로마눔에 보조금을 지원해 예수회 교육기관을 증축, 교육 정책을 체계적으로 펴나가도록 했고, 예수회는 인근에 별도의 땅을 확보해 대학교를 완성했다. 1584년 10월 28일에 축복식을 가진 이 학교를 ‘그레고리아노 최고 학부이자 그레고리아노 대학교(Archiginnasio Gregoriano e Universit Gregoriana)’라고 했다. 그레고리오 교황에게 헌정한 오늘날의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이다. 이런 소식은 즉시 선교지로 전해졌고, 열악한 환경에서 힘겹게 선교 활동에 임하는 선교사들을 고무하는 원동력이 됐다. 동시에 선교지에서도 수도원과 함께 교육 사도직을 위한 학교가 지어졌다. 이는 로마 교회가 지역 교회에 심어지는 것을 의미했다.
예수회에 관해, 앞서 바치챠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죽음’ 편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1540년 종교 개혁의 불길이 한창 타오르던 시기에 설립됐다. 종교 개혁은 가톨릭교회의 성인 공경과 각종 이미지를 통한 신심 활동에 제동을 걸었고, 예수회는 설립과 동시에 예술과 영성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과 함께 말씀과 이미지 간의 대화와 통합의 길을 모색해야 했다. 바오로 3세 교황도 예수회 설립을 승인하는 교서에서 “영적으로 무장되고, 교육 사도직과 문화 방면에 이르는 깊은 인식을 두루 갖춘” 교회 내 단체가 필요하다고 천명했다. ‘문화 방면에 이르는 깊은 인식’을 위해 예수회는 예술에 관한 원칙과 토대를 마련하고, 트렌토 공의회를 통해 단행한 전례 개혁과도 보조를 맞췄다. 공의회 개혁에 담긴 규범에 따라, 성당 건축과 장식에 기술적이고 예술적인 이정표를 제시했다.
예술과 학문, 교육 발달 이끌어
예수회는 교육기관만 세운 것이 아니라, 교육 프로그램에 관한 기준도 마련했다. 오늘날 거의 전 세계에서 사용하고 있는 의무 교육 과정에 있는 교육 프로그램은 16~17세기 예수회 교육지침서(Ratio Sudiorum)에서 마련한 것이다. 중세기 인문학 중심의 커리큘럼에 인문과학을 추가한 것은 예수회 크리스토퍼 클라비우스의 업적이다. 예컨대, 예수회 교육 과정에서 수학 지식은 신학 과정에 진입하기 전에 반드시 이수해야 하는 필수 과목이었다. 하느님께서 창조한 자연 질서는 수학적인 법칙에 따라 기획되고 만들어졌기에, 우주를 지배하는 자연법칙을 탐구하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 업적의 위대함을 탐구하는 종교적인 행위로 보았다. 수학은 철학, 음악과도 연결돼 있어, 다른 순수 학문이나 응용 학문에 기초가 됐다. 이것을 입증하는 것이 ‘예술’이었다.따라서 예수회 전통에서 인문학을 토대로 수학, 물리학, 천문학 등의 인문과학을 습득한 탄력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과 건축, 음악, 미술 등 예술 분야에 자질 있는 회원을 양성하고, 그들을 선교 현장에 투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로마의 예수회 총원 콜레지움 로마눔 옥상에는 천체 관측소가 있었고, 퀴리날레에 있던 성 안드레아 수련소에는 예술 분야의 선교사들을 양성하기 위한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이 별도로 있었다. 당시 예수회 화가들의 작품도 많았다. 그 흔적은 오늘날 바티칸 박물관 피나코테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시실 한 공간이 거의 모두 예수회 화가들의 작품으로 채워져 있다. 1773년 예수회가 해산될 때, 바티칸은 예수회 총원을 압수했고, 그때 가지고 온 예술 작품들이다.
예수회 3대 보르자 총장은 설교할 때, 이미지를 폭넓게 활용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그것을 음식에 맛을 더하기 위해 사용하는 ‘향신료’에 비유했다. 피렌체 출신으로 바르톨로메오 암만나티의 제자 조반니 바티스타 피암메리(Giovanni Battista Fiammeri, 1530~1606)와 아브루쪼 지방 아퀼라 출신의 주세페 발레리아노(Giuseppe Valeriano, 1526~1596)는 예수회에 들어와 로마의 예수 성당 장식에 투입됐고, 베르나르도 비티(Bernardo Bitti, 1548~1610)는 선교사로 선발돼 페루로 파견됐다. 말씀 텍스트에 삽화를 넣은 시리즈물도 나왔다. 예로니모 나달(Jernimo Nadal, 1507~1580)의 「복음 이야기 도해집」이 대표적인데, 이것은 중세기 문자를 모르는 백성에게 이미지로 성경 내용을 가르치던, ‘가난한 이들의 성경(Biblia pauperum)’의 새로운 버전이었다.
예수회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그리스도교 신앙 논쟁에 관한 토론」(15811)과 「거룩하고 속된 이미지에 관해서」(1594년)에서 프로테스탄트인들이 가톨릭 신자들을 겨냥해 우상 숭배라고 비난한 것에 맞서 이미지를 통한 신심을 더욱 강하게 옹호했다. 그 시기에 추기경은 ‘천사학’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고, 그의 가르침이 널리 보급된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유럽의 바로크 양식의 성당들에서 천사들이 넘쳐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예수회 설교자 올리바(Gian Paolo Oliva)는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와 절친했다. 그는 제노바에 있던 바치챠(Giovan Battista Gaulli, Baciccia로 알려짐, 1639~1709)와 예수회원 포쪼(Andrea Pozzo)와 스페인 출신의 화가 보르고뇨네(Borgobnone)를 로마로 불러 예수회 성당들을 바로크 양식으로 바꾸고, 장식을 의뢰했다. 이 시기에 포쪼가 로마의 성 이냐시오 성당에서 ‘예수회 선교 활동의 은유’를 그렸고, 오늘 소개하는 바치챠가 예수 성당 천장에 ‘예수 이름의 승리’를 그렸다. 푸생, 틴토레토, 다 바싸노, 베로네세, 솔리메나, 루카 조르다노, 카를로 마라타, 구이도 레니,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 무릴로 등 바로크 시대를 주름잡던 당시 예술가들은 예수회와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베르니니의 지지 얻어 예수 성당 장식
환상적인 이 작품이 교회사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종교 개혁의 칼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교회가 문화 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지지와 후원을 아끼지 않은 흔적은 이 작품 하나로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이 프레스코화를 그린 화가 바치챠에 대해서는 지난번 ‘성 프란체스코 하비에르의 죽음’<1612호 5월 9일 자 참조>에서 간단히 이야기했기 때문에, 여기선 작품에 관련한 것만 언급하기로 하겠다.
제노바 출신의 화가 바치챠가 로마에 온 것은 1657년이다. 그는 로마에 오자마자 베르니니의 눈에 띄어 그의 다른 동료들과 함께 베르니니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거장의 가장 충실한 협력자 중 한 사람이 됐다. 이 작품은 베르니니가 성 베드로 대성전 중앙 제단 뒤쪽 앱스에 만든 ‘성 베드로 좌’에서 영감을 얻어 기획했다. 그는 예수 성당에서 돔과 중앙 천장을 장식하면서, 베르니니가 설계한 성 베드로 좌에 버금가는 회화와 조각의 정수를 남기고 싶었다. 베르니니도 적극적으로 권했고, 나중에 힘을 보태주기도 했다. 그 결과 그가 바란 대로 이 작품은 그에게 불후의 명작이 됐다.
그림 속으로
작품의 주제는 ‘예수 이름의 승리’다. 바로크 양식을 완전히 통합한 17세기 원근법적 환상주의 기법으로 배경을 장식했다. 바로크의 최고 정수를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다. 화가는 가장 높은 데서 황금색의 빛이 발산되는 눈부신 자리에 그리스도의 모노그램, IHS(Iesus Hominum Salvator, 인류의 구세주 예수)를 배치했다. 예수회의 문장이다. 거기에서 발산되는 빛은 점차 그 아래 있는 모든 인물에게로 퍼진다. 가운데 교회, 성인과 동방 박사들이 있고, 아래에 죄와 이단과 허영의 우화들까지 밝히고 있다. 주변에는 그림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하는 사람들 때문에 숨이 막힌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48) 자코모 조볼리의 ‘성 빈센트 드 폴의 설교’
사랑의 혁명가, 소외된 이들에게 십자가의 빛을 비추다
- 자코모 조볼리, ‘성 빈센트 드 폴의 설교’(1737), 룬가라의 코르시니 궁(Palazzo Corsini alla Lungara), 이탈리아 로마.
트렌트 공의회로 시작된 가톨릭교회의 개혁은 1600~1800년대를 규정하는 교회의 얼굴이 됐다. 교회가 ‘복음으로 돌아가는’ 새로운 방식으로서 자선, 곧 애덕 활동이 제시됐다. 그것은 필립보 네리와 카를로 보로메오, 성 가밀로, 페데리코 보로메오에 이어 또 다른 큰 성인으로 이어졌다. 오늘 소개하는 빈센트 드 폴(Vincent de Paul, 1581~1660) 성인이다.
그 시기, 유럽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과 개신교를 지지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가장 잔혹한 전쟁이 있었다. 30년 전쟁(1618~1648)으로 알려진 이 ‘종교 전쟁’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립인 동시에 전제 군주정과 봉건 제도의 대립이자, 유럽의 여러 국가가 얽히고설키면서 정치적인 구도 속에서 합스부르크 가문과 프랑스의 대결 구도로 양상이 뒤바뀐 복잡한 전쟁이었다.
이런 대혼란 속에서 인류는 과학 혁명으로 인식과 지식 분야에서 큰 도약을 예고하고 있었다. 추론과 관용, 판단의 자유를 기반으로 한 계몽주의 과학 혁명은 시민, 경제와 사회 분야에 큰 변화를 가져올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는 교회의 탄압 속에서도 망원경을 직접 개발해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입증했고,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은 만유인력 법칙을 밝혔다. 프랑스의 데카르트와 파스칼, 독일의 케플러와 라이프니츠, 이탈리아의 토리첼리, 영국의 보일과 같은 위대한 학자들도 이 시대를 이끌었다. 과학 혁명과 함께 태어난 합리적 사고는 인간의 행동과 생각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 시기 여러 분야의 학자들은 이전 세기의 권위주의에 입각한 이성, 자유와 관용에 반대했다.
17세기, 그리스도 중심적 휴머니즘
‘계몽주의’라는 사고(思考) 혁명의 소용돌이를 예상한 듯, 가톨릭교회의 지체들은 행동으로 타자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시작했다. 애타심으로 타자를 대하고, 평등과 형제애를 실천하며 내세에서가 아니라, 현세에서 지복을 경험할 수 있는 틀을 마련했다. 사랑으로 표현되는 ‘불변하는 사도직’에 투신한 사람들이 세상을 참으로 변혁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줬다.
중세기,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과 가족의 영혼 구원에 힘을 썼다면, 1600년대를 기점으로 온 교회 공동체와 더불어 인류의 구원에 힘을 쓰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중세 교회에서 흔히 보던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의 간극은 사라지고,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교회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지리상의 대발견 이후, 공간에 상관없이 가난한 인류를 챙기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1600년대 이후, 교회 안팎에서 드러나기 시작한 교회 쇄신 운동의 특징은 ‘그리스도 중심적 휴머니즘(Umanesimo Cristocentrico)’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앞장서서 실천한 인물 중 한 사람이 빈센트 드 폴 성인이다. 빈센트 성인은 17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영성가 중 한 사람으로 프랑스 가톨릭교회 개혁의 선봉자며 정치사상가기도 했던 피에르 드 베륄(Pierre de Brulle, 1575~1629) 추기경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 시기 프랑스 교회를 규정하고, 빈센트 성인을 정의하는 핵심적인 말이 ‘그리스도 중심적 휴머니즘’이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자신과 다른 사람들 안에서 선교 활동의 근본 동력으로 구현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중세기 탁발수도회들이 부르짖었던 가난하고 힘없는 형제들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려는 움직임이 재소환되기 시작한 것이다.
빈센트 성인은 누구
빈센트 성인은 1581년 피레네 산맥을 등에 업은 프랑스 남부의 푸이(Pouy)에서 가난한 농부의 여섯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많은 식구를 위해 고생하는 부모를 도와 양을 치고, 소와 돼지를 치는 일을 했다. 닥스(Dax)의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문법과 라틴어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 거기서 사도직과 사제 성소를 발견하고, 수도회 삭발례를 받았다. 16살에 툴루즈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1600년 19살에 사제품을 받았다. 재속 사제로 있다가 ‘거룩한 성체 동반자회’에 들어갔다. 1604년 학업을 마치고, 이듬해 마르세유에서 나르본으로 배를 타고 가던 중 해적들에게 붙잡혀 튀니지에 노예로 팔려 갔다. 그를 노예로 산 주인을 그리스도인으로 회개시키고, 2년 후에 풀려나 프랑스로 돌아왔다. 얼마 후, 앙리 4세의 첫 왕비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Marguerite de Valois, 1553~1615)의 요청으로 왕실 교목 및 자선 담당 사제로 갔으나, 몸이 아파 클리시(Clichy)에서 치료를 받던 중 마음이 세상의 것에서 멀어지기 시작했고,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교리를 가르치는 데서 기쁨을 얻기 시작했다. 그의 영적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친 프랑수아 드 살(Francis de Sales,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을 만난 것도 이때다.
1613년, 곤디(1581~1662) 후작의 요청으로 그의 자녀들을 위한 가정교사가 됐고, 1617년에는 그의 영지인 폴빌(Folleville)에서 일하는 소작인들의 사목자로 고용됐다. 폴빌에서 죽음을 앞둔 한 노인의 총고백을 들으며 가난한 이들의 영적 빈곤을 목격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1625년 농민들의 영적 상태를 개선하고자 농촌 사도직을 전문으로 하는 성직자 단체를 설립했다. 라자리스트라고 부르게 될 첫 번째 선교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라자리스트의 많은 회원이 사제가 되면서 선교의 못자리를 형성했고, 첫 번째 라자리스트가 1648년부터 마다가스카르로 파견되었다. 또 그 시기(1617)에 샤띠용 레 동브(Chtillon-les-Dombes)라는 가난한 마을에서 잠시 본당 신부로 있었는데, 거기서 쫓겨나고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며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볼 지속적인 봉사 단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사랑의 여성 동반자회’(1617)를 설립했다. 이 회는 훗날 파리에서 루이즈 드 마리약(Louise de Marillac, 1591~1660)의 지도하에서 ‘성 빈센트 드 폴의 사랑의 딸회’(1630)가 된다.
빈센트의 자선과 약자들을 위한 지원 활동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부자들에게도 상대적인 빈곤과 질병이 있음을 간파한 성인의 활동은 프랑스 왕 루이 13세가 자문관으로 선택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곧 왕궁을 떠나 가난한 사람들 곁으로 갔다. 파리에서 30년 종교 전쟁의 희생자들을 선두에서 도왔고, 거룩한 성체 동반자회 회원으로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중재 요청에도 응했다. 하지만 얀세니즘에는 반대했다. 1660년 80세의 일기로 생을 마칠 때까지, 그는 1600년대 가톨릭교회 사랑의 가장 중요한 혁명가가 되어 사랑의 불꽃을 태웠다.
당대 최고의 아카데미 회원
소개하는 작품은 자코모 조볼리(Giacomo Zoboli, 1681~1767)가 그린 ‘성 빈센트 드 폴의 설교’이다. 이탈리아 북부 모데나 지방 출신인 조볼리는 일찌감치 고향에서 수습기를 마친 후, 스트린가(Francesco Stringa, 1635~1709)와 함께 모데나의 두칼레궁(Palazzo Ducale di Modena) 프레스코화 작업을 했다. 1709년 볼로냐를 거쳐, 1712/1713년 로마로 이주했다. 1718년 교황청 판테온 명인 아카데미 회원이 됐고, 1725년에는 성 루카 국립 아카데미 회원으로 활동했다. 둘 다 최고 명인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당대 최고의 아카데미였다. 클레멘스 12세 교황의 조카, 네리 마리아 코르시니 추기경의 보호 아래서 로마, 피렌체, 브레샤를 오가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1767년 86세를 일기로 로마에서 사망했다.
그림 속으로
이 작품은 1737년, 클레멘스 12세 교황에 의한 빈센트 드 폴의 시성을 기념해 그렸다. 1885년 레오 13세 교황은 빈센트 성인을 모든 애덕 활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17세기 말부터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빈센트를 그린 화가는 참으로 많았다. 종교 개혁과 종교 전쟁의 안방이 된 유럽에서 17세기 진정한 혁명적 행동가인 그에게 붓으로 헌정한 것이다.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누구나’ 지닌 ‘빈곤’을 통찰한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자극합니다(Charitas Christi urget nos)”라는 말씀을 모토로 17세기 가톨릭교회에 내적 충격을 가했다. 그의 애덕 활동은 설교에서부터 시작했다.
작품 속에서도 보듯이, 그가 설교한 곳은 시골 마을이고 농부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사이지만, 와서 듣는 사람은 ‘누구나’였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하나하나 진지하게 살펴보기를 권한다. 어른이건 아이건, 부자건 빈자건, 성한 사람이건 아픈 사람이건, 하느님 사랑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이 그를 향해 있다. 그가 백성들에게 준 것은 오로지 십자가, 그 희망의 빛을 가난한 사람과 죄인들을 향해 비추어 주었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49) 자크 루이 다비드의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프랑스 혁명의 폭풍 전야에 그린 로마 영웅사, 신고전주의를 열다
- 자크 루이 다비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1784년), 유화, 루브르, 파리.
1700년대에 들어오면서, 유럽은 계몽주의 사상을 근간으로 혁명의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아시아의 이슬람, 인도-중국권의 여러 문명을 추월하며 격차를 벌렸고, 르네상스 시대부터 이어오던 절대 왕정이 점차 주저앉기 시작했다. 근대를 완성하는 새로운 물결이 온 유럽을 조용히 휩쓸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루이 14세에서 정점을 찍었던 부르봉 왕조가 내리막길을 걷더니 루이 16세에 이르러 결국 프랑스 대혁명으로 붕괴하였다. 영국은 하노버 왕조의 조지 1세 이후 입헌군주제가 정착되고, 산업 혁명으로 증기 기관 등 눈부신 기술 혁신이 국력을 신장시켰다. 물론 그 안에서도 새로운 사회 문제가 발생했다. 독일은 이름뿐인 신성 로마 제국 아래서 계속해서 분열을 거듭하다가 북방의 프로이센이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며 프리드리히 대왕의 치세하에서 새로운 성장을 시작하였다.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2세 치하에서 아시아의 정체성을 버리고 유럽의 정체성을 거머쥐며 서구화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서 폴란드는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의해 세 조각으로 찢겨 지도상에서 사라지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이 시기, 유럽은 전쟁도 잦았다. 스페인은 왕위 쟁탈전을, 오스트리아 역시 왕위 계승 전쟁에 이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와 프로이센이 벌인 ‘7년 전쟁’이 연달아 일어났다. 7년 전쟁은 당사자인 두 나라에 그치지 않았다. 유럽의 거의 모든 열강이 참여하는 유럽 전쟁의 양상을 띠게 되면서, 오스트리아-프랑스-작센-스웨덴-러시아가 동맹을 맺어 프로이센-하노버-영국의 연합에 맞섰다. 그들의 식민지가 있던 아메리카와 인도에까지 퍼지면서, 세계대전 급의 대규모 전쟁으로 바뀌었다. 예컨대 영국이 인도 벵골 지방을 침공하려고 하자 그간 영국의 식민지로 있던 무굴 제국이 프랑스의 지지를 받으며, 이를 저지하고 나섰다. 원래부터 앙숙인 영국과 프랑스가 인도에서 부딪친 것이다. 이 둘은 여기서만 부딪친 것이 아니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부딪쳤다. 프렌치-인디언 전쟁이 그것이다. 카리브 해의 섬, 필리핀, 아프리카 해안을 무대로도 부딪쳤다. 결과는 프로이센-하노버-영국 팀이 우세하면서, 세계 정치 무대의 판도를 바꾸었다. 프로이센은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확보하고,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기초를 닦았다.
프랑스 혁명과 구체제로 여겨진 가톨릭교회
18세기 유럽의 이런 정치 구도 속에서 교회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프랑스의 상황이었다. 게다가 언급한 여러 전쟁이 중요한 것은 미국의 독립 전쟁과 프랑스 혁명에 여러 면에서 원인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프랑스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1714), 미국 독립 전쟁(1775~1783) 등 대혁명 전까지 여섯 차례의 전쟁에 참여했고, 결과적으로 국익에 전혀 보탬이 되지 못했을뿐더러 국가 재정만 낭비한 셈이었다. 루이 14세(재위 1643~1715년) 말년에 시작된 국가 재정의 위기는 이후 더 심각해지고 만성적으로 되어갔고, 그것이 루이 16세까지 이어졌다. 거기에 더해 불평등한 사회 체제에서부터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목걸이 사건에 이르기까지 혁명으로 가는 길은 거듭 확고해지고 있었다.
그 길목에서 교회도 ‘앙시앵 레짐(Ancien Rgime, 구체제)’의 하나로 살아남기 힘들었다. 당시 프랑스는 자본가 계급이 부상하고, 계몽주의와 미국 독립 혁명의 여파로 자유 의식이 고취된 상황에서 심각한 경제 불황으로 인구의 절대다수(98%)를 차지하던 평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해 있었다. 1789년 대혁명이 일어나던 해에도 유례없는 흉작으로 농민들의 불안이 가중되어 있었다. 거기에 그간 부와 권력을 누리던 인구의 2%밖에 되지 않던 성직자와 귀족을 제치고 사회의 주도층이 되길 바라던 신흥 부호 세력이 있었다. 의사, 변호사, 사업가 등 전문적인 지식을 통해 부를 축적한 신흥 부르주아 계급으로 계몽주의 사상에 깊이 경도되어 있었다. 노동자, 빈농, 인민으로 분류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도 나름의 동기와 의지로 혁명의 정당성을 부르짖기 시작했다.
프랑스 혁명의 과녁은 봉건 왕조를 겨냥하는 동시에, 가톨릭교회를 향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앙시앵 레짐의 상징이 된 가톨릭교회를 습격하고 성상을 파괴했다. 수많은 성직자와 수도자가 희생당하는 것은 물론, 파리와 인근 지역 대성당의 조각상 중에서 구약의 다윗이나 솔로몬처럼 왕관을 쓴 예언자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모두 프랑스의 왕들로 알고 부수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사람 키 높이 정도에 서 있던 대부분 작품도 훼손되었다.
오늘 소개하는 작품은 바로 그 혁명을 앞둔, 폭풍 전야에서, 혁명의 정당성을 상징하는 신고전주의의 대표적인 작품이자, 혁명가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 되었던 작품이다.
근대 회화의 선구자
작가는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다. 대혁명이 일어나기 5년 전인 1784년에 그린 회화 작품이다. 그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작품이고, 근대 회화의 선구자로 만든 작품이다.
파리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던 그는 처음에는 로코코 스타일을 따랐으나, 1774년 프랑스에서 건축, 미술, 조각 분야의 뛰어난 학생에게 주는 로마 대상(Prix de Rome)을 받으며, 로마로 유학한 이후 고전적인 엄숙함으로 바뀌었다. 도덕적인 면에서 그 시기 프랑스에 불어닥친 정치 풍조와도 맞았다.
로마 유학 이후, 그는 역사화를 주로 그리면서 고전주의를 이끌었고, 근대 프랑스 회화에서 신고전주의의 시조가 되었다. 1780~1789년 그는 앙시앵 레짐의 프랑스에서 혁명의 당위성을 고취하는 그림으로 대혁명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영광의 추락을 의미하는 ‘벨리사리우스의 구걸’(1781), ‘소크라테스의 죽음’(1787) 등 당시 프랑스에서 예술 작품으로 공화정을 지지하던 독보적인 화가였다. 혁명 시기에는 문화재 보호에 앞장서기도 했다.
대혁명 이후 나폴레옹 1세의 정치 체제에 협력하며, 나폴레옹의 궁정 화가가 되어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그리기도 했다. 후에 나폴레옹이 실각하자 자신의 아틀리에와 중요한 몇 개의 작품을 친구에게 맡기고, 스웨덴, 로마, 브뤼셀 등으로 망명했으나,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초대에는 거절했다. 1817년 이후 브뤼셀에서 작품 활동을 재개했고, 1824년에는 전시회를 열어 수익금을 자선단체에 기부하기도 했다. 같은 해에 파리에서도 전시회를 열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듬해(1825) 12월, 잠자듯 조용히 이승을 떠났다.
그림 속으로
그림의 모델은 영국 화가 가빈 해밀톤(Gavin Hamilton)이 그린 ‘브루투스의 맹세’(1781)이다. 이 시기에 주로 그렸던 주제답게 배경은 고대 로마에 전해오는 이야기다.
고대 로마의 세 번째 왕 툴루스 호스틸리우스(Tullo Ostilio, 기원전 673~641년)가 통치하던 시절, 로마와 알바 론가가 전쟁을 앞두고 있었다. 양측은 대규모 전쟁보다는 각 진영의 대표를 뽑아 승부를 가리기로 했다. 국가를 대표하여, 국가를 위해, 로마에서는 호라티우스 3형제가, 알바 론가에서는 쿠리아티우스 3형제가 대표로 선발되었다.
싸움은 힘겨운 격투 끝에, 쿠리아티우스 3형제는 모두 죽고, 호라티우스 3형제 중 하나가 살아남아 로마에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그림은 고대 로마의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Titus Livius, 기원전 59~서기 17년)의 「로마사」와 피에르 코르네유(Pierre Corneille, 1606~1684)의 「호라티우스 전설」을 토대로 그렸다. 칼을 들고 있는 아버지 앞에서 호라티우스 3형제가 일렬로 서서 로마식으로 엄숙한 맹세를 하고 있다. 이들 뒤에는 호라티우스가의 여인들이 있다. 이 중 여동생 카밀라는 쿠리아티우스가의 한 남자와 약혼한 상태였고, 약혼자를 잃게 될까 걱정이 된 카밀라가 오빠들에게 항의하자, 큰오빠는 카밀라를 죽였다.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잘한 일이라며 아들을 칭찬했다. 흰옷을 입고 실의에 빠진 여인이 카밀라다. 검은 옷을 입은 며느리는 자식들을 감싸 안고, 가운데 여인은 국가를 위해 희생되는 가문의 이 기막힌 상황에 실신한 듯 의자에 기대 있다.
건물은 반원형의 아치와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도리아식 기둥으로 인해 전형적인 로마 양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형제와 아버지의 모습은 엄숙하고 결연하다. 이들의 근육과 행동은 강한 색으로 표현되어 역동적이지만, 여인들은 밝고 연한 색으로 실의에 빠진 심리 상태에 집중했다. 사실적인 감정, 형식의 단순함, 영웅적인 주제를 강조한 점 등이 전형적인 신고전주의 스타일로 간주되어 이후 미술사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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