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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봄바람이 라일락 향기를 품다
김 선 구
4월이 되니 나뭇가지 끝마다 신록이 움트는 모습이 역역하다. 벗 꽃들이 화사한 얼굴로 마음 것 자태를 뽐내고,
푸릇푸릇 잡초들이 새싹을 틔우는 푸른 들판에도 살포시 봄바람이 자태를 드러낸다. 봄기운이 온 누리를 축복
하는 뜻 기지개를 켜며 다가온다. 그러나 영국의 시인 T S 엘리엇은 「사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다. 한
겨울 얼어붙었던 땅에서 라일락꽃을 피우라니 잔인한 요구가 아닌가?
독일 땅에서도 4월은 봄을 찬미하기에 아직 이른 것 같았다. 이름 모를 꽃들이 곱게 피어나는 모습은 우리나라
와 같았지만 때 아닌 눈 설로 꽃잎을 무참히 짓눌러 버리는 잔인한 모습이었다. 스칸디나비아에서 발생한 한파가 남하하며 눈보라를 몰고 왔다. 눈과 꽃은 자연이 주는 선물이다. 눈을 통하여 꽃을 상상할 수 있고, 꽃을 통하여 눈송이를 그려 볼 수 있다. 그러나 꽃과 눈은 공존할 수 없는 경원의 대상이다. 차가운 눈덩이에 짓눌려 초라해진 꽃송이의 모습은 심술이 궂은 마녀의 행패를 참아내는 가련한 여인처럼 보였다.
어느 해였던가? 나의 학생 중 한 사람인 D가 경찰에 구속되는 날도 4월이었다. 학생이라 했지만 그는 나와
연배가 비슷한 만학도였다. 그리고 이웃 마을 농협조합의 현직 조합장이었다. 그 때 우리학과에서는 직장인
들에게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산업체 특별과정을 야간에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이러한
관계로 그가 우리 학과에 입학하여 만학의 정렬을 불태우고 있었다. 구속 수감된 그의 모습이 눈서리 맞아
초췌해진 꽃송이와 다름이 없었다. 4월이 잔인함을 드러 내는 뜻했다.
당시 나는 학과장의 소임을 맡고 있어서 학생의 신상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걱정해야 할 것은 그의
학업이 중도에서 포기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정상적으로 졸업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급했다.
서둘러 학과 교수들 연명으로 진정서를 작성하여 검찰에 제출하였다. D가 학생 신분이므로 학업에는 지장이
없도록 선처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별다른 효험이 없었다. 그 때부터 나는 다른 방도로 그 학생의 구명
을 위하여 애쓰면서 사건의 내용을 상세히 알게 되었다.
D는 조합장을 두 번이나 연임할 정도로 지역민들의 신임이 두터웠다. 두 번째 조합장 선거가 끝나자 낙선한
편에서 그를 음해하기 시작했다. 전직조합장 시절에 있었던 부정한 사례들을 모아 검찰에 고발 하였다. 그 주
요내용이 판공비의 부정 착복이었다. 당시에는 카-드 결재가 일반화 되지 않았다. 따라서 조합을 방문한 손님
을 접대 할 때 조합장 자신이 식비를 선불하고 식당에서 발행해준 영수증을 첩부하여 판공비에서 식비를 지
불 받았다. 이것이 고소장에는 개인이 부정 착복한 것으로 둔갑하여 고발되었다.
검찰의 지시에 따라 먼저 경찰에서 수사가 이루어졌으나 무혐의 처리되었다. 그러나 검찰에서 잇따라 재수사
지시가 내려오자 경찰에서 그를 구속하기에 이르렀다. D의 집안 식구들이 화들짝 놀랬다. 부랴부랴 변호사를
선임하여 사태해결을 의뢰 하였다. 그러나 변호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변호사 비용을 다소
깎아 달라고 요청하였기 때문이었다. 변호사 사무실의 사무장이란 사람이 찾아와서 깎았던 비용까지 다 지불
받아서야 변호사가 경찰서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수습 한다는 얘기가 “빨리 조합장직 사퇴서를 제출하라”
“그러면 곧 석방조치를 내리게 해 주겠다“고 하였다. 변호사의 지시 데로 그는 조합장직을 사퇴하고 구속에서
풀려났다. 변호사가 해 준일은 거기까지였다. 비용 이천만원을 지불하고 조합장직을 잃었다. 덕택에 대학의
학사과정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 때 까지만 해도 나는 법조인을 존경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법은 약자의 편이며 억울한 사람을 보호
해 주는 방패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태의 진행과정을 지켜보면서 이 나라의 법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검찰은 범죄를 만들어 내는 조직처럼 보였다. 훗날 D의 진술내용이다. 「검찰에서
조서를 꾸민다하여 불려갔다. 조서 담당자가 옆에 앉아 있으라고 하고는 말 한마디 없이 종일 기다리게 하였다.
초조한 마음과 억울한 심정이 겹쳐 녹초가 되었다. 밤이 이슥하여 10시경이 되어서야 조서 내용을 읽어보고
서명하라고 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자세히 읽어보려고 하니 빨리 서두르라고 다구 쳤다. 계획적으로 범법자로
만들려는 처사처럼 느껴졌다.」
그의 범죄는 사실로 굳어졌다. 사태가 불리해지자 경리를 담당했던 직원도 조합장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고
진술했다. 같이 근무했던 동료직원들로 부터도 불리한 진술들이 이어졌다. D의 항변은 반복되었지만 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을 거치면서 형량이 확정되었다. 그는 변호사를 선임할 여력이 없었다. 여러 곳에서 유능한 변
호사를 소개해 주었지만 비용을 부담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모두 외면하였다. 우리는 마을 주민들의
협조를 얻어 탄원서를 작성하여 제출하기도 하였고, 식당을 순회하면서 영수증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서명도 받아 제출하였다. 그러나 그는 최종적으로 2년 징역에 2년 집행유예라는 무거운 형량을 언도를 받았다.
조합장 직에서 추락하여 그는 초라한 농부로 전락하였다. 비록 구속은 면했지만 공민권이 박탈된 상태였다.
지역 주민들이 그의 억울함을 동정하고 있었다. 다시 조합장 선거에 출마할 수만 있다면 당선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법이라는 울타리 속에 갇혀 주권을 행사할 수 없는 처지였다. 몇 번의 조합장 선거를 지켜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야 했다. 황무지 같은 동토의 땅에서 긴 겨울을 보내었다. 10여 년간 인고의 세월을 흘려
보냈다.
지난 3월 단위 협동조합장 선거가 전 국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때 D도 옛 근무처였던 S농협의 조합장 후보로
출마하였다. 그리고 조합원들에게 명예회복과 봉사의 기회를 줄것을 호소하였다. 개표결과 60%에 달하는 압도
적인 득표로 당선되었다. 얼었던 땅이 풀리기 시작하였다. 긴 겨울을 이겨내고 꽃을 피우는 새봄을 맞이하였다. 황무지에서 라일락을 키워내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이제 잔인했던 4월은 사라졌다.
며칠 전 조합장 취임식이 있었다. 많은 하객들이 운집한 가운데 D가 조합장으로서 단상에 올라섰다. 그리고
축하객들을 향하여 무릎을 끌고 큰 절을 올렸다. 이어서 한마디 했다. 「명예를 회복 시켜 준 조합원 여러분
감사합니다. 불행했던 지난날의 기억을 잊어버리고 조합원 여러분을 위하여 헌신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4월 따스한 햇살과 함께 봄바람이 불었다. 라일락 향기를 담뿍 품은 바람이었다.(2015. 4. 4)
첫댓글 원래 수수꽃다리라고 불리었던 꽃이 미국까지 가서 개량된 뒤 라일락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들어왔다지요?
때가 되면 향기를 내뿜는 라일락처럼 사람들도 은은한 기품을 지녔으면 좋겠습니다.
와신상담 그 조합장 명예회복 참으로 다행한 일이네요 라일락 향기와 같이 멋진 조합장 될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