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철원군 대마리의 백마고지로 들어가는 비무장지대 초입의 팻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대비하라.”
4세기 로마 작가 푸블리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의 경구(Si vis pacem, para bellum.)다. 그런데 수많은 전쟁 중에서도 가장 큰 전쟁은 역사전쟁이다. 역사는 한 민족, 한 국가가 이루어 온 모든 것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역사전쟁에서 패배한다는 것은 오늘날까지 그 민족이 이룬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1863~1952)는 ‘역사를 잊어버린 자, 역사의 파고에 휩쓸려가리라.’고 했다. 지금 한,중,일 동북아를 중심으로 영토를 빌미삼은 갈등과 충돌 역시 그 본질은 역사전쟁, 문화전쟁이다.”
“오늘 우리의 삶은 과거 역사에 바탕을 두고 있다. 또 지금 우리의 발걸음에 따라 미래의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에 역사를 바르게 아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다. 과거가 단절되고 왜곡되어 있으면 과거의 소산인 현재의 역사의식도 뒤틀리고, 미래를 보는 올바른 시각도 가질 수 없다. 역사란 문명 진화의 총체이다. 오늘의 우리는 과거 역사가 만든 작품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역사가 E. H. 카아가 말했듯이 “과거는 죽은 과거가 아니라 아직도 현재 속에 살아 있는 과거”이며, 그 때문에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인 것이다. 과거와 현재가 소통될 때 비로소 우리는 다가오는 모든 변화에 대비하고 밝은 미래를 열 수 있다. 미래를 구축할 수 있는 기반은 올바른 역사의식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자식을 낳아놓고서 성姓씨를 가르쳐주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였던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읽게 하되 어릴 때부터 읽게 할 것이며, 역사를 배우게 하되 늙어 죽을 때까지 배우게 할 것이다.’라고 역사교육을 강조했다. 또 고려 말의 행촌杏村 이암李?(1297-1364)은 ‘나라가 몸이라면 역사는 정신과 같다(國猶形 史猶魂)’고 하였다. 정신이 없으면 몸이 어떻게 보존될 수 있겠는가? 국가와 민족을 소생시키는 깨어 있는 정신을 위해 역사를 배워야, 그것도 바르게 배워야한다고 했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정신이 없는 민족이다.”
고려 공민왕 때 지금의 국무총리 자리에 있었던 행촌 이암(杏村 李灸,1297~1364) 선생이 한민족에게 전하는 역사의 유언 과 같은 단군세기檀君世紀 서문에 우리 한민족의 정신문화 역사관의 모든 게 다 들어있다. 단군세기檀君世紀 서문은 천고의 대명문이다. 팔만대장경 경문보다, 사서삼경 경문보다, 주역의 경문보다도 단군세기 서문이 더 놀라운 이 우주 정상의 진리의 근본 틀을 알려주고 있다. 서문을 보면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을 하고 있다.
위국지도爲國之道가 막선어사기莫先於士氣하고, 선비들의 사기士氣를 높이려면, 막급어사학莫急於史學은 하야何也요. 나라를 위한 길은 선비들의 사기를 높이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사학史學이 불명즉不明則 사기士氣가 부진즉국본不振則國本이 요의搖矣오. 정법政法이 기의岐矣니라.
역사학이 명료하지 못하면 즉, 역사가 왜곡되어 전해지면 선비들의 기개, 사기士氣가 고양 되지 못하고, 나라의 근본이 흔들린다는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법도가 혼탁해진다는 것이다. 사리사욕을 채우는 쪽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언론과 사법부와 모피아, 기타 공무원들의 현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한국과 중국,일본 3국의 역사 성립 주장을 보면, 일본은 국가 성립사 1,300년을 두 배로 잡아 늘려서 2,600년이라고 하고, 중국은 하상주 단대공정(斷代工程)을 통해 황제헌원(BCE 2692~ BCE 2592)과 염제신농(BCE 3218~ BCE 3078)씨는 물론 5500년 전, 한민족의 조상 태호복희(BCE 3528~ BCE 3413)씨까지 중국의 조상으로 다 가져갔다.
중국 한족 문화권과는 전혀 색깔이 다른 5천년 전에서 9천년 전에 이르는 동북아의 시원문명 홍산문화까지도 중화문명권에 포함시켜 본래 이 문명의 주인인 고구려, 발해, 그 이전의 단군조선 역사까지 중국사로 흡수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이 왜곡한 우리 역사의 결론은 ‘대한민국의 한강 북쪽은 한사군에 의한 중국의 식민지로, 남쪽은 임나일본부에 의한 일본의 식민지 역사로 시작되었으므로 한국의 역사는 청동기 역사로 봐도 기껏해야 한 2,700년, 3천년을 넘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한,중,일 3국, 한자문화권인 한국과 중국, 일본 일본의 ‘기원紀元은 2,600년이다. 기겡와 니센록뺘꾸넨이다.’ 물론 고대로부터 보면 2,600년이라는 시간대가 맞지만 일본이라는 국가가 성립된 것은 친정집 백제가 망하고 난 10년 뒤, 670년이다. 일본이라는 국가 성립사 1,300년을 두 배로 잡아 늘려서 2,600년이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것이다. 그러면 중국은 몇 년인가?
중국사를 들어가 보면 전통적으로 신화, 전설, 왕조시대, 이렇게 셋으로 나눠서 기술하고 있다. 신화, 전설은 삼황오제(三皇五帝) 시대다. 문제는 삼황(三皇) 시대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황皇과 제帝를 따서 중국사 최초로 황제(皇帝) 자리에 오른 사람이 약 2,200년 전 진시황이다. 진나라 시황제가 처음 황제의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그들은 역사를 기록할 때 앞에 있는 삼황(三皇)과 삼제(三帝)는 쓸 수가 없었다. 왜? 그것은 동방 한민족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교의 경전인 사서오경[四書五經]《논어》,《맹자》,《중용》,《대학》과 다섯 가지 경서인《시경》,《서경》,《주역》,《예기》,《춘추》에 나오는 유가의 역사관을 보면, 항상 ‘요순우탕문무주공(堯舜禹湯文武周公)’이다. 요堯임금의 당(唐)나라, 그다음에 순舜임금의 우(虞)나라, 그리고 하상주(夏商周), 하夏나라 우(禹)임금, 상商나라 탕(湯)임금, 그리고 주周나라를 연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이다. 그러던 중국이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야, 우리의 역사, 국가 성립사는 어디부터냐?’하는 걸 묻기 시작했다.
그래서 1996년부터 2000년까지 4년 동안 하상주 단대공정(斷代工程)을 했다. 역사학, 고고학, 천문학 등의 연구 방법을 종합하여 서기전 841년 이전의 하夏, 상商, 주周 시대의 연표年表를 확정하고, 그동안 전설로 여겨 온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 역사를 실제 중국 고대 왕조사로 만든 것이다. 그러고서 요순(堯舜)시대를 물고 들어가 ‘이것이 실제 중국의 고대 왕조국가 시대다.’라고 했는데, 그런 역사 개혁을 하면서 자신감이 붙었다.
사마천『사기』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4,700년 전의 황제헌원이 우리 중국 한족漢族의 시조다.’라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 500년 이전 동방 배달국의 성인(聖人)인 ‘동양 의학의 아버지, 농경의 아버지, 시장문화의 아버지인 염제신농(BCE 3218 ~ BCE 3078)씨도 중국 한족의 조상’이라고 했다. 또 여기서 더 비약을 해서 5,500년 전, 동방 문화의 원 주인공이던 우리 한민족의 조상 태호복희(BCE 3528 ~ BCE3413)씨. 지금 우리나라 태극기의 ‘팔괘를 처음 그린 태호복희씨도 중국의 조상이다.’라고 했다.
중국 하남성 정주시에서는‘중국 인민의 역사의식을 개조해야 한다! 우리 중국이 지구촌 문명의 중심이다! 중화문명! 염제신농씨와 황제헌원이 우리의 조상이다!’라고, 문화혁명 이후 이것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83년도에 중국 문명사에서 천지가 개벽하는 대사건이 일어난다. 만리장성 밖은 동이족들이 사는 곳이라고 히던 동북쪽 우하량에서 길이가 150미터 되는 동북아 최초의 피라미드, 소위 우하량의 총塚(무덤)·묘廟(여신을 섬긴 사원)·단壇(제천단)이 발굴되었다.
그때 당시 중국과 한국에서 대대적인 신문 보도가 있었는데 ‘신화, 전설인 삼황오제시대의 문화유적이 나왔다.’고 했다. 만주지역까지 발굴해 보니 소위 홍산문화에서 동북아의 신석기 또는 옥문화가 7천년을 넘어 8천년, 9천년 전 것이 나온 것이다. 중국의 황하문명보다도 더 앞선 문명인 것이다. 그래 중국 정부와 역사학자들이 큰 충격을 받고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고민을 했다. 그것은 사실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 한족 문화와는 전혀 색깔이 다른 것이다.
미국의 고고학자 넬슨 교수는 ‘동북아 중국의 홍산문화, 소위 우하량을 중심으로 해서 5천년 전에서 9천년 전에 이르는 동북아의 시원문명 역사의 현장이 드러났는데, 이것은 중국의 한족 문화권과는 다르다.’고 지적을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중국의 젊은 소장파 학자들은 ‘중국 문화는 만리장성을 기준으로 해서 남방문화와 북방문화, 이런 전혀 다른 2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하면서‘ 이 모든 문화는 우리 중화문명권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고서 본래 이 문명의 주인인 우리 동이족의 문명을 해체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고구려, 발해, 그 이전의 단군조선 역사까지 중국사로 흡수하고 있다.
최근 중국의 역사학회에서 ‘중국의 문헌이나 학술서적에서 일체 조선이라는 말을 없애자! 그걸 조선국이 아니라 조선현朝鮮縣이라고 일개 지방 이름으로 격하하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도 열려있는 정보화시대에 이런 학계의 정보가 그 문화의 주인공인 대한민국에는 전혀 전달되고 있지 않다.
중국은 그들이 말한 신화, 전설 시대의 역사 유적이 원형 그대로 드러났다면서 ‘중국이 세계 4대 문명의 원 뿌리, 근원되는 이 문명의 주인공이다. 이제 우리가 미국을 제치고 세계 경제와 군사력의 중심이 됨과 동시에 인류 문화와 역사의 본래 창조자로서 진정한 세계 일등 지도자, 문화민족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그게 아니다!
넬슨 교수가 중국 곽대순 같은 학자들이 쓴 논문을 영어로 번역을 했는데 거기에 주註를 붙였다. 홍산문화는 한반도, 대한의 역사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데, 중국학자들이 그것을 저 동아시아 또는 북아시아에서 온 거라고 에둘러 말함으로써, 그 역사의 주인공인 대한민국의 존재를 폄하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역사 해석을 하고 있다고 썼다. 그러면 우리 대한민국은 실제 역사의 성립이 언제부터인가?
중국과 일본이 왜곡한 우리 역사의 결론은 ‘한반도 북쪽은 중국의 식민지로, 남쪽은 일본의 식민지 역사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게 우리 대한민국의 교과서 내용이다. ‘한국의 역사는 청동기 역사로 봐도 기껏해야 한 2,700년, 3천년을 넘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틀을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일본이 가야에 임나일본부라는 식민지 통치본부를 세워놓고 한반도 남부의 신라, 가야, 백제를 다스렸다.’고 조작했다. 지금 국내에서는 어느정도 극복되었다고 하지만, 역사학자들이 쓴 책이나 논문에서는 극복되지 않고 있다. 일본 역사교과서 또한 임나일본부 역사가 사실인 것처럼 왜곡해 가르치고 있다.
『태백일사太白逸史』<고구려국본기>에 의하면 ‘본래 일본의 구주(九州, 큐우슈우)라는 땅은 저 북쪽에 있는 신라, 가야, 백제, 고구려 사람들이 와서 문화를 가르쳐 주고 개척한 곳이다. 구주(九州)는 본래 왜인이 대대로 살던 곳이 아니다(본비왜인세거지本非倭人世居地라).’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대마도는 두 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는데 그 이름이 본래 임나(任那)다. 그것을 삼가라(三加羅)로 나눠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통치했다.”고 했다.
단군조선은 삼신문화(三神文化)를 국가 통치 제도로 뿌리내려, 나라를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곧 한반도를 마한馬韓, 압록강의 북쪽을 진한辰韓, 그리고 요하 서쪽, 지금의 산동성이 있는 쪽을 번한番韓이라 하였다. 이게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다. 삼한三韓으로 나라의 국가 영토 경계를 나누어가지고 다스렸다는 것이다. 이 삼한三韓의 삼경 균형이 무너지는 날 고조선이 패망을 당한다는 것이다. 이게 고려사 김위제전(金謂磾傳)에도 나오고, 조선왕조 때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도 이 내용이 있다. 이 삼한(三韓)체제는 22대 색불루(BC 1285~ BC 1238) 단군 때부터 서서히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색불루 단군이 쿠데타로 권좌에 올라 도읍을 송화강 아사달에서 백악산 아사달로 옮기게 되면서 차츰 삼조선(三朝鮮) 체제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다 진조선(진한)의 44대 구물(BC 425~ BC 397) 단군 때에, 병권을 막조선(마한)과 번조선(번한)에 완전히 나눠줌으로써, 삼조선三朝鮮이 각각 독립된 국가로 운영되면서 삼한관경 체제가 완전히 무너졌다. 이 때 국호를 대부여로 바꾸었는데, 이는 한양조선의 고종황제가 국운을 살리기 위해서, 최후의 탈출구로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바꾼 것과 상황이 매우 흡사하다.
그러다가 47대 고열가 단군에 이르러 나라의 정사(政史)가 혼란에 빠지자, 임금이 왕위에서 스스로 물러나버렸다. 그래서 오가(五加)가 연정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6년 동안 이어졌다. 그런데 고열가 단군이 물러나기 1년 전인 BCE(기원전) 239년에, 해모수가 웅심산을 중심으로 북부여를 열었다. 그리고 이후 오가(五加)의 공화정을 접수하고 고조선의 국통을 계승하게 된다.
삼국유사에서 단군왕검이 1908세를 살았다고 한 기록은 무슨 뜻인가?
단군왕검이 나라를 삼한三韓으로 다스리면서 21세 소태(BC 1337~ BC 1286)단군 때, 쿠테타가 일어나 1048년 동안 나라의 수도를 유지했던 송화강 아사달에서 백악산 아사달로 수도를 옮기게 되는데, 44세 구물(BC 425~ BC 397) 단군 때는 수도를 장당경 아사달 시대로 옮겨가면서 나라 이름을 대부여大夫餘로 바꾼 것이다.
삼국유사에 보면 단군왕검이 1908세를 살았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의 진실은 수도 송화강 아사달 1048년 시대와 백악산 아사달 860년 시대를 합하면 이게 1908년이다. 단군조선은 44대 구물(BC 425~ BC 397) 단군의 대부여(大夫餘) 이후 마지막 47세 고열가(BC 295~ BC 238)단군까지가 188년이다. 그리고 대부여大夫餘는 BC 232년 해모수의 북부여北夫餘로 계승되고, 북부여는 다시 고구려(BC 58년)와 대진국(발해,AD 668년)으로 국통 맥이 이어진다.
춘추전국(春秋戰國)을 통일한 진(秦 : BCE 221 전국통일 ~ BCE 207 멸망)나라가 15년 만에 망하고 난 후, 한 고조 유방(劉邦)과 초패왕 항우(項羽)가 6년 동안 아주 피가 터지도록 싸운다. 결국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고 한(漢 : 전한 BCE 206~CE 8)제국을 열게 되는데, 그 7대 임금이 무제(武帝 : BCE 141~ BCE 87)다. 오늘의 사가들은 북쪽의 흉노를 굴복시킨 한 무제가 자신감을 얻어 동북방의 고조선을 쳐들어왔다, 그리하여 준왕(準王)을 몰아내고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그 자리에 식민지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한다. 마치 준왕이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무엇인가?
준왕은 고조선의 서쪽 날개였던 번조선(番朝鮮)의 부단군이었을 뿐이다. 또한 진조선(辰朝鮮)의 마지막 제왕인 고열가(古列加) 단군이 장수들의 거듭된 화란 속에 퇴위하여 고조선 본조시대가 마감(BCE 238년)된 것은, 찬적 위만(衛滿)이 번조선을 점거하여 스스로 왕위에 오르기(BCE 194년) 44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식민주의 사관에 물든 역사학계에서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라고 주장하고 있는 위만조선(衛滿朝鮮: BC 194년~ BC 108년) 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위만(재위 BCE 194~BCE 180)은 본래 중국 한족 출신으로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죽마고우였던 노관의 부하다. 중원을 평정한 한 고조는 여태후와 더불어 개국공신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이 때 연나라 왕 노관은 흉노로 달아나고, 위만은 조선인으로 변장한 뒤 부하 1천 명과 함께 왕검성에 와서 번조선의 준왕에게 거짓 투항을 했다. 이에 준왕은 덕으로써 그를 받아주고 서쪽 변경을 지키는 수비대 책임자로 임명까지 했다. 그러나 그 곳에서 한족 망명 집단을 이끌고 몰래 세력을 기른 위만은 이듬해 준왕을 배반하고 왕검성을 쳤다. 그리고 나라 이름은 그대로 둔 채 스스로 왕이 되었다(BCE 194).
『삼국유사』에서 말한 위만조선은 바로 우리 민족의 서쪽 영토였던 번조선의 한 모퉁이를 잠깐 강탈하여 지배했던 위만정권에 불과하다. 그런데 현 역사학계에서는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준왕을 잡아먹은 위만 같은 배은망덕한 자가 고조선의 정통을 계승하였다는 것이다.『사기』에도 분명히 위만을 연나라 사람[燕人]이라고 기록했을 뿐 아니라, 안정복의 『동사강목』에서는‘위만은 나라를 찬탈한 도적’이라 했고,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용은‘위만은 한 명의 강도에 불과하다[乃一强盜]’고 하였다. 이처럼 위만은 중국 한족의 인물로서, 한마디로 은혜를 원수로 갚은 배은망덕한 떠돌이 도적인 것이다.
위만정권은 손자 우거왕 때에 이르러 밖으로는 한 무제의 침입과 안으로는 지도층의 분열로 인해 결국 망하게 된다.(BCE 194~BCE 108). 한 무제는 그 여세를 몰아 고조선의 뒤를 이은 북부여로 쳐들어온다. 그런데 당시 북부여의 4대 고우루(高于婁) 단군은 워낙 심성이 유약하여 제대로 맞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중에 병사하고 만다. 그리하여 우리 조선 민족이 다 넘어가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하는데, 이를 지켜보고 있던 고조선 47대 고열가 단군의 후손 고두막한(高豆莫汗)이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한 무제의 군대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다.
중국 한 무제가 고두막한을 죽이려고 덤벼들었다가 참패를 당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마천의 기록을 보더라도, 결코 한나라가 승리한 전쟁이 아닌 패전인 것이다. 사마천(BCE 145년~ BCE 86년)은 그 전쟁의 목격자였음에도 “이로써 드디어 조선을 정벌하고 사군(四郡)으로 삼았다”라고만 적고, 사군의 개별적 이름도 적지 않았다.
사마천은 왜 한사군의 이름도 적어 놓지 않은 것일까? 한사군의 이름은 고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이 끝난 200여년 후에 반고(班固)가 편찬한 <한서(漢書)> ‘무제(武帝) 본기’에 처음 등장한다. 낙랑·임둔·현도·진번이란 명칭이 이때 나타나는 것이다. 전쟁의 목격자 사마천이 적지 않았던 이름을 200여년 후의 반고는 어떻게 적을 수 있었을까?
반고는 흉노 정벌에 나섰던 두헌(竇憲)을 따라 종군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중화(中華)사관이 강한 인물이었다. 이처럼 사마천의 <사기史記>와 반고의 <한서漢書>와 같은 고대 역사서가 의문투성이로 기록하고 있는 한사군을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확고하게 각인시킨 세력은 물론 일제 식민사학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국사 교과서에서는 한반도 내에 낙랑, 임둔, 진번, 현도의 한사군이 있었다고 일제에 의해 조작된 역사를 그대로 가르쳤고 한국인은 이것을 어린 시절부터 외우고 다녔다. 한국사의 시작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의도였다. 이를 한국 주류 사학계가 현재까지 정설로 떠받들자 중국은 ‘이게 웬 떡이냐’하고 동북공정에 그대로 차용해 ‘한강 이북은 중국사의 영토였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 무제가 패퇴한 대사건, 이것은 중국 역사상 최대의 수치였다. 중국 5천년 역사에서 당태종이 안시성에 와서 양만춘 장군한테 화살을 맞아 눈 빠진 것보다 더 부끄러운 사건이다. 그래서 중국의 역사가들과 국내 사대주의자들이 이 북부여 역사를 완전히 뿌리 뽑아 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민족 역사의 맥, 사통의 허리가 잘려버렸다. 그래서 국통 맥이 연결이 안 된다. 지금 역사학자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부여의 역사를 중국의 사료에 맞추어 꿰매고 있다. 그러니 너덜너덜하다.
이렇게 꿰매면 이런 작품이 나오고, 저렇게 꿰매면 저런 작품이 나오고, 전부 애꾸눈이처럼 찌그러져 버렸다. 그 결과가 예전에 방영했던 주몽이야기다. 이 드라마에서는 고주몽이 해모수의 아들로 나온다. 그게 다 중국 측 사료를 보고 만들어서 그렇다. 해모수와 주몽은 무려 120여년 이상 차이가 난다. 해모수는 북부여의 초대 단군이고 주몽은 6대 마지막 단군 고무서의 사위인데, 어떻게 주몽이 해모수의 아들이란 말인가!
「북부여기」상에 해모수 단군서부터 역대 단군들이 나오는데, 5대 단군 고두막한이 바로 동명성왕이다. 고두막한은 기원전 108년, 졸본(卒本)에서 나라 이름을 ‘북부여’에서 동방의 대광명이라는 뜻의 ‘동명(東明 : 동명부여, 또는 졸본부여)’이라 바꾸고 동명왕으로 즉위한다. 그리고 기원전 87년에는 북부여를 계승하여 조선 역사 부활의 푯대를 다시 세우니, 이분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이다. 그런데 이 역사가 다 말살되어 지금 고주몽이 동명왕으로 알려져 있다.
왕위에서 밀려난 해부루(解夫婁)가 국상 아란불과 함께 우수리강 지역의 가섭원(迦葉原) 땅에다 나라를 세우는데, 동쪽에 있는 부여라는 뜻으로 동부여(東夫餘)로 금와와 대소로 왕통이 이어졌다.
해부루는 북부여 4대 단군의 동생이다. 그리하여 고두막한이 북부여의 5대 고두막 단군이 되는데, 그때부터 북부여의 후기시대[後北夫餘]라고 한다. 북부여는 시조 해모수(解慕漱) 단군으로부터 6대 만인 고무서(高無胥) 단군 때에 막을 내린다. 그러면 세상에서 동명왕으로 잘못 알고 있는 고주몽은 어떤 인물인가? 그분은 고구려의 창업 시조이다.
원래 북부여의 마지막 단군인 6대 고무서 단군은 딸만 셋이었다. 그 둘째딸이 소서노(召西弩)인데, 고주몽과 혼인을 시켜 사위로 삼아 주몽으로 하여금 북부여를 계승토록 한다. 그리하여 고주몽이 북부여의 7대 단군이 되었다.
그 후 기원전 37년에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로 변경하여 고구려 700년 역사의 창업 시조가 된 것이다. 이것이 고조선이 멸망한 후 열국시대로 들어서는 과정이다. 북부여는 단군조선과 고구려를 이어주는 잃어버린 열국시대의 역사의 맥을 이어주는 고리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부여사를 잘 알아야 한다.
중국의 역사가가 100년 전에 중국을 알려면 상해를 가라. 그러나 그대가 5백년 전의 중국을 볼려면 북경을 보라. 자금성, 1천 년 전의 중국을 볼려면 서안, 장안을 보라. 그러나 5천년 전의 중국을 보려면 탁록을 가보라. 탁록이 황하문명의 원조인데 여기를 가보면 황제성이 있다. 황제헌원이 4,700년전에 다스렸던 그 성터가 지금도 그대로 있다. 그런데 그옆에 가보면 바로 치우천蚩尤泉이 있다.
배달국 14대 환웅桓熊, 치우천황(蚩尤天王,BC2706~ BC2598)과 함께 전쟁을 했던, 그 치우蚩尤가 동방의 대황제다. 천자다. 치우(蚩尤)는 옛동방의 古天子라고 중국 사서 주석에 있다. 전쟁을 했던 그 유적지가 지금도 그대로 있다. 강화도 마리산에는 초대 단군이 개국 50주년(BCE 2283)을 맞아 쌓은 제천단이 그대로 남아 있다.
배달국 14대 환웅桓熊, 치우천황(蚩尤天王,BC2706~ BC2598)과 함께 전쟁을 했던, 그 치우蚩尤가 동방의 대황제다. 천자다. 치우(蚩尤)는 옛동방의 古天子라고 중국 사서 주석에 있다. 전쟁을 했던 그 유적지가 지금도 그대로 있다. 강화도 마리산에는 초대 단군이 개국 50주년(BCE 2283)을 맞아 쌓은 제천단이 그대로 남아 있다.
우리가 중국 문명을 중심으로 보면, 지금 황하 양자강 남부에서는 대략 한 8천년 전에 유물이 나오고 있다. 자산(磁山)문화가 8천년에서 7,500년. 앙소(仰韶)문화가 7천에서 한 5천년 전 신석기 유적이 나오고 있고, 하모도(河姆渡) 문화가 한 7천년 전. 중국은 이 마가빈(馬家濱)이 7천이고, 대계(大溪)문화가 거기도 7천년에서 5천년. 제일 오래된 자산문화가 한 8천년인데, 만리장성 북쪽은 본래는 중국 사람들도 그것은 동이족의 문화라고 했다. 동방문화. 자신들 문화하고는 문화 양식이 다르다.
중국과 일제는 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만은 남겨 두었나?
김부식 (金富軾.1075-1151)이 쓴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철저하게 당唐나라의 입장에서 서술한 책으로 삼국사기의 서술 주체가 중국이고, 객체가 한국이다.
우리민족을 침략한 당나라 이세민을 “我唐太宗(우리 당태종)”이라고 칭하였다. 위징 등이 쓴 『수서(隋書)』에 이런 구절이 있다. “고구려(高句麗)가 교오불공(驕傲不恭)해서 제장토지(帝將討之)라.” 고구려가 교만하고, 오만하고, 공손하지 않아서 수양제가 장차 토벌을 하려고 했다는 내용을 삼국사기에는 고구려를 아(我)로 바꿔놓고는 "아(我)가 교오불공(驕傲不恭)해서, 제장帝將, 이걸 상장토지(上將討之)라.
우리나라의 역사를 쓰면서, 우리가 교만하고 오만해서 중국의 임금이 치려고 했다… 는 식으로 쓸 수가 있을까? 참으로 황당한 내용인 것이다. 또 하나 예를 들면, 신라 650년 진덕여왕 4년에 당나라 고종의 ‘영휘(永輝)’라는 연호를 처음 쓴 부분에 대해서도 주석을 달기를, “옛날에 법흥왕이 연호를 스스로 썼는데, 편방의 소국으로서 왜 연호를 쓰나? 당 태종이 꾸지람을 했는데도 연호를 고치지 않다가, 650년에 당나라 고종의 연호를 갖다 쓰니, 허물을 능히 잘 고쳤다고 할 수 있도다” 이런 식이다.
이것이 국보로 보존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의 역사서에 나오는 구절들이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사정이 이러하니 중국의 입장에서 쓰여진 사대주의 책이라고 비판받아도 피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이처럼 "김부식은 비아(非我)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묘청, 정지상 등이 고토 회복을 위한 발판으로 벌인 서경천도 운동을 벌였을 때, 김부식을 대표로 하는 집권층 유학자들이 이것을 권력 장악을 위한 음모라고 몰아붙였다.
유교를 국교로 신봉하는 조선은 개국 초 공자의 춘추와 주자의 자치통감 강목만 사필(史筆)로 여기고, 한민족의 고유사서들은 이단이라 하여 모조리 압수 소각하였다. 그의 열렬한 모화(慕華)정신은 사대사관의 전통이 되어 오늘날 우리 역사의 올바른 인식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통해서 존화사대주의 사상을 정립한 것이다. 그가 지은 삼국사기는 그 이후의 모든 역사왜곡의 기본 원전이 되었다.
첫댓글 역사적 진실을 왜곡된 중국사로 편입하려 했던 식민사관의 뿌리가 무엇인지 알게하는 통괘한 글 잘 읽었습니다.^^*
눈멀고 기막힌 현재를 바라보게 해서 고맙습니다.
네,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