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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11월 23일 거제도 고향 거남사(巨南祀) 처해당(處海堂)준공식 날 촬영.
https://www.youtube.co
m/watch?v=U-wLqZe5qRg
2017년에 drone 으로 촬영한 거제도 장목면 관포리 마을 전경에 닭섬이 맨 먼저 나온다..
경남 거제시 장목면 관포리 마을 위성사진
冠浦里 마을의 歷史
1592년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 장군은 지금의 舊永(구영)뒤를 蘇秦浦(소진포)라고 표현 하였고, 冠浦里[(관포리,갓개, 저포, 관포] - 本來(본래) 地形(지형)이 갓(這)처럼 생겼으므로, 갓개(這浦-저포)라고, 불렀다고 학글 學會(학회)가 밝혔다. 記錄(기록)에는 巨濟府邑誌(거제부읍지)에는 這浦(저포)라는 이름으로 河淸面(하청면) 坊里(방리)에 처음으로 이름이 올랐다.
本來(본래) 杜毛里(두모리)는 頭毛里(두모리)로 這浦里(저포리)는 冠浦里(관포리)로 동네 이름 바꾼 理由(이유)는 杜毛里(두모리) 住民(주민)들이 頭毛里(두모리)라는 이름으로 바꾸자 這浦(저포) 住民(주민)들이 冠浦里(관포리)로 바꾸었다고 한다. 理由(이유)는 머리털위에는 갓(冠(관)을 쓴다는 理由(이유)로 고쳤다고 한다. 우리 冠浦(관포) 마을 선조님들의 證言(증언)이다.
朝鮮朝(조선조)에 巨濟郡(거제군) 河淸面(하청면) 面長(면장)을 歷任(역임)하신 筆者(필자)의 曾祖父(증조부)님을 찾아 오신 郡守(군수)가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1895년 제26代(대) 高宗(고종) 37년에 地方官制改正(지방관제개정)에 依(의)하여, 郡(군)이 되어, 長木面(장목면), 外浦面(외포면), 一運面(일운면), 二運面(이운면), 屯德面(둔덕면), 西部面(서부면), 東部面(동부면), 沙等面(사등면), 河淸面(하청면), 延草面(연초면)의10개 面(면)을 管轄(관할) 할때 杜毛里(두모리)는 頭毛里(두모리)로 這浦里(저포리)는 冠浦里(관포리)로 바꾸었다.
거제군수가 杜毛(두모)를 頭毛(두모)로 하는데, 這浦(저포)의 同名(동명)을 어떻게 하여야 할지 諮問(자문)을 하시자, 曾祖父(증조부)님께서는 本來(본래) 這浦(포)는 음을 따서 "갓개" 라고 했으니, 갓 冠 字에 개 浦字로 冠浦(관포)로 바꾸었다고 先代(선대)에서 말씀 하신것을 父親(부친)께서 늘 말씀 하셨다.
▶경상남도(慶尙南道) 거제군읍지(巨濟郡邑誌) <서울대규장각(奎章閣) 소장(所藏)>에는
1899년 고종(高宗) 36년 광무(光武) 3년 5월 거제읍지(巨濟邑誌)에 기록(記錄) 하기를 장목면(長木面) 11방(坊)중에 장목(長木). 관포(冠浦). 하유(下柳). 저도(猪島). 송진(松眞) 황포(黃浦). 구영(舊永). 농소(農所). 궁농(宮農). 두모(頭毛).로 분류하고 있다.
1914년 行政區域(행정구역) 廢合時(폐합시)에 冠浦里(관포리)를 頭毛里(두모리)와 倂合(병합)하여 冠浦里(관포리)를 1區(구)로 頭毛里(두모리)를 2區(구)로 고쳐서 統營郡(통영군) 長木面(장목면)에 編入(편입)되었다. 그러다가 1953년 巨濟郡(거제군)이 復舊(복구)됨에 따라, 巨濟郡(거제군)에 編入(편입) 되었다가. 인구 증가에 따라 巨濟市(거제시)로 승격되어 거제시 장목면에 속한다.
◉▶冠浦里(관포리) <갓개, 관포, 저포,里(리)> 본래(本來) 거제군(巨濟郡) 장목면(長木面)의 지역(地域)으로, 지형(地形)이 갓 처럼 생겼으므로, 또는 관포(冠浦), 저포(這浦)라하였는데, 1914년 行政區域(행정구역) 廢合時(폐합시)에 杜毛里(두모리)를, 頭毛里(두모리)로, 這浦里(저포리)를 冠浦里(관포리)로 하여, 頭毛里(두모리)를 倂合(병합)하여, 冠浦里(관포리)라하고, 冠浦(관포)를 1區(1구)로, 頭毛(두모)를 2區(2구)로 하여, 統營郡(통영군) 長木面(장목면)에 편입되었다가, 1953년 거제군(巨濟郡)이 復舊(복구)되어 거제군(巨濟郡)에 편입(編入)되었다.
◉ 장목면지(長木面誌)를 쓴 작가는 우수개 소리라고 일축(一蹴) 하였는데, 타지(他地) 사람이 어떻게 우리 거제(巨濟) 고향(故鄕) 문화(文化)를 잘 아느냐? 거제(巨濟)가 고향(故鄕)인 사람의 말이 맞는지 따져볼 일이다.
◉▶1849년 己酉(기유=憲宗(헌종15)년에 발행(發行)한 戶籍(호적)에 頭毛里(두모리)의 地名(지명)이 나타나고 있는데 父親(부친)께서 말씀 하시기를 口傳(구전)에 의하면 인접 마을 杜毛(두모)를 頭毛里(두모리)라 表記(표기)하니, 증조부(曾祖父)님께서 동네 어른들과 의논하기를 “這浦里(저포리)를 ” 머리위에 “갓”을 쓴다는 것을 착상하여 “갓”은 머리를 눌린다는데서, 갓 冠(관) 개포(浦)자를 사용하여 갓개 즉, 冠浦(관포)라는 同名(동명)이 오늘날까지 傳來(전래)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관포리"는 1區(1구)로, “두모리”는 2區(2구)로, 面의(면) 行政上 (행정상) 地名(지명)으로 通用(통용) 되어왔다.
증조부(曾祖父)님께서는 거제부(巨濟府) 하청면(河淸面) 마지막 면장(面長)을 奉職(봉직)하시다가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자, 일제(日帝)의 攝政(섭정)을 排斥(배척)하고, 公職(공직)을 버리시고, 나라의 장래를 항상(恒常) 걱정하시면서 書藝(서예)와 通鑑(통감)을 읽으시면서 消日(소일)하시다가 1941년 辛巳年(신사년) 陰(음) 1월 7일에, 관포리(冠浦里) 4번지에서 세상(世上)을 떠나셨다고 조부(祖父)님께서 말씀하셨고 부친(父親)께서도 늘 말씀하셨다.
하청면장(河淸面長) 재임시(在任時)에는 거제(巨濟) 7개(個)면(面) 대표(代表)로, 高宗(고종) 皇帝(황제)을 두번이나 謁見(알현)하시면서 從前(종전)의 土地稅(토지세)를 번거로운 穀物(곡물), 代身(대신) 稅錢(세전)으로 내는 法(법)을 바꾸는등 巨濟郡(거제군) 政事(정사)에 中樞的(중추적)인 一翼(일익)을 擔當(담당)하셔서 世人(세인)들은 평소에 梁 直講(양 직강:정5품의 벼슬)을 追尊(추존:추앙하고 존경)하였으며 巨濟(거제) 郡守(군수)들이 赴任(부임)시에는 꼭 찾아와서 정사를 의논했다고 전한다.
필자(筆者)의 증조부님께서는 일제(日帝)의 내정간섭(內政干涉)에 회의(懷疑)를 품고 공직(公職)에서 사임(辭任)하시고, 通鑑(통감) 읽으시고, 시(詩)를 쓰시면서, 말년(末年)을 보내셨다고 하셨다. 증조부님께서 보시던 通鑑(통감)과 우리나라 최초(最初)의 언문(諺文)으로 된 옥편(玉篇)은 필자(筆者)가 물려 받아 보관 하고 있다. 이 옥편(玉篇)은 국어(國語) 국문학자(國文學者)들이 보고 연구(硏究) 해야 할 귀중(貴重)한 유산(遺産)인데, 한양(漢陽)을 두 번이나 가셔서 고종(高宗) 황제(皇帝)를 알현(謁見)하시고, 오실 때 서점(書店)에서 구입(購入)하신 것으로 옥편(玉篇)을 발행(發行)한 곳은 대구(大丘)로 기록 되어있다.
당시(當時) 증조부님께서는 下人(하인)한사람을 帶同(대동)하시고 熊川(웅천:지금의 진해)까지 나룻배를 타시고, 웅천(熊川)에서 말을 타시고 한양(漢陽)까지, 석달를 걸어서 두번이나 왕래 하시면서 받으신 勅命(칙명)과, 敎旨(교지)등, 친필(親筆)등이 많았는데, 鳳九(봉구)조부님께서 관리 부주의로 때로는, 손자(孫子)들이 자기차는 놀이로 없애 버렸다,고 양기생(梁己生) 부친(父親) 양두한(梁斗漢)아저씨께서 나에게 말씀 하셨다. 그러시면서 기념으로 증조부님의 사진 한 장을 주셨다.
筆者(필자)도 본 사실이지만 斗八(두팔) 伯父(백부)님 댁에 갔더니, 증조부(曾祖父)님께서 생전(生前)에 소중히 여기시던, 所藏品(소장품)을 벽지(壁紙)로, 문(門) 종이로 사용했었다. 특히나 아까운것은 교지(敎旨), 호적(戶籍),등을 문종이로 사용했던것을 필자(筆者)도 보았는데, 부친(父親)께서 못내 哀惜(애석)해 하시면서 항상 말씀 하셨다. 내가 어렸을때는 종이가 참으로 귀해서 일본(日本)잡지나 신문(新聞)을 쓰다 남은것으로 벽을 발랐고 1950년 이전에는 일본(日本) 잡지로 이후에는 영어(英語)로된 잡지며 신문(新聞)으로 벽지로 사용했었다.
내가 어릴때는 방에 누워 있으면 천장(天障) 온통 일본(日本) 글씨였고 6,25이후에는 영어(英語) 글씨였다. 그래도 우리집은 煙草荷置場(연초하치장:담배 배급소)을 했던 관계로 담배 종이로 많이 활용하였다.
때는, 1905년 乙巳年(을사년) 5월 13일 저녁때 해적(海賊:왜구를 말함) 무리가 배 7척을 이끌고 가까운 포구(浦口)에 정박(碇泊)하여 마을 사람들의 재물(財物)을 약탈(掠奪)하고 칼을 빼어 죽인다고 위협(威脅)하자, 온 마을 사람들이 놀라서 흩어지고, 막을 길이 없었다.
때마침 이 마을의 양 한종씨의 부친(父親) 양 재현씨는 본래 마을을 이끌어온 사람으로 나이도 많고 마을의 모든일을 每番(매번) 이 어른의 뜻을 따랐고, 마을 사람들도 평소에 그 어른을 존경하고 복종 했던터라, 그날 저녁도 이 소식을 듣고 혼자 집을 나와서 그 왜구(倭寇)들을 만나서 좋은 말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할즈음에 갑짜기 한 도적이 칼을 빼어들고 곧 바로 찌를려고 덤비니, 이 危機(위기)를 피할길이 없던차에 옆에 같이 있던 효자(孝子) 한종이 칼을 막고 호위하여 아버지를 구하고 그 자리에서 칼날에 목을 베였음에도 불구하고, 외적과 용감히 싸워서 물리치고 殉節(순절)하니, 하늘이 감동하여 왜적들이 바다로 도망하자 갑짜기 폭풍이 일어나 배는 순식간에 뒤집혔다.
이때 아버지는 화(禍)를 면하고 아들은 그대로 죽었으니, 참으로 아름답고 위대하다.
양공(梁公)은 진실로 효도(孝道)하고 절의(節義)를 굳게 지킨 사람이다. 아! 적도 왜놈들은 이 凶變(흉변)을 꾸며서 두렵고 두려운 마음을 품고 도주(逃走)하여 바다에 이르렀다가 갑짜기 폭풍을 만나 엎어졌으니 그 일이 어찌! 하늘이 감동하지 않았겠는가? 한 마을의 백성(百姓)을 대신해서 목슴을 잃으니 공의 나이 31세였고, 홀로된 부인(夫人) 윤씨(尹氏)의 뱃속에 9개월이 되는 아이가 있었으니 泳福(영복)이다.
과부(寡婦)가 된 윤씨(尹氏)는 위로 시아버님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어린 자식을 보호하고 한편으로 세상을 떠난 남편이 바라는 의리를 지키고 남편을 대신하여, 10살된 아들, 영복이를 잘 키우고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받들고, 효자를 잃고 효손을 두게된 경위와 과부가 된 윤씨가 시아버지를 극진히 공경하고 모신 경위를 쌍효록 자세히 기록하고, 세상에 본보기가 됨을 기념하는 쌍효비를 세우고 1920년 庚申年(경신년) 9월에 雙孝小識(쌍효소식)을 梁 柱肅(양 주숙)이 글을 책머리에 쓰고, 墓碣銘(묘갈명)이며, 道內士林稟目(도내사림품목), 雙孝記實碑銘(쌍효기실비명) 發文(발문) 雙孝文落成韻(쌍효문낙성운)등 律詩(율시) 170수(首)등을 모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경남 통영군 원 거제 동부면 저구리 명사동 양씨문중 쌍효록 이야기 아래 크릭
http://blog.daum.net/bangyang/1901
251.梁萬弼(양만필) 증조부님의 律詩(율시)
一木猶能大厦支(일목유능대하지) : 한 나무라도 오히려 큰집을 지탱할수있고,
幹村今世異凡姿(간촌금세이범자) : 간촌에 지금 세상에 보기드문 자질이 나왔으니,
不嫌賊刃(불협적인) : 도적의 칼날을 협의하지 않았다.
知倫重(지윤중) : 인륜의 중함을 알고,
反捐身(반연신) : 도리어 몸을 버리니,
金値禍奇(금치화기) : 기이한 화를 당했다.
餘愛人間(여애인간) : 인간을 사랑한 나머지,
懸白日(현 백일) : 하늘에 매달고,
遺痕江上似當時(유흔강상사당시) : 강위에 끼친 흔적은 그 당시와 같다.
千秋源行蒼笞字(천추원행창태자) : 천추(오래고 긴세월)의 근본되는 행실은 글자에 푸른 이끼가, 끼도록 오래 전하고,
又是寒山可語碑(우시한산가어비) : 또 이 한산에 말 할만한 비가 생겼다.
長木面 冠浦 梁 萬弼 國享(장목면 관포 양 만필 국향).
號(호)가 國享(국향)이라고 기록 했고, 이때의 春秋(춘추) 육십(60) 이셨다.
尋章摘句(심장적구) - 옛 사람의 글귀를 뽑아서 詩文(시문)을 짓는다는 뜻
옥편(玉篇) 권지상(券之上)
癸丑至十三日?(계축지십삼일?) - 癸丑年(계축년:1913년) 55세때 동짓달(음력11월) 13일.
先數其点後尋其字(선수기점후심기자) - 먼저 점수(획수)를 세고 후에 글자를 찾아라.
옥편(玉篇) 권지하(券之下)
옥편(玉篇) 권지상(券之上)
取妻送恨無良挾(취처송한무량협) - 아내를 취하여 한을 보내니 진실로 가질것이 없고,
書中有女顔如玉(서중유녀안여옥) - 글 가운데 여자가 있는데 얼굴이 구슬 같다.
옥편(玉篇) 권지(券之) 상하(上下)
不志乃知有疑乃覺(불지내지유의내각) - 뜻하지 못한것을 알게되고, 의심나는 것을 알게된다.
양만필(梁萬弼) 증조부(曾祖父)님 생전(生前)에 지어 사셨다는 관포리(冠浦里) 4번지 梁斗漢(양두한) 內從叔父(내종숙부)님이 現在(현재) 사시는 집으로 日帝(일제) 戶籍(호적)의 記錄(기록)은 前(전) 戶主(호주) 梁再寬(양재관) 高祖父(고조부)님의 戶籍欄(호적란)에는 慶南(경남) 統營郡(통영군) 長木面(장목면)이 巨濟郡(거제군) 長木面(장목면)으로 改稱(개칭)할때에 5번지로 번지가 바뀌었고, 본래 27번지에서 83번지로 바뀌면서 5번지로 다시 바뀐 글이 나타난다.
현재(現在) 집은 1937년 7월 26일 金牙只(김아지) 戶主(호주) 相續申告(상속신고)에 의한 번지는 관포리 4번지로 記錄(기록)이 되어있다,
위 사진(寫眞)은 內從叔(내종숙- 梁斗漢(양두한) 內外分(내외분)이 좌측에 나란히 앉아 계시는 모습.
이집은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때 공직(公職)에서 물려나신후 손수 초가삼간(草家三間)을 지으시고 막내 아들이신 鳳石(봉석:1891년 신묘년 5월 9일- 1937년 정축년 6월 10일)에게 물려준 집으로 박정희 정부에 의해 1969년 새마을 운동이, 전국적(全國的)으로 시행되어, 1975년에는 도시와 공장으로도 확대되어, 1973년 경 새마을 운동(運動)으로 지붕을 개량한 것으로 막내 아들은 한동안 수산업(水産業)에 성공(成功)하여 집앞 바닷가에 크나큰 창고(倉庫)를 지었으나, 사업(事業) 실패후 관포(冠浦) 마을에서 구입(購入)하여 동사(洞舍)로 사용할때 1957년경에는 필자(筆者)도 이곳에서 秋夕(추석)때 연극(演劇) 공연(公演)도 하였다. 지금은 그 자리가 어떻게 변했는지 알길이 없다.
참고: 5촌 아저씨는 직계촌수로 따지자면 從叔父(종숙부)라고 하며, 內從間(내종간) 촌수로는 內從叔(내종숙)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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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bangyang/511
https://www.youtube.com/watch?v=8kThBhu5NZo
① 섬은 섬을 돌아 연연 칠-백리 구비구비 스며 배인 충무공의 그 자취 반역의 무리에서 지켜온 강토 에야디-야 우리 거제 영광의 고-장
② 구천 삼거리 물따라 골도 깊어 계룡산 기슭에 폭포도 장관인데 갈고지 해금강은 고을의 절승 에야디야 ~우리 거제 금수의 고장
③ 동백꽃- 그늘 여지러진 바위 끝에 미역이랑 까시리랑 캐는 아기 꿈-을랑 둥실 갈매기의 등에나 싣고 에야디야~ 우리 거제 영광(평화)의 고-장
작사/김기호, 작곡/금수현 「거제의 노래」
(레코드판 표지에서 인용)
시조시인 김기호 선생님이 1953년 12월23일에 작사하였다는 이 노랫말 중에서 ‘구비구비’ ‘갈고지’(현대의 표기법으로는 ‘굽이굽이’ ‘갈곶이’ 이나 저작 당시에는 ‘구비구비’ ‘갈고지’로 표기했음) ‘여지러진’(꽉 차지 아니하고 한쪽 부분이 비어 있는 모양을 나타내는 ‘이지러지다’의 작은 말‘야지러지다’가 모음조화 하여 쓰임)
‘까시리’(‘우뭇가사리’ ‘가사리’의 거제방언) ‘아기’(‘아이’와는 다르게 ‘부모나 시부모가 나이 어린 딸이나 며느리를 친근하게 이르는 말) ‘꿈을랑’(‘꿈일랑’을 부드럽게 표현) ‘실고’(‘싣고’의 거제방언) 등이 현대 표기법으로 제각각 변형되었다가 다시 원작을 최대한 살려서 통일시켰다는 소식은 거제인의 한 사람으로써 매우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김숙태씨와 양일웅씨가 무원선생이 친필로 쓴 거제의 노랫말 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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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의 노래'가 부르는 사람마다 제각각이라는 보도가 나가자 거제시가 노랫말 정립에 나섰고, 무원 선생이 친필로 쓴 노랫말 원본도 나왔다.
또 거제교육청(교육장 윤동석)은 노랫말이 정립되는 대로 '거제의 노래'를 초등학교에서 3절까지 정확하게 모두 부를 수 있도록 각 학교에 특별 지시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1970년 당시 무원 선생의 부인(황인아 여사)이 1970년 무렵 새마을부녀회원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등사한 곡과 노랫말은 무원 선생의 지시로 당시 신진규 음악 선생님이 만든 것이라는 증언도 나왔다.
거제시는 김한겸 시장의 특별지시에 따라 거제문화원 향토사연구회에 의뢰, 유족, 문인 등 관계자들과 정확한 거제의 노랫말 찾기에 나서 20일 현재 자료를 모으고 있다.
시는 노랫말이 정립되면 거제지역에 세워진 3개의 거제의 노래비에 잘못 새겨진 노랫말을 다시 새기도록 할 계획이다. 또 거제시 홈페이지에 있는 거제의 노랫말을 바꾸는 것은 물론 인터넷에 유포돼 있는 거제의 노랫말도 바로 잡아나갈 방침이다.
거제시 관계자는 "거제의 노랫말을 정립, 거제시민의 기상과 거제의 비경을 노래한 거제의 노래를 20만 시민이 애창하는 노래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무원 선생의 고향인 하청면과 경남산업고등학교(전 거제종합고등학교) 교장과 교사로 지냈던 분들도 중요한 자료를 내놓았다.
하청초등학교 기능직으로 있다 교사로 퇴직했다는 김숙태씨(70·하청면 실전리)는 무원 선생이 직접 쓴 '거제의 노래' 사본을 들고 지난 15일 거제신문을 찾아왔다. 김씨는 "거제신문을 보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김기호 선생의 장남 한석씨가 갖고 있던 거제의 노랫말 원본을 복사해 갖고 왔다"고 말했다.
또 경남산업고 교사를 지낸 양일웅씨(68·사등면 사등리)는 무원 선생이 편지지에 펜으로 눌러 쓴 거제의 노랫말을 액자 뒤에 풀로 붙여 놓았다가 거제신문을 보고 지난 16일 공개했다.
김씨와 양씨가 내놓은 두 노랫말은 틀린 낱말을 고쳐놓은 것까지 똑같았고, 무원 선생 아래서 경남산업고(전 거제종고) 교사를 지내다 교장으로 퇴임한 김백훈씨도 무원 선생의 친필이라고 확인해 줬다.
김백훈씨는 "무원 선생은 서예에서 붓을 잡는 것과 비슷한 방법으로 펜을 잡았는데 엄지로 펜끝을 잡고 나머지 네 손가락으로 펜을 둘러 잡는 독특한 방법으로 글을 썼다"면서 "무원 선생의 친필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김숙태씨와 양일웅씨가 무원 선생이 친필로 썼다는 '거제의 노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섬은 섬을 돌아 연연 칠백리 구비구비 스며배인 충무공의 그 자취 반역의 무리에서 지켜온 강토 에야디야 우리 거제 영광의 고장
구천 삼거리 물따라 골도 깊어 계룡산 기슭에 폭포도 장관인데 고지 해금강은 고을의 절승 에야디야 우리 거제 금수의 고장
동백꽃 그늘 여지러진 바위 끝에 미역이랑 까시리랑 캐는 아기 꿈을랑 둥실 갈매기의 등에나 싣고 에야디야 우리 거제 평화의 고장
이는 1970년 당시 무원 선생의 부인이 새마을부녀회원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무원 선생에게서 노랫말을 받아 등사해 갖고 있던 것과 같은 것으로 확인됐다.
김백훈씨와 양일웅씨는 무원 선생의 부인이 등사해 갖고 있던 노랫말은 “당시 무원 선생의 지시로 신진규 음악 선생님이 만든 것이어서 가사와 음이 정확할 것”이라고 말했다.
거제교육청(교육장 윤동석)은 거제시가 거제의 노랫말을 정립하는 대로 '거제의 노래'를 거제지역 모든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도록 특별지시를 내리겠다고 밝혔다.
윤동석 교육장은 지난 17일 거제신문에 전화를 걸어와 "거제의 노랫말 정립 필요성과 거제의 노래가 잊혀져 가고 있다는 거제신문의 보도는 개인적으로 충격적이었다"면서 "거제의 노래를 모든 학생들이 1절부터 3절까지 정확하게 부를 수 있도록 가르쳐 거제의 노래가 거제 전역에서 울려 퍼지도록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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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산의 진달래 꽃들
대금산의 진달래 꽃들
대금산 진달래 꽃
진달래 축제가 한창인 봄날 대금산 정상에서 바라본 관포마을 앞바다의 시원한 모습
대금산 정상에서 바라본 경남 거제시巨濟市 장목면 이수도
저 멀리 거가대교와 저도를 넘어 연도와 진해구의 시루봉이 까마득히 보인다.
방파제를 쌓아 본섬과 동섬을 하나로 연결한 이수도.
물(水)이 사람을 이롭게 하는 섬 ‘이수도’(利水島·51가구· 113명, 39만 3970㎡). 섬의 형상이 대금산을 향해 날아가는 학(鶴)처럼 생겨 ‘학섬’으로 더 알려진 ‘이수도’는 거제시 장목면 시방리에 속한 작은 섬 마을이다. 한때 대구 등 어자원이 풍부해 ‘부자 섬’으로 통했을 정도로 이수도는 어자원의 보고였다.
물 빠진 바닷가는 바지락이, 앞바다는 문어, 도다리, 노래미, 감성돔, 멸치, 물메기, 보리새우(일명 오도리), 전어 등 각종 어류와 해산물로 넘쳐났다.
섬은 원래 이수도 본 섬과 동 섬이 자갈로 연결된 2개의 섬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태풍 등 거센 파도와 바람에 대비하기 위해 방파제를 축조하면서 하나의 섬이 되었다.
이수도는 비록 작은 섬이지만 다른 섬과 달리 산이 없고 능선을 따라 넓게 펼쳐진 임야와 물이 풍부해 농사를 많이 지었다. 가뭄 때는 바다 건너 이웃마을에서 물을 길러 올 정도로 물이 좋고 풍부했다.
저 멀리 바다 한가운데는 거제도와 부산 가덕도를 잇는 ‘거가대교’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며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시방리 시방마을에서 이수도와 시방마을을 오가는 도선 ‘이수호’(선장 김순봉)에 몸을 맡긴 지 7~8분여 만에 도착한 섬 부둣가에는 전어와 병어, 보리새우(오도리) 잡이 철을 맞아 그물을 손질하는 어민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한낮의 따가운 햇살도 아랑곳 없이 그물을 손질 하느라 까맣게 그을린 어부의 모습에서 치열한 섬사람들의 삶의 哀歡(애환)의 모습을 느낄수가 있다. 섬은 학의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이 서쪽으로 향하여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고, 목에 해당하는 방파제를 거쳐 몸통에 해당하는 부분이 남쪽으로 자리 잡고 있는 형태다. 마을은 학의 목에서 몸통으로 연결되는 부분의 서쪽 오목한 만을 중심으로 약 5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온가족이 부둣가에 나와 그물을 손질하던 김형식(49)씨는 “요즘 보리새우가 예년에 비해 크게 줄어 어민들의 시름이 깊다”며 “지난해 하루 150여 마리 잡히던 보리새우는 요즘 하루 30~40마리 잡는 수준에 그쳐 기름값 맞추기도 빠듯할 정도다”고 푸념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0FLZq3o_rhU
https://www.youtube.com/watch?v=5EFhHryfOxM
거제시 장목면 관포리 414번지 양 방수 제공
巨加 大橋 - 거가대교의 모든 것
巨加란? 巨濟島와 加德島를 잇는 大橋(대교)
내 고향 거제도로 가는 길
저 멀리 내고향 거제섬이 보인다
거가대교(巨加大橋)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덕도동에서 가덕도와 죽도, 저도를 거쳐 거제시 장목면을 잇는 다리이다. 2010년 12월 13일에 개통되었으며, 총길이 3.5km의 2개의 사장교 와 3.7km의 침매터널, 총길이 1km의 2개의 육상터널로 이루어져 총 길이는 8.2km에 달한다.
도시고속도로인 거가대로(부산광역시도 제17호선)를 구성한다. 거가대교를 포함한 거가대로 개통으로 부산~거제(부산 사상시외버스터미널~거제 고현터미널) 간 통행거리는 기존 140㎞에서 60㎞로, 통행시간은 기존 130분에서 50분으로 단축되었다.
저 멀리 거제섬이 까마득히 보인다.
거가대교 의 전경
교통시설 | 부산광역시도 제17호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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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단 | 진해만 앞 바다 |
국적 | 대한민국 |
관리 | GK해상도로(주) |
구조 | 사장교 |
길이 | 3.5km |
너비 | 4차로, 20.5m |
착공일 | 2004년 12월 10일 |
완공일 | 2010년 12월 13일 |
개통일 | 2010년 12월 13일 |
통행요금 | 10,000 원 |
위치 | |
거가대교 지도 | |
위치 | 거제시 장목면 유호리 ~ 부산광역시 강서구 천성동 |
부산광역시 강서구 천성동의 가덕도에서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유호리 구간을 연결한다. 이로써 광역도로망이 구축되어, 동남광역권의 산업, 항만, 물류를 담당하게 되며, 거리는 140km에서 60km로 줄고, 시간은 3시간 30분이 걸리던 연결거리를 40분 내로 단축 연결함으로써 물류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통영대전고속도로, 중앙고속도로 (부산대구고속도로)와 연결되어 기존의 남해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의 교통량이 분산될 것으로 기대된다. 거가대교의 개통으로, 부산과 거제는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통영, 고성 등을 포함한 10개 지역(인구 673만명)이 부산광역경제권에 묶이게 되었다.
총사업비는 1조 4,469억원이며, 국고 지원은 28%에 민간자본 72%가 투입되었다. 2004년 12월에 착공되었으며, 2010년 12월 13일 오후 2시에 개통식을 하였고 차량 통행은 다음날인 12월 14일 오전 6시부터 가능해졌다.
巨加大橋(거가대교)
한국의 해저 고속 도로 거가대교
https://www.youtube.com/watch?v=MNN3-l_xETo
민간투자사업이었던 거가대교 건설사업에는 다음과 같은 업체가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최초로 침매터널(Immersed Tunnel, 오차 ≤4 cm)과 2주탑과 3주탑이 연속된 사장교이다. 왕복 4차로에 총 길이는 8.204km로, 사장교 3.5 km, 침매터널 3.7 km, 육상터널 1km로 구성되어 있다.
거가대교 개통 이전인 2010년 11월 25일에 거가대교 건설조합과 GK해상대교 측은 거가대교 통행료를 승용차를 기준으로 10,770원으로 해 논란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1월 30일에 통행료를 770원을 인하해 10000원으로 책정하였지만 이런 극소폭 인하에 대해 지역 주민들이 반발을 해 감사원에 감사를 청구하였다. 또한 거가대교보다 4 km 이상 긴 12.3 km 인천대교의 통행료에 비해 배 가까이 비싸며, 국내 유료 도로 가운데서도 가장 비쌀 뿐만 아니라 민자도로 중에서 서울양양고속도로의 덕소삼패 나들목 ~ 춘천 분기점 구간과 인천대교의 운영기간은 30년인데 비해 거가대교는 40년이 되어 큰 논란이 되고 있다.
2010년 12월 14일부터 2010년 12월 31일까지는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고, 통행료는 2011년 1월 1일부터 징수하기 시작하였다. 요금은 계획대로 10,000원 (소형차 기준) 이다. 장애인 차량은 2,900원이다.
거가대교 주탑 거가대교 침매터널 거가대교 육상터널
창원시에서는 도로 미관을 위하여 불모산터널에 경관 가드레일, 즉 일반 가드레일보다 좀 더 아름다운 가드레일 설치를 승인하였는데, 이 경관 가드레일은 일반 가드레일보다 강도도 약하였으며, 설치비도 훨씬 더 많이 들어 예산 낭비로 지적받기도 하였다.
감사원은 2012년 3월 이 가드레일이 국토해양부의 기준을 만족하지 않는다며 경상남도와 감리단등에 통보하였다. 자동차전용도로의 경우 가드레일의 성능이 14톤 차량이 시속 65km로 비스듬히 충격하였을때도 견딜 수 있는 5등급 이상이 되어야 하는데 이 경관 가드레일은 이보다 낮은 3등급이라는 것이다. 경상남도는 경관만이 아니라 현장의 도로구조 등도 반영해 설치하였다며 감사원에 이의를 신청할 방침을 밝혔다.
그런데 이 가드레일은 거가대교에도 설치되었다고 한다. 이 가드레일은 불모산터널과 거가대교 모두 경남도 요구로 설치되었는데, 거가대교의 경남도 연결부분에만 해당 가드레일이 설치된 것이 이를 증명한다.
2011년 1월 1일 기준이다.
구분 | 통행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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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차 (1,000cc 미만) | 5,000 |
소형(2축, 윤폭 279.4mm 이하) | 10,000 |
중형(2축, 윤폭 279.4mm 초과 1,800mm 이하) | 15,000 |
대형(2축, 윤폭 1,800mm 초과) | 25,000 |
특대형(3축 이상) | 30,000 |
https://www.youtube.com/watch?v=IeytVITh7F0
아래를 크릭하면 가덕도에서 바라보는 거제섬이 아련히 나타난다.
巨加大橋가 생겨 이제 배타고 故鄕가는 일 없어졌다. 꿈이 현실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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