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견 3
안견이 어떻게 화원화가가 되었으며, 누구에게 그림을 배웠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화가로서 능력이 뒤어나다는 기록은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개인 정보는 없다. 당시로서는 개인정보래야 어느 가문의 출신이며, 선대 조상은 누구누구라는 것임으로, 미천한 기문의 출신이고 내세울 만한 선대가 없는 하층민에게는 개인 정보가 없는 것이 당연하리라.
그러나 화가로서의 능력은 뛰어났음도 분명해 보인다. 기록에 의히면
산수화의 대가이고, 우리나라 산수화가의 1인자이다.
신숙주는 안견과 동시대의 사람이고, 친분도 있었으리라고 추측된다. 畫記를 남겼다.
“우리 조정에 유명한 화가가 한 사람 있다. 비유당(안평대군의 호)을 오래 동안 모셨다. 그래서 안평대군이 그의 그림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신죽주는 자신의 화기의 끝에 1445년이라고 적었다.
이외에도 여러 자료들을 보면 안견은 오래 동안 안평대군을 모셨고, 안평도 안견을 총애했다. 안평의 사랑방에는 당대의 명문 사대부들이 모여드는 장소였다. 그 자리에 불려간 안견은 기가 죽었고, 사대부들은 안견을 낮추어 보았다고 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이런 사정들을 감안한다면, 안견이 안평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아야 할 이유도 없으리라.
안견의 화풍에 대하여서도 당대에 남긴 이런저런 언급이 있지만, 지금 남아 있는 안견의 작품에서 가장 뚜렷한 것은 곽희 화풍이고(몽유도원도), 마하 화풍도 조금 보인다고 한다.
첫댓글 이동민 선생님!...
덕분에 안목이 얼마나 넓으지는지 모릅니다. 고맙습니다...
이동민박사님
덕분에 저도
들은 풍월이 늘어나고
조선초기 안견에 대한 지식이 생겨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