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의 마지막 가르침, 중용의 도
드디어 논어의 마지막에 다달았다. 피날레를 장식할 화려한 말을 기대하며 책을 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3장 밖에 되지 않는 가장 짧은 양의 말들이 있었으며 공자가 아닌 고대의 성왕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 탕임금 등이 등장한다. 그리고 내가 보기엔 그 어디에도 피날레를 장식할만한 글귀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저 기묘해보이는 이 책을 해석하기 위해 나는 또다시 부교재에 의존해보기로 했다.
논어 제20편은 공자가 죽고 유교라는 학파(교단)가 형성되며 그 정통성을 부각하기 위해 만들어낸 설, 진리의 계보학이라 한다. 이 설의 내용은 고대 성왕 요, 순 임금 사이에 비밀스럽게 전해진 ‘통치의 비결’이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 군주들에게 전해져 내려왔는데, 춘추 전국시대로 세상이 혼란해지며 ‘통치의 비결’이 군주가 아닌 일반사람에게 들어갔고 그 일반사람이 바로 공자라는 설이었다.
우선 이 ‘통치의 비결’은 요임금에게서 순임금으로 전해졌는데 그 비결이 바로 무엇인지 알아보자
”요임금께서 말씀하셨다. ‘아아, 그대 순이여! 하늘의 정해진 뜻이 바로 그들에게 와 있으니, 진실로 중용의 도를 지키도록 하라. 천하가 곤궁해지면 하늘이 내려 주신 천자의 자리도 영원히 끊어질 것이다.’“(20.1)
그렇다,이들이 말한 통치의 비결은 바로 ‘중용의 도’를 지키는 일이다. 중용이란 무엇일까? 중용이란 과유불급이다. 지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하지도 않는 최적의 상태를 이야기 한다. 어떤 반대편의 한가지를 배제시켜 그 반대의 것만을 고수 하는 것이 아닌 ‘좋고 나쁜 것의 두 끝을 잡아서 그 가운데 적절한 것’을 베푸는 것이다. 그러니 중용은 ‘이것도 별로고 저것도 별로야‘가 아닌 ’저것도 좋고, 이것도 좋아‘ 라는 수용의 자세에서 나온다. 귀를 다방면에 열어두고 이것 저것 모두 들어본 후에 나쁜 것은 흘리고 좋은 것을 붙잡아 그것들로 상황에 맞게 조화를 이뤄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중용이다. 이 중용의 도를 잘 이뤄낸 순임금은 ’남에게 묻기를 좋아하고 남의 말을 잘 들었다‘고 한다. 자칫 잘못들으면 이것은 줏대가 없고 귀가 얇은 사람들의 행동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것은 남의 말을 그대로 수용해버리는 것이 아닌 나를 통해 한차례 여과시켜 걸러내는 과정이기에 귀얇은 약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겸손히 나의 것을 성찰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반대자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아주 강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이렇듯 소통을 잘해낸 순임금은 각각의 억울한 사정을 듣고 뭉쳐진 것을 풀어 넓게 쓰일 수 있도록 한 좋은 군자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정치체제를 통해 예시를 들어보자. 흔히 대립구조로 공산주의, 사회주의 대 민주주의, 자본주의가 이뤄진다. 우리나라는 특히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가 자리잡으며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배제시키는 경향이있다. 적어도 내가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최근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그 자체와 그 시작에는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시 그들이 계급 체제를 비판하며 분배와 평등을 내세운 것은 그들의 상황에서 너무나 당연했고 충분히 꿈꿀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했던 것은 인간의 악성이었다. 인간의 악성은 어느 공동체에서든 어느 체제의 나라든 계급 체제를 촉구하기 마련이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인 우리나라에서도 돈이라는 계급이 드러나듯 말이다. 그러니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시작은 좋았다만 독재주의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이 많았다는 것이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사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도 그렇게 좋기만한 체제들은 아니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우매함과 참여성에 따라 나라를 산으로 날려버리는 재주가 있고 자본주의는 물질만능주의와 빈익빈 부익부, 무한 경쟁 등을 초래하여 사람들의 정신을 피패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무엇이든 ‘~주의’가 등장하면 두려워지는 것 같다. 한 곳만 들여다보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많은 분야의 지식을 조합해 상황을 이해하고 옳바르게 판단해야한다. 그리하여 나도 알고 남도 알아, 그에 맞게 새로운 생각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우리의 앞에는 열공만이 놓여져 있는 것 같다. 이 부분에서 다시 논어의 첫장이자 배움에 대해 적은 학이편으로 돌아간다.
이제 논어가 끝이 났다. 자그마치 20주동안 함께 했기에 드디어 끝났다라는 해방감과 동시에 왠지 모를 아쉬움도 함께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조각글에 충분히 찔렸고 글을 뽑아내기 위해 머리싸맨것이 한 두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 값진 시간이었던 것 같다. 살다가 언제 이렇게 고전으로 고통받아 보겠는가? 내 조그만 사고력을 언제 이렇게 굴려보겠는가? 고통받았던 만큼 조금은 성장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말하자면 논어는 재밌지도, 통쾌하지도 않았다. 그저 무거운 이상을 제시하며 나를 콕콕 찔렀을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논어에 진실이 있음에 믿는다. 우리 삶의 궁극적인 끝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진 못하지만 우리 삶의 과정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순 있는 것 같다.
지금은 이상으로만 느껴지는 공자지만 살아가며 내가 우매해 질 때 그의 말이 문득문득 떠올라 나를 깨우길, 그리하여 한 번이라도 그의 말에 따라 현명한 군자로 살아볼 수 있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