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잘못 읽으면 자신의 관점에서 성경을 왜곡되게 이해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실례가 구약성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다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저주의 하나님, 신약의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을 몰라도 한 참 모르고 하나님을 몰라도 한 참 모르는 사람의 생각이다. 이렇게 신구약을 단절된 쪼가리 복음으로 이해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성경은 전체적으로 조화와 통일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고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은 결코 다르지 않으며 그 하나님은 변함이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약1:17) 분이시다.
그분은 천하를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이신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이런 하나님의 심판은 보수 혹은 복수로 나타난다. 하나님만이 가장 확실하고 올바른 복수를 하실 수 있다. 피해를 당해도 그 어디에도 호소하거나 보복할 힘이 없는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복수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그래서 시편94편은 하나님의 복수를 호소하고 있다.
(시 94:1) 여호와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추어 주소서 (시 94:2) 세계를 심판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들에게 마땅한 벌을 주소서 (시 94:3) 여호와여 악인이 언제까지, 악인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르리이까 (시 94:4) 그들이 마구 지껄이며 오만하게 떠들며 죄악을 행하는 자들이 다 자만하나이다
여기서 복수하시는 하나님은 `엘 네카모트'(el neqamot)인데 불의를 당하는 억울한 자들을 위해 하나님이 악인들에게 복수해 주실 것이라는 신앙의 표현이다. 성경은 늘 한 가지 원칙을 강조하는데 그것은 원수는 직접 갚지 말라는 것이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복수하신다는 사상이다. 이것은 신구약을 막론하고 일관된 사상이고 가르침이다. 그래서 사도는 구약성경을 인용하시면서
(롬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고 하셨다.
흔히 사람들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구절을 구약의 원수 갚는 방법이라고 오해하곤 한다. 하지만 함무라비 법전이나 고대 근동지방의 규정은 복수법으로 나오지만 거기에 반해 성경이 말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취지는 복수법이 아니라 오히려 보상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손해를 입힌 만큼 공정한 재판을 통하여 배상하라는 것이다.(레24:20, 신19:21) 성경은 사람이 개인적으로 친히 복수하는 것을 막고 있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고 또 다른 복수의 순환을 만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복수하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도록 명령한다.
(시 94:16)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행악자들을 치며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악행하는 자들을 칠까 (시 94:17)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 요셉은 복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때에 자신을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고 과거 수년 동안 온갖 고생을 하게 만든 그의 이복형제들에게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창 50:20)라고 말했다. 그는 복수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임을 분명히 했다.
누구나 사람은 억울하고 원통하면 자신의 억울함을 원수 갚음으로 복수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오늘 시편기자처럼 하나님을 잠잠히 믿고 그분께 맡기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면서도 동시에 온 천하를 공의로 심판하신 보수의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믿는다. 그분의 방식으로 악인들에게 반드시 갚아 주실 것이므로 그분의 섭리를 믿고 오히려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겠다.
하나님 아버지!
때론 억울하고 원통하며 되갚아 주고 싶은 충동을 받습니다. 그럴 때에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우리를 복수하는 마음에서 지켜 주소서 공정한 사회 공의로운 세상을 위해 기도하지만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진정으로 공의로우신 분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