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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인생의 굴속에 있다 할지라도(시57편)
2012.8.26(김상수목사)
“〔1〕 [다윗의 믹담 시, 영장으로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2〕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3〕 저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셀라) 하나님이 그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4〕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내가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으니 곧 인생 중에라 저희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5〕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6〕 저희가 내 걸음을 장애하려고 그물을 예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저희가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스스로 그 중에 빠졌도다(셀라) 〔7〕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8〕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9〕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10〕 대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11〕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시57:1-11)
비록 인생의 굴 속같은 고난의 상황에 처해 있다라도 그 속에서 주님을 만났느냐 못만났느냐에 따라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요즘 뉴스를 보면 불과 얼마사이에 여기저기에서 묻지마식 칼부림의 소식들이 들려온다. 8월18일에는 의정부역에서 공업용 커터칼을 휘둘러서 8명을 중상을 입힌 사건을 시작으로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다발적이다. 지난 10일에는 서산 동문동 피자집 주인의 성폭행과 협박으로 수석동 야산에서 여대생이 자살한 안타까운 사건도 있었다. 이 일들이 불과 열흘 남짓 우리 주변에서 쉴새 없이 터지고 있다. 뉴스에 보도된 이야기를 들어보면 칼부림이나 폭행을 했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경제적으로 벼랑 끝에 있던 사람들이고, 나름대로 고통 속에 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 모든 사건들의 배후에는 어둠의 영이 미소짓고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인생의 깊은 굴 속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해서 모두가 비관하며, 묻지마식의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보면 사람이 죄와 고통, 죽음의 사슬에 매어있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데에 근본 원인이 있다.
그런가하면 이와는 반대로 깊은 고통의 수렁 속에서도 주님을 만남으로 훌륭하게 변화된 예들도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 얼마 전 청년모임에서 비전에 대해서 나누면서, 고(故) 강영우박사의 간증 동영상을 함께 봤다. 강영우박사에 대해서는 전에 언젠가 설교시간에도 이 분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다. 아버지는 13살 때 돌아가시고, 15살 때 축구공에 맞아서 실명하고, 충격으로 8시간 만에 어머니가 소천하셨다. 이후에 당시 17살 먹은 누나가 동대문 평화시장 봉제공장에서 일하다 과로로 죽고, 어린 두 동생을 껴안고 통곡하던 그 어린 소년이 맹학교에서 주님을 깊이 만났다. 그리고 사도 바울과 같이 되겠다고 신앙의 결심을 했다. 그리고 후에는 마침내 한국인으로는 최고위직인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까지 올랐다. 그 결심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지었다.
그 강영우장로님이 간증 말미에 이런 말씀을 했다.
“하나님께서 절벽 가까이 오라고 하셔서 그리로 갔습니다. 그랬더니 절벽 끝까지 더 가까이 오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절벽 끝까지 다가갔습니다. 그 절벽 끝에서 간신히 발을 붙이고 서있는 나를 밀어서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떨어지고 떨어지고 또 떨어져서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때까지 내가 날개를 가지고 날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적으로 또는 육신적인 회복을 원하는가? 뭔가 새로운 인생의 변화를 갈망하는가? 그렇다면 먼저 하나님을 향해서 신앙적인 마음의 결심을 하고, 그 결심대로 행하시기 바란다. 강영우라는 소경 소년이 사도 바울과 같이 되겠다고 신앙적인 결심을
했을 때, 주님이 그 인생을 품으셨던 것처럼, 오늘 이 시간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그 사람의 신앙의 결단을 동일하게 받으시고, 품으시고, 변화시켜 주신다.
오늘 우리들이 함께 읽은 본문말씀은 바로 이처럼 인생의 극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믿음의 결심을 주님께 올려드림으로 해서, 그의 남은 생애 동안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축복들을 받아서 누렸던 한 사람의 고백을 기록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다윗이다.
먼저 7절 상반절 말씀을 보라.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7절 상반절)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마음이 확정되고 확정되었다고 반복해서 강조하여 고백하고 있다. 뭘 확정을 했는가하면, 하나님을 향한 강력한 믿음을 확정한 것이다(확정의 내용은 조금 후에 나눔).
그런데 다윗이 이런 신앙적인 마음의 확정을 할 때, 결코 평안할 때가 아니었다. 시편57편의 서두에 보라.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라는 소제목이 있다. 시편에 보면 다윗이 사울왕에게 쫒겨 다닐 때 지은 비탄시들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정말 굴속에 지었던 몇 편의 시들이 있는데, 시편57편은 그 중의 하나다. 다시 말해서 결코 신앙적인 믿음의 확정을 하기에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는 말이다. 지금 버전으로 말하면 인생의 낭떠러지 상황이나 마치 예전에 찾아왔던 인생의 IMF같은 파산상황보다 더하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믿음의 마음을 확정 했던 것이다.
다윗이 어느 정도로 험난한 상황이었는지 보자. 그때 굴속에서 숨어있던 그의 심정이 어땠는지 본문 속에서 몇 곳을 살펴보자. 먼저 1절에 보면 “재앙”이라는 단어를 쓴다.
“... 이 재앙이 지나가기까지”(1절)
그에게 있어서 사울에게 쫒겨다니는 이 상황을 재앙이라고 표현했다. 다른 곳에서는 저주라는 표현도 썼다. 인생의 재앙이다. 인생의 심각한 가뭄, 견딜수 없는 폭염, 감당할 수 없는 물난리, 더 떨어질래도 떠러질 곳도 없는 것과 같이 철저하게 낮아진 상태다.
4절에 보면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내가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으니 곧 인생 중에라 저희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I am in the midst of lions; I lie among ravenous beasts--men whose teeth are spears and arrows, whose tongues are sharp swords.”)라고 했다. 원문을 직역하면, 지금 내가 우르렁대는 사자떼의 중간에 있고, 굶구린 맹수들 중에 누워있고, 대적자들이 얼마나 말로 폭언과 비방을 하는지 그것이 창과 살과 칼처럼 느껴진다는 말이다. 우리 주변에도 이렇게 말의 칼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심지어 6절에 보면 다윗의 걸음 앞에 그물을 치고, 비탄함 가운데 엎드려지게 하고, 나가는 길에 구덩이(함정)을 파놓기도 하였다. 그래서 얼마나 속이 상한지, 내 영혼이 억울하다고 하나님께 그 심정을 토로했다. 우리 주변에도 곳곳에 몰래 그물쳐 놓고, 함정 파놓고 자들이 있다.
“저희가 내 걸음을 장애하려고 그물을 예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6절)
(“They spread a net for my feet--I was bowed down in distress. They dug a pit in my path...”)
이러한 와중에서도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마음에 믿음의 결심을 확정한 것이다. 정말 놀라운 결심이다. 과연 다윗은 어떤 마음의 확정을 했을까? 바로 이 고백들을 이 시간 우리들이 나의 고백으로 믿고 확정하여 주님께 올려드려야 한다.
다윗이 확정한 마음의 내용을 살펴보자.
1절을 보면, 그는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지 피하리이다”라고 했다. 내 영혼이 주님께 피하겠습니다. 내가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겠다는 고백이다.
계속해서 2-3절을 보라.
“2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3 저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셀라) 하나님이 그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2-3절)
다윗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겠다. 기도하겠다고 결심했다. 이렇게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그 하나님께서 대적자들의 손에서 구원하실 것이라고 확신했다. 진실로 우리가 의지할 대상은 하나님 밖에 없다.
그러기에 이러한 동일한 맥락에서 시편 146편 3-5절은 이렇게 선포하고 있다.
“3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4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5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46:3-5)
다윗이 믿은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2절 하반절을 보라. 이렇게 선포했다.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 할렐루야! 참으로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하기로 마음을 확정하고 간구하면,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진리를 믿음으로 받기 바란다. 할렐루야!
계속해서 다윗의 놀라운 마음의 확정함을 보라. 7-9절이다.
“7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8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9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시57:7-9)
7절에서는 이 역경 속에서도 노래하고 찬송하겠다는 마음을 확정했다. 8절에서는 새벽을 깨우겠다(기도)고 마음을 확정했다. 9절에서는 주께 감사하며 찬송하겠다고 결심했다. 여기서의 이 감사는 조건에 따른 상대적인 감사가 아니라, 조건이나 상황과 상관없는 절대감사다. 바로 우리가 이렇게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믿음의 결심과 마음의 확정을 받으시고 그의 앞길을 더욱더 견고하게 인도하셨다. 그의 믿음대로 모든 것을 이루어 주셨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때로 다윗이 경험했던 같은, 때로는 그 이상의 고난이 찾아 올 수 있다. 특히 요즈음 같은 극한 경제적인 사회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겠다는 믿음의 결단이 필요하다. 이 결단이 우리의 남은 생을 좌우한다.
마지막으로 지금부터 약30년 전에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있었던 실화를 소개하고 마치려 한다. 미국 동부 필라델피아의 외각인 스프링가든가에 매우 큰 저택이 하나 있었다. 이 저택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어린 딸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신실한 기독교인 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제 어머니와 딸(소녀)만 남게 되었다. 이 소녀는 교회에서 성가대를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성가대에 빠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성가대 좀 빠지는 것이 뭐 그리 대수겠는가?’라는 마음으로 바쁠 때는 성가대에 빠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후부터 한 번 두 번 성가대를 빠지게 되었고, 그것이 습관화 되어서 나중에는 교회도 빠지게 되었고 급기야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게 되었다. 얼마후 소녀의 엄마가 소문을 듣기를 자기 딸이 나쁜 친구들과 어울린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후 얼마가지 않아서 그 소녀는 가출하였다. 어머니는 아무리 딸을 찾을려고 노력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필라델피아시 중심가에 위치한 한 사창가의 어두운 골방에서 한 소녀가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두 소녀가 죽어가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소녀는 바로 5년전에 집을 나갔던 그 소녀였다. 죽어가면서 이 소녀는 말하기를 “나는 마귀의 꾐빠져서 나쁜 친구들을 사귀었고, 우리집의 그 좋은 환경과 사랑을 버리고 여기서 병에 걸려 죽는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소녀는 말하기를 “내가 죽기 전에 우리 엄마 얼굴을 한 번만 보고 죽었으면 좋겠어.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여한이 없지만 이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우리 엄마에게 나쁜 딸이었어. 마지막으로 용서를 빌고 싶어”라고했다. 그래서 두 소녀가 새벽에 택시에 태워서 필라델피아시 외각 그 큰 저택을 향해 달렸다. 택시 안에서 소녀는 말하기를 “저기 저쪽 현관에 불이 켜있는 집이 우리집이야”라고 말하고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택시기사와 다른 두 소녀는 그 소녀을 현관 앞에 놓고는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이 집의 하인이 들으니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가 문을 열어보니 5년 전에 집을 나갔던 주인의 딸이 거기 쓰러져 있는 것이였다. 그래서 방에 누이고 의사를 데려다 치료를 하고, 소녀 엄마는 밤새도록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다음날 아침 찬란한 아침 햇살이 창문을 통하여 소녀가 누운 침대로 비쳤다. 소녀는 혼수상태에서 서서히 깨어났다. 소녀가 눈을 뜨고 보니 거기는 어둡고 침침하고 병균이 득실거리던 사창가의 어두운 골방이 아니라, 사랑이 가득했던 자기 방인 것을 발견했다. 물건들도 5년전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소녀가 얼굴을 돌리면서 엄마와 눈이 마주 쳤다. 이 모녀는 서로 붙잡고 몸부림을 치면서 통곡하고 울었다. 그리고 한참만에 가까스로 소녀가 말했다. “엄마 저를 용서해 주세요. 제가 나쁜 딸이었어요” 그때 엄마가 말했다. “내가 지금 너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너를 사랑한다는 말 뿐이란다”. “그런데 엄마 궁금한 것이 있어요. 어제 저녁에 우리 집의 현관불은 왜 켜 놓으신 거죠? 그 불은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나 우리 집에 큰 일이 있을 때만 켜놓잖아요. 저는 어제 저녁에 현관불이 켜있는 것을 보고 엄마가 돌아가신 줄 알았서, 이제 이 나쁜 딸은 이 땅에서 용서받을 사람도 없어졌구나”라고 생각하니 충격을 받아서 쓰러진 거예요“ 그때 소녀의 엄마가 말했다. “나는 네가 집을 나가 이후로 한 번도 그불을 끈 적이 없단다. 가장 귀한 딸인 네가 집을 나갔는데 그 이상 큰 일이 어디 있겠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중에 오늘 교회에 나오신 얼마 안되는 분이 계신가? 길잃은 철새처럼 오랜 시간 방황하다가 이제 다시 주님 앞에 나왔는가? 아니면 몸은 오랜시간 동안 이미 교회 안에 있으되, 마음은 냉동실에 있는 것과 같은 상태인가? 그래서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느끼는가? 그렇다면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간 기도 가운데 주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겠다고 결정하라. 그 어떤 상황이든 간에 모든 상황 속에서 이 시간에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확정하라.
그 소녀가 처음 교회 성가대에 한 번 빠졌을 때 그것이 그녀를 죽음에까지 끌고 가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귀는 그 한 번을 놓치지 않았다. 한 번 교회에 빠진 것이 그 소녀를 죽음으로 까지 몰고 갔다면, 반대로 지금 이 말씀을 듣는 이 순간의 마음의 확정이 여러분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가장 귀한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시키셨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확정은 우리들 삶의 진정한 변화를 향한 첫 출발이다.
이 시간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내 상황과 조건과 상관없이 믿음의 눈으로 주만 바라보기로 마음을 확정하기 원하시는 분들, ‘주님, 저는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 간절합니다’라는 소망을 품으신 분들을 두 손을 가슴에 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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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멘트) 하나님은 지금도 십자가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이미 용서 놓고,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의 확정을 주님께 올려드리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허물어진 성벽같은 부분이 있습니까? 그 부분을 회복하십시오. 예배의 어느 한 부분입니까? 기도의 감격이 허물어졌나요? 그럼 그 부분을 회복하겠다고 마음의 확정하십시오. 성경말씀을 가까이 하는 일들이 약해졌나요? 충성하지 못하고 있나요? 생활 속에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있나요? 그렇다면 그 부분들을 회복할 것을 결심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합시다. 맹인학교에서 사도바울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한 소년 강영우의 마음의 결심을 받으신 주님께서 우리를 거절하실 이유가 없으십니다. 지금 두 팔 벌리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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