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용(姜鏞)
상세정보
[생원시]철종(哲宗)9년(1858)무오(戊午)식년시(式年試)[식년생원]
2등(二等)23위(28/100)
방목 말미에는 ‘유사(有司)’ 명단이 있다. 그리고 ‘부록(附錄)’이라 하고, ‘방중색장(榜中色掌), 은문색장(恩門色掌), 수권색장(收卷色掌), 공포색장(貢布色掌), 제마수(齊馬首)는 이상인방회불성병궐언(以上因榜會不成並闕焉)’이라 하여 각 명단이 빠져있고, ‘양시(兩試)’와 ‘연벽(聯璧)’의 명단만 기재되어있다. 이어서 ‘초시무오년(初試戊午年)’의 시일, 시관, 시제, 장원, 각도시관 및 장원, 승보와 합제의 명단이 있고, ‘병진(丙辰) 5월 15일(대왕대비전탄신응제(大王大妃殿誕辰應製))’과 ‘병진(丙辰) 6월 25일(대왕대비전탄신응제(大王大妃殿患候平復應製))’에 각각 춘당대(春塘臺)에 친림(親臨)하여 시취(試取)한 시관, 시제, 유학응제(幼學應製) 명단이 첨부되어 있다. 그리고 ‘회시동년년(會試同年)’의 시일, ‘시제(試題)’, ‘생진경외입격수(生進京外入格數)’를 차례로 기재하였다. 마지막 하단에는 ‘기미계춘예각활인(己未季春藝閣活印)’이라 하였다. 1858년 9월 9일, 1858년 9월 21일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2AC15C6A9FFFFB1826X0
자 대용(大用)
생년 병술(丙戌) 1826년(순조 26)
합격연령 33세
본관 진주(晉州)
거주지 영동(永同)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100명
전력 유학(幼學)
과목 이의(二義)
부모구존 구경하(具慶下)
[가족사항]
[부]
성명 : 강석중(姜錫重)
품계 : 장사랑(將仕郞)
[출전]
《숭정기원후4무오식사마방목(崇禎紀元後四戊午式司馬榜目)》
(하버드옌칭도서관[TK 2291.7 1746 (1858)])
2005-11-30《숭정기원후4무오식사마방목(崇禎紀元後四戊午式司馬榜目)》(하버드옌칭도서관)을 저본으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철종 10권, 9년(1858 무오/청함풍(咸豊) 8년) 9월 7일(기묘) 1번째기사
과시에 사사로움을 없애고 공정하게 행할 것을 하교하다
하교하기를,
“일전에 과시(科試)를 공도(公道)를 넓히는 뜻으로 연중(筵中)에서 칙유(飭諭)한 바 있으니, 연석에 있던 제신(諸臣)들은 나의 마음을 다 알았을 것이다. 과시의 공불공(公不公)에 국맥(國脈)의 장단(長短)이 달려있는 것이다.
현능(賢能)한 사람을 선발하여 뒷날의 수용(需用)에 도움이 되게 하자는 것이 곧 과거(科擧)를 설치한 본의(本意)인 것이다.
그런데 근래 온갖 폐단이 마구 생겨 선비가 된 사람은 당초 거업(擧業)을 정습(程習)하지않고서 찬자(鑽刺)819)만을 일삼고 시관(試官)이 된 사람은 또한 국체(國體)를 돌보지않고 청촉(請囑)만을 들어주었기 때문에 한 번 과시(科試)를 거칠 때마다 번번이 더한층 울불(鬱沸)함을 빚었으니, 조정의 기강이 실추(失墜)되고 국사가 어그러지며 군정(群情)이 혼란하여진 것이 여기에서 연유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는가? 주사(主司)의 신하가 진실로 정백(精白)한 마음으로 면려하여 먼저 가슴속에 있는 하나의 ‘사(私)’자를 제거한다면 인재가 나오지않고 선비들의 추향이 단정하지못하며 백성들의 뜻이 안정되지않고 국세(國勢)가 존엄해지지 않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만일 그렇게 하지않으면 단지 물이 더욱 깊어져 차츰차츰 젖어들어가 빠져서 패퇴(敗頹)하는데 이른 뒤에야 그만두게 되는 것을 보게될 것이다. 모두들 이런 뜻을 알고서 대양(對揚)할 방도를 마련하라.”하였다.
註819]찬자(鑽刺): 일을 주선할 적에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을 써서 소개를 넣는 것을 말함.
○己卯/敎曰: “日前以科試恢公之意, 有所飭諭於筵中, 登延諸臣, 庶悉予心。 而科試之公不公, 國脈之延促係焉。 簡拔賢能, 以爲他日需用之資者, 卽設科本意。 伊來百弊滋生, 爲士子者, 初不程習擧業, 惟鑽剌爲事, 爲試官者, 亦不顧念國體, 唯干囑是視, 每經一番科試, 輒致一層沸鬱, 朝綱之隳弛, 國事之泮渙, 群情之泯棼, 未必不由於是。 興言及此, 寧不慨歎? 主司之臣, 苟能精白淬勵先去胸中之一和字何患乎人才之不進, 士趨之不端, 民志之不靖, 國勢之不尊乎? 如未然者, 只見眞如水益深, 浸浸然至於淪胥以敗而後巳矣。 感悉此意, 以爲對揚之道。”
철종 10권, 9년(1858 무오/청함풍(咸豊) 8년) 9월 13일(을유) 1번째기사
식년감시의 복시 일소·이소에서 방목을 올리다
식년(式年) 감시(監試)의 복시(覆試) 일소(一所)·이소(二所)에서 방목(榜目)을 올렸다. 일소에서는 유학(幼學) 최태준(崔泰準), 이소에서는 유학 이민실(李敏實)이 으뜸을 차지하였다.
○乙酉/式年監試覆試一二所進榜目, 一所幼學崔泰準, 二所幼學李敏實居首。
철종 10권, 9년(1858 무오/청함풍(咸豊) 8년) 9월 17일(기축) 2번째기사
경과 정시의 문·무과를 행하다
경과(慶科) 정시(庭試)의 문과(文科)를 경복궁(景福宮)에서, 무과(武科)를 모화관(慕華館)에서 행하였다. 문과에는 이조신(李肇信)등 3인을 뽑고, 무과에는 최규오(崔圭五)등 2백67인을 뽑았다.
○行慶科庭試文科于景福宮, 武科于慕華館, 文科取李肇信等三人, 武科取崔圭五等二百六十七人。
철종 10권, 9년(1858 무오/청함풍(咸豊) 8년) 9월 22일(갑오) 2번째기사
생원·진사의 사은을 받다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친히 생원(生員)·진사(進士)의 사은(謝恩)을 받았다. 하교하기를,
“생원 박효예(朴孝藝)·김대규(金大奎), 진사 고몽수(高夢洙)·최동익(崔東益)·한세유(韓世裕)·박민헌(朴敏憲)·이두언(李斗彦)·안형(安炯)은 아울러 오위장(五衛將)에 단부(單付)하게 하라.”했는데, 나이가 70세이기 때문이었다.
○御熙政堂, 親受生進謝恩。 敎曰: “生員朴孝藝、金大奎, 進士高夢洙、崔東翼、韓世裕、朴敏憲、李斗彦、安炯, 幷五衛將單付。” 以年七十也。
강용(姜鏞) 대용(大用) 1826 ~ ? 진주(晉州) 2등(二等) 23위
강영수(姜穎秀) 여수(汝修) 1819 ~ ? 진주(晉州) 3등(三等) 53위
강유(姜瑬) 원달(源達) 1832 ~ ? 진주(晉州) 3등(三等) 59위
강기석(姜琦奭) 공규(公圭) 1822 ~ ? 진주(晉州) 3등(三等) 70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