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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대학교 동양사상의 이해
1조
다음 글은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발췌한 것으로 플라톤의 철인 정치(哲人政治)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글을 읽고 철인 정치 사상의 의의와 현대 사회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지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시오.
['철인 정치(哲人政治)'론 -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그렇지만 소크라테스님, 만약 그렇게 말씀을 이어가시도록 허락되신다면, 이 모든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앞서 미루어 놓았던 문제, 즉 이러한 국가 체제가 생길 수 있는가, 또 어던 방식으로 생길 수 있는가의 문제에 관해서는 영영 말씀하시게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는군요. 왜냐하면 만약 그것이 생길 수 있다면 그렇게 생겨난 나라는 온갖 좋은 것을 가지리라는 점을 저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선생님께서 그냥 지나치신 것까지도 저는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즉, 그들은 형제라든가 아버지라든가 아들로서 서로 잘 알고 있고, 또 서로 그런 이름으로 부르고 있어서 피차에 버리는 일이란 극히 적기 때문에 적들과 가장 용감하게 싸우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만약 여성도 적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같은 대열이건 그 후방에 배치되건, 또는 필요한 경우의 예비로서건, 어쨌든 남성과 함께 출전한다면, 그것으로 하여 그들에겐 절대로 당할 자가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라 안에서도, 선생님께선 빼놓으셨지만, 그들이 누릴 모든 좋은 것을 저는 보고 있읍니다. 그러나 그런 국가 체제가 생기게 되면, 제가 그 모든 것이나 그밖에 헤아릴 수 없는 좋은 것들을 가지리라는 것을 찬성한다고 생각하시고, 국가 체제에 관해서는 더 말씀하실 것 없고 오히려 바로 이 점, 즉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과 또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라는 점을 우리 자신이 알아듣도록 해봐야겠고, 그밖에 다른 모든 것에는 작별을 고하도록 하시죠."
"자, 그렇다면 우선 첫째로 우리는 정의와 부정이 어떤 것인지를 탐구하면서, 이 점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상기(想起)해야겠네."하고 내가 말했네.
"그래야죠. 그런데 그것이 어떻단 말씀입니까?"하고 그는 말했네.
"아무 것도 아닐세. 그러나 정의가 무엇인지 우리가 발견한다면, 정의로운 사람은 바로 그 정의라는 것과 결코 달라서는 안되고, 오히려 정의와 전적으로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요구할 것인가? 또는 그것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있어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가장 많이 그것을 함께 나누고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겠는가?"
"그 정도라면 우리에겐 만족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우리가 찾아내서 증명하기에 힘써야 할 것은, 오늘날의 나라들에서 도대체 무엇이 서투르게 이뤄지고 있길래, 앞서 말한 대로 국가가 조직되는 걸 막고 있는가? 그리고 또 가장 작은 변화를 통해 어떻게 우리가 이상으로 하는 국가 조직을 실현시킬 수 있는가? 그 변화(변혁)는 될 수 있는 한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겠지. 그것으로 족하지 못할 경우엔 두 번, 그래도 안 될 경우엔 가능한 한 적을수록 좋겠으며, 힘의 규모에서도 적었으면 좋겠군."
"그렇고말고요"하고 그는 말했네.
"그런데 내 생각엔 한 가지 변화로도 나라를 변혁시키리라는 것을 우리는 논증할 수 있다고 보는데, 그건 작은 것도 아니고 쉬운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할 수는 있는 것일세"하고 내가 말했네.
"그것이 무엇입니까?"하고 그는 말했네.
"우리가 가장 큰 파도에 비유했던 바로 그것에 내가 올라타고 있는 셈일세. 어쨌든 말하기로 하겠네. 하기야 깔깔대고 웃음을 터뜨리는 파도처럼, 웃음과 경멸로 나를 휩쓸어 버릴 것 같긴 하네만, 그러나 내가 말하려는 것을 고려해 보게나"하고 내가 말했네.
"말씀하십시오"하고 그는 말했네.
"만약 철학자들이 여러 나라에서 왕이 되든가, 또는 우리가 오늘날 왕이나 통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그리고 충분히 철학을 하든가 해서, 이것들, 즉 정치 권력과 철학적 정신이 일체가 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또 현재로서는 그들 중 어느 하나를 따로 떼어서 추구하고 있는 숱한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를 억지로라도 금지당하지 않는다면... 여보게 글라우콘, 내가 생각하기엔 여러 국가들이나 인류에게도 재앙이 그치지 않을 걸세. 또 지금 우리가 말로 설명해 온 국가체제가 가능한 한도 안에서 그때까지 생겨나서 햇빛을 보는 일은 결코 없을 걸세. 그러나 오래 전부터 내가 말하기를 주저한 것이 바로 이것일세. 매우 앞뒤가 안맞는 말을 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으니 말이야. 왜 그런고 하니, 다른 어떤 국가 체제는 개인에게도 사회에도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일세."하고 나는 말했네.
그러자 그는 "소크라테스님, 이왕 그런 말씀을 던지신 바에야 만만치 않은 떼거리가 이제 곧, 말하자면 옷을 벗어 던지고 알몸이 되어서, 저마다 손에 닥치는 대로 무기를 움켜잡고 엉뚱한 짓을 할 셈으로 선생님을 향해서 온갖 힘을 기울여 밀어닥치리라는 것을 각오하셔야 합니다. 만약에 이 사람들을 말로 막아 내어서 물리치지 못하신다면, 정말로 웃음거리가 되시고 벌금을 물으셔야 할 겁니다"라고 말하더군.
"내가 그렇게 되는 것이 다 자네 탓이 아닌가?"하고 내가 말했네.
"그렇죠. 그리고 제가 그렇게 한 것은 잘한 일이죠"하고 그는 말하더군. "그래도 저는 선생님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제가 할 수 있는 힘을 다해서 지켜드릴 것입니다. 저는 선의(善意)와 격려로 그렇게 할 수 있고, 아마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적절하게 대답해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협조자가 있으니 의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납득하루 수 있도록 힘쓰셔야겠습니다."
"물론 힘써야겠지. 특히 자네가 그렇게 큰 동맹(同盟)을 제공해 주니 말일세. 그런데 만약 우리가 자네가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어떻게 해서든 도망을 가자면 그들에 대해서 철학자들이 지배해야 한다고 감히 우리가 말할 때, 그 철학자란 누구를 뜻하는 것인지 그것을 규정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 까닭은 그런 일들이 분명하게 구별될 경우에, 어떤 사람은 철학에 종사하고 나라의 지도자가 되기에 적합하게 태어났지만, 다른 사람은 그것에 종사하지 않고 지도자에게 따르는 일에 적합하다는 것을 보여 주어서, 우리 자신을 방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일세"라고 내가 말했네.
"바로 정의(定義)를 내릴 때로군요"하고 그는 말하더군.
"자 그렇다면 이렇게든 저렇게든 해서, 우리가 그것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으리란 희망으로 내 뒤를 따라오게나."
"이끌어 주십시오"하고 그는 말했네.
2조
다음 글을 읽고 인간의 본성이 선한지 악한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시오.
1. 인간의 악한 본성은 원래 악한 것이니, 선이란 인위적으로 된 것이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이익을 추구하게 마련이므로, 그대로 내버려 두면 서로 싸우고 빼앗기 때문에 양보란 있을 수 없을 것이요, 또 나면서부터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게 마련이므로, 그대로 내버려 두면 남을 해치고 상하게 할 줄만 알 뿐 신의나 성실성은 없을 것이다. 또, 귀로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눈으로 아름다운 것을 보려는 감각적 욕망이 있으니, 그대로 두면 무절제하여 사회 규범으로 지켜야 할 예의나 규범의 형식적 절차인 문리(文理)는 없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타고난 성질이나 감정에 맡겨 버린다면 반드시 서로 싸우고 빼앗아 사회의 질서를 파괴하고 세상을 혼란에 빠지게 할 것이니, 반드시 스승의 교화와 예의의 법도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남에게 사양할 줄도 알고 사회의 질서를 지킬 줄도 알아 세상의 평화가 유지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사람의 천성은 원래 악한 것이 분명하며, 선이란 인위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구부러진 나무는 반드시 도지개를 대고 불에 쬐어 바로잡아야 곧게 되고 무딘 칼은 반드시 숫돌에 갈아야 날카로워지는 것처럼, 사람의 본성은 악하기 때문에 반드시 스승이 있어야 바로잡히고 예의를 얻어야 다스려질 것이다. 만일 스승이 없으면 편벽된 데로 기울어져 부정해질 것이요, 예의가 없으면 난폭해져서 다스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왕(聖王)이 이를 위하여 예의를 일으키고 법도를 세워 성정(性情)을 교정하고 훈련함으로써, 사회 규범에 따르고 도리에 맞도록 한 것이다.
이제 사람들을 살펴보면 스승의 감화를 받고 학문을 쌓아서 예의를 숭상하는 사람은 군자가 되고, 제 성정대로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예의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소인이 된다. 이로써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 분명하며 선은 인위적인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맹자는 말하기를 , "사람이 학문을 하는 것은 그 본성이 선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으로서, 사람의 본성을 잘못 이해하여 타고난 본성과 후천적으로 교정된 성정을 구분하지 못한 것이다. 무릇 본성이란 타고난 대로를 말하는 것이니, 배워서 되는 것도 아니요, 행동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예의는 성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니, 배우고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배우지 않고 행하지 않아도 그대로 있는 것을 본성(本性)이라 하며, 배우고 노력해야 되는 것을 인위(人爲)라 한다. 이것이 성(聖)과 위(僞)의 구별인 것이다. 이제 사람의 본성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니, 볼 수 있는 밝은 눈을 떠나서 있을 수 없고, 들을 수 있는 밝은 귀를 떠나서 있을 수 없으므로, 눈이 밝고 귀가 밝은 것은 배워서 된 것이 아니다.
맹자는 말하기를, "사람의 본성은 착하지만 악한 이유는 모두 본성을 잃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사람의 본성은 나면서 곧 그 소박을 떠나고 그 소질을 떠나게 마련이니, 잃어 버릴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성은 악하다. 이른바 성이 선하다는 것은, 그 소박한 것을 떠나지 아니할 때를 미(美)로 보고, 그 소질을 떠나지 아니할 때를 선으로 본 것이다. 따라서, 그 소박한 것과 미와의 관계를 또는 그 소박한 본질과 선과의 관계가, '보는 것의 밝음이 눈을 떠나지 않고 듣는 것의 밝음이 귀를 떠나지 않는 것'과 같을 때를 두고 '성이 선하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이 배고프면 배불리 먹고 싶고 추우면 따뜻하게 입고 싶으며, 고단하면 쉬고 싶은 것이 본성이다. 그런데 배고파도 먼저 먹지 못하는 것은 어른에게 양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릇 자식이 아비에게 사양하고 아우가 형에게 사양하며, 또 자식이 아비 대신 일하고 아우가 형 대신 일하는 것은 두 가지가 다 본성에 위배되는 것이요, 성정에 어긋난다. 그러나 효자의 도리는 예의의 규범이다. 그러므로 성정대로만 하면 사양할 까닭이 없고 사양하면 오히려 성정에 반하는 것이 된다. 이로써 사람의 성정이란 악한 것이 분명하며, 선이란 인위적인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 대개 사람이 착한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은 그 본성이 악하기 때문이다. 박하면 후하기를 원하고 추하면 아름답기를 원하며, 좁으면 넓기를 원하고 가난하면 부유하기를 원하며 천하면 귀하기를 원하는데, 자기 속에 없는 것은 반드시 밖으로 구하는 것이다. 또한 부유해지면 재물을 원치 아니하고 귀해지면 권세를 원치 않게 되는 것이니, 사람은 또 자기 속에 있는 것은 절대로 밖으로 구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사람이 착한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은 그 본성이 악하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인간의 본성에는 처음부터 예의라는 것이 없다. 그래서 사람은 애써 배워서 그것을 갖고자 노력한다. 또, 인간의 본성 그 자체는 예의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알고자 노력한다.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방치해두면, 사람은 예의도 없거니와 예의를 전혀 알지 못한다. 사람은 예의가 없으면 어지러워지고 예의를 모르면 인도(人道)에서 벗어난다. 이로 미루어 보아 본성 그대로 놓아 두면 사람은 인도에서 벗어나 혼란에 빠지고 만다. 따라서, 분명히 인간의 본성은 악하며, 이것을 착하다고 말하는 것은 인위적인 노력에 의한 꾸밈의 결과일 뿐이다.
3조
아래의 글을 읽고 역사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역사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진술하시오.
[역사란 무엇인가 - E.H. Carr]
이 글(What is History)은 크게 6가지 부분 즉,「역사가와 그의 사실」, 「사회와 개인」, 「역사, 과학 그리고 도덕」,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진보로서의 역사」, 「지평선의 확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의 내용마다 저자의 역사관이 강력하게 드러나 있다. 즉 Carr는 역사를 '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 ' 라고 규정하고 역사는 역사가의 해석이며 인간 역사의 끊임없는 변화는 저자의 가치와 관념의 변화에 따라 언제나 다르게 해석될 수 있으며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Carr역사관의 핵심이다.
그러나 종래의 역사철학 관계 저서처럼 난잡한 이론으로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지 않고, 저자 자신의 깊고 넓은 역사 연구의 체험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예를 통해 역사의 문제점을 밝히고 자신의 명료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역사 이론을 개관하는 책이 아니라 탁월한 역사가인 저자의 역사관을 조리있게 밝힌 책이다. 물론 다시 역사 이론에 대한 비판도 없지 않지만 이 책은 저자의 역사관을 강력하게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그의 역사관은 한마디로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표현되어 있으며, 이것은 E.H.카아의 오랜 역사 연구에서 탄생된 역사철학인 것이다.
이런 핵심을 기반으로 해서 Carr는 여러가지 역사에서의 근본문제를 다루고 있다.
제 1장에서 다루는 것은 역사가와 사실에 대한 것이다. Carr는 19C의 랑케의 실증사학에 반기를 들었다. 즉, 역사적 사실은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사실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가 그 사실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자신의 해석에 따라 재구성함으로써 역사적 사실이 되는 것이라 한다. 그런데 역사가는 그가 사는 시대와 사회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므로 역사적 사건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기준은 현재에 있다. 따라서 역사란 ' 현재의 역사가와 과거 사실의 끊임없는 대화 ' 인 것이다. 즉,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 사실에 대한 단순한 암기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비추어 과거에 대한 이해를 촉진하고 과거에 비추어 현재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며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해 미래를 위한 교훈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다.
근대 역사학의 확립자 랑케는 "역사가란 자기 자신을 죽이고 과거가 본래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가를 밝히는 것을 그 지상과제로 삼아야 하며, 오직 사실로 하여금 이야기하게 해야 한다"고 언급함으로써 역사적 사실들. 그 자체에 큰 비중을 두었었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되는 역사인식론이 금세기에 크로체(Benedetto Croce)나 콜링우드(Robin G. Collingwood)에 의해 피력되었었다. 즉 "모든 역사는 현대의 역사(contemporary history)다" "모든 역사적 판단을 기초를 이루는 것은 실천적 요구이기 이기 때문에 모든 역사에는 현대의 역사라는 성격이 부여된다. 서술되는 사건이 아무리 먼 시대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역사가 실제로 반영하는 것은 현재의 요구 및 현재의 상황이며, 사건은 다만 그 속에서 메아리 칠 따름이다."라는 글들에서 보듯이 역사랑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을 통하여 현재의 문제의 관점에서 과거를 본다는 데에서 성립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의 비중이 크다는 것이다.
E.H. 카는 그러나 중심을 과거에 두는 역사관과 중심을 현재에 두는 역사관의 중간 입장을 취하고 있다. 즉,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과는 평등의 관계에 있는 것이며 말하자면 기브 앤드 테이크(give and take)의 관계에 있다. 역사가는 사실의 천한 노예도 아니오, 억압적인 주인도 아니다. 역사가란 자기의 해석에 맞추어서 사실을 형성하고 자기의 사실에 맞추어서 해석을 형성하고 하는 끈임없는 과정에 종사하고 있다. 요컨대 역사가와 역사상의 사실은 서로가 필요하다, 사실을 못 가진 역사가는 뿌리를 박지 못한 무능한 존재이다. 역사가가 없는 사실이란 생명없는 무의미한 존재라는 것이다. 역사란 결국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 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와의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카의 첫째 해답인 것이다.
제 2장 에서는 과거의 사건의 주역은 누구인가, 곧 역사적 원동력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내용이다. 종래의 역사가들은 위대한 천재적 개인의 창조력에서 역사의 원동력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Carr는 역사란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개인의 의도를 초월한 힘을 가지는 사회에 의해 형성된다고 한다. 역사가는 자신의 사실과 연구에 대해 어떠한 주관적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고 이러한 입장 자체에는 특정한 사회적, 역사적 배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역사가에 대한 것과 함께 그의 연구대상 역시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즉 역사가의 연구대상은 개인의 행동인가 아니면 사회적 힘의 작용인가라는 물음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역사가가 문제에 접근하는 입장부터를 파악하지 않고서는 그의 연구를 충분히 이해할 수도 없고 평가할 수도 없다. 동시에 그 입장 자체는 사회적 역사적 배경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카의 다음과 같은 언급들은 의미심장하다. 즉, 역사를 연구하기에 앞서서 우선 역사가를 연구하라. 역사가를 연구하기에 앞서서 우선 그의 역사적 사회적 환경을 연구하라.
요컨대 역사가는 개인인 동시에 역사와 사회의 산물이다.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과의 상호작용이라는 상호과정은,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라고 지적한 바 있지만, 추상적인 고립된 개인들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오늘의 사회와 지난날의 사회와의 대화인 것이다. 과거는 현재의 빛에 비쳐졌을 때에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현재도 과거의 조명 속에서만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과거 사회를 이해시키고 현재 사회에 대한 그의 지배를 증진시킨다는 것이 역사의 이중적 기능이라는 것이다.
제 3장의 역사의 과학성, 제 4장의 역사의 연구는 원인에 관한 연구이다.
사회과학이라는 학문분야가 전반적으로 겪고 있는 과학화의 어려움에 대해서 논하면서 역사학의 정체성에 대해 그가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부분이다. 즉,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과학에 대한 개념을 그는 전면적으로 재수정될 것과 사회과학 특히 역사학은 만약 이러한 과학에 대한 개념이 바뀌지 않을 경우, 과학이 아니라고 까지 주장하고 있다. 카아는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기본 목적이나 근본절차에 있어서 방법은 동일하다고 생각했으며, 어떤 과학이든 인간과 환경의 상호작용 및 상호관계를 연구함으로써 인간의 환경에 대한 이해력과 지배력을 증대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역사가와 자연 과학자는 설명해야 할 기본적인 목적과 문제를 제기하고 대답하는 기본적인 방법에서는 똑같아진다.
역사가들이 연구과정에서 사용하는 가설의 지위와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가설의 지위와의 사이에는 놀라운 유사성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 카는 역사를 과학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과학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잘못이라는 견해들이 있는데, 이에 대한 카의 반론은 이렇다.
첫째, 역사는 특수와 개별을 취급하고 과학은 일반적인 것, 보편적인 것을 취급한다. 고로 역사는 과학이 아니다. 그러나 역사가들이 진실로 관심을 가지는 것은 특수한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것 속에 있는 일반적인 것이다. 즉 역사는 특수한 것과 일반적인 것과의 관계를 취급하는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역사는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역사는 교훈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반화라는 문제의 진정한 핵심은 이를 통해서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으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즉, 어떤 한 경우의 사건에서 얻어낸 교훈을 딴 대목의 사건에 적용한다는 것이다.
셋째, 역사는 예언할 수 없다. 그러나 소위 과학적인 법칙이란 것도 하나의 경향성을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역사가에게는 일반화란 불가피한 것이고, 또한 일반화를 통해서 비록 個別的인 예언은 아닐지라도 미래 행동을 위한 타당하고도 유용한 일반적인 지침을 마련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넷째, 역사는 불가피하게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이 인간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자연과학 분야도 어느 정도까지는 지각하는 주체(인간)와 지각되는 객체(자연력)간의 상호관계와 의존관계를 내포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섯째, 역사는 과학과는 달리 종교와 도덕의 문제를 내포한다. 그러나 역사와 종교와의 관계에서, 진지한 역사가라면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믿을 수는 있겠지만 낮시간을 연장시킨다거나 하는 구약성서식의 신을 믿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또 역사와 도덕과의 관계에서, 역사가는 과학자와는 달리, 취급하는 자료의 성질상 도덕적 판단의 문제 속에 들어가게 되지만, 이것이 곧 역사가 가치라고 하는 초역사적인 규준의 지배를 받는다는 뜻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 4장에서 역사가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끊임없이 왜라는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 하나의 동일한 사건에 대해 여러 가지 원인을 제시한다. 물론 역사가의 역할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렇게 발견한 원인들을 정리하고 평가한다. 그렇다면 역사가가 이러한 역사의 원인들을 평가하는 가치판단 기준은 무엇일까? 어떤 것이 더 결정적이며 또 어떤 것은 우연으로 평가되는 것일까? 이 장에서는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카의 고민이 담겨있다.
역사의 연구는 원인의 연구이다. 따라서 역사가는 많은 원인의 복합체를 취급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진정한 역사가라면 자기가 작성한 여러 원인의 목록을 앞에 놓고서는, 그것을 질서지여야 하겠다. 제 원인의 상호관계를 결정할 수 있도록 거기에 상하관계를 설정해야 하겠다. 혹은 "결국에 가서는""궁극적으로는" 어떤 원인과 어떤 종류의 원인을 최종 원인, 즉 모든 원인 중의 원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인가를 결정지어야 하겠다는 직업적인 강박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것이 주제에 대한 역사가의 해석이다.
결국 역사란 역사적 의의라는 견지에서 행하여지는 선택과정이다. 역사가는 다수의 인과연쇄 가운데서 역사적으로 의의있는 것들을, 아니 그것들만을 빼내는 것이다. 여기서 역사적 의의에 대한 규준이 되는 것은 자신의 합리적 설명과 해석의 원형 속에 인과연쇄를 맞추어 넣는 역사가의 능력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과거의 기록이 보존되기 시작한 것은 미래 세대의 복지를 위한 것이었다. 훌륭한 역사가들은 역시 미래라는 것을 뼈속 깊이 느끼는 사람들이다. 역사가는 왜냐라고 묻는 동시에 어디로라고 묻는 법이다.
제 5 장에서는 역사의 진보성을 고민하고 있다. 역사는 과연 진보하는가? 이 물음에 앞서 진보라는 것이 지니는 의미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진보는 흔히 진화와 혼동되어 왔으며, 진화가 생물학적인 유전에 기반하고 있는 데 대해 진보는 사회적인 획득에 그 배경을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에서의 진보는 한 세대에 의해서 획득된 기술이 다음 세대로 전승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역사의 진보는 어디에서 출발하여 어디에서 끝을 맺는가, 역사의 종착점은 어디인가?라는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카는 진보라는 것을 계속되는 여러 시대의 요구사항과 조건에 의해서 각 시대만의 특정한 내용이 채워지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때문에 진보의 목적은 앞으로 계속 펼쳐질 시대를 따라 한없이 먼 곳에 있는 어떤 것이며 그것을 향한 지표는 우리가 계속 전진해야만 시야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란 과연 끊임없는 전진의 연속일까? 여기서 우리는 과연 진보라는 것이 무엇이고, 현실을 박차고 보다 더 나은 곳으로 향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해볼 수 있다.
역사가가 직면한 난관은 인간 본성의 한 반영이다. 갓 태어난 유아기라든가 아주 고령인 경우는 아마 다르겠지만, 인간이란 결코 완전히 환경에 휘말려 들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환경에 순종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반면에 인간은 또 환경에서 완전히 독립된 것도 아니고, 절대적인 주인도 아니다. 인간과 환경의 관계는 역사가와 주제의 관계다. 역사가는 사실의 천한 노예도 아니고, 군림하는 주인도 아니다. 역사가와 사실의 관계는 기브 앤드 테이크의 평등한 관계이다.
역사가가 실제로 생각하고 쓰고 할 때의 자기 자신의 작업태도를 조금만 반성해 보면 알 일이지만, 역사가는 자신의 해석에 따라서 자신의 사실을 만들어내고, 자신의 사실에 따라서 자신의 해석은 만들어내는 연속적인 과정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쪽을 다른 쪽 위에 올려놓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역사가는 사실의 일시적 선택과 일시적 해석으로(이 해석에 입각하여 자기 자신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도 일시적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지만)출발하는 것이다. 일이 진척됨에 따라 해석도, 사실의 선택과 정리도, 그 상호작용을 통하여 거의 무의식적인 미묘한 변화를 입게 된다.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이고, 사실은 과거에 속하므로, 이 상호작용은 또한 현재와 과거의 상호관계를 포함하고 있다.
역사가와 역사상의 사실은 서로가 필요한 것이다. 사실을 소유하지 못한 역사가는 뿌리도 없고 열매도 맺지 않는다. 역사가가 없는 사실은 생명도 없고 의미도 없다.
E.H.Carr의 여섯가지 주제를 정리하여 보면 크게 이견이 제기되지 않는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였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서술하고 해석하는 방법론에서 금세기에 가장 빛나는 과학에 관하여, 그리고 역사의 일반화와 현대관, 미래관에 대해서 명확하고도 깔끔하게 쓰여진 글이다. 대체로 보수적인 성향을 띠고 있으며, 그런 점이 아직까지 다른 나라 대학에서 읽혀질 정도로 보편성을 띠게 한다고 생각된다. 이 책을 완전히 그리고 비판을 곁들여 읽으려면 상당한 지식을 갖추어야 힐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요지인 ' 역사는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 ' 라는 이 한마디를 정확히 이해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4조
아랫 글은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중에서 발췌한 글이다. 윗글을 참고하여 우리 일상 생활에서 소유 양식에 의한 다양한 사례를 찾아보고 에리히 프롬의 관점에 따라 어떻게 개선되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밝히시오.
[일상적 경험에서의 소유와 존재 - 에리히 프롬]
우리가 몸 담고 살고 있는 사회는 전적으로 소유 지향과 이윤 추구로 처방된 사회이다. 따라서 존재적 실존 양식의 실례는 찾아보기 힘들고, 대다수 사람들은 소유를 겨냥하는 실존을 당연한 것으로, 그야말로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 방식으로 여긴다. 이 모든 현상은 특히, 존재라는 실존 양식의 특성을 이해하고 결국 가능한 유일한 인간의 성향이 소유라는 사실마저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가지 개념은 인간의 경험에 근거한다. 두 개념 가운데 그 어느 쪽도 순전히 추상적으로, 이성적 방식으로만 고찰되어서는 안되며, 또 그럴 수도 없다. 두 개념은 모두 우리의 일상 생활에 반영되는 것으로, 따라서 구체적으로 취급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에 서술한 일상 생활에서 나온 단순한 실례들은 소유와 존재의 선택적 양식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도와주리라고 생각한다.
<학습>
소유적 실존 양식에 길든 학생들은 강의를 들을 때, 놓치지 않고 어휘들을 경청한 뒤 그 논리적 연관과 의미를 파악하여 가능한 한 모조리 노트에 기록한다. 그래서 필기한 것을 나중에 암기하여 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그들 고유의 사고 체계를 풍요롭고 폭넓게 하는 구성 요소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들은 그 둘이 들은 강의 내용을 경직된 사고의 집합체, 또는 그들이 저장해 놓은 온갖 이론들 속에 억지로 밀어넣는다. 학생들 각자가 남이 확인해 놓은 주장들(그 주장들이 발설자의 창의에서 나왔거나 다른 원전에서 인용된 것이거나 간에)을 소유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강의 내용과 학생들은 여전히 생소한 관계에 있다.
소유적 실존 양식에 젖어 있는 학생들은 오로지 한 가지 목표를 겨누다. '학습한 것'을 기억 속에 새기거나 기록을 용의주도하게 보관함으로써 굳게 지키는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거나 생산할 필요가 없다. 사실상 '소유형' 인간은 자신의 주제에 고나한 새로운 사상이나 관념에 맞닥뜨리면 불안해한다. 그럴 것이, 새로운 것은 그가 수집하고 확보한 기존 정보를 회의하게끔 몰아세우기 때문이다. 세계와의 관계에서 소유를 주형태로 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쉽게 기록되어 고정될 수 없는 사상들이야말로 성장하고 변하며 따라서 다스릴 수 없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두려움의 대상이다.
존재 양식으로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는 학생들은 학습 과정에서 전혀 다른 특질을 보인다. 우선 그들은 첫 강의부터 백지 상태(tabula rasa)로 참여하지 않는다. 그 강의가 다루는 주제를 미리 고찰하고 특정한 문제와 의문에 대해서 골몰한다. 그들은 강의 주제를 놓고 이미 씨름한 바가 있어 그것에 흥미를 느낀다.
그들은 그저 수동적으로 낱말과 사상을 수신하지 않고, 경청하며, 듣는 데에 그치지 않고 능동적으로 생산적으로 수용하고 대응한다. 그들이 들은 것은 그들 고유의 사유 과정을 자극한다. 새로운 의문, 새로운 관념, 새로운 전망이 떠오른다. 경청 행위는 그 자체로 살아 있는 과정이다. 학생은 선생이 말하는 어휘들을 수용하고 그것에 대응하면서 생기를 얻게 된다. 그가 습득한 것은 단순히 집으로 들고 가서 암기할 수 있는 그런 지식에 그치지 않는다. 모든 학생은 자기 나름대로 충격을 받고 변화한다. 강의를 들은 후에는 그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다.
<학습>
대화에 해당되는 요체는 작가와 독자 사이의 대화라고 할 수 있는, 마땅히 그래야할 독서의 경우에도 십분 해당된다. 물론 독서를 할 때는(대화를 할 때와 마찬가지로) '무엇을' 읽는가(또는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술성 없이 싸구려로 만들어진 소설을 읽는 과정은 백일몽과 같은 형태이다. 그런 독서는 생산적 반응을 허용하지 않는다. 텍스트는 시시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듯, 또는 화면을 보면서 씹어먹는 감자 칩처럼 무심코 삼켜질 뿐이다. 그와는 달리, 예컨대 발자크의 소설 같은 것은 진심으로 관여하는 생산적 독서, 다시 말하면 존재 양식으로서의 독서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책들도 십중팔구는 소비 행위 - 즉 소유 양식으로 - 읽힌다. 독자는 호기심에 이끌려서 줄거리를 알고 싶어한다. 주인공이 사아 남는지 죽는지, 여주인공이 유혹에 빠지는지 아닌지를 궁금해한다. 이런 경우 소설 텍스트는 독자를 흥분시키는 일종의 전희 역할(前戱役割)을 하며, 행복하든 불행하든 그 결말이 절정을 이룬다. 결말을 알고 났을 때 독자는 마치 자기 자신의 기억들을 헤집어 본 듯이 현실감 있게 이야기 전체를 소유한다. 그러나 그가 획득한 인식은 아무것도 없다. 소설 주인공을 파악하여 인간의 본성을 통찰하는 능력도 심화시키지 못했고, 스스로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깨우친 바도 없다.
철학서나 역사서를 읽을 때도 이런 차이는 드러난다. 철학서나 역사서를 대하는 올바른 독서 태도 - 또는 나쁜 독서 태도 - 는 교육의 결과이다. 학교는 모든 학생에게 일정한 양(量)의 '문화적 자산'을 전달하려고 애쓰고 있고, 수업 기간이 끝나면 각 학생에게 그 중 최소한의 것은 습득했음(소유했음)을 입증하는 졸업장을 준다. 따라서 학생은 책을 읽을 때 저자의 주요 사상을 뒤따라서 암기하는 식을 주입받는다. 이런 방식으로 학생들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칸트 그리고 하이데거와 사르트르까지를 알게된다. 고등학교에서 대학교에 이르는 교육 수준의 차이는 주로 전수받은 교양적 자산의 양적(量的) 측면에서 드러나며, 전수받은 교양적 자산은 어쩌면 학생들이 훗날 생애에서 관장할 물질적 자산의 양과 비례할 수도 있다. 우수하다고 인정받는 학생은 과거 철인들이 말한 경구를 가장 정확하게 따라 외울 수 있는 학생들이다. 그는 해박한 박물관 안내인과 비견된다. 지식의 소장품 외곽의 것은 습득하지 못한다. 선대 철인들을 문제의 과녁에 놓고 그들을 대상으로 대화를 펼치기를, 그들도 자기 모순을 지니고 있으며 어떤 문제들은 제쳐 놓고 어떤 주제들은 회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기를 배우지 못한다. 언제 작가가 순준히 머리로만 이야기하는지, 언제 마음과 머리를 다해서 말하는지를 느끼지 못하며, 작가가 진실된 인물인지 허풍선인지 - 그 밖의 여러 가지를 깨닫지 못한다.
이와는 달리 존재 양식으로 책을 대하는 독자는 아무리 저명한 저서라도 다소간에 무가치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확신에 이를 수 있다. 어쩌면 그는 때로는 작가 자신보다 그 책을 더 잘 이해할 수도 있다. 작가에게는 자신이 쓴 것은 모조리 중요하게 보였을 테니 말이다.
<지식>
지식의 영역에서 소유와 존재의 실존 양식의 차이는 '나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와 '나는 알고 있다'라는 두 가지 어법에서 드러난다.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함은 이용할 수 있는 지식[정보]을 획득하여 확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나는 알고 있다'는 의미에서의 앎은 기능적인 것으로 생산적 사고 과정의 한 부분이다.
존재 양식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지식[앎]의 특성에 대해서는 석가모니, 헤브루 예언자들, 예수, 에크하르트 수사, 지크문트 프로이트, 그리고 카를 마르크스 등으로 대표되는 사상가들을 떠올리면 깊이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이 보는 앎이란 이른바 상식적 지각이 가져다 주는 기만성(欺瞞性)을 인식하는데에서 출발한다. 물리적 현실에 대한 우리의 상(像)이 '참으로 실재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특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몽사몽의 상태에서 참이며 자명하다고 여기는 것의 상당 부분이 주변 사회의 암시적 영향으로 야기된 미망[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지 못하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따라서 앎[깨달음]은 미망을 깨뜨리는 것,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에서 비롯된다. 앎은 표면을 뿌리까지 뚫고 들어가서, 그래서 근원에 이르러서 적나라한 현실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진실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표면을 뚫고 들어가서 비판적이고 능동적으로 진실을 향해 가급적 접근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창조적 침투의 특질은 남성 성적(性的) 침투의 예에서 보여지는, 인식과 사랑을 의미하는 헤브루 어 jadoa에 내포되어 있다. 각성자 석가모니는 사람들에게 "깨어나라, 물질의 소유가 행복을 가져온다는 미망에서 벗어나라"고 설법한다. 헤브루 예언자들은 "깨어나라, 너희들이 섬기는 신은 너희 손으로 빚은 우상에 불과한 환상임을 알라"고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예수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 복음 8:32)라고 말한다. 에크하르트 수사는 인식에 관한 자신의 표상을 여러 차례 표현했다. 이를테면 신을 인식하는 문제와 상관하여 "그 인식은 어떠한 다른 사상도 첨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식 자체가 떨어져 나와 앞으로 달려나아가서, 알몸 그대로의 신을 접하고 자신의 존재 안에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적나라함'과 '알몸으로'라는 말은 에크하르트 수사와 <미지의 구름>을 저술한 익명의 그의 동시대인이 즐겨 썼던 표현이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자신의 상황에 대한 환상을 버리라는 요구는 환상을 요하는 상황을 파괴하라는 요구이다." 자기 인식에 대한 프로이트의 개념은 "무의식적 현실을 알기 위해서는 환상[합리화]을 파괴해야 한다."는 관념에 기초하고 있다.
이 모든 사상가들이 전념한 문제는 인간의 구원이었고, 그들 모두 사회적으로 안정된 기존의 사고 도식의 문제로 제기했다. 그들에게 앎[覺醒]의 목적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절대적 진리'를 확인하는 데에 있지 않고, 인간 이성이 스스로를 확증하는 과정에 있었다. 깨닫는 자[覺者]에게는 무지(無知)의 상태도 앎의 상태와 마찬가지로 좋은 것이다. 두 상태 모두 인식 과정의 일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의 무지는 사고(思考)으 게으름에서 오는 맹목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존재 양식의 지고의 목표는 보다 깊이 아는 것인 반면, 소유 양식의 지고의 목표는 보다 많이 아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교육 제도는 학생들에게 소유물로서의 지식을 공급해 주려고 애쓰고 있고, 그 지식은 이를테면 그들이 훗날 살아가면서 확보하게 될 재산이나 사회적 특권에 상응한다. 그들이 획득한 최소한의 지식은 장차 그들이 일을 원활히 하는 데에 필요한 양만큼의 정보인 것이다. 거기에다가 모든 학생은 각기 자신이 지닌 값에 대한 느낌을 높여 줄, 그리고 앞으로 그가 누릴 사회적 특권과 상응하게될, 크거나 작게 포장된 '사치스러운 지식' 꾸러미를 덤으로 받게 된다. 학교란 학생들에게 인간 정신이 쌓아 온 최고의 업적들을 전달해 주는 기관이라고 일반적으로 주장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이런 지식의 꾸러미들을 생산하는 공장에 불과한 것이다. 수많은 대학들은 이런 현상을 탁월하게 부양하고 있다. 인도의 철학과 예술에서부터 실존주의와 초현실주의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메뉴들이 긇고 있는 부뚜막'이 제공되고 있고, 학생들은 각자 이것저것 조금씩 맛을 본다. 학생들의 자발성과 자율성이 위축되지 않도록 하나의 주제에 집중하라고, 하다못해 한 권의 책이라도 끝까지 읽으라고 강력히 권하는 경우는 찾아볼 수가 없다.
<사랑>
사랑의 행위 역시 소유 양식으로 말해지는가 존재 양식으로 말해지는가에 따라서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사랑을 소유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있다면 사랑은 아마도 하나의 사물, 획득하고 소유할 수 있는 어떤 실체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사랑'이라는 사물은 없다. '사랑'이란 추상적 개념으로서, 여신(女神)이라든가 어떤 이질적인 존재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껏 그것을 목격한 사람은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사랑의 행위뿐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생산적인 활동이다. 사랑이란 - 그 대상이 이간이든 나무이든 그림이든 어떤 이념이든 간에 - 누구인가(또는 무엇인가)를 배려하고 알고자 하며, 그에게 몰입하고 그 존재를 입증하며 그를 보고 즐거워하는 모든 것을 내포한다. 그것은 그(그녀 또는 그것)을 소생시키며 그(그녀 또는 그것)의 생동감을 증대시킨다. 사랑은 소생과 생장을 낳는 과정이다.
그러나 소유 양식으로 체험되는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구속하고 가두며 지배함을 의미한다. 이런 종류의 사랑은 생명감을 불러일으키기는 커녕 목을 조여서 마비시키고 질식시켜서 죽이는 행위이다.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도 사실상 사랑의 부재를 은폐하려는 내용의 오용된 표현이기 일쑤이다.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자식을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도 전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다. 지나간 2,000년 서구 역사에서 볼 수 있는, 육체적 학대에서 정신적 학대에 이르기까지, 무관심과 순전한 소유욕에서 새디즘에 이르기까지 어린이들에게 가한 부모의 잔혹한 행위에 대한 보고들이 어찌나 충격적인지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통례라기보다는 예외라고 여겨질 지경이다.
결혼 생활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사랑을 바탕으로 결혼했든 전통적 방식으로 사회적 인습에 따라서 결혼했든 간에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부는 예외인 듯이 보인다. 사회적 편의, 전통, 경제적 타산, 자식에 대한 공유의 관심, 상호간의 의존, 또는 두려움이나 증오가 의식적으로 '사랑'으로 체험된다. - 마침내 그 중 한 사람이나 둘 다, 서로 사랑하고 있지 않으며 과거에도 사랑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까지는 말이다. 오늘날에는 이런 면에서 어느 부분은 진보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람들이 훨씬 현실적이고 냉철해져서, 많은 이들이 이미 사랑을 전제로 한 성적 매력을 주고받지 않으며, 친절하기는 해도 거리를 둔 공동 관계를 사랑과 맞먹는 것이라고 여긴다. 이 새로운 관점은 한결 정직한 면을 지니고 있고 - 파트너를 더 자주 바꾸는 현상을 낳는다. 그렇다고 그런 관점이 사랑하는 상대를 더 많이 만나는 결과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이 신세대 남녀들도 아마 옛 부부만큼이나 서로를 별로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에 빠짐'으로부터 사랑을 '소유하고' 있다는 환상으로 변해 가는 과정은 사랑에 빠진 적이 있는 남녀의 역사에서 그 구체적인 예들을 더듬어 볼 수 있다.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1956)에서 나는 '사랑에 빠짐'[falling in love]'이라는 개념 자체가 모순을 내포하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사랑하고 있음은 생산적 활동 상태이므로, 사랑 안으로 들어서거나 그 안에 자리잡을 수는 있겠지만, 그 속에 '빠질' 수는 없다. 이 동작은 수동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구애를 하는 기간에는 그 어느 편이나 상대방에 대해서 자신감이 없다. 연인들은 서로 상대방의 마음을 사려고 부심한다. 그들은 생기에 넘치고 매력적이며 관심을 돋우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 생동감은 항상 아름다운 얼굴을 만드는 법이니까. 아직은 어느 쪽도 상대방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말하자면 양측 모두 존재적 존재적 측면에, 다시 말하면 상대방에게 무엇이든 베풀고,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데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결혼과 더불어서 상황은 근본적으로 변한다. 결혼의 약속은 쌍방에게 상대방의 육체, 감정, 관심을 독점할 권리를 부여한다. 이제부터는 그 어느 편도 상대방의 마음을 사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이제 사랑은 소유하고 있는 무엇, 하나의 재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랑을 일깨우려는 노력도,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려는 노력도 수그러든다. 그들은 권태로워지고 각자 지녔던 아름다움도 소멸된다. 환멸을 느끼며 어쩔 줄 몰라한다. 그들은 이제 예전의 그들이 아닌 것일까? 시작부터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그들은 흔히 변해 버린 관계의 원인을 상대방에게서 찾으려고 들며 자신은 속았다는 느낌에 젖는다.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점은 두 사람 모두 서로 사랑에 빠졌던 그 때와는 이미 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 사랑을 소유할 수 있으리라는 그릇된 기대감이 결국 사랑을 정지시켰다는 사실이다. 지금 그들은 그 수준에서 서로를 조율하며 서로 사랑하는 대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 이를테면 돈, 사회적 지위, 가정, 자식을 공유한다. 따라서 사랑으로 시작된 결혼도 때로는 우호적인 공동 자산체, 즉 두 개의 자기 중심주의가 합자한 '가정'이라는 이름의 법인체로 변질된다. 아니면 이 법인체의 주주[부부]들은 흘러가 버린 감정이 소생하기를 갈망하면서, 다른 상대라면 자신의 열망을 채워 주리라는 망상에 자신을 맡긴다. 그러면서 자신이 바라는 것은 오로지 사랑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사랑은 한낱 우상이요 그 앞에 굴종하려는 여신일 뿐, 자신의 존재의 표현이 아니다. 그들이 사랑에 실패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모름지기 '사랑은 자유의 자식'(프랑스 옛 가요의 노랫말)이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여신을 숭배하는 사람은 그렇게 너무나 수동적인 위치로 떨어져 버려서 결국 권태로운 인간이 되고, 그나마 지니고 있던 지난날의 매력도 상실하게 된다.
이런 여러 가지 예를 확인했다고 해서, 결혼의 형태가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을 위한 최선의 길이라는 사실이 배제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결혼이라는 형태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배우자의 소유 지향적 성격 구조에,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 구조에 있다. 그룹 결혼, 파트너 교환, 그룹 섹스 등 현대적 형태의 공동 생활 제창자들은 내가 보는 한, 한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보다는 파트너의 숫자를 늘려서 끊임없는 새로운 자극으로 권태를 물리침으로써 사랑의 난점을 기피하려는 사람들이다.
5조
아래의 글은 밀턴 프리드만의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발췌한 글이다. 윗글을 읽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의 의미를 정리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균등이 가지는 의의와 한계는 무엇인지 구체적 논거를 들어 논술하시오.
<경제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의 관계>
일반적으로 정치학과 경제학은 분리되어 있으며, 서로 별 연관성이 없다고 믿고 있다. 즉, 개인적 자유는 정치적 문제이고 물질적 후생은 경제적 문제라고 보고 있으며, 어떠한 정치 제도도 어떠한 경제 제도와 결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잘 표현한 것이 '민주적 사회주의(democratic socialism)' 이다. 소련에서는 '전체주의적 사회주의(totalitarian socialism)'에 의해 개인의 자유가 제한되고 있는데 이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민주적 사회주의'는 찬양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소련식 경제 제도를 채택하면서도 정치 제도를 통해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런 이유 때문에 이들은 '민주적 사회주의'를 찬양하고 있다. 이 글의 주제는 그러한 견해는 몽상에 불과하며, 정치학과 경제학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정치 제도와 경제 제도 사이에는 오직 정해진 결합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해 준다는 의미에서는 민주적일 수가 없다.
경제 제도는 자유 사회를 촉진시켜 주기 위해 두 가지 역할을 한다. 하나는 경제 제도에서의 자유는 그 자체가 넓은 의미로 이해되는 자유의 한 구성 요소이기 때문에 경제적 자유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 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적 자유가 정치적 자유를 성취시켜 주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정치적 자유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경제 제도가 권력의 집중이나 권력의 분산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경제적인 자본주의 제도와 같이 직접 경제적 자유를 보장하는 경제 조직은 정치적 자유도 촉진시킨다. 왜냐 하면 이러한 자본주의 제도는 경제적 권력을 정치적 권력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이러한 과정에서 두 권력은 서로 상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와 평등주의>
자유주의 철학의 심장은 개인의 존엄성에 대한 믿음이고, 자기와 똑같은 것을 하려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 그 자신의 판단에 따라 자기의 능력과 기회를 활용할 수 있다는 자유를 믿는 것이다. 이것은 한 면에서는 사람들의 동등성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다른 면에서는 그들의 불균등에 대한 믿음을 의미한다. 각자는 자유에 대한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이것은 중요하고 기초적인 권리이다. 왜냐 하면 사람들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며, 이 사람은 자유를 가지고 저 사람과 다르게 하기를 원할 것인데, 그 과정에서 이 사람은 많은 사람들이 사는 사회의 일반적 문화에 대해 저 사람들이 하는 것보다도 더 많은 공헌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자는 한 면에서 권리의 균등과 기회의 균등을 정확하게 구분할 것이고, 다른 면에서는 물질적 균등이나 결과의 균등을 정확하게 구분할 것이다. 자유 사회는 사실 자금까지 시도된 어떤 다른 것보다 물질적 균등을 더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자유주의자는 환영할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는 이것을 자유 사회의 바람직한 부산물로 간주할 것이지 자유 사회의 주된 정당성으로 간주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자유와 균등 모두를 촉진하는 조치를 환영할 것이다. 이것은 독점력을 제거하고 시장 작용을 개선하려는 조치들이다.
자유주의자는 행운이 적은 사람들을 도우려는 민간 자선 행위를 자유가 적절하게 사용된 한 예라 간주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빈곤을 개선하기 위하여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지역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공동 목적을 달성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승인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발적인 행동 대신 강제적인 행동을 사용해야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유감을 가질 것이다.
평등주의자도 이렇게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는 더 나아가기를 원할 것이다. 그는 이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저 사람들로부터 받아 오는 것을 변호한 것인데, 이것은 '어떤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더욱 효과적인 수단으로써가 아니라 '정의'에 입각해서이다. 이 점은 균등성이 자유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점이며, 우리들은 이것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들은 평등주의자가 되면서 동시에 자유주의자가 될 수 없다.
<자유 사회에서의 정부의 역할>
정부는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재산권을 규정하고, 재산권이나 다른 경제적 게임의 규칙을 수정하는 수단이 되고, 그 규칙의 해석상 일어나는 논쟁을 조정해 주고, 계약을 이행시키고, 시장 경쟁을 촉진시키고, 화폐 제도를 제공해 주고, 정부 개입을 정당화시켜 주는 중요 요인인 기술적 독점을 제한 하면서도 근린 효과를 극복해 주는 활동을 하고, 민간 자선 활동을 보조해 주고, 정신 이상자나 아이들과 같이 책임감이 없는 사람들을 보호해 주는 민간 가족을 보조해 준다.
이러한 정부는 주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일관성 있게 자유주의자를 자부하고 있는 사람들도 무정부주의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정부도 분명히 제한된 기능을 가져야 하는 것이 사실이며 미국의 연방 정부, 주정부, 그리고 서방 국가들의 이러한 정부들이 오늘날 행하고 있는 많은 활동들도 제한 되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재분배를 위한 정부의 개입이 오히려 공평성을 저해>
자유를 신봉하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이 실수를 저지를 자유를 갖고 있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오늘을 위해서 살기로 작정하여 그가 가진 자원을 현재의 즐거움에 다 써버리고, 나이 들어서는 가난한 생활을 하기로 의도적인 선택을 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자격으로 그가 그와 같이 하지 못하도록 말릴 수 있는가? 우리는 그와 대화를 나눔으로써 그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것을 하지 못하도록 말리기 위해 강제력을 사용할 권리를 과연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일까?
첫댓글 4조 여러분 모여서 과제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