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12월 18일 월요일
제1독서 : 예레 23,5-8
복 음 : 마태 1,18-24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2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전에 자전거를 타다가 자동차와 부딪힌 적이 있습니다.
홀로 자전거 여행 중이었는데 차와 부딪힌 것이었지요. 너무 아팠습니다.
그런데도 이 차의 운전사에게 전혀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저의 성격이 좋아서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 차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은 주자 중인 차였기 때문입니다.
그 차는 가만히 있는데, 제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부딪힌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 차 안에 사람이 있었고 또 운전 중인 차였다면 저 역시 화를 냈을 것 같습니다.
아니 그렇게 운전하면 되냐고?
차는 약자라고 할 수 있는 자전거 운전자를 보호해야 하는 것을 모르냐고 하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차 안에 사람이 없으니 온전히 저의 잘못입니다. 누구 탓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구를 향해 화를 낼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꼭 화를 냈어야 했나 싶을 때도 있습니다.
물론 상대가 크게 잘못한 경우에 화를 낼 수도 있겠지만,
무조건 상대에게 책임을 물을 때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 자체를 지우고 그 상황만을 바라본다면 어떨까요?
실제로 화를 낸다고 문제가 반드시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또 화를 냄으로 인해 감정의 골이 깊어져서 상황이 더 꼬일 때도 많습니다.
전에 운전하면서 신호를 확인하고 좌회전하는데
제 좌측에 있는 차가 속도를 내어 직전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제 차의 왼쪽을 그대로 그 차가 와서 부딪혔습니다.
운전석에서 내려서 그 차를 향해서 갔습니다.
그리고 괜찮냐고 물으려고 하는데, 상대방 운전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아저씨? 그따위로 운전하면 어떻게 해요?”
더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보험회사를 불렀고, 결과는 상대방 과실 100%였습니다.
화를 내는 길보다 내지 않는 길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이 더 좋은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해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요셉이라는 인물을 만납니다. 그는 성모님과 약혼한 상태였지요.
그런데 마리아와 같이 살기 전에 아기를 잉태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다고는 하지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화가 치밀어 오르고, 배신당했다는 생각에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요셉 성인은 세상 사람들처럼 화를 내고 복수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를 마음에 담아둘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
이렇게 세상의 방법이 아닌, 하느님의 방법을 선택한 요셉 성인이었기에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방법으로 하느님의 뜻을 전달해 주셨습니다.
세상의 방법을 쓰면서 화를 내고 복수하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는 하느님께서 함께할 자리가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리는 하느님의 방법을 선택할 때 가능했습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제1독서에서 예언자 예레미아는 주님의 오심을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예레 23,5-6)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화답송을 바쳤습니다.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시편 72,7 참조)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입니다.
루카 복음에서는 ‘예수님 탄생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마리아인데 비해,
여기 마태오복음에서는 요셉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태어날 아기는 요셉의 혈통에서 태어날 '다윗의 자손'(마태 1,31)으로 제시됩니다.
그리고 구세주 메시아의 탄생은 요셉의 믿음의 결단과 행동을 통해서 성취됩니다.
그렇다면, 요셉 그는 어떤 사람인가?
오늘 복음에서 그는 '의로운 사람'(마태 1,19)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마태오복음에서 '의로움'은 헐벗고 굶주리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이들을 보살펴 줌이요(25,34-40),
산상설교에서는 참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요(5,6),
하느님 나라와 함께 찾으라고 권유됩니다(6,33).
‘의로움’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품행’과 관련됩니다.
그러니 '의로운 사람'이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은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믿되,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행동하되, 순명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실행하는 진정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마태 1,24)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안락과 평안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혼하기도 전에 아내를 포기해야만 했고,
아들을 얻기도 전에 이미 아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구원계획의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구원의 협조자가 된다는 것은 구원을 이루시고자 하는 '그분의 뜻' 안에 머물고,
'그분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행위는 성령의 작용, 곧 은총에서 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모두 하느님의 도구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세상에서 활동하시도록 하는 도구들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믿음과 순명으로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이 모든 일에 대해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마태 1,22)
그러니 우리 모두는 성 요셉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하느님의 조력자요 협력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곧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좋으신 계획이 완성되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마태 1,20)
주님!
의심을 떨치고 신비를 받아들이게 하소서.
당신의 개입을 맞아들이게 하소서.
기이하고 황당하게 보여도 ‘당신의 뜻’에 가두어지게 하소서.
어처구니없고 터무니없게 보여도 ‘당신의 뜻’을 품고 살아가게 하소서.
제 안에 ‘당신의 뜻’을 세우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개발도상국이었던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았던 국제행사들이 있습니다.
지금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이 있었습니다.
어느덧 37년과 35년이 지난 행사입니다.
세계의 변방에서 이름 모르는 국가였던 대한민국은
이 두 행사를 통해서 국제행사를 치를 만큼 성장한 나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있었습니다.
주최국은 한국과 일본이지만 행사의 결과는 대한민국을 빛나게 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은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룩했습니다.
이즈음 스포츠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은 문화와 경제에서도 ‘한류’를 보여주었습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은 남과 북이 화해하는 ‘평화’의 올림픽이 되었습니다.
비록 성과는 없었지만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의 만남도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국제행사를 유치하거나, 진행하는 것은 새로울 것도 없는 뉴스가 되었습니다.
그만큼 대한민국의 국가위상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눈떠 보니 선진국’이라는 말이 전혀 낯설지 않았습니다.
세계 최대의 도시 뉴욕에서 살고 있지만 삶의 인프라와 문화적인 역량은
서울이 결코, 뒤지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239년 전 평신도들의 모임으로 시작된 한국천주교회도 그 시작은 미미했습니다.
신앙의 뿌리가 내리기 전에 심한 박해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100년 동안 만여 명이 순교하였습니다.
한국교회의 수호자인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의 도움으로
한국천주교회는 박해의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세계의 변방에서 이름 모르던 가톨릭이었던 한국천주교회가
긴 어둠을 뚫고 꽃을 피우기 시작한 행사가 있었습니다.
1981년에 있었던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행사‘와
1984년에 있었던 ‘103위 성인 시성식’이 있습니다.
한국천주교회는 여의도에서 대규모 행사와 미사를 준비하였고, 완벽하게 행사를 마무리했습니다.
1989년에는 ‘제44차 세계성체대회’가 있었습니다.
그전의 행사가 우리만의 행사였다면
세계성체대회는 전 세계 가톨릭을 초대한 명실상부한 국제행사였습니다.
2014년도에는 ‘아시아 청년대회와 124위 복자 시복식’이 있었습니다.
한국천주교회가 국제행사를 유치하거나 진행하는 것은 새로울 것도 없는 뉴스가 되었습니다.
서울은 2027년 세계청년대회를 주관하는 교구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유흥식 추기경님은 바티칸의 성직자부 장관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는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 를 위해 헌신했던
많은 분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역사의 변곡점에는 4,19구 혁명, 5,18 민주화 운동, 6.10 민주화 운동‘이 있었습니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명언을 남긴 대통령도 있었습니다.
준비된 대통령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대통령도 있었습니다.
조국 근대화를 위해서 땀 흘린 노동자들이 있었습니다.
서독의 탄광에서, 중동의 사막에서 땀 흘린 노동자들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한국천주교회가 있기까지 순교자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도록 헌신했던 성직자와 신앙인들이 있었습니다.
자유와 민주를 위해서 투쟁했던 많은 젊은이들이 명동성당을 찾았습니다.
명동성당은 그들에게 희망이 되었습니다.
명동성당은 그들에게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명동성당으로 진입하려는 경찰에게 김수환 추기경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 젊은이들을 잡아가려면 먼저 나를 잡아가시오,
그 다음에는 성직자들을 잡아가시오, 그리고 수도자들을 잡아가시오,
그래야만 저 젊은이들을 잡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찾았습니다.
예비자 교리반은 신청자가 줄을 이었습니다.
교회의 신자는 매 10년 100만 명씩 증가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먼저 찾는다면
우리의 ‘꿈’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밤이 깊으면 새벽은 오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던 요셉성인처럼
우리들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가난한 이, 헐벗은 이, 굶주린 이, 외로운 이를
주님으로 맞아들이면 좋겠습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그는 하소연하는 불쌍한 이를, 도와줄 사람 없는 가련한 이를 구원하나이다.
약한 이,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주나이다.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니,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임마누엘, 이 얼마나 은혜로운 이름입니까?
전삼용 요셉 신부
또다시 성탄이 목전에 다가왔습니다.
성탄이 아무리 수백 번, 수천 번 되풀이된다할지라도,
우리가 성탄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래서 우리 안에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시지 않는다면, 그 성탄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오늘 마태오 복음사가는 성탄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싶은 간절한 원의와 열망이
아기 예수님의 탄생으로 성취되었음을 밝힙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을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마태 1,23)
예수라는 이름 이상으로 심오하고 풍요로운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름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이 얼마나 은혜로운 이름인가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이스라엘과 항상 함께하신다는 사상은
이스라엘 신앙 속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이스라엘의 영광이자 자랑거리였습니다.
이러한 임마누엘 신앙은 이스라엘 역사 안의 중요한 순간마다 강조되고 상기되었습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네가 물 한 가운데를 지난다 해도 나 너와 함께 있고 강을 지난다 해도 너를 덮치지 않게 하리라.
네가 불 한 가운데를 걷는다 해도 너는 타지 않고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하리라.”(이사 43, 1~2)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주 부르짖었습니다.
“도대체 하느님이 계시기는 한건가요?
정말 계시다면 어떻게 이토록 큰 곤경과 수모를 겪게 하시는 것인가요?”
그러나 사실 하느님께서는 역사 이래, 항상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주변 강대국의 침략으로 공포에 떨고 있을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분명 함께 계셨습니다.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간절히 기도하고 있을 때에도 함께 계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기름을 바르실 때, 예언자들을 통해 사명을 수행하실 때에도 함께 계셨습니다.
예루살렘이 처참히 함락되고 파괴될 때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로 끌려가
유배 생활을 할 때도 함께 계셨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 참담한 심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부르짖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토록 부르짖고 있는데, 대체 하느님께서는 어디 계신가요?
사랑의 하느님이시라면서 어찌 당신 자녀들에게 이토록 큰 고통을 허락하실 수 있나요?”
그러나 우리가 정녕 잊지 말아야 할 불변의 진리 한 가지를 신뢰해야 할 것입니다.
임마누엘 하느님께서는 재앙 한가운데서도 변함없이 우리 인간을 환대하시며,
극진한 사랑을 베푸시며, 발버둥 치는 인류를 도우신다는 진리를 말입니다.
이토록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임마누엘 하느님께서는 변함없는 자비를 베푸시며,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주셔서, 이 큰 환난에 당당히 맞서게 하시며 극복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경위
조욱현 토마스 신부
주님께서 육신으로 태어나신 것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은 시간이 생겨나기 전의 일이다.
그분은 육신으로는 동정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셨고,
그분께서 아드님이심은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비롯한다.
주님은 당신의 보이지 않는 신성을 보여주시려고 눈에 보이는 육신을 취하셨다.
성경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18절)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나셨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일어날 새로운 태어남에 대한 암시가 있다.
우리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모두 그리스도와 약혼한 동정 교회에서 태어나며
마리아는 그래서 교회의 어머니이시다.
동정 교회는 성령으로 아들을 잉태하시고 낳으신 마리아의 표상이다.
우리는 여기서 의로운 요셉을 볼 수 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를 모르고 있던 요셉에게는 난감한 일이었다.
마리아를 자기 집에 받아들이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었고,
마리아의 일을 드러내는 것은 마리아를 죽음으로 내모는 일이었다.
요셉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요셉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19절)
이때 꿈에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20절)
요셉이 마리아의 순결을 의심하지 않도록 그 신비를 알려주셨다.
요셉은 자신이 의심이라는 악을 떨치고 신비라는 선을 받아들여야 함을 깨닫게 된다.
천사는 또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1절)
예수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이는 하느님께 어울리는 이름이다.
“하느님이요 구원자는 나밖에 없다.”(참조: 이사 43,3; 호세 13,4) 하셨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23절)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해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고,
그분은 하느님으로 우리 가운데 계신 것을 보게 되리라는 뜻이다.
이렇게 요셉은 기쁘게 천사의 말을 따름으로써 하느님의 계획을 따른다.
우리도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협력하는 자세를 갖도록 하여야겠다.
요셉의 응답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마태 1,18-24)
이 이야기는 요셉 성인이 아기 예수님의 아버지 역할을 하라는 부르심에 응답한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기 예수님의 어머니로 성모님을 선택하실 때,
마리아라는 한 처녀를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요셉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를 선택하셨습니다.(루카 1,26-27)
이것은 하느님께서 요셉 성인과 성모님을 함께 선택하셨음을 나타냅니다.
<두 사람이 약혼한 것 자체가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르심’도 따로 주어지고 ‘응답’도 따로 이루어진 것은,
두 사람이 아직 약혼 단계여서 ‘같이 살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의 내용을 보면,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을 찾아간 일이 먼저 있었고,
요셉 성인을 찾아간 일은 마리아의 성령 잉태 사실이 드러난 다음입니다.>
본문에는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저절로 드러난 것은 아니고, 성모님이 요셉 성인에게 알렸을 것입니다.
<천사가 찾아온 일과 천사와 나눈 대화도 모두 전했을 텐데,
성모님과 천사가 나눈 대화에서는 요셉 성인이 해야 할 일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천사가 직접 요셉 성인을 찾아가는 것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님 쪽에서도 요셉 성인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요셉 성인이 성모님을 믿었고,
성모님의 말도 모두 믿었다는 점입니다.
<사랑했으니까 믿었습니다.>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라는 말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손에서 성모님과 아기를 보호하려고 했다는 뜻입니다.
<믿었으니까 보호하려고 한 것입니다.>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라는 말은,
성모님에게 일어난 일을 하느님과 성모님 사이에서만 일어난 일로 생각했고,
아기의 아버지는 하느님이시니까 자기는 뒤로 물러나려고 생각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남모르게 파혼하면, 사람들은 두 사람을 부부로 생각할 것이고,
아기를 요셉 성인의 아기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성모님과 아기를 무사히 보호할 수 있게 됩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라는 말은,
요셉 성인이 충실한 신앙인이었고, 성모님처럼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요셉 성인이 얼마나 당황했는지, 얼마나 고민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일에 대해서 마치 소설을 쓰듯이 상상할 필요는 없고,
우리는 이루어진 일의 결과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요셉 성인이 해야 할 일을 알려주고,
또 성모님의 잉태가 성령으로 말미암은 일이라고 알려주고,
아기 예수님이 앞으로 하실 일을 알려준 것은,
성모님이 요셉 성인에게 한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해 준 일이기도 하고,
아기 예수님의 아버지 역할을 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전달해 준 일이기도 합니다.
<천사가 나타난 일과 천사가 한 말들은, 목격자도 없고 증인도 없는 일,
누가 옆에서 보고 기록할 수도 없는 일, 순전히 요셉 성인 자신의 혼자만의 체험이고 증언입니다.
(성모님이 천사를 만난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일을, 요셉 성인의 입장에서 표현하면,
“나는 마리아를 믿는다. 그리고 마리아가 나에게 한 말들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이 모든 일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나는 확신한다.”입니다.>
천사가 ‘성령 잉태’와 ‘메시아 강생’을 설명해 줄 때,
요셉 성인과 성모님이 겪게 될 고난들도 미리 알려주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요셉 성인과 성모님은 자신들이 겪게 될 일들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고,
두 분의 응답에는 그런 고난들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응답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자기 자신을 모두 봉헌한 일, 즉 전적인 헌신과 희생입니다.>
요셉 성인의 응답은, 주님의 명령이니까 어쩔 수 없이 복종한 일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으로, 또 자신의 자유의지로 ‘기꺼이’ 순종한 일입니다.
그 ‘믿음과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고, 또 성모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사람을 믿고 사랑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 모든 일은 이사야서에 있는 ‘임마누엘 예언’이 실현된 일이라는 설명은 복음서 저자의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은, 요셉 성인과 성모님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일, 즉 인류 전체를 구원하기 위한 일이고, ‘바로 나’를 구원하기 위한 일입니다.
서공석 요한 신부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서가 전하는 예수 탄생의 이야기입니다.
복음서는 과거에 일어난 사실을 정확하게 보도하는 문서가 아닙니다.
복음서들은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로 말미암아 깨달은 신앙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기록한 문서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요셉과 마리아가 약혼한 사이이고,
두 사람이 동거하기 전에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말하였습니다.
물론 이 말은 수사기관의 기록도 아니고, 역사적으로 考證된 사실도 아닙니다.
복음은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이사야서(7,14)의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말하기 위해
‘두 사람이 동거하기 전에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복음서는 히브리어 단어 임마누엘도 설명합니다.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신앙은 믿어지지 않는 일을 사실이라고 믿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요셉과 동거하기 전에 예수를 잉태한 사실을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동정녀’ 혹은 ‘처녀’라는 말은 구약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단어입니다.
기원전 2세기 지중해 연안 여러 나라들이 그리스어를 사용할 때,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때 번역하는 사람들이 이사야서 히브리어 원본에 있던 ‘젊은 여인’이라는 단어를
그리스어 ‘처녀’라는 단어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들은 마태오복음서는 그 그리스어 번역본을 그대로 인용하여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신앙은 인간과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선을 제공합니다.
신앙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그분과의 연대성을 기반으로 인간과 세상을 새롭게 볼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그 연대성을 철저히 사신 분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으로부터 그 연대성을 배워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실천안에 나타나는 하느님은 인류가 상상하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이 하신 기적에 놀라서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실천하신 ‘불쌍히 여김’, ‘가엾이 여김’, ‘측은히 여김’을 보고
그것이 하느님과의 연대성을 사는 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가 죄인이라고 버린 사람들, 경건하지 못하다고 외면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들은 불쌍히 여겼습니다.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천한 사람들을 가엾이 여겼습니다.
예수님의 그런 행위들 안에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보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당신의 아버지라 부르면서
아버지의 일을 행하는 아들이라고 스스로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일이 과연 하느님의 일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 그분의 부활 사건입니다.
위대한 사람을 존경하고 따르는 것은 정직한 인간이 하는 일입니다.
강한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과 친분을 갖는 것은, 물질적 이득을 추구하는 사람의 생활방식입니다.
예수님 안에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삶은 그런 우리의 이야기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위대하고, 강하고, 많이 가진 생명이라서 소중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베풀어 주신 생명이라서 그것을 은혜롭게 생각하고,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서 그분과의 연대성 안에 살겠다는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입니다.
그 연대성은 우리 주변의 어떤 인간 생명도 외면하거나 버리지 말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이 살고 소중히 생각하신 연대성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생명을 베푸셨고 또 아끼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과의 연대성 안에서 다른 생명들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성탄은 그런 삶을 산 예수님이 이 세상에 출생한 사실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잉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출현은 하느님이 하신 새로운 일이었다는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을 담아 알리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당신의 삶 안에 함께 계시게 살았고,
그 삶을 배워 실천하는 우리들 안에도 하느님이 살아계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말합니다.
물질의 풍요로움에 마음을 빼앗기고, 권력의 화려함에 심취한 나머지,
虛張聲勢라는 거품을 좇아 사는 인간의 삶 안에는 물질과 권력은 있어도,
하느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권위라는 허세도 없이, 물질의 풍요라는 허풍도 없이, 弱者의 초라함과
서민의 哀歡을 당신 것으로 하면서 인류 역사 안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 주면서
아버지이신 하느님과의 연대성을 산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같은 연대성을 살도록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은 막강한 하느님을 찾았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휘두르는 권력이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졌다고 믿었습니다.
싸움에 이긴 사람은 하느님이 주신 승리라고 믿었습니다.
재물을 가진 사람은 하느님이 주신 재물이라 생각하였습니다.
높은 지위를 얻은 사람은 하느님이 자기와 함께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높고 강하고, 승리하고, 재물을 주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믿고 가르친 하느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라 부르던 하느님을 버리고,
사람들이 상상하던 하느님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강하고, 승리하고, 재물과 권력을 주는 분이라고 고집하던 사람들의 위협에도
예수님은 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생명을 잃으면서까지 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을 처형한 사람들은 그분을 십자가에 달아놓고,
내려오는 기적을 해 보라고 조롱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용서하시라고 하느님에게 기도하면서 죽어가셨습니다.
하느님은 강자와도, 승리자와도 함께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면서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실천한 예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하느님은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는 우리의 노력들 안에,
또 사람들의 불행과 고통을 퇴치하기 위해 봉사하는 우리의 노력들 안에, 살아계십니다.
성탄이 다가왔습니다.
옛날 베들레헴의 구유에 탄생하셨던 그 생명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계시도록 기도합시다.
불쌍히 여기고, 이웃을 돌보아 주며, 섬기는
우리의 보잘것없은 실천들 안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시리라.
이승화 시몬 신부
세상이 가장 어두워졌을 때
빛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 빛은 이미 우리와 함께하고 있었지만
구름에 가리어져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던 무지의 구름
자신의 생각에 갇혀버리게 만드는 교만의 구름
눈앞의 즐거움에만 매이게 하는 허영의 구름
이 구름들을 거둬들이기 위해서
하느님은 당신의 놀라운 구원 손길을 보내십니다.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과 그 안의 법칙보다
더 큰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사랑을 위해서 협조자가 필요했습니다.
홀로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분이지만
어리석은 인간이기에
그들의 마음을 풀기 위해서
그들을 둘러싼 구름을 거둬버리기 위해서
같은 사람을 초대하였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와
그의 약혼자 요셉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였지만
유다의 율법에 따르면 부정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생각을 굳혔습니다.
그럼에도 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 사랑에
그는 이내 마음을 돌립니다.
이미 무지의 구름과 교만의 구름과 허영의 구름이
그에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느님과 함께하며 기도하는 삶이었기에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식별할 수 있었고
그 말씀에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요셉을 닮아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뿐 아니라
이미 함께하시는 하느님 안에 머물기 위해
우리를 둘러싼 구름을 거둬들이고
하느님께 마음을 열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느님 계획에 동참할 수 있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 ‘시몬 신부의 신앙 이야기’>
박 에끌레시아 수녀
대림 시기의 둘째 부분을 맞이하였습니다.
세 개의 초가 밝혀졌고,
Gaudete 주일을 보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전합니다
마리아와 요셉!
특별히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심경과 결단을 강조합니다.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고,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고 생각을 굳혔지만
꿈에 나타난 주님의 천사의 명령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먼저 구했던 요셉은
꿈에서 깨어나
“오~ 하느님이여!~~”하고,
아내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잠자리도 같이하지 않고,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임마누엘 하느님을
이 땅에 탄생하게 하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출처] 툿찡 베네딕도 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