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영양왕
25년(614년) 봄 2월, 양광이 백관들에게 고구려를 공격하는 문제를 의논하게 하였으나, 수일 동안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양광이 다시 전국 군사를 소집하여 모든 방면의 길로 일시에 진공하게 하였다.
가을 7월, 양광이 회원진으로 행차하였다. 이 때 수 나라는 나라 전체가 이미 혼란하여, 소집한 군사의 대부분이 기일을 어기고 오지 않았고, 우리 나라도 역시 피폐된 상태였다. 수 나라 장군 내호아가 비사성에 이르자, 우리 군사가 나아가 싸웠으나 호아가 승리하고 곧 평양으로 진격하려 하였다. 왕이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고, 곡사정을 돌려 보냈다. 양광이 크게 기뻐하여 신임표 가진 사절을 보내 내호아를 소환하였다.
8월, 양광이 회원진에서 군사를 거두었다.
겨울 10월, 양광이 서경에 돌아가서 우리의 사신과 곡사정에 대한 일을 태묘에 고하고, 또한 우리 왕에게 수 나라 조정에 들어와 예방하라고 하였으나 왕이 끝내 듣지 않았다. 양광이 장수들에게 엄밀하게 대비할 것을 명하고, 다시 공격할 것을 기도하였으나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수서 고려전
대업 십년(614년) 또 병사를 일으켰으나 도적들이 일어나 사람들이 흩어지고 길이 끊어져 군사들을 많이 잃어 버렸다. "요수"에 이르렀는데 "고려" 또한 곤궁하여,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청하며, 죄인 "곡사정"을 보내면서 죄를 속죄하였다. 제가 이를 허락하여, "회원진"에서 그 항복을 받았다. 인하여 포로를 돌려 보내었다. 서울에 이르러 "고려"가 사신을 보내어 조정에 고하니 이에 잡아두어 머물게 하고, "원"을 입조하라 불렀지만, "원"은 끝내 가지 않았다. 제께서 군사들을 독려하여 엄히 다시 일어날 것을 꾀하자 천하에 큰 난이 일어가 다시 가지 못하였다
614년에 벌어진 4차 고수 전쟁에서 고구려는 3차 전쟁때 자국에 투항 귀순해온 곡사정을 수나라로 송환하는 것으로
화친을 맺어 고수 전쟁을 종식시키려고 하였다고 4차 고수전의 종식 원인이 곡사정 송환이 작용했다는
시각들이 많이 제기되지만
삼국사기가 인용한 수서와 자치통감등 중국 사료에서는 장시간의 전쟁에 지친 고구려가 비사성 함락으로 위기에 몰리자 투항해온 곡사정을
수양제에게 송환하는 것으로 화친을 맺어 전쟁을 끝내려고 했다고 기록되어 나와 있지만
그러나 수양제는 곡사정을 송환 받고서 장안으로 돌아온 후에 어찌된 일인지 곡사정을 호송해온 고구려 사신들을 감금하고 영양왕에게 자신에게 입조하라는 요구를 하지만 영양왕은 이를 들어주지 않을 정도로 체결되기 성사 직전의 고 수간 화친은 깨지고
수양제는 전쟁 준비에 돌입하게 되었지만 어려운 국내 사정으로 실행하지 못하였지요
고구려가 곡사정을 송환한 사실에 관해 의문점들이 많습니다
고구려가 수와의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감당할길이 없어서 곡사정을 송환하여 수와의 전쟁을 끝내려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수양제는 곡사정 송환에 만족하지 않고 영양왕의 입조를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는 태도를 바꾸어
수양제의 입조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 곡사정 송환으로 어렵게 체결된 화친은 깨지게 되었지요
고구려가 중국 사료의 기록대로 전쟁을 끝내려는 의도로 곡사정을 송환했다면 수양제의 입조 요구에 곡사정 송환과의 마찬가지
이유로 정면에서 거부하지 말고 당장은 보내기가 힘들더라도 입조 약속을 하는 등의 들어주는 척이라도 해야 됩니다
그런데 고구려는 수양제의 입조 요구를 정면에서 거부하고 들어주지 않아 화친을 깨는 모습을 보여 곡사정 송환때와
상반된 모습을 보였지요
피해가 야기되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곡사정 송환으로 화친을 추구하던 고구려의 모습이라고는 180도로 갑작스럽게
달라진 모습이지요 곡사정 송환으로 전쟁 끝난지가 1년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고구려는 곡사정 송환으로 조심스럽게 맺은 화친 약속을 파기 하여 전쟁을 다시 하려는 모습을 보인 것일까요?
그리고 또 하나의 의문점은 4차 전쟁 당시 수양제는 회원진에서 고구려 사신으로부터 곡사정을 송환받은 후에
고구려에 침입한 내호아의 군대를 철수시키고 자신은 회원진에서 철수하여 수도 장안으로 돌아온 후에
갑작스럽게 고구려 사신들을 감금하고 영양왕에게 입조요구를 한것인데
아니 수양제가 영양왕의 입조를 받을 생각이었다면 회원진에서 곡사정을 송환받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비사성을 함락한 내호아를 철수시킬리가 만무하지요 영양왕의 입조를
수도에 돌아와서 받지 않고 회원진에서 기다려서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료에서는 수양제는 회원진에서 곡사정을 송환받을때 고구려 사신에게 영양왕 입조에 관한 말을 꺼내지 않고
수도 장안으로 돌아왔다가 갑작스럽게 곡사정을 호송하고 화친을 청하러 온 고구려 사신들을 감금하고
영양왕에게 입조 요구를 한것에 의문들을 보면
삼국유사 보장봉로 보덕이암조가 그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하였지요
삼국유사 보장봉로 보덕이암
<고구려고기(高句麗古記)>에 이렇게 말한다. 수(隨)나라 양제(煬帝)가 대업(大業) 8년 임신(壬申; 612)에 30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쳐들어왔으며, 10년 갑술(甲戌; 614) 10월에 고구려왕(高句麗王; 그때는 제 26대 영양왕拏陽王이 즉위한 25년이다)이 표문(表文)을 올려 항복을 청할 때 한 사람이 비밀히 소노(小弩)를 품속에 감추고, 표문을 가진 사신을 따라 양제가 탄 배 안에 들어갔다. 양제(煬帝)가 표문(表文)을 들고 읽는데 소노(小弩)를 쏘아 양제의 가슴을 맞혔다. 양제가 즉시 군사를 돌리려 하여 좌우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천하의 군주(君主)가 되어 작은 나라를 친정(親征)하여 이기지 못했으니 만대(萬代)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때 우상(右相) 양명(羊皿)이 아뢴다. "신이 죽으면 고구려의 대신(大臣)이 되어 반드시 그 나라를 멸망시켜 제왕(帝王)의 원수를 갚겠습니다." 양제가 죽은 뒤에 그는 과연 고구려에 태어났다
위의 삼국유사의 고구려 고기 내용에서는 4차 고수전이 일어났던 갑술년(614년)10월의 기사에 수양제에게 갔던
고구려 사신단중에 수양제를 쇠뇌로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내용이 서술되었는데 수양제가 수도에 돌아와서
고구려 사신들을 감금 조치를 취하던 내용이 기록된 수서 자치통감 등 중국 사료의 대업 10년(614년) 10월의 상황 기록과 그 정황이 비슷하게 유사하게
맞아 떨어질 정도로 고구려 사신단 내에서 수양제에게 암살 미수 같은 위해 시도가 있었음을 반증해 내는 것이지요
그런 암살 시도가 있지 않았다면 수도에 돌아온 수양제가 무엇 때문에 고구려 사신들을 감금하는 조치를 취하고 회원진에서 곡사정 송환때에 꺼내지 않았던 영양왕의 입조를 갑작스럽게 꺼낼리가 있습니까?
그리고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고구려가 사신단에 자객을 은밀히 투입시켜 수양제를 암살하려고 시도하는 등의
곡사정 송환때와 상반된 모습을 보인 이유를 내면적으로 깊이 추구하면
고구려에서 곡사정 송환을 두고 찬반으로 대립하는 정치적 갈등이 있었기에
그런 상반된 모습을 보일수 있던 것이지요
단재 신채호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자객 사실을 근거로 곡사정 송환에 대한 고구려의 화친파와
주전파의 대립설을 주장했고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수양제에게 자객을 보낸 고구려 내부의
세력은 곡사정 송환에 반발하는 주전파 세력들이지요
곡사정 송환을 주도한건 주화파 세력들이고요
곡사정을 송환할 당시에 주화파 세력들이 주도권을 잡는 상황이었으나
자객 사건이 일어났던 614년 10월에 고구려 사신들을 감금시킨 수양제의 영양왕 입조 요구를 고구려가
거부하는 등 곡사정 송환때와 상반된 입장을 보인 것을 고구려 내에서 강경파 세력들이
자객과 입조 사건으로 화친파들을 제압하고 주도권을 잡았기에
이런 상반된 결과가 나타났을 것임을 알수가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