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2.21-2003.2.9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제 3전시실
성인 5천원 / 학생 3천원
문의 580-1300
현대미술의 전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분수령이었던 팝아트
-팝아트의 주요작가들을 망라하는 국내 최초의 전시
예술의전당 미술관은 매년 연말에 미술애호가들, 특히 방학을 맞은 청소년들을 위하여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작가나 미술운동의 작품을 직접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노력해왔다. 작년에 '렘브란트판화전'을 개최해서 바로크미술을 대표하는 거장의 작품을 직접 감상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 데 이어 올해는 현대미술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작품들인 팝아트를 직접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동안 팝아트는 국내에서는 개별 작가의 개인전 등을 통하여 단편적으로만 감상할 수 있었지만 이번 전시는 팝아트의 주요작가 12명의 작품(52점)을 한자리에 모음으로써 팝아트의 다양한 측면을 총체적으로 맛볼 수 있는 최초의 기회가 될 것이다. 특히 입체파나 야수파 등 20세기의 다른 미술운동과는 달리 팝아트는 그들만의 특정한 스타일로 규정되는 미술운동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더욱 주요작가들의 다양한 접근방식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이번 전시가 뜻깊은 자리가 될 것이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서구사회는 상품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기본구조로 하는 산업사회로 급속히 전환되었고 이러한 경제적 번영을 바탕으로 매스미디어가 엄청난 팽창력을 보이며 사회를 지배하는 산업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중심의 상품경제 속에서 매스미디어가 쏟아내는 새로운 이미지들은 자연스럽게 미술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60년대 초반부터 뉴욕과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일군의 젊은 작가들이 미국의 상업적 대중문화의 이미지들을 가지고 미술작품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팝아트(Pop Art)라는 용어는 1954년 영국에서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주제로 한 작품들과 관련하여 처음 사용되었지만 일반적으로는 60년대 초반부터 미국의 상업적 대중문화의 이미지들을 주제로 작업을 한 작가들의 작품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팝아트의 작가들은 각기 독특한 방식으로 상업적 대중문화의 다양한 측면을 미술로 담아냈다. 그들은 상업광고, 연재만화, 영화, TV 그리고 상표 등을 통해서 대중들에게 너무나 낯익은 이미지들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새롭게 결합하고 변형하여 새로운 미적 이미지로 재창조해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그들은 전통적 의미에서의 미술을 극복하고 매스미디어가 지배하는 산업사회에 걸맞는 새로운 미술적 가능성을 열어갔고 그 결과 미술사상 가장 친숙한 작품들을 우리에게 남겼다.
팝아트는 1960년대 매스미디어의 급속한 발전과 그에 따른 상업문화의 확산이 낳은 미적 산물이었다는 점에서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정보통신의 혁명을 통해 폭발적인 상업문화의 확산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이번 전시는 앞으로 우리의 미술이 어떻게 새로운 조형적 가능성을 열어갈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역사적 시각을 제공할 것이다.
로버트 라우젠버그는 추상표현주의를 벗어나 새로운 표현방식을 모색한 첫 번째 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하나의 캔버스에 회화적 붓질과 삼차원적 사물들-낡은 매트리스, 사진, 동물-을 결합해 놓았다. 동시대의 놀라운 기술적 진보를 목격하면서 로버트 라우젠버그도 더 이상 회화와 조각을 별개의 장르로 구별하는 전통적인 사고에 얽매이지 않고 둘을 합쳐서 아상블라주(Assemblage)라는 새로운 표현방식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로버트 라우젠버그 이전에도 회화적 평면과 실재 사물을 결합하는 방식(collage)을 사용한 작가들이 있었지만 콜라쥬에 사용할 재료를 선택하는 기준에 있어서 그는 이전의 작가들과 달랐다. 그는 형태적 요소보다는 얼마나 현대 도시적 이미지를 재현할 수 있는가에 근거하여 재료를 선택했다. 콜라쥬에 대한 그의 이러한 새로운 접근은 팝아트가 일상의 사물과 이미지를 채용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팝아트의 선구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재스퍼 존스와 로버트 라우젠버그는 1955년경에는 같은 건물에 살면서 작업을 했는데 4,50년대 미술계를 지배했던 추상표현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그들은 추상표현주의의 시각적 언어를 일상현실의 파편들과 결합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1958년 뉴욕 레오 카스텔리갤러리(Leo Castelli Gallery)에서 열린 재스퍼 존스의 첫 번째 개인전에서 소개되었던 미국국기와 과녁을 소재로 한 작품들은 현대미술의 전개에 있어서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상적인 사물의 이미지로 캔버스전체를 덮은 그의 작품들은 유럽회화의 전통-미술은 내적 탐구(intense inwardness)나 자기 성찰(self-communion)을 통한 작가 개성(personality)의 표현이라는-을 명백히 부정함으로써 미술의 정의에 있어서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했고 팝아트의 태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래리 리버스도 회화적 요소를 중시하는 조형화가(figurative painter)였지만 담배갑이나 지폐, 잡지사진 및 카드처럼 대량생산된 디자인에 나오는 이미지들을 차용함으로써 팝아트의 태동에 영향을 주었다.
짐 다인은 혼합매체를 사용한 구성작품(mixed-media constructions)과 '해프닝(happening)'을 통한 실험적 작업을 통해서 재능 있는 젊은 작가로서 주목을 받게 된다. 우리 곁에 널려있는 버려진 일상적 사물을 이용하여 자유롭게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그의 회화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일상적 사물 중에서도 그는 사람과 직접적인 관련이 많은 것들-낡은 구두, 페인트자국이 있는 셔츠, 해머나 기타 연장 등-에 일관적인 관심을 보였다. 이처럼 실재 사물을 그림에 끌어드림으로써 그는 일상적인 경험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통해서 미술을 보다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1950년대 말 짐 다인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비슷한 길을 갔던 작가가 클라에스 올덴버그이다. 그는 추상표현주의적 제스쳐와 퍼포먼스 그리고 도시 하층민의 삶과 관련된 버려진 사물들을 섞는 작업을 통해 그의 작품세계를 만들어갔다. 1958년에는 알란 카프로(Alan Kaprow)를 만나서 그의 해프닝작업에도 참여했다. 이 무렵부터 햄버거, 아이스크림 그리고 케이크같은 음식물의 복제품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대량생산-소비사회를 직접적으로 다룬 이런 작업을 통해서 그는 대표적인 팝아트 조각가로 떠올랐다.
물방울이나 구불구불한 리본으로 환각적으로 표현된 단어나 문장의 형태는 에드워드 류세이 미술의 상징이다. 팝아티스트중에서 에드워드 류세이만큼 도시근교의 삶과 도로에 대해 열정적으로 탐구한 작가는 없다. 그는 그가 사적으로 발간한 일련의 책들을 통해 현대미국건축을 사진자료로 남겼다(Twenty-six Gasoline Stations, Some Los Angeles Apartments, Every Building on the Sunset Strip). 이 책들은 그가 차를 운전하면서 만나는 주유소나 아파트 등을 통해 남부캘리포니아의 삶의 단면을 포착한 것이다. 팝아티스들 중에서 사진을 작품의 일부로 사용한 경우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사진을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 사용한 것은 에드워드 류세이가 처음이다.
멜 라모스는 1961년부터 그가 어릴 때 읽었던 만화의 주인공들을 작품의 주제로 하기 시작했다. 슈퍼맨을 필두로 해서 배트맨 등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을 주제로 여러 작품을 제작했는데 그는 그들을 단순히 인쇄된 이미지로서가 아니라 '선은 항상 악에게 승리한다'는 현대신화의 영웅들로서 다루었다.
1965년부터 그는 잡지에 나오는 누드모델들과 광고에 등장하는 유명브랜드를 섞어 대중문화의 단면을 표현하는 그만의 독특한 방식을 개발했다.
로이 리히텐스타인은 연재만화의 등장인물을 벤데이 점(benday dot)을 사용해서 상업적 인쇄과정을 통해 제작한 것처럼 묘사하는 그의 독특한 스타일로 유명하다. 그는 그의 독특한 스타일로 다양한 주제들과 다양한 미술 무브먼트(큐비즘, 초현실주의 그리고 표현주의)를 탐구했다.
앤디 워홀은 광고와 일러스트 작업을 왕성히 했고 1955년경에는 뉴욕에서 가장 잘 나가는 상업작가로 이름을 날렸다. 1960년부터 그는 순수회화작품을 하기 시작했는데 뽀빠이나 슈퍼맨같은 만화주인공들 또는 소비재상품의 광고를 토대로 그림을 그렸다. 로이 리히텐스타인과 마찬가지로 그도 이러한 스타일을 통해서 전통적인 미술에 대한 개념-미술은 작가 개인의 내면을 표현하는 고상한 것이라는-을 극복하고자 했다.
앤디 워홀은 1961년 연재만화를 주제로 한 로이 리히텐스타인의 작품을 보고 더 이상 이 주제를 다룬 작품을 하지 않기로 하고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신문광고와 소비재상품의 이미지를 주제로 한 작품을 제작했다. 앤디 워홀은 대량생산되고 소비되는 상품의 상표와 광고를 직접적으로 차용함으로써 미국이라는 대량소비사회를 상징하는 이미지를 미술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였다. 특히 그런 이미지들을 실크스크린 프린팅이라는 방법을 통해 기계적으로 처리함으로써 작가의 개성과 독창성을 전제로 하는 전통적인 미술의 개념을 부정하고 대량생산과 소비를 바탕으로 한 당대 미국사회의 메커니즘과 미술을 동일시하게 되었다. 이제 미술도 생산라인에서 제작되는 상품들처럼 작가의 개성적인 손길을 거치지 않고 기성의 이미지들을 기계적으로 합성함으로써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앤디 워홀은 소비재상품, 신문, 잡지, 사진, TV, 영화와 광고가 만들어내는 시각적 정보가 넘쳐나는 현대산업사회에서 그의 미술작업의 모티프를 선정하는데 있어 뛰어난 재능을 타고 났다. 우리가 위의 매체들이 쏟아내는 이미지들을 반복적으로 접하면서 그 이미지들이 우리의 기억 속에 각인되고 결국 도상적 힘(iconic power)을 갖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릴린 먼로, 엘비스, 잭키 같은 유명인사나 평범하고 낯익은 상품의 상표들(코카콜라, Campbell's soup) 그리고 모나리자같이 너무나 잘 알려진 명화들의 이미지를 캔버스에 반복적으로 늘어놓음으로써 그는 미술을 통해 당대 사회의 근본적 구조를 반영하고 있다.
로버트 인디애나는 미국 도로에서 일상적으로 만나는 표지판을 놀라운 색채를 지닌 기하학적으로 형태의 팝아트로 바꾸어 놓았다. 그의 작품을 통해 로버트 인디애나는 'Eat", "Die" 그리고 "Love"같은 기본적인 단어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그 단어들을 생생한 색으로 원이나 사각형 같은 기본적인 형태와 결합하여 도드라진 글자체로 표현함으로써 감상자가 마치 도로 표지판을 보는 느낌을 갖게 했다. 그의 작품 "Love"가 1973년 미국우표에 도안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작품이 널리 인정을 받아 그가 성공한 작가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제임스 로젠퀴스트는 상업광고간판을 그리던 경험을 토대로 의도적으로 파편화 된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불가사의하게 병치하여 몽타쥬처럼 배열하는 스타일을 발전시키게 된다.
상업광고간판을 연상시키는 기법으로 그려진 그의 대규모 작품들은 매스미디어와 상업문화가 야기한 저속화에도 불구하고 당시 미국인들이 물질적 진보와 사회적 낙관주의에 대해 갖고 있던 긍정적 태도를 표현한다.
톰 웨슬만은 미국인의 일상생활의 아이콘들을 관능적인 자세를 한 여성의 육체와 결합하는 방식으로 그의 스타일을 정립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