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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19일 화요일
제1독서 : 판관 13,2-7.24-25
복 음 : 루카 1,5-25
5 유다 임금 헤로데 시대에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로서 즈카르야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으로서 이름은 엘리사벳이었다.
6 이 둘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7 그런데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못낳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둘 다 나이가 많았다.
8 즈카르야가 자기 조 차례가 되어 하느님 앞에서 사제 직무를 수행할 때의 일이다.
9 사제직의 관례에 따라 제비를 뽑았는데, 그가 주님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기로 결정되었다.
10 그가 분향하는 동안에 밖에서는 온 백성의 무리가 기도하고 있었다.
11 그때에 주님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분향 제단 오른쪽에 섰다.
12 즈카르야는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13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15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않고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
16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17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18 즈카르야가 천사에게,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하고 말하자,
19 천사가 그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가브리엘인데, 너에게 이야기하여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파견되었다.
20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21 한편 즈카르야를 기다리던 백성은 그가 성소 안에서 너무 지체하므로 이상하게 여겼다.
22 그런데 그가 밖으로 나와서 말도 하지 못하자,
사람들은 그가 성소 안에서 어떤 환시를 보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몸짓만 할 뿐 줄곧 벙어리로 지냈다. 23 그러다가 봉직 기간이 차자 집으로 돌아갔다.
24 그 뒤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였다. 엘리사벳은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내며 이렇게 말하였다.
25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종종 여행을 갔습니다. 이렇게 과거행을 쓰는 이유는
이제 여행을 잘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좋은 여행을 위해 많이 알아야 합니다.
그 여행지에 어떤 것이 있는지, 즐길 것은 무엇인지를
알아야 풍요로운 여행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렇게 여행을 위해 공부하는 것이 힘듭니다.
그래서 공부할 필요 없이 아무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쉼에만 집중하면서 한적한 곳을 찾아갑니다.
성지순례를 갈 때도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한 만큼 많은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과의 연관성, 그곳 성지의 역사와 유래 등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그 성지에 다녀왔어도 어디 다녀왔는지도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알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알려고 노력할수록 많은 것이 보이는 법입니다.
그런데 주님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어떤 신부가 제게 “너희 동네의 그 집 가봤어?”라면서 맛집을 물어봅니다.
처음 들어보는 집이었습니다.
“우리 동네에 그런 곳이 있었어?”라고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알려고 하지 않았고, 또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갑자기 주님께서 나타나셔도 주님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어쩌면 늘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말은 하면서도,
주님을 보는 순간에 두려움에 벌벌 떨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하느님의 천사가 사제인 즈카르야에게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대해 말해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시 성전은 예루살렘에만 있었기에, 사제들을 조로 나누어서
차례로 한 주일 동안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속한 조의 차례가 되면
복음에서 보듯이 제비뽑기하여 분향할 사제를 정했습니다.
바로 즈카르야가 주님의 성소에서 분향하던 중에 주님의 천사를 만났던 것이지요.
이 상황에 대해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즈카르야는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루카 1,12)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두려워하지 마라.”(루카 1,13)라고 말합니다.
천사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온 존재,
결국 주님을 만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두려워해야 할까요? 아니면 기뻐해야 할까요?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서도, 정작 주님 알기를 소홀히 하는 사람은
주님 앞에서 기쁨의 감정보다 두려움의 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주님을 아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큰 기쁨 안에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우리는 어제 예수님의 탄생 예고에 대한 말씀을 들었고,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에 대한 말씀을 듣습니다.
곧 어제는 '의로운 사람'(마태 1,19) 요셉의 이야기였고,
오늘은 '하느님 앞에 의로운 이들'(루카 1,6)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이야기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는 구원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고 너무 늙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에게서 거룩한 인물이 태어나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사실 성경에는 여러 거룩한 여인들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창세 11,30), 이사악의 아내 레베카(창세 25,21),
야곱의 아내 라헬(창세 29,31),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1사무 1,2),
그리고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삼손의 어머니인 마노아의 아내(판관 13,2),
그리고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루카 1,7)이 모두 그렇습니다.
그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거룩한 인물들을 낳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간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장소와 시간은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곧 오늘 복음의 장소인 성전의 ‘두 제단’은 두 계약을,
그리고 옛 계약에 따라 ‘제사를 드리는 시간’에 벌어진 이 일은
구약 시대와 신약을 연결해 줍니다.
따라서 요한의 출현은 옛 계약의 율법과 사제직이 끝났음을 알려줍니다.
이는 경계가 무너지는 일입니다.
벽이 무너지고 막힌 것이 사라집니다.
이는 우리를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사실 요한은 불임인 늙은 여인에게서 태어나고,
그리스도는 동정인 젊은 여인에게서 태어납니다.
여기에는 어떤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막시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구약의 인물인 요한은 늙은 여인의 식어버린 피에서 태어나야 했고,
장차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실 주님은
꽃처럼 피어나는 처녀의 몸에서 피어나셔야 했던 것입니다.
~ 그리고 즈카르야는 의심했기 때문에 목소리를 잃었고,
마리아는 곧바로 믿었기에 세상을 구하는 ‘말씀’을 잉태했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아기의 잉태를 알려주면서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줍니다.
‘요한’이란 이름은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다’라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명이 주어집니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루카 1,17)
이처럼 ‘요한의 사명’은 그리스도와의 연관성을 드러냅니다.
곧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일’(루카 1,17)입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의 사명을 되새겨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안에 혹은 우리가 만나는 이 안에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탄생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미 자비를 입었으니, 기뻐하며 자비를 선포하는 일입니다.
<오늘의 말·샘 기도>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 (루카 1,24)
주님!
당신께서는 저의 무능과 허약 안에서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피하고 도망쳐도 보물을 찾듯 찾아오시고,
거부하고 배신해도 목숨처럼 아끼시며 끝까지 버리지 않으십니다.
주님, 지금 지체치 마시고 당신의 일을 완수하소서.
제가 응답하게 하시고, 당신의 자비를 이루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가족계획’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자란 세대입니다.
가족계획이라는 말의 의미는
“부부가 생활 능력이나 건강상태에 맞추어 자녀의 수나 출산의 간격을
계획적으로 조절하는 일을 가리키는 가족학용어.”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의미는 ‘출산억제 정책’입니다.
정부에서 발표했던 가족계획의 구호를 보면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당시 표어는 이렇습니다.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1960년대)
→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71년)
→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78년)”
이렇게 강력한 가족계획의 결과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출산율이 가장 적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인구감소라는 위기 앞에서 정부는 다른 의미의 가족계획을 발표하였습니다.
바로 ‘출산장려 정책’입니다.
이는 2,000년대에 정부에서 발표했던 가족계획의 구호를 보면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당시 표어는 이렇습니다.
“아빠, 혼자는 싫어요. 엄마, 저도 동생을 갖고 싶어요.
자녀에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은 형제입니다.”
정부에서 출산장려정책을 실시하고, 다자녀 가정에 대해 많은 혜택을 주고 있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의 출산율은 세계 최저 수준입니다.
가족계획을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보면
대한민국의 출산율은 앞으로도 더 좋아질 가능성은 적습니다.
정부의 혜택이 있을지라도, 다자녀를 키울 수 있는
경제적인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에게 ‘가족계획’은 어떤 의미여야 할까요?
그것은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이렇게 축복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아브람의 몸에서 나온 아이가 상속자가 될 것이라 하시고,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보여주며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내가 너의 후손을 땅의 먼지처럼 많게 할 것이니,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자라야 네 후손도 셀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고난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많은 자녀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모세는 이 하느님의 자녀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사제 즈카르야에게 보냈습니다.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하느님 구원사업의 정점은 마리아와 가브리엘 천사의 만남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신앙인에게 가족계획이란 하느님이 창조사업에 함께하는 숭고한 소임입니다.
신앙인에게 가족계획이란 하느님이 구원사업에 함께하는 거룩한 소임입니다.
사제는 혼인성사를 앞둔 배우자들에게 혼인의 목적을 특별히 당부하고 있습니다.
사제는 다음 사항을 알려줍니다.
“가톨릭 신자 배우자는 혼인한 후에도 신앙생활을 계속할 것이며
자녀들도 모두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게 하고
종교 교육을 받게 하도록 노력할 것을 서약해야 합니다.
신자가 아닌 배우자에게는,
신자인 배우자가 혼인 후에도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있도록 허락하며
자녀들도 세례를 받게 하고 종교 교육을 시켜야 할
중요한 의무를 약속하였음을 알고 있는지 확인합니다.”
내가 세우는 계획이 나의 영광과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세우는 계획이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것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얼굴과 존재 자체로 주변 사람들에게 온유와 친절의 교사가 되어 주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60, 70 나이가 될 때 까지 자녀가 없어 의기소침해 살아가던
노인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자비와 축복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던지, 처음에 그들은 도무지 믿지 못했습니다.
믿지 못하는 것을 넘어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고,
어이가 없는 일이어서 속으로 헛웃음까지 터져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이런 그들 내면의 표현이 이랬습니다.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 1,18)
즈카르야의 반응은 오늘 이 시대 많은 노인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표현 같습니다.
어쩌다 보니 우리나라는 초고령 사회에 접어들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치도 않은 긴 노년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품위 있고 고상하고 삶의 질이 높은 노년기라면 아무 문제 없을 텐데,
안타깝게도 수많은 대다수의 노인들이 아무런 희망도 없이
가치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고통스러운 노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신앙 없이 살아가는 노인은 더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만 희망을 둡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희망을 둘 곳이 없습니다.
결국 남는 것은 좌절이요 환멸이고 지옥 같은 현실입니다.
이렇게 신앙 없는 노인들, 세상의 노인들은 새벽부터 밤늦도록 지루해 죽습니다.
산보나 등산도 하루 이틀이지 즉시 싫증이 납니다.
그 어디서도 오라고 손짓하는 데가 없습니다. 외로움에 몸부림을 칩니다.
이런 면에서 올곧은 신앙을 지닌 노인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몇몇 노인들을 뵐 때마다 깜짝 놀랍니다.
연세가 70, 80인데도 새벽부터 밤늦도록 바빠 죽습니다.
기상하자마자 성모상 앞에 촛불을 켜고
한 시간 두 시간 자녀들과 손주들을 위한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10시 미사 가기 위해 꽃단장을 하십니다.
성당에서 만난 절친한 교우들과 나누는 이야기꽃이 무르익으면 오전이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레지오 회합, 연령회 회합, 반 모임, 일주일이 금방 지나갑니다.
그래서 나이 들수록 신앙생활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신앙 안에 살아가는 노인들은 정녕 행복합니다.
지금 몸 담고 있는 이 세상 정녕 멋진 세상이지만, 이 세상 반드시 지나갑니다.
그리고 이 세상보다 훨씬 아름답고 풍요로운 또 다른 세상,
하느님 나라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으니, 더 이상 불행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병고나 노화나 죽음도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또 다른 희망을 간직하고 기쁘게 살아갑니다.
막 87세 생신을 지내신 노인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행복한 노인의 모델을 온몸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 병약한 노구를 이끌고도 세상과 인류를 위해 적극적으로 헌신하고 계십니다.
마지막 불꽃을 아낌없이 활활 소진하고 계십니다.
노인으로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계십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자신 안에 주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을 간직한다면
영원한 청춘으로 살 수 있습니다. 노인이라고 포기하거나 낙담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후손들에게 달릴 곳을 다 달린 훌륭한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주십시오.
얼굴과 존재 자체로 주변 사람들에게 온유와 친절의 교사가 되어 주십시오.
자신에게 다가오는 병고나 노화 죽음조차도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도구로 사용하십시오.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
조욱현 토마스 신부
요한의 출생에 대한 예고는 구원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느님께서는 아기를 못 낳는 엘리사벳의 몸에서 거룩한 인물이 태어나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신다.
천사는 기적적인 출생과 아이의 이름에 대해 예고하기 전에 먼저 “두려워하지 마라.”(13절) 한다.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지어 준 아기 이름, 요한은 주님께서 은총을 베푸신다는 뜻이다.
이 은총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은총, 하늘나라로 들어가게 하는
하느님의 은총을 세상에 선포하러 왔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충만했고 하느님 은총의 기쁜 소식을 전했던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이미 은총을 선포한다. 때문에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하였다고 한다.
엘리야와 요한은 둘 다 독신이었다. 두 사람은 다 거친 옷을 입었고 광야에서 살았다.
둘 다 정의를 지키다 왕과 왕비에게 박해를 받았는데,
엘리야는 아합과 이제벨에게(1열왕 19,1-3 참조)
요한은 헤로데와 헤로디아에게 받았다(마태14,3 참조).
엘리야는 불 마차를 타고 하늘에 오름으로써(2열왕 2,11 참조)
사악한 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고,
요한은 순교를 당해 하늘나라에 들어감으로써 사악한 자들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요한은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17절) 백성들을 불신에서 신앙으로 돌려놓아서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17절) 하는 역할을 하였다.
즈카르야는 자신의 나이, 백발이 된 머리카락, 힘을 잃어버린 몸을 떠올렸다.
또 아내가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는 사실도 떠올렸다.
그래서 장차 일어나리라는 천사의 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이렇게 천사의 말을 믿지 못했던 즈카르야는 목소리를 잃었고,
마리아는 곧바로 믿었기 때문에 세상을 구원하시는 말씀을 잉태하실 수 있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25절)
나이 많아서 갖게 된 아들 때문에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낸 엘리사벳은
요한을 잉태한 것을 하느님께 감사하며 주님을 찬미한다.
하늘의 별은 여전히 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밤하늘이 유난히 빛났습니다. 별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기온은 뚝 떨어졌지만 바람 한 점 없는 하늘에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어서 상쾌했습니다.
가끔은 아름다운 하늘을 보고 주님을 찬미할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때로는 먹구름에 가려져 별을 볼 수 없지만 그래도 별들은 별의 모습으로 있었습니다.
어둠이 아무리 깊어도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이지, 모든 별이 아주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느님의 은총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항상 우리를 향해 있습니다.
내가 그분의 은총을 느끼든 그렇지 않든 풍요로움으로 여전히 있습니다.
담을 그릇이 준비되어 있으면 언제든 충만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흔들비쭉입니다.
기대하는 바가 채워지면 호들갑을 떨고, 그렇지 않다고 여겨지면 투덜대기 일쑤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하느님의 은총은 언제나 넉넉함으로 우리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은총이 왜 꼭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으로 주어져야 하나요?
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주심을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요?
최선을 다한 다음에는 손을 털고 주님께 맡긴다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어 주신”(요한3,16) 그분께서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을까요?
즈카르야는 계명을 충실히 지키며 흠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 하면서도 기도가 꼭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였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루카1,13).고 하였지만,
그 말을 믿지 못하고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1,18).하며
보이는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천사가 한 말이 그대로 이루어질 때까지 벙어리가 되고 말았습니다(루카1,20).
하느님 앞에서 의롭고 흠 없이 살아온 즈카르야, 엘리사벳에게도 시련이 있었습니다.
하물며 우리에게 시련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 아닐까요?
예기치 않은 처지, 상황을 접하게 될 때 나의 믿음의 현주소가 드러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고 그분의 은총은 그분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주시건만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왜 그리 힘이든지요!
간절히 청하고는 그저 그분의 처분을 바라는 삶, 그리고 그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어둠에 갇힌 별이 보이지 않는다고 별이 없는 것이 아니듯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서 은총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일깨움이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엘리사벳이 잉태한 후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내며 고백합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루카1,25).
은총은 언제나 넉넉히 우리를 기다립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두 쌍의 부부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독서와 복음에는 두 쌍의 부부들이 등장합니다.
그들 사이에는 아기를 낳지 못하던 차에
하느님의 개입으로 아주 특별한 아들을 갖게 된다는 공통점이 있지요.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루카 1,25).
우리는 먼저 아이 못 낳는 여자라고 손가락질 받아온 여인들의 간절한 기다림을 만납니다.
자손의 수가 곧 재산이고 힘이던 시대에
생산자 역할에서 소외된 여성의 설움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처절했지요.
그 기다림이 주님의 은총으로 열매를 맺어 가련했던 그 손으로 아기를 안게 되지요.
오랜 눈물과 기다림 끝에 그녀들이 누린 이 기쁨과 환희가 곧 성탄의 전조일 겁니다.
"모태에서부터 죽는 날까지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판관 13,23).
그리고 그렇게 세상에 온 아기들이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주님의 천사가 일러준 아들은 나지르인,
즉 주님께 봉헌된 존재이고 또 이스라엘 구원에 일익을 담당하게 됩니다.
제1독서에서 당시 필리스티아인들에게 억압과 괴롭힘을 당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할 미래의 판관인 이 아기가 바로 삼손이지요.
사랑과 배신 등 극적인 요소가 듬뿍 담긴 삼손 이야기는
세간에서도 쉽게 회자될 만큼 유명합니다.
"아이는 자라나고 주님께서는 그에게 복을 내려 주셨다"(판관 13,24).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선택하신 아기는 '봉헌된 이'로서
주님께서 내리신 복을 받으며 성장합니다.
그는 스무 해 동안 이스라엘에서 판관으로 일하며
필리스타인들과 거친 싸움을 벌여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 줍니다.
삼손을 통해 이스라엘은 이십 년간의 구원과 평화를 누리지요.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루카 1,15).
복음에서도 주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즈카르야에게 아기의 잉태를 전하는데
그 아기는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복음사가는 아기의 부모 역시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루카 1,6)이라고 소개했지요.
사실 사람들 눈에 큰 인물로 보이기보다
주님 앞에 큰 인물이 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 아닐까 합니다.
사람들은 위대해 보이는 이면의 약함을 잘 모르지만, 주님은 모든 걸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루카 1,20).
평생 간절히 바라마지않던 절원을 하느님께서 들어주신 것임에도
즈카르야는 이미 늙어버린 나이를 이유로 이를 의심합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일시적이나마 혀가 묶이게 되지요.
사실 믿지 않는 이는 침묵해야 옳습니다.
그의 불안한 회의주의와 불가지론적 동요가
하느님의 단순한 진리를 가리거나 오염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혀가 묶이는 침묵은 자신에게는 정화의 기회가 되고 타인에게는 두려움을 일깨웁니다.
두 이야기에서 우리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이 '아이 못 낳는 여인의 출산'이라는 구약의 기적이
'처녀의 잉태와 출산'이라는 신약 초입의 기적으로 이어짐을 보게 될 것입니다.
구약 여인들이 겪어온 개인적인 기다림은
마리아에게서 민족적이고 인류 보편적인 구원의 기다림으로 건너갑니다.
그 통로의 끝에 진정한 구세주께서 태어나십니다.
꼭 생물학적으로 출산의 능력을 받은 여성이 아니더라도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잉태하고 출산해 양육하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접하고 성체를 영하는 매일 매 순간 우리에게서 성탄이 이루어집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나에게서 탄생하신 말씀께서는
나의 미소와 격려, 사랑과 배려, 용서와 동행의 발걸음으로 육화됩니다.
거기서 흘러나온 구원의 파장은 개인과 이웃, 친지와 지인의 울타리를 넘어
온 인류를 향한 보편적 구원에 작은 빛을 보탤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간절히 아기를 기다리는 마노아의 아내이고 엘리사벳입니다.
나자렛의 마리아입니다!
믿음을 받고 싶으면 손에 쥔 그걸 내려놓아라!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구세주의 선지자가 그에게서 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즈카르야는 믿지 못합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벙어리로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기 생각을 말하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조용하고 순응해보라는 뜻입니다. 해보면 알게 될 것이란 뜻입니다.
그렇게 말을 하지 않게 되자 정말로 그 일이 실현됩니다.
만약 계속 자기 생각을 말하며 이 핑계, 저 핑계를 댔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왜 세상 사람들은 믿어서 손해 볼 게 전혀 없는데도 믿지 않을까요?
믿는다고 크게 손해 볼 게 없습니다. 죽고 나면 알 일입니다.
진짜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믿은 게 얼마나 다행일까요?
하지만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믿음을 버립니다.
『한 번이라도 모든 걸 걸어본 적이 있는가』란 책을 쓴 전성민 씨가 있습니다.
그는 20대를 게임 중독으로 날려버렸습니다.
행정 고시를 위해 공부하다가 게임에 빠져 젊은 시절을 폐인처럼 날린 것입니다.
군대에 다녀오니 서른한 살이었습니다. 절망적인 마음으로 자신에게 묻습니다.
“인생에 단 한 번이라도 후회 없이 모든 걸 걸어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부모님에게 한 번만 더 믿어 달라고 청합니다.
그는 2년 만에 5급 공무원에 해당하는 행정 고시와 입법 고시까지 동시에 합격합니다.
우리는 왜 믿지 못할까요? ‘자존심’을 지키고 싶기 때문입니다.
믿었는데 하느님이 없으면 창피할까봐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자기 자존심과 맞바꿉니다.
사이비에 들어가서 이건 아닌가 싶어 나오고 싶어도 창피해서 못 나온다고 합니다.
우리 자존심이 그만큼 믿음과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관계입니다.
노태권 씨는 중졸 막노동꾼이었습니다. 난독증이 있어 글도 읽을 줄 모릅니다.
두 아들은 중학교 때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둘 다 자퇴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아들을 대학에 보내겠다고 먼저 공부를 시작합니다.
난독증임에도 막노동하며 틈을 내어 공부한 끝에 2006년 수능 모의고사를 일곱 번 만점 받습니다.
12과목 모든 과목 만점을 맞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을 가르쳐서 맏이는 서울대 경영학과 4년 장학생,
둘째는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수석으로 입학시킵니다.
노태권 씨가 꿈꿨던 세상은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믿게 되었을까요? 그가 자존심을 내려놓는 계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IMF 구제금융 시절 서울에서 구두닦이를 할 때였습니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사흘 동안 한 명의 손님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흘을 꼬박 굶었습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겠습니까?
그때 구두를 신은 발 한 쪽이 자기 앞에 올려졌습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구두에 떨어졌습니다.
눈물이 스며들지 않게 하려고 울면서 엄청 열심히 구두를 닦았습니다.
그 사람은 이렇게 구두를 열심히 닦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1,000원이나 2,000원을 주며 나에게 구두를 닦아 달라고 발을 내미는 사람에게
고마워서 눈물을 흘렸다면 그 사람의 자존심은 어디 있는 것일까요?
눈물로 다 빠져버린 것입니다. 더는 자존심이 없어서 실패가 두렵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니 믿기 쉬워집니다.
이런 사람은 누리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전성민 씨가 처음에 게임 중독이 되었던 것은
시험에 떨어지는 것에 대한 창피함을 이기기 위한 자기 합리화가 더 컸습니다.
핑곗거리를 만든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다 이렇게 ‘표징’을 달라며 핑계를 댑니다.
사실 표징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존심이 강해서
믿지 못하는 것이면서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하느님이 없으면 존재할 수조차 없는 존재입니다.
쓸데없는 자존심을 버리기 싫어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믿음을 버리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알리다.
이승화 시몬 신부
하느님의 일은
어느 순간 갑자기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미 수많은 징조를 보여줍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람들의 간절함이 모이고 모일 때
가장 적절한 순간에 하느님은 다가오십니다.
하느님이 오실 때에도
이미 징조들이 나타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
하느님의 뜻을 되찾는 이들
참 진리와 행복을 찾아 하느님께 나아가는 이들
이런 이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하고
서서히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질 준비가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일은
결정적인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충분히 하느님의 일이 준비되었고
가장 적절한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기 전에도
이미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주님이 오시는 길을 마련하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입니다.
나이 많은 여인이 하느님의 손길로 잉태하였습니다.
이를 믿지 못한 즈카리야는 벙어리가 되었지만
이는 하느님의 섭리를 인간이 막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세례자 요한의 잉태를 보면서
우리도 주변을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은 이미 충분히 준비해 주셨지만
내가 스스로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 하느님 사랑의 손길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내가 만든 하느님만을 찾고 있던 것은 아닌지.
이러한 성찰을 통해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길 바랍니다.
깨어 기다리는 마음으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 ‘시몬 신부의 신앙 이야기’>
마리문모 수녀
이해 할 수 없는 일이 마주했을 때,
우리 또한 즈카르야와 같은 반응을 보입니다.
어떻게 저에게 이런 일이..
제 상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당신의 뜻을 제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럴 때 하느님께서는
침묵 속에서
당신의 뜻을 깨닫기를 바라십니다.
침묵 속에서
나의 의견,
나의 고집,
나의 감정,
나를 덧씌우던 것들이 사라질 때
당신의 깊으신 뜻이
조금씩 떠오르고
모든 것이 드러날 때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입니다.
[출처] 툿찡 베네딕도 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