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티나무
구연식
시골에는 마을마다 랜드 마크 격인 상징물이 있다. 그중에서 수호신으로 당산나무의 대접을 받고 있는 느티나무를 빼놓을 수 없다. 느티나무는 수종(樹種)은 달라도 마을의 애환과 세월을 같이 해서 울퉁불퉁한 악어 껍질 같은 몸 뚱은 전설의 칩으로 여겨진다. 같은 시골에 있으면서 옛 서화(書畵)에 나오는 정자(亭子)와 지금의 느티나무는 같은 쉼터이지만 이미지가 대조되는 분위기다.
정자는 기암절벽 위나 풍광이 수려한 곳에 많은 하층 백성들의 인력과 강제를 동원했다는 흔적을 바로 느낄 수 있다. 번질번질하게 기름걸레로 닦은 기둥은 양반들의 피부와 같고 날아갈 듯한 추녀 끝은 지배계층의 콧대 같아 좀처럼 정이 가지 않는 건물이다. 서화 속에 나오는 정자 그림 인물들의 옷차림이나 좌석 배치 등을 보면 정자 안 마룻바닥에는 갓을 쓰고 의관을 정제한 사대부들만 앉아서 풍류를 읊거나 음주·가무가 대부분이다. 정자 밖 아래 맨땅 위에는 의복도 허름하고 상투도 흐트러진 신분 낮게 보이는 사람들이 상전들의 시늉을 드는 묘사가 대부분이다.
느티나무는 힘들이지 않고 자연적으로 자라서 인위적 강제성은 보이지 않고 아무나 쉽게 찾을 수 있는 마을 어귀나 여러 길이 모이는 곳에 있어, 동네 사람이든 행인이든 누구나 앉아서 땀을 식히는 장소로 논일하다가 생긴 장딴지 거머리 핏자국을 허연 띠풀 꽃을 훑어 붙이거나, 농사일 때 지친 피로를 담뱃대에 담뱃가루를 연신 채우고 피로회복제를 빨듯이 하얀 연기를 뿜어대며 쌈지 속의 담배를 내밀며 궐련(卷煙)과 농주(農酒)를 서로 권하는 그 옛날 목가적 풍경이 느티나무 가지마다 기어오른다. 정자(亭子)가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이고 사람이 찾지 않아 먼지가 뿌연한 시멘트 문화라면, 느티나무는 시골집 주막으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찾아 잡풀이 자랄 틈이 없는 토방문화이다.
나의 고향(익산 왕궁 부상마을)에도 어린 시절에는 정자나무(느티나무)가 마을 농수로에 널찍한 동네 마당 한가운데에 있었다. 수령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나무 한가운데는 불에 그을린 흔적으로 텅텅 비어 있었고 어린 꼬마 두서너 명이 함께 나무 통속에 들어가 비를 피 할 수 있는 만큼 굵었으며, 수형은 제주도의 용두암의 형태를 간직한 아주 큰 고목이었다. 더구나 농수로 바로 옆에는 한약방 집 연 방죽이 함께 있었고 정자나무 아래는 마을의 공동우물인 샘이 있어서 더없이 보기 좋은 구도를 갖춘 곳이다. 그래서 아낙네나 어린이나 남녀노소가 모이는 유일한 회합과 휴식 그리고 만남의 장소였다.
그런데 그 정자나무는 수령을 다해 마을에서 별의별 처방을 했어도 고사(枯死)하고 말았다. 정자나무 자리에는 마을 사람들의 걸립(乞粒)으로 모정(茅亭)을 지어 정자나무를 대신하더니 이제는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으로 마을회관이 시멘트와 블록으로 지어져 그 옛날의 왁자지껄했던 마을 사람들 웃음의 정감은 사라지고 양로원으로 슬그머니 자리바꿈하여 마을의 대소사를 이야기하고 선공치사(善功致謝)를 했던 소싯적의 느티나무가 오늘따라 감자 찌는 솥 김처럼 모락모락 떠오른다.
옛 궁궐, 서원, 향교나 사대부집 마당 한가운데는 으레 선비와 지조의 상징인 배롱나무(백일홍나무)를 심었고, 궁궐부터 아래로는 백성들의 생활터전 까지는 느티나무를 심어 모두를 다 함께 편안하게 보듬어주는 넉넉하고 편안한 나무다. 느티나무라면 고려나 신라 때부터 삶을 함께해온 역사 속의 나무로 긴긴 세월을 이어오면서 맞닥뜨린 민족의 비극도, 애달픈 백성들의 사연도 모두 듣고 보아 오면서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왔다. 그래서 전설을 간직한 느티나무는 수없이 많다.
지금도 느티나무를 보면 그 옛날 사람들 그중에서 소꿉친구들이 무지개처럼 떠오른다. 느티나무는 늙고 수형이 변했어도 그 자리에서 옛 친구들을 기다려주는데, 죽마고우 친구들은 대나무말 대신 자동차를 타고 멀리도 갔는지 아무리 기다려도 만날 수가 없다. 더 늦기 전에 마을의 전설을 타임캡슐에 넣어 마을의 공터에 구덩이를 파고 묻고 그 위에 느티나무 묘목을 심어 자라는 어린이들에게 아름다운 고향을 되새김할 수 있도록 땀 흘리고 싶다.
(202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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