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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20일 수요일
제1독서 : 이사 7,10-14
복 음 : 루카 1,26-38
26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28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30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종종 신부 중에 새벽 미사에 늦게 들어가는 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물론 신부도 인간이기 때문에 새벽에 일어나지 못해서 늦게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매번 늦는다는 것입니다. 같은 신부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미사를 하기 전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평일 미사는 1시간 전에,
주일과 대축일 미사는 30분 전에 고해소 안으로 들어가서 성사를 주고 미사 준비를 합니다.
신자들이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 들어오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이는 저의 미사를 위한 준비이고, 저의 정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급하게 미사에 헐레벌떡 들어가는 신부들을 안타깝게 생각했고,
그러면 안 된다면서 판단하기도 했습니다.
며칠 전, 주일 저녁 미사 때에 부랴부랴 제의방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고해소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곧바로 미사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제관 시계를 잘못 본 것입니다.
시계를 보고 아직도 한 시간이나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시계가 멈춰있었던 것입니다.
제대로 살지 못한다고 다른 신부를 비판하던 저였지만,
저 역시 그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전혀 그러지 않을 것처럼 자신 있게 말했지만,
저 역시 언제든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기 역시도 그렇게 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겸손함을 가지고 있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하느님도 심판하지 않는데, 뭐가 그리 잘 났다고 남을 비판하고 단죄할 수 있을까요?
이런 행동들이 하나의 습관이 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더 나아가 하느님에 대해서도 온갖 불평불만을 하면서 판단하고 있지 않습니까?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을 찾아가서 엄청난 소식을 전해줍니다.
바로 예수님 잉태 소식이지요.
이 세상을 구원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다는 커다란 기쁨입니다.
그래서 가브리엘 천사의 첫 마디가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성모님의 지금 처지입니다.
당시는 결혼 전에 아기를 갖게 되면, 간음했다는 이유로 투석형을 당해 죽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기쁜 소식이라 할지라도 거부할 수밖에 없으며,
하느님의 이런 선택은 잘못되었다면서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활동을 가로막지 않습니다.
여기에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활동은 무조건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아셨던 것입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우리의 교만함으로 얼마나 많이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었을까요?
성모님과 같은 겸손함을 통해서만이
하느님의 활동에 함께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예고합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4)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이사야의 예고대로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이 잉태하게 된 경위를 말해줍니다.
이를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와 비교해 보면,
‘주님의 탄생 예고’는 성전 안 ‘성소’에서 전해진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와는 달리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았던 '이방인의 갈릴래아'(마태 4,15)에 있는
작은 동네 나자렛의 시골 처녀의 ‘집’에서 전해집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거처를 성전 안이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 두시게 됩니다.
그런데 천사의 인사말은 마리아가 이미 “은총이 가득한 이”(루카 1,28)였음을 말해줍니다.
곧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기 전에, 믿음으로 충만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즈카르야는 ‘의심’하여 자신의 목소리까지 잃어버리고 벙어리가 되었지만,
마리아는 ‘믿음’으로 응답하여 구원의 말씀을 품으셨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마리아는 몸으로 우리 주님을 잉태하시기 전에 마음으로 먼저 잉태하셨다."
또 즈카르야에게는 아기가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루카 1,17)이라는 ‘사명’이 예고되지만,
마리아에게는 아기가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외아드님”(루카 1,35)이라
불리게 될 것이라는 ‘신원’이 예고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루카 1,35)으로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마리아의 응답을 통해 드러납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오늘은 여기에서 드러나는 마리아의 ‘희망’에 대해서만 보고자 합니다.
이는 마리아 자신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 그것을 저도 바랍니다.’라는 뜻입니다,
곧 그분의 희망을 희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리아의 희망과 하느님의 희망이 같아진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원하신 바를 이루시도록 그분의 뜻에 승복하는 일이요,
그분의 뜻을 자신의 뜻으로 품고 자신의 희망이 아니라 그분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이요,
당신의 사랑을 이루시도록 자신을 그분께 허용하고 수락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하느님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고,
그분의 은총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분이 하시는 일에 함께 일하는 협조자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집으로 삼으십니다.
저희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시고, 저희 안에서 사십니다.
바로 이것이 저희가 마리아와 함께 진정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희망이 있다는 이 사실 말입니다.
우리를 희망하는 분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이 사실 말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큰 기쁨인지요!
내가 바로 하느님의 집이요 놀이터요 일터라니!
이는 마치 잠에서 깨어난 야곱의 탄성(Eureka!), 그 깨달음의 외침과 같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창세 28,17)
오늘 우리는 참으로 기쁘고 행복합니다.
바야흐로 성탄의 기쁨이 몰려옵니다.
희망이 이미 수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로 주님의 희망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희망이 진정,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계시다." (루카 1,28)
주님!
참으로 큰 기쁨입니다.
제 안에 사랑이 있다는 이 사실, 참으로 놀랍고 아찔한 감미로움입니다.
이제는 그 사랑에 승복하게 하소서.
그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소서.
그 사랑을 퍼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5년째 뉴욕에서 살면서 ‘의, 식, 주’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옷은 주로 ‘사제복’을 입고 있습니다.
다른 옷들도 입었지만, 사제에게는 사제복이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교우들에게 이런 질문도 받곤 했습니다.
“신부님은 이런 데 올 때도 사제복을 입으세요?”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할 때도, 아침에 산보할 때도,
모임의 자리에 갈 때도 즐겨 입는 옷은 사제복입니다.
사제복 덕분에 도움을 받은 적도 많았습니다.
뉴욕에서 운전면허 실기시험을 볼 때였습니다.
감독관은 천주교 신자였고, 제게 강복을 청했습니다.
저는 긴장하지 않고, 무사히 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공항에서 입국할 때였습니다. 입국 심사관이 신자였습니다.
저를 보고 환하게 웃으면서 ‘환영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식당에서 식사할 때입니다.
사제복을 알아본 교우들 중에는 미리 계산을 해 주는 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제복을 즐겨 입는 것은 도움을 받아서가 아닙니다.
그냥 사제복이 편하고,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머무는 곳은 신문사입니다. 1층은 사무실이고, 2층은 저의 숙소입니다.
다락방이라서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지만 제게는 비싼 뉴욕에서 편한 쉼터가 되고 있습니다.
가구를 움직이거나, 재배치하는 편이 아닙니다.
작년에 브루클린 교우들이 2층의 숙소에 있는 가구들을 말끔하게 재배치해 주었습니다.
책상과 침대의 위치가 바뀌었는데 완전히 새로운 집이 되었습니다.
우중충했던 샤워커튼을 치우고 새로 샤워커튼을 달았습니다. 샤워실이 호텔급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았더라면 행복했을 것”이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베들레헴에는 ‘예수님의 탄생 성당’이 있습니다.
성당의 지하에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던 자리가 있습니다.
많은 순례자들이 줄을 서서 예수님의 탄생 자리에 경배하기 위해서 기다렸습니다.
비좁은 곳이지만 한국의 순례자들은 경배를 마친 후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성가를 부르곤 합니다.
‘145 - 27 33ave flushing NY 11354'는 언제나 저를 포근하게 맞이해 주는 제 삶의 구유입니다.
입는 것과 머무는 곳은 큰 어려움이 없지만 먹는 것은 매일의 숙제입니다.
밥과 국 그리고 반찬을 준비해서 먹기도 했고, 죽을 데워서 먹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아침에 주로 떡을 먹습니다. 혼자 먹다 보니 간편하고, 쉬운 먹거리를 찾게 됩니다.
사목정보 11, 12월호에 먹는 것에 대한 좋은 글이 있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가톨릭의 식사 후 기도에서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라는 구절이
단순한 위령의 기도가 아님을 깨닫는다.
세상을 떠난 모든 만물은 나의 몸을 통한 거룩한 성찬이 되었다는 의미
역시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묵상할 수 있기를,
그 죽은 만물의 몫과 은혜만큼 더 열심히 살 수 있기를 전구한다.
동학의 해월 최시형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천지의 녹인 줄 알면 반드시 식고(食告)하는 이치를 알 것이요,
어머니의 젖으로 자라는 줄 알면 반드시 효도로 봉양할 마음이 생길 것이다.
식고는 반포(反哺)의 이치요, 은혜를 갚는 도리니,
음식을 대하면 반드시 천지에 고하여 그 은덕을 잊지 않는 것이 근본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체성사를 제정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 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들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그렇습니다. 음식을 먹는 것은 단순히 연료를 주입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 생명에게로 전해지는 은혜를 입는 것이고, 하느님의 은총이 주어지는 성사입니다.
이제 곧 주님의 탄생입니다.
주님께서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수고하고 힘든 자들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다.”라고 하십니다.
이제 곧 주님의 성탄입니다.
‘의, 식, 주’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이 있다면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의 손을 내밀면 좋겠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능력 없으면 사랑도 못 한다?
전삼용 요셉 신부
여러분은 능력이 없으면 사랑도 못 한다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긍정하시나요, 부정하시나요? 만약 능력을 돈으로 바꾼다면 어떨까요?
여러분이 여자라면 능력 없고 인물 좋은 사람과
능력은 있지만 외모가 좀 딸리는 남자 중에 누구를 택하시겠나요?
돈은 능력입니다. 하느님은 그러나 약하셨습니다.
인간이 되셔서 인간에 의해 처참히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게 다일까요? 저는 사랑도 능력이 있어야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이 등장하십니다.
성모님은 강한 분이셨을까요? 성모님은 온 세상을 사랑하셨을까요?
그래서 성모님은 아무 저항도 없이 당신 아드님도 십자가에 내어 주셔야 했습니다.
사랑은 약함인가요, 강함인가요? 약해지는 게 사랑인가요, 강해지는 게 사랑일까요?
치킨 프랜차이즈로 많은 돈을 벌고 백종원 대표의 골목식당처럼
‘장사의 신’이란 유튜브를 진행하는 은현장 씨가 예전 씨름 선수 박광덕 씨를 방문한 내용이
조회수가 많이 나와 여러 편을 봤습니다.
박광덕 씨는 씨름으로 번 돈 15억을 사기 맞고
지금은 오산에서 작은 족발집을 운영하며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대학 보낼 때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죽을 고생을 하며 재기하였고 지금은 유튜브로도 돈을 벌며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은현장 씨는 어디를 방문하던 가게 사장이 나이가 많아도 존댓말을 쓰지 않습니다.
TV에 나와서도 연예인들에게 쓴소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덩치 큰 전직 씨름 선수에게는 존댓말을 씁니다.
처음엔 족발이 좀 심심하고 막국수가 너무 싱겁다는 말을 못 했습니다.
하지만 장사의 신은 거기서 멈출 수 없었습니다.
100만 원 상당의 많은 선물을 사 들고 다시 갑니다.
맞아 죽을 각오하고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 박광덕 씨에게 컨설팅해 줍니다.
박광덕 씨는 지금까지 자신이 하던 맛에 자부심이 있었지만,
거의 연예인급이 된 은현장 씨의 말을 잘 듣고 그대로 따라 해서 변화되었습니다.
누가 더 강한 사람일까요? 박광덕 장사일까요, 은현장 대표일까요?
누구도 박광덕 씨 앞에서 저런 솔루션은 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은현장 대표도 수백억을 가진 자산가이지만, 그 앞에서는 약해졌습니다.
그에게 솔루션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랑은 약해지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약하기 때문에 약해지는 것은 비굴함입니다.
사랑은 강한데 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강해져야 합니다.
내가 하느님과 함께 계시고 그분이 나에게 은총을 계속 주시어
나는 못 할 게 없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누구에겐가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보통 갓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분들을 보면 스마트폰에 온통 손주 사진입니다.
부모보다 더 좋아합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 봅니다.
어떤 분들은 조부모는 아기에 대한 책임이 적어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저도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젊은 부모들은 아기들이 사랑스럽기도 하지만,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부모들은 이미 자녀를 키워본 경력이 있습니다. 크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더 사랑스러운 것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유튜브에서 보면 낡아 버려진 오토바이 등을 재분해하여
새것처럼 만드는 과정을 올린 동영상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버려진 오토바이가 사랑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능력을 과시할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잔인할 수 있어도 사랑과 능력은 비례한다고 봅니다.
능력이 있어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능력자이시기에 사랑이시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라는 천사의 말을 믿으셨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라고 말한 것대로,
그분이 당신과 함께 계시며 은총을 주심을 믿으셨습니다.
나에게 능력 자체이신 분이 함께 계시며 능력을 주고 계신다면
그 은총을 받지 못하는 온 세상 사람들은 불쌍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온 세상을 사랑하는 게 가능해집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의 탄생 예고가 이어지고 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28절)
이런 인사는 마리아에게만 주어진 인사였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28절)
주님께서는 마리아를 보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태어남의 신비를 통해 마리아에게로 내려오신다.
마리아는 천사를 바라보던 그 자리에서 하늘의 심판관을 몸에 받아 모시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하느님께서는 한 처녀를 당신의 어머니로 만드셨고, 당신 여종을 어머니로 삼으셨다.
온 세상도 하느님을 품지 못하지만, 하느님은 온전히 그 품에 오시어 사람이 되셨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31절)
천사는 마리아에게 거룩한 신비를 드러내 줄 아기에 대하여 말한다.
마리아는 처녀로서 어머니가 될 것이다.
그 아기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이 되실 분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세상을 다시 창조하실 분이시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34절).
이 물음은 동정 잉태라는 신비에 대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천사는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내려오시어 잉태하리라고 한다.
마리아가 열매를 맺게 하신 분은 성령이시다.
마리아에게 내려와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하신 성령께서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의 양식인 빵과 포도주에 내리시어,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거룩한 성찬례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어
믿는 이들의 몸이 되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마리아의 잉태는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요한 1,13) 성령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
마리아는 하느님께 순종함으로써 하와의 불복종을 되돌려 놓는다.
그리하여 한 천사였던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첫 번째 처녀의 타락이
다른 천사의 말을 받아들인 처녀 마리아의 믿음으로 극복되고 있다.
마리아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평범한 한 시골 처녀였다.
우리와 같은 한 사람이고 평범한 삶을 사는 인간이었다.
그 마리아가 그렇게 하느님께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다면,
우리도 마리아와 같이 고백하고 실천해야 한다.
먼저 믿어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믿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확인한 후 그에 대해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보지 않고도 그렇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믿기 위해 아는 것이 인간적이라면, 알기 위해 믿는 것은 신성에 가깝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명확히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11,6).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 29).
성경을 보면, 즈카르야는 분향 제단에서 천사를 만나게 되는데 놀라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즈카르야는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1,18) 하고
그 메시지가 참되다는 것을 증명하는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이미 인생의 경험상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으니 웃기는 소리하지 마시오’라는 마음이 거기 있었습니다.
결국은 메시지가 이루어지는 날까지 벙어리로 지내야 하였고, 비로소 믿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를 만나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는 인사말을 듣게 되었는데
몹시 놀라면서도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 하였습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1,34).
하느님의 은총은 나의 공로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은총을 주시고,
은총을 발견하느냐 못하느냐는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마리아의 질문은 곧 어떻게 해서 처녀가 어머니가 될 수 있단 말인가?’하는
우리의 물음이기도 합니다. 그에 대한 천사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7).
믿음은 불가능한 일이 없는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하고 순종했습니다.
우리는 먼저 믿고 곰곰이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 믿으면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기적이나 표징을 요구하지 말고 먼저 믿으면,
애당초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시련과 고통 안에서 더욱 빛나게 됩니다.
마리아의 대답은 바로 목숨을 내놓는 기도였습니다.
당시 시대 상황으로써는 처녀가 임신을 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지만 당신의 일을 인간과 더불어, 인간을 도구 삼아 하십니다.
인간의 자발적인 협력안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탄생은 하느님의 은총과
거룩한 어머니 마리아의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 열매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의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통하여 예수님을 낳아드려야 할 때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만큼 우리의 믿음이 더해지길 희망하며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당신의 뜻이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사랑의 거처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마리아께서 당신은 남자를 알지 못한다고 하시는데
저는 즉시 남자는 알지 못해도 하느님은 아는 분이시다는 묵상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남자를 몰라야만 하느님을 안다고 얘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남자만 알고 하느님을 모르는 여자가 있긴 하지만
남자를 몰라야만 하느님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남자를 모르는 사람이 하느님을 더 잘 알 수는 있을 거라고.
물론 이것도 모두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다만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남편이 없는 여자와 처녀는 몸으로나 영으로나 거룩해지려고 주님의 일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혼인한 여자는 어떻게 하면 남편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일을 걱정합니다.
이와 같이 혼인하는 사람도 잘하는 것이지만 혼인하지 않는 사람은 더 잘하는 것입니다.”
사실 잘 아는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특히 사람은 사랑이 없이 잘 알 수 없고,
하느님은 더욱더 사랑 없이 잘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마리아는 남자를 알지 못하기에 사랑이 갈리지 않았고,
그래서 하느님의 어머니 되기에 온전히 합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성모 무염시태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합당한 거처가 되도록 미리 축성하신 것 말입니다.
사랑이 우리에게도 오십니다.
사랑의 거처가 됩시다.
우리도.
하느님이 사람에게 청한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예고한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고하는 복음이 봉독된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예고의 序幕이었다.
요한의 탄생 예고는 오직 그리스도의 탄생 예고 때문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선구자는 선구자 다음에 도래하는 메시아에 의해 의미를 갖게 된다.
서막이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本幕의 준비를 위해 존재하는 것과도 같다.
요한의 탄생 예고로 말미암아 임간의 세상에 “새로운 무엇”이 시작되었다면
예수의 탄생 예고는 “그 무엇”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선포하는 것이다.
바로 인간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 즉 구원자요 메시아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본막을 위한 서막의 존재, “무엇”의 예고와 예고된 “무엇인지”를 밝히는 작업은
두 개의 탄생 예고 사화를 비교해 봄으로써 가능해진다.
루카는 요한의 탄생 예고에서와 같이
예수의 탄생 예고에서도 시간과 장소를 명확히 하고 있다.
시간은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진 지 정확히 여섯 달째 되는 때였다.
이는 새로운 무엇이 인간 세상에 시작된 지 6개월이 지난 때이다.
이제는 시작된 그 무엇이 도대체 무엇인지가 밝혀지는 때이다.
장소는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동네이다.
요한의 경우는 화려하고 웅장한 성도 예루살렘의 성전이었지만,
여기는 변두리 어느 한 마을이다.
즈가리야는 분향을 위해 주님의 성소에 들어가
그곳에 나타난 천사 가브리엘을 만나게 되지만,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보내어 찾아온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을 받는다.
즈가리야는 천사의 인사도 없이 바로 메시지를 전해 듣는다.
그러나 마리아는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는
천사의 인사를 받고 난 다음 메시지를 전해 듣는다. 놀라기는 둘 다 마찬가지였다.
즈가리야의 경우는 이미 늙은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질 것이고,
마리아의 경우는 요셉과 약혼은 했지만 아직 남자를 모르는 처녀로서
스스로 아기를 가질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즈가리야는 의심이 앞서 믿을 만한 표징을 요구했고,
마리아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묻는다.
즈가리야는 불신의 대가로 벙어리가 되어 이 일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기다려야 했지만,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이지기를 바랍니다.” 하면서
엄청난 메시지를 겸손과 순명으로 수용한다.
그 순간 예수는 이미 마리아 안에 잉태된 것이다.
마리아 안에 잉태된 아기는 “하느님은 구원이시다.”는 뜻을 가진 “예수”라 불릴 것이며,
그는 조상 다윗의 왕위를 물료 받아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될 것이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예수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요, 만민의 주님이 될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보다 먼저 와서 세상 사람들이
이 주님을 맞아들일 만한 백성이 되도록 준비시키는 임무를 받았다.
요한은 구약성서에서 흔히 있었던 아이를 낳지 못한,
그러나 나중에 야훼의 안배로 아이를 낳은 여인들,
즉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창세 11,30; 17,17; 18,11-14),
이사악의 아내 리브가(창세 25,21),
마노아의 아내요 삼손의 어머니(판관 13,2-3),
엘카나의 아내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1사무 1,5) 등과
같은 처지의 엘리사벳에게서 태어난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 예수는
사상 初有의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이다.
남자를 모르는 동정녀가 어떻게 아기를 가질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뜨거운 토론의 대상이다.
학계에서도 이에 대한 說이 구구하다.
동정녀 잉태는 분명 우리 가톨릭교회의 “사도신경” 안에 자리 잡은 신앙조목이다.
신앙조목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동정녀 잉태를 믿는다, 또는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정녀 잉태에 대한 토론의 여지가 있다는 것은,
이 신앙의 조목이 事實史인지 意味史인지에 대한 구별이다.
이 구별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구별은 칼로 물을 베는 것과 같다.
이는 이성과 감성이, 철학과 신화가, 로고스와 뮈토스가
동시에 인간정신세계에 속해 있는 것과도 같다.
동정녀 잉태가 생물학적이고 물리적인 측면에서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건의 한 편만을 이야기한 것이다.
사건은 다른 한 편은 아직 이야기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따라서 동정녀 잉태의 문제를 인간의 측면에서 해결하려 들면, 시원한 답을 얻지 못한다.
동정녀 잉태는 세상 안에 통상 존재하는 수백만 잉태 중의 하나가 아니다.
남녀의 관계를 통한 생물학적 잉태만을 정상적으로 인정하는 세상의 눈은
동정녀 잉태를 생물학적 이변으로밖에 볼 수 없다는 말이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하느님께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이 되시는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 마리아의 수용에 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인간의 肉을 취하는 길이며,
육을 취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인간적 관계를 배제하는 길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스스로 마리아를 찾아가 동의를 구하셨고,
마리아의 동정성을 겸손과 순명으로 받으신 것이다.
구약의 石女들은 그 청이 하느님에 의해 받아들여지거나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찾아가 청을 건넴으로써
마리아는 다른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은총을 가득히 받은 여인이 된 것이다.
주님의 성탄은 이렇게 하느님께서 인간을 찾아오는 사건이다.
우리 안에 인간이 되시고자 청을 넣으러 오시는 것이다.
인간이 되시려는 하느님의 청에 나는 과연 무엇이라 답을 드리겠는가?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예수님의 탄생예고
송영진 모세 신부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카 1,28-33)
여기서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라는 천사의 인사말은,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특별히 선택하셨고 부르셨음을 전해주는 말이기도 하고,
성모님이 그 특별한 은총을 받으신 것을 찬양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는
하느님께서 성모님께 은총을 가득히 내려 주셨다는 뜻이고,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는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 자체가 큰 은총이라는 설명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너를 뽑으셨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기뻐하여라.”는 하느님께서 ‘하신 일들과 하실 일들’은,
성모님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큰 기쁨’을 주는 일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라는 말은,
천사가 하는 말 자체의 뜻은 알아들었지만, 자기가 왜 그런 ‘찬양’을 들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몰라서 놀랐다는 뜻입니다.
<말 자체를 알아듣지 못했다면, 또는 이해하지 못했다면 놀라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 인사말은, 인간이(신앙인이) 들을 수 있는 찬양 가운데에서 최고의 찬양입니다.
성모님은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비천한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겸손한 분이었기 때문에(루카 1,48),
그런 ‘찬양의 말’을 듣는 것에 몹시 놀라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놀라지 마라.”입니다.
이 말은, “무서워하지 마라.”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모님은 천사의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놀라거나 무서워하지 않으셨고,
천사의 인사말을 무서워하신 것도 아닙니다.
“왜 나에게 이렇게 엄청난 찬양을 하는가?” 라고 의아해한 것뿐입니다.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는 ‘가득히 받은 은총’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고,
천사가 성모님을 찬양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고,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특별히 선택하셨음을 다시 강조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31절-33절의 말은,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뽑으신 이유, 뽑힌 성모님이 하시게 될 일,
그리고 예수님이 하시게 될 일들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일방적인 통보가 아니라, 성모님의 동의와 협조를 구하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세상에 보내시려고 메시아의 어머니로 너를 선택하셨는데,
너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겠느냐?”>
“큰 인물,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 다윗의 왕좌, 영원히 다스리다, 그분의 나라”라는 말들은
모두 ‘메시아’를 뜻하는 말인데,
성모님은 이 말들이 모두 메시아를 뜻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들으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루카 1,34-38)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가 아니라,
“동정녀인 제가 어떻게 아기를 낳을 수 있겠습니까?”입니다.
<성모님은 “도대체 당신의 말이 무슨 뜻입니까?” 라고 묻지 않으셨고,
“그런 일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항의하지도 않으셨고,
“제가 아기를 낳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 바로 약혼자 요셉과 결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물으셨습니다.>
성모님이 그 모든 일들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중요한 점은, 성모님의 질문은 응답할 준비를 이미 하고있는 상태에서
‘응답의 방법’을 묻는 질문이라는 점입니다.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은,
천사의 말을(하느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언제나 항상, ‘이해’보다 ‘믿음’이 먼저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도 성모님은 우리의 모범이 되시는 분입니다.
천사의 대답을 단순하게 요약하면,
“하느님께서 다 알아서 하실 것이니 너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입니다.
성모님의 말씀에서 ‘바랍니다.’라는 말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저도 원합니다.”라는 뜻이고,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나도 원하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라는 말은,
천사가 성모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가, ‘응답의 말’을 듣고 나서 떠났음을 나타냅니다.
즉 성모님께서 충분히 심사숙고하신 다음에 자신의 자유의지로 응답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어쩔 수 없어서 복종한 것도 아니고,
이해를 못하면서도 맹목적으로 복종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이승화 시몬 신부
어둠이 짙어질수록
빛을 찾고자 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해집니다.
그 빛을 품으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하느님은 그에게 손길을 내어 주고
그를 통해 하느님의 빛을 세상에 전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기쁜 소식은 이렇게 전달됩니다.
빛을 품으려 하는 자는
이러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독서에 나오는 아하즈처럼
표징을 청하고 시험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분께 대한 온전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
나를 이끌어 주시고 있음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리아와 같은 자세를 가집니다.
은총을 전하는 이를 기쁨으로 맞이하고
이미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빛을 품기에 다가올 두려움을 넘어
하느님께 순명하고 그대로 따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고백은 우리 신앙인들이 닮아야 할 겸손이며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개방성입니다.
이러한 겸손과 개방성이 있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빛을 전해주시고
우리를 통해 세상에 빛을 전하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도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기적이나 이적, 표징에 매이기보다는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고 신뢰할 수 있기를
사랑에 대한 확인보다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삶에 집중하기를
그리하여 어두운 세상에 빛을 전하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 ‘시몬 신부의 신앙 이야기’>
서 바오로 수녀
몹시 놀랐다.
곰곰이 생각하였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성모님은 몹시 놀라셨지만
곰곰이 생각하셨고
다만 한가지 질문을 하신 후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고 고백하십니다.
얼마나 많은 역동이 성모님의 마음 안에 일어났을까?
그러나 마지막 성모님의 고백은 담담하게 들려옵니다.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두려움, 긴장감, 급박함..
오늘 성모님의 고백을 기억하며 저도 조금 더 담담하게
그 역동 속을 잘 지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출처] 툿찡 베네딕도 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