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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생명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백대영
오늘은 “우상을 예배한다면 죄를 범하는 것임”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상(偶像)”, 한자 “우(偶)”에는 “짝”이라는 뜻이 있고 “인형(人形)”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사람 형상으로 만든 것을 인형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범위가 넓어져서 동물 모양이나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든 상(像)을 인형이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우상(偶像)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든 형상(形像)을 가리켜서 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미술 시간이 되면, 조각가가 석고를 가지고 사람 모양을 만듭니다. 석고(石膏)가 무엇이냐 하면, 팔이 부러지거나 다리가 부러졌을 때 병원에 가면 깁스하잖습니까? 그때 사용되는 재료가 석고인데, 석고 가루를 물에 섞으면 마르면서 단단하게 굳어집니다. 하지만 돌처럼 단단하지는 않기 때문에 칼로 긁어서 사람 모양을 만들 수 있습니다. 석고로 만든 형상을 “석고상(石膏像)”이라고 합니다.
서울 광화문에 가면 이순신 동상이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 모양을 청동(靑銅)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동상(銅像)”이라고 합니다. 저기 북한에 평양에 가면 김일성 동상이 있습니다.
나무로 만든 형상은 무엇입니까? 나무가 한자로 무엇입니까? “목(木)”이잖습니까? 그래서 나무로 만든 형상을 “목상(木像)”이라고 합니다.
돌로 만든 상은 “석상(石像)”이라고 합니다. 돌을 망치로 깨 만듭니다. “돌”이 한자로 “석”이기에 돌로 만든 상은 “석상”입니다.
우리 교회의 교단이 “백석(白石)”입니다. “백(白)”이 희다는 뜻입니다. 제 이름에 들어가는 글자입니다. “석(石)”은 “돌 석(石)” 자입니다. 그러므로 “백석(白石)”은 “흰 돌”이라는 뜻입니다.
옛날 로마 시대 때에 법원에서 재판할 때에 배심원들이 피고가 유죄인지 무죄인지 투표로 결정하기 위해서 검은 돌과 흰 돌을 사용했습니다. 검은 돌은 유죄, 죄가 있다는 표였습니다. 흰 돌은 무죄, 죄가 없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재판하실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을 진실로 믿은 사람들은 흰 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죄가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죄를 범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재판 때 죄가 없는 자라고 선언될 수 있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죗값을 속바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속죄”라고 하며, 예수님께서 대신 속죄하신 것을 “대속”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무엇을 속바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의 보배로운 피를, 보혈(寶血)을 가지고 우리를 위해 속바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죗값은 이미 모두 치러졌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 믿는 자들이 지급할 죗값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무죄, 죄가 없다고 선언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석고상이든, 동상이든, 목상이든, 석상이든 이것들을 만들고 그것에 절하고 하나님이라고 섬길 때 그것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잖습니까? 절에는 불교에는 불상이 있잖습니까? 불상 앞에 가서 삼천 번을 절하는 것을 “삼천 배(拜)”라고 합니다. “예배(禮拜)”라고 할 때 “배(拜)” 자가 “절 배(拜)” 자입니다.
불상에 삼천 번을 절하면서 자신에게 복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불상도 우상입니다.
천주교 성당에 가면 마리아상이 있습니다. 천주교에서 예수님은 단지 마리아 가슴에 안겨 있는 어린아이일 뿐입니다. 이 모두가 우상입니다.
우상을 예배하는 것이 바로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예배”와 “숭배”는 똑같은 말인데 “예배”는 보통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말할 때 사용되고 “숭배”는 보통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말할 때 사용됩니다. 우상 예배를 보통은 “우상숭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나오게 만들어서 황야로 들어갔습니다. 그 황야 이름이 시나이 황야입니다. 거기에는 산이 있는데, 그 산의 이름이 시나이산입니다.
그 산에 모세가 하나님의 앞에 올라갑니다. 왜 올라갔느냐? 이스라엘의 자손들하고 하나님하고 언약식을 맺기 위해서, 오늘날의 말로 하자면 계약식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이 계약하려면 계약서가 있어야 합니다. 그 계약서에 계약 조항들이 기록되어 있고 그대로 하겠다고 합의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자손들 사이에 계약하기 위해서, 언약하기 위해서 언약 문서를 받기 위해서 모세가 산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모세가 산에 40일을 있는데 40일 동안 밤과 낮으로 40일을 있었는데,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그렇게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 40일 안 먹고 살 수 있습니다. 다 살 수 없습니다. 40일 안 먹다가 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물을 안 먹고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저도 3일 동안 밥도 안 먹고 물도 한 방울도 안 마시고 그렇게 살아 본 적이 있습니다. 물 안 먹고 3일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 안 먹고 일주일을 살 수는 없습니다. 금식하는 하는 사람도 밥은 안 먹어도 물은 마십니다.
그런데 모세는 산에 올라가서 40일 동안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그런데 지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큰 바위에서 돌 판 2개를 자르셨습니다. 무엇으로 자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번갯불로 자르셨겠죠. 하나님께서는 그 돌 판 둘에다 10가지 언약 조항들을 직접 기록해 주셨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십계명입니다. 모세가 십계명 언약 조항들을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1장 18절에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 완성하신 때 하나님의 손가락 안에 글을 씀을 받은 돌의 판들 그 증거의 판들의 둘을 그가 그에게 주신지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모세는 “너를 위하여 조각상을 만들지 말라”는 십계명을 받고 있었고, 그때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시나이의 황야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1.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예배하였습니다.
1) 이스라엘 백성이 아론에게 하나님을 만들 것을 요구합니다.
출애굽기 32장 1절에 “당신은 우리 앞에 갈 하나님을 만드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모세가 그 산으로부터 내려오기에 지체한 것을 그 백성이 보았고 그 백성이 아론의 곁에 소집함을 받았으며 그들이 아론에게 말하였기를, “당신은 일어나고 우리를 위해 우리의 앞에 갈 하나님을 만들어 주시오, 우리를 이집트의 땅으로부터 오르게 한 그 사람 모세에게 무엇이 있는지 우리가 알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출 32:1).
출애굽기 32장 1절에 “우리에게 하나님을 만드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이 순간까지 하나님께서 그들의 앞에 가시며 그들을 이끌어 주셨는데, 그들은 이제 아론에게 그들의 앞에 갈 “하나님을 만들라”고 요구합니다.
‘아론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우리를 이끌어 줄 하나님을 만들어 주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1절에 “신(神)”이라는 말이 한자로 “신(神)”이라는 말이 우리말로 버꾸면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들은 아론에게 하나님을 만들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들면 그것이 하나님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지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을 만들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하나님을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들 수 있습니까? 사람이 만들 수 있는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가짜 하나님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짜 하나님은 눈에 안 보이거든요. 진짜 하나님께서는 ‘너 그것 하지 마라, 너 그것 해라, 너 선악과 먹지 말라 그것 먹으면 죽을 거야’.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것 하지 말라 저것 하지 말라’ 그러시니까 사람들은 진짜 하나님이 싫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하나님, 가짜 하나님. 내 기도 들어 줄 만한 하나님, 내가 이것 달라고 하면 이것 주고 저것 달라고 하면 저것 주고, 내 마음대로 움직일만한 하나님을 사람이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아론에게 ‘하나님을 만들어 달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들며 자기 욕망을 따라 하나님을 만드는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은 우리 위에 왕(王)이시거든요. 주(主)시거든요. 왕이 명령을 내리는 것입니까. 왕명이 무엇이었습니까? ‘너 선악과 먹지 말라’, 그것이 왕명(王命)이잖습니까? 지금 모세가 받은 십계명도 명령이잖습니까? 명령을 내리시는 하나님이 싫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아라비안나이트에는 왕이 나오는데 그 왕이 여자랑 하룻밤 자고 나면 싫증을 내는 것입니다. 하룻밤 자고 나서 죽이고 다음 날에는 다른 여자랑 하룻밤 자고 죽이고, 다음 날에는 또 다른 여자랑 하룻밤 자고 죽였답니다.
어떤 지혜로운 여자, 슬기로운 여자가 이 왕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이 여자는 그 왕에게 그 밤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오늘날 드라마가 그렇듯이 재미있는 순간에 이야기를 끝냅니다. 다음 이야기는 내일 해 드릴게요. 이런 식으로 이 여자는 밤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여 죽지 않고 살 수 있었답니다.
그 이야기 중에서 램프의 거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램프를 문지르면 램프에서 큰 사람이 나와 ‘주인님 무엇을 해 드릴까요?’라고 묻습니다. 돈 달라면 돈 주고 집 달라면 집 주고 해 달라는 것을 해 주는 것입니다. 이 거인의 이름이 지니(genie)입니다.
사람은 지니(genie)와 같은 하나님을 원합니다. 해 달라는 것 해 주고 원하는 소원 다 들어주는 지니 같은 가짜 하나님을 원하는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는데, 가짜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을 주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짜 하나님을 싫어하고 가짜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입맛에 맞는 하나님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 자손들이 아론에게 우리를 위해 하나님을 만들어 달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나타나지 않으면 기다려야 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닌, 그들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바라볼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을 원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미래를 성공으로 인도하여 줄 그런 하나님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들 수 있는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입니다.
그들은 그들을 위하여 그들의 앞에 갈 하나님을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욕망에 들어맞는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을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자기 생각을 붙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변형시켜 자기가 믿는 신념을 하나님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지 못한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일 수 있습니다. 매우 아름답게 지어진 교회 예배당도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지 못하면, 금송아지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건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할 때 그것은 다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서울 강남에 3천억을 들여서 지은 건물도 금송아지 우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전은 예배하려고 지은 건물이며, 거기에 하나님께서 거주하십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곳에 거주하지 않으신다면, 그냥 건물에 불과합니다.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육체에 거주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육체가 곧 성전이었습니다. 이 성전에서 드려진 제물은 예수님 자신이셨습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마지막 성전은 헤롯 성전이었고 건물로서의 성전은 존재 사명을 다하였습니다. 건물로서의 성전이 존속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원후 70년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끝장난 것입니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e the Great, 280?~337) 이후 크리스트교가 공인되고 난 이후에 크리스트교가 세속화되기 시작하였고 중세에는 로마가톨릭에 의해 저마다 소위 성전 건축에 열을 올렸습니다. 건축비 충당을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고, 그래서 종교개혁이 일어납니다.
그와 같이하여 지은 화려한 성당들이 오늘날 역사적 유물은 되겠으나,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가 세속화되고 타락하게 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 건물 짓기입니다.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르면서 소위 성전 건축에 열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는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악행을 피하여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하나님을 보이는 하나님으로 만들기 원하였듯이 사람들은 이렇게 볼 수 있는 그 무엇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경향을 보이며, 그리고 사람들은 볼 수 있는 것에 끌립니다.
건물은 다만 예배당이며 예배하는 데 필요한 공간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배 공간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오해하지 말기 바랍니다. 모이기 위한 공간은 필요하나 건물이 성전이 되지는 못한다는 말입니다. 지나친 욕심으로 일을 벌여놓고 하나님께 그 일을 해결해 달라고 한다면 정말 참믿음인지 의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지 믿음 자체를 믿는 것이 아님에도 『긍정의 힘』의 저자 조엘 오스틴과 같이 믿음의 말씀을 믿는 이단자는 믿음 자체를 믿으면서 믿고 선포하면 선포하는 대로 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 뒤치다꺼리하시는 분입니까? 하나님을 그와 같이 대하며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사실은 하나님을 알라딘의 램프의 요정 정도로만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솔로몬이 많은 물질을 사용하여 화려한 성전 건물을 지었다고 말하며, 교회당 건축에 즐거운 마음에 물질을 드려야 한다는 목사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향유 옥합을 발에 부은 여자를 칭찬하셨다며, 예수님을 위해 사용하는 물질을 낭비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성경이 마치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고,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가요? 눈의 욕망을 위해 화려한 건물을 지으면서 낭비하는 자들의 생각입니다. “사랑의 교회” 예배당 같은 건물을 하나님께서 진짜 기뻐하실 것인가요?
금송아지를 만들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도 진짜 하나님은 아닙니다. 교회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나 금송아지를 섬기는 것은 아닙니까? 금송아지를 섬기면서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스스로 속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우리가 만든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의 하나님을 섬겨야만 합니다.
2) 사람들이 우상을 만드는 이유는 ‘자기를 위하여’입니다.
출애굽기 32장 1절에 “우리에게 하나님을 만드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론에게 “우리에게” 하나님을 만들라고 요구하는데 새 번역은 “우리를 위하여”라는 문구를 빼고 번역한 잘못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만들 것을 요구한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우리를 위하여”서였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듭니다. 자신이 만든 하나님을 앞에 세우고 가면서 든든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나 사실은 그 자신을 위하여서 한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나는 누구를 위하여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를 위하여 살며 자아를 신봉하는 자아 우상 숭배자는 아닙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명분으로 고가의 악기를 사는데 그것이 정말로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사람이 듣기에 좋기 위한 것인지가 의문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파이프오르간을 수억 원이나 수십억 원으로 설치하여서 연주하여야만 하나님의 귀를 즐겁게 하는 찬양이 된다고 생각하는 목사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靈)이시고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여야지 예배하는 자가 값비싼 악기를 연주하여 예배하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눈에 보이는 값비싼 금송아지를 만들고 싶은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우상 숭배자들과 인본주의자들에게는 변명거리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서고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위한 것이라고요. 사람들이 보이는 것을 원하므로 보이는 것을 만들어 주어야만 한다고요. “사람들이 원하니까!”,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든 이유가 그것이었습니다.
3) 아론은 백성에게 금귀고리를 가져오라고 말하였습니다.
출애굽기 32장 2절에 “금의 귀고리를 벗기고 그것들을 가져오라”라고 하였습니다.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금의 귀고리들을 벗기고 나에 가져오라”라고 하였습니다(출 32:2).
그러므로 모든 백성이 그들의 귀에 있는 그 금의 귀고리들을 벗겼으며 아론에 가져왔습니다(출 32:3).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드는 데 있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연합하였는데, 사람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연합하여 무엇인가 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한마음 한뜻으로 연합한다고 해서 그것이 항상 올바른 것만은 아닙니다.
첫 번째 범죄는 부부가 한마음으로 금단의 열매를 먹은 것이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성령님을 속이는 일에 한마음이 된 것입니다.
인류는 그 시초부터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한마음인 경향이 있는데, 인류는 꼭대기가 하늘에 있을 성읍과 탑을 세우는 일에 일심이었습니다. 인류는 한마음으로 뭉쳐서 바벨탑을 건축하기 시작하였습니다(창 11:4).
바벨탑 건축도 역시 “우리를 위하여” 성읍과 탑을 세우자고 말합니다. 즉 사람은 “우리를 위하여”, ‘그 자신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어 섬깁니다. 화려한 교회당 건물도 결국 자기를 위하여 이름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우상을 만들고 섬기는 일에 있어서 한마음이 되기 쉽습니다. 아론이 금귀고리를 가져오라고 하니 그 백성이 금을 가져와 바쳤습니다. 그들이 금(金)을 바쳤으니[獻], 말 그대로 그들은 헌금(獻金)하였습니다. 헌금이 다 옳은 것일까요? 그들은 우상을 만드는 일에 헌금한 것입니다.
4) 금송아지 숭배는 지도자가 앞장설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2장 4절에 “아론이 부어 만든 상의 송아지를 만들고,”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조각 도구 안에 가두고 부어 만든 상의(molten) 송아지로 만들고 그들이 말하기를 “이집트의 땅으로부터 오르게 한 너의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출 32:4).
출애굽기 32장 4절에 보면 아론이 부어 만든 상의 송아지를 만들었고 그들이 그 송아지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말하였습니다(출 32:4). 송아지가 하나님입니까? 자기들이 만든 것을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론은 금을 가지고 부어 만든 상의 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출 32:4). 이것은 종교 지도자도 우상숭배에 앞장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명한 종교 지도자들이라고 생각 없이 따르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00주년 기념교회의 이재ㅊ 목사가 코로나 때 무엇이라고 말하였냐면 ‘우리가 제2의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가 왔다’라고 말했는데 그가 말한 제2의 종교개혁은 온라인 비대면 예배를 활성화해 인터넷상으로 예배를 드리자는 것입니다. 유명한 목사 말 듣고 따라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너희가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이라’고 명령하셨는데 이ㅈ철 목사는 비대면 예배를 말하여 그가 거짓 교사임이 결국 드러난 것입니다.
그의 아들 이승윤은 싱어게인 가수 경연대회에 나와 1등을 하였는데, 각자 자기 꿈을 위해 산다는 방탄 소년단의 노래 소우주를 불렀습니다. 이ㅈ철 목사의 자녀 교육 철학은 내가 바라는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1)
보이는 하나님, 즉 내 입맛에 맞는 하나님을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교회에 출석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되고 책망받아야 하는데, 온라인으로 설교를 들으면 “아 이 말씀 좋네 하면서” 자기 입맛에 맞는 설교자를 설교만을 골라 듣게 됩니다. 이것은 올바른 예배가 아닙니다.
복 받는다고 말하고 부자 된다고 병 고침 받는다고 말하는 목사말만 찾아서 듣는 것입니까? 그게 무슨 예배이고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자기 입맛에 맞는 설교를 듣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자기 입맛에 맞는 하나님을 만들었습니다.
이것 들으니까 죄 이야기하고 죄인이라고 말하니까 듣기 싫은 것이고, 복 받고 잘된다는 이야기만 골라서 듣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입맛에 맞는 하나님을 만드는 것이지 그 설교에 나오는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 아닙니다. 본문은 아론, 종교 지도자가 우상숭배에 앞장설 수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고 그랬습니다.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하나님이라고 그랬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으로 예배하고 섬기면서 나 하나님 믿어, 나 예수님 믿어, 나 예수님 이름으로 설교하고 전도도 하고 예수님 이름으로 병까지도 고치고 그랬어.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 죽고 하나님의 재판정에 딱 섰는데, 하나님께서 ‘너 지옥’ 그러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예수님 이름으로 가르치고 병자들도 고치고 기적들도 행했는데 왜 저를 지옥으로 가라고 그러는 것입니까? 그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알지 못하니 악마를 위해 준비된 지옥으로 떠나가라”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내가 너를 알지 못하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교회는 내부 좌석 수는 12,000석, 교인 숫자가 70만 명이라는데 왜 그렇게 사람들이 모였습니까? 복 받는다니까 병 고침을 받는다니까 많이 모이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고 고난받아야 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별로 안 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금송아지 하나님을 섬기면서 진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짜 하나님과 가짜 하나님을 잘 구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5) 금송아지 숭배자들은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32장 4절에 “이스라엘아 이집트의 땅에서 너를 올라오게 한 너의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알 숭배자들은 솔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할 것이며 바알을 섬길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겉과 속이 똑같습니다.
그런데 금송아지를 섬기는 자들은 겉의 이유와 실제가 다른 것입니다. 금송아지 숭배자들은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노라’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이 실제 섬기는 대상은 참 하나님이 아니라 금송아지 하나님입니다. 우상을 섬기면서도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교활하게 속여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참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 하나님을 섬기도록 합니다.
6) 우상숭배를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출애굽기 32장 5절에 “내일은 야훼께 축제라”라고 하였습니다.
아론이 반응을 보고 그것의 앞에 제단을 짓고 아론이 부르고 말하기를 “내일은 야훼께 축제(festival)라”고 하였습니다(출 32:5).
아론은 부어 만든 상의 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하였고, 그는 제단을 세운 후 “내일은 야훼께 축제라”고 하였습니다(출 32:4-5).
그들은 하나님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형상으로 변질시켰습니다.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대체했습니다.2)
7) 예배의 대상이 올발라야만 합니다.
출애굽기 32장 6절에 “그들이 이튿날 일찍 일어나고 번제들을 오르고 그들이 화목제들을 접근시키고 그 백성이 먹기와 마시기 위해 거주하고, 그들이 웃기 위해 일어났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배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예배하기 위해 제단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절기를 지킬 준비를 마쳤습니다(출 32:5).
그들은 예배의 방법만은 잘 배운 것 같습니다. 번제들을 오르게 하고 화목제들을 접근시키고 함께 교제하였습니다.
어떻게 예배하느냐보다 누구를 예배하느냐가 우선하여서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1계명을 범하면서도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생각하였고, 금송아지를 만듦으로 2계명을 범하였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하였으니 하나님의 이름을 허무에 들어 올리는 것을 통해 3계명을 범하였습니다.
예배하는 대상이 무엇입니까? 성공입니까? 명예입니까? 업적입니까?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 금송아지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성공을 위하여 이용하고 성공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배 되는 금송아지와 똑같은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송아지 형상은 만들지 않았을지 모르나, 성경에서 원리를 찾아야 합니다. 보이는 송아지는 만들지 않았다 하여도 하나님 대신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금송아지입니다.
번제들을 올리고 화목제들을 접근시키는 예배의 겉모양이 있을지라도 내면에 참된 생명력을 잃게 된다면 오히려 그와 같은 열성적인 겉모양이 위선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8) 참 하나님은 없고 웃음만 있는 예배는 참 예배가 아닙니다.
출애굽기 32장 6절에 “그들이 이튿날 일찍 일어나고 번제들을 오르고 그들이 화목제들을 접근시키고 그 백성이 먹기와 마시기 위해 거주하고, 그들이 웃기 위해 일어났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든 예식을 금송아지를 향해 행하였으며, 그들은 웃기 위해 일어났습니다(출 32:6).
사람에게 듣기 좋고 유머가 넘치고 즐겁고 교인들을 웃음 짓게 만들고 때론 눈물 나게 하며 감동적인 감정을 선사하는 메시지가 넘쳐난다 해도 사람을 좋게 하는 예배는 참 예배가 아닙니다.
크리스천 음악(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의 약자인 C. C. M이 현대의 교회에 널리 보급되어 있습니다. 젊은이들의 감정을 움직입니다. 감정이 고양되었다고 성령의 임재라고 착각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옛날 찬송가 가사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신학과 신앙 고백이 있었는데, 현대 크리스천 음악을 볼 때 모두 아니나 신학이 빠진 것 같이 보입니다. 현대 크리스천 음악 가사는 “하나님 사랑해요”라고 반복하여 노래하는데 그 하나님이 성경의 하나님인지 금송아지 하나님인지를 어떻게 압니까?
그나마 외국곡들을 원어로 살펴보면 신학이 들어 있는 것들도 있으나, 그것을 우리말로 번역하다 보면 번역 과정에 길이가 더 늘어나기 때문에 내용을 자르고 번역하여 도대체 무엇을 고백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는데 그것을 부르며 눈물 흘리는 자들은 가사에 은혜로워 눈물 흘리는 것인지 자기의 감성에 맞아떨어져서 눈물 흘리는 것인지를 종잡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후 그것 앞에서 웃고 뛰놀았듯이, 가수들의 공연장에서 미쳐 날뛰듯이 가사는 아무 상관이 없는 듯합니다.
바른 말씀이 빠진 예배는 참 예배가 아닙니다. 참 예배는 복종입니다. 말씀이 선포될 때에 그 말씀에 ‘아멘’으로 복종하는 것이 참 예배입니다. 진리 없이 자기가 만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참 예배가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금송아지를 섬기며 참 하나님을 섬긴다고 합니다. 금송아지를 예배하며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으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계시가 되지 아니하여 있는 모습의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입니다.
성경 구절을 아전인수처럼 인용하고서 사용하는 목회자들이 허다한데 ‘목사가 좋은 차 끌고 다녀야지 교인들도 좋은 차 끌고 다니지’라고 하며 최고급 승용차를 끌고 다니는 목사도 보았습니다.
3000억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웅장하고 화려한 교회당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예수님의 발에 기름을 붓는 것에 비유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성경을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로 쓰는 것은 악마적인데, 악마가 성경 구절을 들고 와 예수님을 시험하였음에 주의하여야 합니다.
2. 우상을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9장 16절에 “그들이 그들의 하나님이신 야훼께 죄를 범하였고 그들이 그들을 위해(for) 부어 만든 우상의(molten) 송아지를 만들었고, 야훼께서 명령하신 길부터 그들이 길을 잘못 든지라.”라고 하였습니다.
우상숭배는 무엇입니까?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범하는 죄 중에서 가장 큰 죄가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우상숭배가 제일 큰 죄기 때문에, 십계명의 열 가지 계명 중에 제일 계명이 무엇입니까? “나의 앞에 다른 신(神)들을, 다른 하나님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내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참 하나님보다 더 앞세우는 것, 더 우선순위로 삼는 것, 이것이 다 내가 하나님 앞에 두는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리처드 포스터라는 사람이 쓴 『돈, 섹스, 권력』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사람의 영성은 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리처드 포스터가 쓴 『돈, 섹스, 권력』이라는 책의 제목은 진리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돈을 하나님 앞에 돈을 우상으로 예배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쾌락을 하나님 앞에 쾌락을 우상으로 예배하면서 살고 있으며, 사람들은 권력을 하나님 앞에 권력을 우상으로 섬기면서 살고 있습니다.
권력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문재인, 이재명, 옛날은 누구입니까? 3김,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이런 사람들, 김영삼을 장로라고 대통령 뽑아주었으나 김영삼의 하나님은 대통령직이었습니다. 한국 경제는 그때부터 내리막길이고 IMF 구제를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여자가 너희가 선악과 먹지 말라고 했을 때 왜 먹은 것입니까?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 먹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누구였습니까? 자기 자신, 한자로 자아(自我), 그래서 자아를, 자기 자신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을 만든다는 말은 자아를 섬기는 것을 뜻합니다. ‘불상 안 만들어요, 불상에 절하지 않아요, 마리아 안 섬겨요’라고 하나, 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무언가를 하면서 살아가는 때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을 우상으로 예배하는 우상 숭배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의 왕좌에 하나님이 앉아 계시고 예수님이 앉아 계시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것 하지 말고 저것 하지 말라고 마음에 말씀하시면 왕명에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내가 먹고 싶은 것 먹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내가 게임을 하고 싶으면 게임 하고 사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을 하나님으로 섬기면서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죄의 성품이 있는 것이며 우리가 일요일에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 우리가 참회기도 드리잖습니까? 일주일 동안 살며 범한 죄 회개기도 하잖습니까? 왜 회개기도 합니까?
간음했습니까? 도둑질했습니까? 다른 사람을 칼로 찔러 죽였습니까? 안 그랬잖습니까? 그런 짓 하지 않아도 그래도 참회기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왕이 되어서 내가 하고 싶은 것 하며 살았던 죄, 내가 하나님이 되어서 살았던 죄, 이게 가장 큰 죄라는 것입니다. 이런 죄를 회개하고, 내 마음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 예배하면서 말씀에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이렇게 예배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복된 성도들이 모두 됩시다!
1)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978393#home
2) James K. Bruckner, 『출애굽기』, 김귀탁 역 (서울: 한국성서유니온선교회, 2015), 4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