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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성당 레지오 마리애 단원 교육) (2024-08-09 11:15:11, Hit : 277)
[“저에게 이루어지소서!”(Lu 1,38)]
<신앙, 나이듦에 대하여>
찬미예수님! 저는 부산성모병원과 메리놀병원에서 기획실장으로 일하고 있는 조영만 신부입니다. 오늘 아치에스 행사는 잘 마치셨습니까? 레지오 단원들의 사열식이라고 할 수 있는 아치에스 후에 레지오 단원들의 교육 시간을 마련했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저의 생각은 보통 군대에서 사열식 후에는 사병들도 좀 쉬고 맛있는 음식도 좀 먹고 휴식시간을 갖는 것이 통상적인데, 남산성당 레지오라는 군대는 군기가 좀 빡세구나! 사열식한다고 힘들었던 군사들을 집에도 안보내고 또 뭘 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대단하다! 싶었습니다. 우리 남산성당 레지오, 군기가 대단한 거, 맞습니까?
예, 좋습니다! 군기는 대단한 거 맞는데, 제가 가만히 보니 군사들의 연령 때가 만만치 않아보입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했는데, 정말 우리는 죽지 않았습니다. 레지오 4,50년씩. 보통 군생활 35,6년 하면 제대를 시켜주는데, 성모님의 군대는 대단하지요. 이렇게 평생을 레지오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뭘 하래! 이만큼 했으면 제대를 시켜줄만도 한데, 제대도 안시켜줘! 레지오 까떼나에서 레지오 단원들의 제대일을 명기해놓았는데, 언제까지 레지오 군사로서 군복무를 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 “한평생 싸움이 끝날 때까지!”
(레지오 마리애 마침기도문)
‘미지근한 이들을 열정으로 불태우고, 죄로 죽은 영혼들을 다시 살아나게 하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한평생 싸움이 끝난 다음, 저희 레지오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주님의 사랑과 영광의 나라에서 다시 모일 수 있도록 저희의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는 믿음을 주소서!’
그래서 레지오 단원들의 제대일은 언제다? 한평생 싸움이 끝날 때까지! 참, 이 군대. 대단하지요. 세상의 모든 군대는 눈에 보이는 적과 대치하여 맞서고 전쟁을 벌입니다. 하지만, 성모님의 군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 싸웁니다. 세상의 군대는 교전하다가 쉬기도 하지만, 성모님의 군대는 스물네시간이 영혼과 육신의 전쟁입니다. 내 안의 악과도 맞서고 세상의 악과도 싸워야 합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그렇습니다. 내 발 옆이 바로 천길 낭떨어지입니다. 평생 쌓아놓은 신앙내공이 한꺼번에 무너져내리는 것도 순식간입니다. 마귀는 그렇습니다.
#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인 악마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닙니다.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악마를 대적하십시오!”(1베드 5,8-9)
스물네시간 경계근무를 서며 악마의 동태를 살피고, 저 자식이 나의 어떤 약점을 파고들어 나를 멸망으로 이끌려고 하는지 파악하여 내 영혼의 진지를 수선하고 마귀의 침략에 맞서 싸울 내공을 길러야 하는 우리 성모님의 군사들이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자꾸만 나이가 들어가요. 이제는 힘들어서 레지오도 못하겠어요. 하시는 단원분들이 많으십니다. 그래서 제가 남산성당 레지오 단원분들의 교육시간에 이 말씀을 좀 드리고, 이런 격려를 좀 해드려야겠다 싶어서, 강의 주제 밑에 부제를 이렇게 달아놓았어요. “신앙, 나이듦에 대하여”
# [“저에게 이루어지소서!”(Lu 1,38)]
신앙, 나이듦에 대하여
사실 이 주제는 5년 전에 전 유럽레지오마리애 단원 피정 주제였어요. 제가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재유럽 한인레지오 지도신부였거든요. 제가 그곳 소임을 마치고 한국에 와 있는데, 다시 독일에서 연락이 왔어요. 신부님. 저희들 레지오 피정이 이번에도 퀼른에서 있는데 와서 강의 좀 해주세요. 그래요. 제가 교구 사무처장을 하던 시절이었는데, 맨날 주교님하고 밥 먹는 게 얼마나 힘들겠어요. 옳다구나, 한 일주일 빠져나갈 절호의 기회다 싶어 냉큼 수락을 하고는 그래, 강의 주제는 어떤 걸로 준비해드릴까요? 했더니, 그 때 그분들이 그래요. 신부님. ‘나이듦’에 대해 해주세요. 이제는 저희들이 너무 늙었어요. 와서 우리들 위로 좀 해주세요. 모두가 파독 광부 간호사들 60년대 때 독일로 떠나간 분들이 레지오 단원들 대부분이셨거든요. 이제는 70은 젊고 대부분 80대의 그야말로 노장 중의 노장들이셨지요. 그래서 제가 19년도에 독일에가서 2박 3일 전 유럽 레지오 단원 교육을 퀼른에서 할 때의 강의 자료 가운데 한 꼭지를 오늘 꺼내오게 된 것입니다. 그 때 모두 여섯 개의 강의를 했는데, 오늘 강의 함께 해보시고 마음에 드시면 다시 말씀하세요. 제가 싸게해드리께요!
우리 함께 읽어볼까요?
#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때로는 20세 청년보다 60세 노인에게 청춘이 있다.
#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우리가 늙는 것은 아니다.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다.
# 세월은 피부의 주름살을 늘게 하지만
열정을 가진 마음을 주름지게 하지는 못한다.
#고뇌 공포 실망 때문에 기력이 땅으로 들어갈 때
비로소 마음이 시들어버리는 것이다
#60세든 16세든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는
경이로움에 이끌리는 마음
#젖먹이 아이와 같은 미지에 대한 끝없는 탐구심,
인생에 대한 흥미와 환의가 있다.
# 영감이 끊어져 정신이 냉소란 눈에 파묻히고
비탄이라는 얼음에 갇힌 사람은
#비록 나이가 20세라 할지라도 이미 늙은이와 다름 없다.
그러나 머리를 드높여 희망이란 파도를 탈 수 이는 한,
#그대는 80세일지라도 영원한 청춘의 소유자인 것이다.
랍비 사무엘 울만 <청춘>이라는 책의 한 대목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의 물리적 나이를 젊게해드릴 능력은 없습니다. 다만, 한 평생 싸움이 끝날 때까지 레지오 단원으로 살아가실 여러분들이시기 때문에, 지금 이 나이를 바라보는 시선 한 줄기는 바꾸어드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하느님으로부터 우리 존재의 의미와 가치는 출발되었습니다. 동의하십니까? 생로병사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주관하신다는 말인데, 거기에는 태어나는 것 뿐만 아니라 늙는 것, 병드는 것, 그리고 마지막 죽는 것 조차도 하느님으로부터 왔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음을 신앙심 깊은 레지오 단원분들은 이미 눈치채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늙는 것도 선물이요, 병드는 것도 선물이요, 그렇습니다. 죽음까지도 선물입니다. 아니 보물상자들입니다! 요즘 세상 사람들 죄다 늙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거의 대부분의 돈을 쏟아 붓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구구팔팔이삼사라는 유행어가 있지요? 아흔아홉살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삼일 앓고 죽는 것이 복이라는 말인데, 과연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다가 아무런 고통이 없이 죽는 것만이 복일까? 수십 년 앓다가 죽은 인생은 과연 불행하기만 한 인생인가? 날마다 호화롭게 살다가 죽은 저 부자(루카 16,19 이하)는 행복한 삶을 살았고, 서른 셋의 나이로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 속에 처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은 불행한 인생을 사신 것일까?
사람이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은총이다. 노인의 쇠약한 몸은 우리에게 이 은총을 느끼게 해준다. 그러므로 ‘노인을 위한 노인의 영성’이 아니라 ‘노인에게서 배우는 영성’이 있을 뿐이다. 오로지 건강하고 편안하게 오래 살다가 고통 없이 죽기를 바라는 마음으로는 이 영성에 도달할 수 없다. 팔팔함이 인생의 목적일 수가 있는가! 그러니 너무 젊게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40대에는 40대에 80대에는 80대에 맞는 얼굴이 있다. 어느 나이든 그 나이에 맞는 가치가 있다. 80대에는 80대의 사고를 할 때 가장 멋있다. 노인이 힘이 넘쳐나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의욕 넘쳐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이 젊은 시절의 힘을 다시 얻기를 바라서라면 그것은 늙음 자체를 초라하게 만드는 일일 것이다. 노욕이다. 젊게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이에 따라 사는 것이 중요하다. 늙지 않으려고 발버둥 칠 일이 아니라 나이를 받아들이며 나이를 즐기는 것이다. 그러니 나이 오십이 되면, 인생은 오십부터. 나이 70이 되면 인생은 칠십부터! 다시 살면 그것이 사무엘 울만이 노래했던 청춘인 것입니다.
오래 사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살고 나이들다 악마에게가 아니라 다시금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제가 전유럽레지오 피정의 네 번째 꼭지에서 들려드린 강의를 짧게 전달하겠습니다. 네 번째 강의의 주제가 바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 루카복음 1장 38절의 말씀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늙음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병고와 나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라고 두 눈 부릅뜬 우리에게, 저는 그 답의 한 출구를 마리아에게서 찾고자 했습니다. 마리아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의 대부분은 루카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루카는 당신 복음의 시작을,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되리라는 소식을 알리는 것으로 복음을 출발시킨다.
# 프라 안젤리코 수태고지(성모영보)
마리아는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라고 질문하지요.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곧 인간의 이성이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느냐는 아주 당연한 질문입니다. 물론 대답은 다 아시는데로 그 일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선언합니다.(루카 1,36 이하)
#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 대답 속에는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신뢰와 더불어 자신의 뜻이나 생각에 대한 완전한 비움이 들어 있습니다. 마리아 영성의 시작인 셈이지요. 아들을 낳기 위해, 구세주의 모친이 되기 위하여 마리아는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고 온전히 그분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믿고 바란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서 함께 들은 대답, 짧디 짧은 천사의 대답 앞에 마리아와 우리가 똑같이 섰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마리아 사이에서 느껴지는 간격. 마리아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성경에서 전해주는 정보 이상의 것에 대하여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천사가 말하는 동안, 그리고 그의 말을 듣는 동안 마리아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은 분명합니다.
마치 글을 읽는 중 행간에 숨겨진 뜻을 불시에 간파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렇지 않다면 어찌 이 짧은 한 문장 앞에 모든 것을 비우고 온전히 받아들여 순명하게 되었을까? 그래서 오랜 시간이 걸려 그리스도교 신학이 간파한 것은 마리아의 대답, 곧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라는, 마리아의 동정론은 곧 인간의 지성이나 능력, 그러니까 인간으로서의 힘을 완전히 비운 케노시스의 상태, 이를 성경에서는 <성령의 다스림>으로 표현하고, 이것은 곧 인간의 욕망 혹은 인간의 의지로 고통의 문제를 극복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임에 대한 전향적 신앙의 고백인 셈이다.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여기에는 그 어떤 인간의 잔재주나 욕망, 심지어 나의 어떤 것 하나라도 내세우려는 시도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나에게 이루어져야 할 것은 오직 하나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그 뜻 뿐입니다! 그것이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바로 성모님을 따르는, 성모님을 닮는, 성모님의 사람들, 레지오 단원들입니다! 저에게 이루어지소서! 이 대답을 못하기 때문에! 맨날 성모님 앞에 앉아 기도는 하면서도 맨날 지가 옳고 지 뜻이 맞고, 지 뜻대로 안되면 하네 안하네 그렇게 떠들어대고 있으니, 늙을수록 어떻게 말이 줄고 침묵이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이를 먹고서도 말로 그렇게들 싸워대는 것 아니겠는가! 제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 저는 이제 입을 닫겠나이다. 주님, 이 세월만큼 살아왔으면 이제는 제 뜻 그거 뭐 대수라고 죽니 사니 하겠습니까? 그저 뜻대로 하십시오. 저에게 이루어지소서! 기도할 줄 알아야 안되겠는가! 아멘!
#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15세기, 패널에 유채, 라사로 갈디아노 미술관, 마드리드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그 말을 듣고 마리아는 마니피갓으로 화답한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6-55) 레지오 단원들의 전략회의 자리이자 충전의 시간인 레지오 쁘레시디움 주회의 시작기도에 나오는 마니피캇 기도문이지요. 이제 무슨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든 그것은 주님이 행하시는 큰일이요, 그것으로 자신은 복된 존재임을 이미 받아들인 것이다. 행복은 행복할만해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행복할만해서 행복하다던 그 조건은 언제든 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할만하게 만들어준 것 가운데 영원한 것은 다 한 가지도 없습니다. 믿음은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 그것이 진짜입니다.
(믿습니까!)
보이지 않는 희망, 보이지 않는 사랑, 보이지 않는 생명, 그 영원에 대한 믿음이 마리아가 지닌 영성의 기반이자, 이것이 마리아를 총사령관으로 모신 레지오 모든 군사들이 지향해야할 믿음의 근원임을 드러내줍니다.
# 아기 예수의 탄생 17세기 루벤스 뤼용 박물관 소장
마침내 때가 되어 마리아는 아들을 낳는다. 그리고 아들을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힌다. 이 아기가 누구인지 천사는 목자들을 통해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알린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2,11) 예수의 탄생을 둘러싼 마리아의 행위는 다섯 가지 동사로 요약된다.
“낳았고, 감쌌고, 눕혔고, 마음에 간직했고, 곰곰이 되새겼다.”
아이를 낳았으니 마리아는 어머니이고, 어머니는 생명을 낳는 존재이며, 영의 열매가 자라나는 풍요로운 대지이다. 마리아는 영의 어머니이니, 그녀가 낳은 아들이 아버지의 말씀이자 영인 까닭이다.
마리아는 아기를 포대기로 감싼다. 아기를 세상에서 지켜주고 따뜻한 온기로 보호하며 돌보는 것이다. 어머니로서 품을 줄 알아야 한다.
마리아는 아이를 눕힌다. 편안한 자리를 마련해 안정되고 차분하며 포근한 분위기를 만들어 쉬게 한다. 아기가 그 곁에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모성의 하느님을 느낄 수 있도록.
마리아는 목자들이 전하는 말을 받아들여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긴다. 그 말 속에 담긴 뜻을 생각하며, 아들보다 더 늙어가며 아들의 일생에 동반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다.
# <시메온의 예언> 램브란트 16세기
(시메온)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친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조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30-32) 그러나 이러한 영광 뿐만 아니라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으며 그 일로 마리아의 영혼이 칼에 꿰찔릴 것이라고 전한다.
마리아는 구원자 아들의 길에 동반될 영광에 대하여, 그리고 아기 예수를 팔에 안고 찬미를 드린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에게 다가올 고통마저도 함께 품에 안으신다. 고통과 영광이 한 몸 안에 있음을. 하나로 통하는 것임을 예감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런 동요도 없이 고요히 일상을 계속해 나간다. 성경은 그날의 일과를 아주 단순하게 보고하고 있을 뿐이다.
#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루카 2,39) 마리아의 비움은 마리아의 일상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일화가 하나 있다. 바로 혼인잔치 장면.
# The Marriage at Cana, c. 1495/1497, Oil on panel, 137 x 93 cm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데로 하여라.”(요한 2,4) 어머니는 아들 예수가 원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선이라는 것과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일이 거기에서 배제되어 있지 않음을 알고 있다. 말하자면 아들이 누구인지 어머니는 알고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믿음이 아들의 때를 이끌어낸 사건이다. 여인이여!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손사레를 치는 아들에게 마저도, 어머니의 믿음이 아들의 때를 이끌어낸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말 한마디로 얼마나 멀어질 수 있는지, 또 얼마나 부담스러워지는지. 우리들의 관계에 비교하면 얼마나 풍성한 관계인지 모른다. 어느 순간에게도 불신이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마음을 온전히 비운 사이 아름다운 인간관계의 전형은 드러난다. 이제는 그 마지막 자리.
# 제목 :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1435)
작가 : 로히르 반 베이덴 (Rogier van der Weyden : 1400- 1469)
크기 : 목판 유채 : 2.2M X 2.6M)
소재지 :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Prado) 미술관
그리스도 뒤편에 있는 사람은 요한복음 3장에 나타나고
메시아를 찾고있는 구도자의 전형으로 나타나고 있는 니코메데스이다.
그의 구도적 열정을 표현하는 듯 붉은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 위에 사다리에는 그의 시종인 듯한 젊은이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리는데 도와주고 있다.
밑부분에 화려한 금빛 옷을 입은 사람이 바로 아리마테아의 요셉이다. 주님께서 갑자기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기에 그분의 장지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요셉은 자기를 위해 준비했던 무덤에 주님을 모셨으니 당시로 보면 상당한 재력가였음을 상상할 수 있다.
그 옆에 점잖은 모습의 남자가 흰색의 항아리를 들고 서있는데, 이 사람은 아리마태아 요셉의 수행원이며 이 항아리에는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할 때 사용할 향이 들어 있다. 격렬한 몸짓으로 슬픔을 표현하고 있는 여인은 마리아 막달래나이다. 이들 가운데, 숨을 거두신 예수님이 계신다. 비록 처참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으나 더 없이 정갈스러운 모습으로 애도하는 사람들 사이에 계신다.
그런데 예수님이 매달렸던 T (타우) 형태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휘어진 몸매는 이것이 석궁수 형제단의 제단화임을 암시하는 듯 활의 모습처럼 휘어져 있다. 화살을 앞으로 보내기 위해 활은 휘어져야 하는 것처럼 주님의 휘어진 모습은 구원이라는 높은 가치의 삶으로 인간을 올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주님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또한 중세기의 석궁수들은 직업 군인들로서 불의와 싸운다는 사명감이 있었기에 활 모양으로 휘어진 주님의 몸체는 자신들의 자부심을 키워주는데 일조를 할 수 있었다.
왼편으로부터 성모님의 사촌인 마리아 클레오파스가 등장하며 그 곁에는 항상 주님을 떠나지 않았던 사도 요한이 있고 그 옆엔 녹색의 옷을 입고 눈물이 뚝뚝 흘리는 너무도 사실적인 모습의 마리아 살로메가 있다.
또한 기절한 성모님의 몸은 십자가에서 내려진 당신 아들의 활처럼 굽어진 몸과 같은 방향으로 굽어져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류구원 사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신 성모님의 역할을 드러내고 있다. 주님 주위에 많은 슬퍼하는 사람들을 등장시킴으로 관객들도 자신을 이 등장 인물 중의 하나로 만들어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고 있다.
혼절한 성모님 주위를 둘러싼 여인들 중 위쪽의 클레오파스의 마리아의 슬픔은 대단하다. 금방 화면에 뚝뚝 떨어질 것처럼 그의 얼굴엔 너무도 선명한 눈물 자국이 있다. 이것은 크리스챤의 삶이란 예수님의 모습을 닮는 것이고, 예수를 닮기 위해선 예수님 십자가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교회에 풍미하던 형식적인 신앙생활의 위선성을 경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작품을 가능케 했던 주님 수난의 복음적 의미를 준주성범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소수의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님에게는 그의 천상의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나,
그의 십자가를 지고자하는 사람들은 적습니다.
위로를 받고자 하는 사람은 많으나, 고난 받고자 갈망하는 사람들은 적습니다.
잔치상의 친구들은 많으나 , 금식의 동료들은 적습니다.
예수와 더불어 즐기려 하지만 , 그분을 위해 고통을 받겠다는 사람은 적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빵을 나눌 때는 예수님을 따르지만,
고난의 잔을 나눠야 할 때 따르는 사람은 적습니다.“(준주성범 2권 11장 1항)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죽기 전에 당신 어머니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그의 어머니라고 선포다.
# “그 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7)
예수의 어머니가 그 제자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의 제자로 살 때 그분의 어머니가 곧 우리의 어머니가 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역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성모님을 우리 인생에 모시고 산다면 단지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됨이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매일같이 까떼나를 바치며 나의 어머니 마리아를 우리 집에 모시는 것! 우리는 단지 그것만으로도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됨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레지오 마리애의 특권이고 신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어머니를 우리에게 믿음의 본보기로 남겨 주셨습니다! 우리도 당신 어머니 마리아처럼 당신을 세상에 낳으라고, 우리도 마리아처럼 이 세상에 믿음을 낳고! 우리도 마리아처럼 이 세상에 희망을 낳고! 우리도 마리아처럼 이 세상에 사랑을 낳고, 우리도 마리아처럼 이 세상에 구원을 낳으라고!!
그것이 바로 당신 어머니가 평생 사신 동정의 영성이며, 우리 또한 동정, 처녀나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힘을 온전히 비운 상태에서 오로지 하느님의 힘에만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비움의 영성, 곧 동정의 영성을 살 때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세상에 낳을 수 있는 것이라고. 그래야만 우리도 하느님 안에서 제2의 그리스도 또 다른 주님을 잉태할 수 있을테니까! 그래서 누군가 우리의 삶을 보고, 아! 예수님이 계시다면 바로 당신 같은 분이셨군요! 라며 깨달음을 줄 수 있을테니까!
어머니이시며 동시에 동정인 마리아의 영성은 그래서 신비이다. 어머니이면서 제자이고, 어머니이면서 구원의 조력자이다. 마리아 속에는 잉태라는 젊음과 비움이라는 늙음이 동시에 내재되어 있다.
# 텅빔과 충만
성숙한 노년의 영성에는 텅빔과 충만이 한데 어우려져야 할 것이다. 세상을 향해서는 갈수록 비원내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내 자신에 대하여도 갈수록 비워내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잘 늙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힘, 인간의 능력, 인간의 것이 나를 좌지우지하도록 이 나이까지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비움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 노장들에게 필요합니다.
대신에 이것을 채워주십시오. 단 하나입니다.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그 뜻을 이루어내겠다는 단호한 결정만이 나를 하루하루 더 채워가기를 소원합니다! 이 인생 70을 살고 80을 살아, 기껏 내놓을 수 있는 것이 몇 줄 안됩니다. 끽해봐야 내 몸 건사하고 내 자식 돌보아낸 것 말고는 자랑할 것도 별로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아직 우리는 조금 늙기는 했지만, 아직 우리는 죽지 않고 살아있지 않습니까! 무엇으로 살아 있습니까? 마리아처럼 완전히 비워낼 각오로 살아있고, 마리아처럼 온전히 하느님만으로 채워낼 충만함으로 살아있는 것 아닙니까? 나이를 먹고서도 이 지혜를 모르고 아직도 일희일비하며 뭐 하나 있으면 대단한 줄 알고, 뭐 하나 없으면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박복한 인생으로 만들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끊어내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아직 덜 늙은 것입니다. 헛 산 것입니다. 헛 살았기 때문에 더 늙어야 합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마지막 한 장의 그림을 더 선물하고 싶습니다.
# 램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이 아버지는 자기 재산을 다 말아먹고 거지꼴이 되어 돌아온 아들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녀에게 아무 것도 원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 이 아버지는 어떤 지경의 자녀라 할지라도 그를 환영해줍니다.
# “하느님의 영광과 구원을 위해”
레지오 단원 여러분, 마리아와 함께 하느님께로 가는 지름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바위와 같이튼튼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저희에게 주소서. 이 튼튼한 믿음을 통하여 삶의 십자가와 노고와 실패속에서도 평온하고 꿋꿋하게 나아가렵니다. 저희 힘을 북돋우는 용감한 믿음을 주소서 이 용감한 믿음에 힘입어, 하느님의 영광과 구원을 위해 큰일을 서슴지 않고 떠맡아 완수하렵니다. 부디 꼭 전쟁에서 성공하시는 레지오 군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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