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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는 글은 스마트폰 ▅ 와이드(WIDE) 화면으로 볼 수 있게 조정하였습니다. 복장(腹藏) 터진다 누가복음 12장 49-53절 / 양의섭 목사 “49. ¶ 내가 땅에 불을 보내러 왔노니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 하리요? 50. 그러나 내게는 잠겨야 할 침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답답하겠느냐! 51. 너희는 내가 땅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열이니라. 52. 이제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하며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자기 며느리와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눅 12:49-53 KJV) 1. “아~ 답답해” 복장(腹藏) 터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답답하다 못해 속이 끓고 끓다가 터진다는 뜻이겠죠. 얼마나 답답하고 속이 아프면 그럴까 싶습니다. 코로나 확진이 되어 지난 주일에 교회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답답해서 속이 터지는 줄 알았습니다. 교우들께 심려를 끼쳐 죄송한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지내다 보니 더욱 더 답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답답해하던 중에 문득 한 십자가가 생각났습니다. 10년 전에 독일에서 체코로 넘어가는 국경 지대의 한 산골 마을에서 본 것인데, 마을 곳곳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유럽에 무서운 전염병인 페스트, 흑사병이 돌 때 세워진 십자가들이라고 합니다. 그중에 한 십자가가 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주 이상한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모형이었는데, 독특하게도 예수님의 배가 툭 터져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복장이 터져 있습니다. 많은 모형의 십자가를 보았지만, 그런 모습의 십자가는 처음 보았습니다. 아마도 전염병으로 퍽퍽 쓰러져 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예수님의 마음이 저랬다는 것을 고백한 십자가였던 것 같습니다. 복장 터진 예수님, 그 예수님이 오늘 성경에도 보입니다. 2. 답답한 마음 오늘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주님은 아주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49 ¶ 내가 땅에 불을 보내러 왔노니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세상에 그냥 오신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 불을 던지러 왔는데, 그 불만 제대로 붙어서 타오른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엔 아직 불이 붙지 않았음을 이 답답한 마음이 엿보입니다. 예수님은 불을 던지러 오셨습니다. 이 불은 무엇인가요? 두말하면 잔소리입니다. 악을 멸하고 선을 정화시키는 예수님의 영적 능력, 즉 말씀과 성령을 통해 우리를 변화시키는 영적 능력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불을 받은 이들은 악을 미워하고, 죄를 경멸하며, 선을 행하기 위해 어떠한 고난도 감수하고, 변화된 삶을 살아갑니다. 불은 이중적 힘이 있죠? 탈 수 있는 가연성(可燃性)의 것들은 모두 태워 버리는 반면에 탈 수 없는 것들, 비 연소성(非 燃燒性) 물질은 순화하고 단련하여 더욱 깨끗하게 합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던진 불은 이 세상의 악을 파하여 멸하며, 동시에 신자들은 더욱 정결케 연단합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더럽고 추한, 아름답게 창조된 모든 것들을 더럽히는 죄와 사탄의 궤계를 멸망시키기 위해 세상에 오셨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성도들에겐 더욱 정결함과 능력, 깨끗함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답답함이 예수님의 첫 번째 답답함입니다. 3. 이루어질 때까지 답답함 ➤50절, “50. 그러나 내게는 잠겨야 할 침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답답하겠느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실 침례, 그것을 이룰 때까지 답답해 못 살겠다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실 침례는 무엇인가요? 분명히 예수님은 공식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요한에게서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또 무슨 침례를 받으시겠다는 건가요? ➤“32 그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서 조롱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며 침 뱉음을 당하리라.”(눅18:32) ➤“15. ¶ 이에 빌라도가 그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려고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주고 예수님은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넘겨 주니라. 16. 군사들이 그분을 끌고 프래토리움(Φρατόριο)이라 하는 집회장으로 들어가 온 부대를 함께 모으고 17. 자주색 옷을 그분께 입히며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분의 머리에 씌우고 18. 그분께 경례하기 시작하며 이르되, 만세, 유대인들의 [왕]이여! 하고 19. 갈대로 그분의 머리를 치며 그분께 침을 뱉고 무릎을 꿇어 그분께 경배하더라. 20. 그들이 그분을 조롱한 뒤에 그분에게서 자주색 옷을 벗기고 그분에게 도로 그분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그분을 끌고 나가니라.”(막15:15-20)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받으실 모욕과 침 뱉음, 멸시, 조롱, 수치스러움, 채찍질, 등등 온갖 저주의 세례, 즉 십자가를 말합니다. 죽음과 죄의 저주 아래 놓여서 평생을 잘 살았다고 하나 결국은 그 죄의 대가로 죽음 앞에서 좌절하는 인간을 사랑하여, 자신이 그 대가를 대신 치르겠노라고 그 저주의 침례를 받으실 때를 기다리는 답답함. 빨리 그때가 와서 속히 끝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도 못한 답답함! 요즘엔 이런 일이 없지만 내 고교 시절에 떠든다고 반 전원이 매를 맞은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때 어떤 아이는 먼저 나가 매를 맞고 어떤 녀석은 끝까지 뒤로 빼다가 매를 맞았습니다. 어느 것이 더 나을까요? 그 순간에 우리는 머리를 복잡하게 굴렸습니다. 먼저 맞으면 선생님이 힘이 있으니 세게 때릴 거야, 한 30명쯤 넘어가면 힘이 빠져서 약하게 때릴 거야, 아니야, 더 악에 바쳐서 세게 때릴 거야. 계산하느라고 복잡했지만, 내 경험상 결론은 먼저 맞는 게 낫습니다. 왜? 먼저 맞고 말면 그다음부터 매 맞는 소리는 부담이 없지만, 나중에 맞겠다고 뒤로 물러서 있으면 앞에 맞는 그 40대의 매 소리는 다 자기 마음을 때립니다. 먼저 맞고 나면 자기 뒤부터 “아야!”하는 소리에 “그 녀석 엄살떠네.”하며 여유를 부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매 맞는 소리에 “어휴, 무지 아픈가 봐”하며 마음을 내내 졸입니다. 차라리 모르고 가다가 할 수 없이 십자가에 매달린다면 괜찮을 텐데,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 십자가의 죽음, 그 모멸감, 그 수치스러움, 모두 예견하고 계셨습니다. 빨리 매를 맞아 버리면 시원하겠는데, 하나님의 때가 있어서 그때까지 참고 가야 하는 답답함, 예수님의 두 번째 답답함이었습니다. 4. 분열하는 답답함이 있습니다. ➤51절, “51 너희는 내가 땅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열이니라.” 그래서 교회는 싸움을 잘하는 걸까? 어느 교회에서 새가족 환영 만찬을 위해 정성스레 음식을 준비하였습니다. 모든 음식이 다 훌륭했습니다. 이제 과일이 나갈 순서가 되어, 아직 철이 덜 되어 좀 비싸지만 그래도 귤을 구입했고, 다른 과일들과 그것을 같이 내려고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칼 같은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니, 귤을 촌스럽게 그냥 내놓으면 어떡해?” 제법 산다는 김 집사의 소리였습니다. 순간 사람들이 멈칫하더니 곧이어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껍질을 벗겨서 내놓자.” “아니다. 반을 쪼개야 모양이 좋다.” “껍질을 벗기고 4등분을 하여 포크로 찍어 먹게 하자.” “무슨 소리, 귤은 직접 까먹어야 맛있는 거다.” 의견이 분분하더니 결국 평소 마음이 맞던 사람들끼리 편이 되었고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고, 그러더니 과거의 모든 불편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 후 3개월 뒤에 교회는 귤처럼 두 쪽이 나고 말았습니다. 귤 때문에 갈라진 교회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러게 말이야. 한국 교회는 싸우기를 좋아해서 탈이야’하는 이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미국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텍사스 주 오스틴에는 ‘오른발 교회’(Right Foot Church)가 있답니다. 세족식 때 오른발부터 씻기는 전통이 있는데, 새로 부임한 목사님이 왼발부터 씻기겠다고 하자 오른발부터 씻기를 원하는 전통과 고집이 있는 교인들이 들고일어나 싸우다가 종내 따로 나가 교회를 세웠는데, 얼마나 한이 맺혔는지 교회 이름을 ‘오른발 교회’(Right Foot Church)라고 했답니다. 왜 이렇게 교회는 별 것도 아닌 것 같고 싸움을 잘하는 걸까요? 정말 예수님이 잘 싸우라고 검을 주셔서 그런가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10:34).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이 이 무슨 어울리지 않는 말인가요? 싸움시키러, 검으로 분쟁하라고 오셨다는 데, 예수님의 진의가 뭘까요?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감상주의적 평화를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허울 좋은 화평, 근본적인 것은 해결되지도 않았는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그런 평화를 이루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속은 썩고 있는데 겉만 잠시 희게 칠하고 덮어 버리는 임기응변식의 평화를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신 평화는 정의와 거룩함에 기인한 근원적인 평화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죄와 불의, 미움과 이기심, 독선과 시기, 우상 숭배와 음행, 사기와 거짓말, 폭력, 안일함, 교만과 방자함, 이런 것과 분쟁이 있어야 합니다. 그릇된 생활과 싸워야 합니다. 분쟁해야 합니다. 참된 평화는 이런 것과 공존할 수 없기에, 진정 주님의 평화를 원하는 이들은 이런 것과 먼저 분쟁해야 하고, 이겨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그저 하나님의 복과 평강만 요구하지, 아무도 이런 그릇된 삶과는 싸우려 하지 않고, 대충대충 타협하며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와 세속적 더러움들을 공존시키려 하니, 그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요? 여러분, 싸워야 합니다. 보다 거룩하고, 보다 신령하고, 보다 아름다운 삶을 살고자 한다면,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로 살기를 원한다면 내 주변뿐만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악한 감정과 욕망들, 그릇된 가치관들과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에게 이런 싸움, 영적 싸움, 거룩한 싸움의 불이 붙었는지 그걸 아직 몰라서 주님은 답답합니다. 5. 주께서 받으셔야 할 침례 지금은 어찌 되었을까요? 주께서 받으셔야 할 침례, 그 모욕과 부끄러움의 침례는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다 해소되었습니다. 주님은 인내하는 가운데 마침내 하나님의 때가 이르러 그 답답함을 푸셨습니다. 맞을 매를 다 맞으셨습니다. 받을 침 뱉음의 침례, 다 받았습니다. ➤“4. ¶ 참으로 그는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였거늘 우리는 그가 매를 맞고 [하나님]께 맞아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였노라. 5. 그러나 그는 우리의 범법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갔거늘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4-6)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인간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답답함입니다. 불을 던졌는데, 그 불길이 과연 타오르고 있는지 답답합니다. 그냥 꺼져버린 것은 아닌지 답답합니다. 다시 말해 과연 성도들이, 그 불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의 욕망과 분쟁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받았으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과 싸워야 하는데 싸우고 있는지 모르겠다. ➤“13.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로되 성령을 통해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14.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인도 받는 자들은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니 15. 너희는 다시 두려움에 이르는 속박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 삼으시는 [영]을 받았느니라. 그분을 힘입어 우리가, 아바, [아버지], 하고 부르짖느니라.”(롬8:13-15) 과연 하나님의 자녀로 굳게 서기 위해 몸의 행실을 죽이는 싸움을 하고 있는지 답답합니다. 그야말로 나의 모습을 보고 주님께서 “아, 답답해 미치겠다.” 하시지는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던진 불이 자신의 삶 속에 타오르게 합시다. 그 성령의 불로 자신의 추한 욕망들을 태워버립시다. 사악한 욕심들을 소멸시킵시다. 끊임없는 이기적인 죄들을 태워버립시다. 모든 더럽고 추한 모습, 생활들을 없애 버립시다! 자신의 생활과 분쟁하십시오! 자신의 잘못된 습관들과 싸우십시오. 자신의 생각들과 싸우십시오. 그전까지 갖고 있던 가치관, 생의 목표, 이웃관, 재물관, 자신의 모든 것들과 분쟁하시시오.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분야의 생활, 직업, 전공, 능력, 권능, 재물, 이런 것들과 분쟁하십시오. 이런 것들과 적당히 타협하며 평화하기를 주님은 원하시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과는 극렬(極烈)하게 분쟁하십시오. 가끔 상담하러 오는 분들을 보면 그 내용은 다양하지만 일정한 패턴을 갖고 있습니다. 전에는 모르고 살았는데, 말씀이 마음속에 들어오고는 그 말씀 때문에 이런 경우 어쩌면 좋겠느냐는 것입니다. 믿음이 생기기 전에는 아무런 갈등도 느끼지 못했는데, 믿음의 눈으로 보니 이걸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고민입니다. 예전엔 이게 죄인 줄 몰랐는데 이제 은혜받고 보니 이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알겠다며 어떡해야 하느냐는 고민입니다. 말씀으로 인한 분쟁이 자신 안에 크게 일어나 고민을 합니다. 그리고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결국 결단하고 성도다운 삶, 성도다운 길을 선택하고 큰 평안을 얻고 돌아갑니다. 그동안 누리던 것들을 놔버리면, 그동안 즐기던 것들을 포기하면 너무 힘들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도 막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순종하면 어디선가 큰 위로와 격려, 신령한 힘이 솟아오릅니다. 어디서 온 것인가요? 우리 예수님께서 주시는 위로요 평강입니다. 6. 성도로 영적 싸움 예수님은 옳지 못한 우리의 생활에, 주님의 말씀 때문에 분쟁이 일어나기를 원하십니다. 받은 은혜 때문에 내 안에서 갈등이 일어나기를, 격렬한 내적 싸움이 벌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고민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성도로 영적 싸움 하는 것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혼 안에 던져주신 성령의 불이 활활 타오르게 하여 잘못되고 그릇되고 추한 것들을 홀랑 태워버리십시오. 예수님의 사람답게 살기 원하는가요? 예수님이 던져주신 성령의 불이 더욱 타오르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가진 세속 욕망, 추한 욕망, 잘못되고 그릇된 가치관과 삶의 자세를 태워버릴 수 있습니다. 반드시 그런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힘을 더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에휴, 답답하다 답답해’하지 않으시고, 거룩한 싸움을 하는 우리를 안타까워하시며 더욱 크게 사랑해 주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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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은혜의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