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 생말로 해변에서, 33×22㎝, 종이에 먹과 채색, 2021.
김병종 화백이 샤토브리앙 동상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 프랑스 생말로와 작가 샤토브리앙
시·소설·평론·종교학 등 섭렵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불려
외교관·정치인·장관 거쳤지만
프랑스대혁명 이후 고난 겪기도
“샤토브리앙이 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던 위고
집필성향·분방한 삶까지 닮아
나는 지금 프랑스 북서부의 생말로라는 한적한 바닷가 호텔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강 같은 바다가 그 벽을 물길로 부딪고 갑니다. 문득 대상 없는 누군가를 향해서라도 손편지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저의 ‘시(詩)로 가는 그림 여행’은 그래서 서간 투로 열어볼까 합니다. 전자메일은 조석으로 쏟아져 나오지만 정작 따뜻한 손편지를 쓰거나 받아본 기억은 아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생말로의 정신적 지주, 프랑수아 르네드 샤토브리앙에 대해 쓸까 합니다. 생말로에 오기 전 나는 샤토브리앙에 대해 도대체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는 프랑스의 어느 고성(古城)이거나 심지어 와인 이름쯤 되는 줄 알았을 정도였으니까요. 실제로 와인 이름은 아니지만 샤토브리앙 스테이크라는 게 있긴 하다는군요. 그러다가 작가 샤토브리앙을 알게 된 것은 그 이름 앞에 늘 ‘위대한’이라는 글자가 붙는 빅토르 위고라는 창(窓)을 통해서, 그것도 아주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어린 시절 위고는 문학 소년의 열병을 치러 내면서 글쓰기에 대한 각오를 일기장에 이렇게 남겼다고 합니다.
“장차 샤토브리앙이 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고요. 도대체 위대한 위고(아직 그때까지는 과도한 열정의 문학 소년일 뿐이었지만)가 그토록 추앙해 마지않았던 작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요. 그렇게 잊고 있었는데 이곳 생말로의 한적한 바닷가에 와서 그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방파제의 끝에 나타나는 성곽 자락 앞에 망토를 걸치고 있는 돌조각상이 바로 그 샤토브리앙이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그의 고향에 와서 보학(譜學)을 훑어보면서 소름이 돋을 만한 하나의 사실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위고는 실제로 놀라울 정도로 샤토브리앙과 오버랩 되는 삶을 살고 간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샤토브리앙이 되지 않을 바엔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는 각오대로 위고는 샤토브리앙의 문학세계뿐 아니라 삶의 방식까지 판박이로 따라 하게 됩니다. 실로 어렸을 적의 꿈이란 무서울 만큼 한 인생의 궤도를 그대로 그려낸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됩니다. “샤토브리앙이 되지 않는다면….” 위고는 “샤토브리앙 같은 작가가 되지 못한다면”이라거나 “샤토브리앙처럼 살지 못한다면”이라고 쓰지 않고 “샤토브리앙이 되지 않는다면”이라고 했는데, 그 함의는 이렇습니다. 문학가의 삶을 살고 싶다. 그러나 문학만을 하고 살지는 않겠다는 것이지요.
샤토브리앙처럼 폭넓은 저술가는 물론 그와 같은 정치가로서의 영향력과 세속적 명예나 권세까지를 함께 갖겠다는 야심의 발로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예컨대 문약(文弱·서양에 그런 개념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에 빠지지 않고 작가의 길을 가되 현실 세계에서도 여러 방면에서 영향력을 갖겠다는 포부였던 것이지요.
실제로 샤토브리앙은 이곳 프랑스 북서부 작은 바닷가 마을 출신이었지만 파리에 정착한 후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불릴 만큼 문학에 큰 족적을 남기면서 ‘아탈라’(1801) 같은 걸작을 썼습니다. 문학의 나폴레옹이라 불릴 만치 글로 할 수 있는 모든 장르를 정복해낸 것으로도 유명해서 시, 소설을 중심으로 문학 평론과 에세이, 종교학, 그리고 저널과 역사학에서도 그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작가라는 명패 외에 군인, 정치가, 외교가로도 일세를 풍미해서 영국, 스웨덴, 교황청 등의 대사와 외교장관까지 역임했으니 한 몸으로 몇 사람 몫의 삶을 산 것이었죠. 사교계의 총아로 루이 16세와 교유했는가 하면 나폴레옹 1세와의 친분으로 로마 공사를 지내기도 했다고 합니다.(나중에는 불화해 평생 서로의 적이 됐지만)
하지만 프랑스대혁명 때는 반혁명군의 입장에 섰다가 혁명이 성공한 후에는 혹독한 망명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는데 놀라운 것은 그의 다식성적인 집필성향뿐 아니라 진폭이 큰 정치적 행로며 분방한 삶까지를 위고가 싱크로율 백프로 근사치로 따라갔다는 점입니다.(다시 느끼게 됩니다. 어렸을 때 꾼 꿈이 실로 무섭다는 것을)
샤토브리앙은 왕정파로 두 번의 정무장관직과 세 번의 대사를 역임하면서 프랑스대혁명과 왕정복고의 파도를 타며 영광과 고난의 행로를 겪게 됩니다. 위고 역시 시, 소설, 희곡, 평론에 화가로서도 명성을 날리면서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다가 친나폴레옹과 반나폴레옹의 정치 노선을 밟으며 국외 추방까지 당해 프랑스 서부 해안의 영국령 건지섬에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게 됐지요. 영욕의 세월이 지나고 샤토브리앙은 80세 때 눈을 감았고(위고는 83세로 영면, 둘 다 당시로는 경이롭게도 장수했습니다) 이제는 그가 떠나갔던 고향 바닷가 마을에 동상과 묘지로 그 흔적을 남겼습니다.
잘생긴 골든 레트리버와 함께 한 노인이 샤토브리앙의 동상 앞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바다 쪽을 바라보고 있는 구멍 숭숭 뚫린 석회암 조각상은 문인과 정치가의 이미지를 절묘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높다란 단에는 따로 검은 사각의 돌판을 붙이고 그 위에 청동인 듯 푸른 초상조각이 서 있습니다. 목 단추를 풀어헤친 얼굴로 보아, 대단한 호남이자 풍류 남아였던 듯합니다.
문득 왜 사람들은 돌멩이나 쇠붙이로 동상을 만드는가 싶어집니다.
동상 가까이에는 돛을 단 요트들이 정박하고 있는 내항이 있습니다. 하얀 물새들이 돛대에 앉아있는 그림 같은 풍경의 안쪽으로는 내항을 바라보며 예쁘고 작은 가게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오랜만에 나는 한가로움과 평화의 사이에 서 있습니다.
샤토브리앙은 한사코 이 작은 바닷가 도시를 떠나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만년에 그가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기록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오매불망, 샤토브리앙 그 이름을 되뇝니다. 출향 인사 중 가장 지역을 빛낸 이름이기도 한 까닭이겠지만 샤토브리앙이라는 이름 속에 담긴 열정과 낭만, 용기와 야성 같은 것이 바로 이곳 사람들의 기질이라고 동일시하는 까닭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의 시선은 늘 풍경보다 사람 쪽으로 향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덧없이 가고 풍경은 오래도록 그 자리에 남아 있어서 더욱 그 시선이 애틋하게 사람 쪽에 머무르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굳이 철을 녹이고 돌을 쪼아 그 형상을 세움으로써 떠나간 이름을 대신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라져버린 형상과 지워져 가는 이름을 그렇게라도 붙잡아두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시간 속에 소멸돼 가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연민, 다만 연민의 대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리 빛나는 광휘를 날리는 삶이었다 해도 저 타오르는 노을빛 한 자락에도 맞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고즈넉한 바닷가에서 지는 석양을 보며 잠시 해본 객쩍은 생각입니다.
김병종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 프랑수아 르네드 샤토브리앙(1768~1848)
섬세하면서도 낭만적 문체로 유명
정치인보다 작가 이름만 남길 원해
프랑스 낭만주의 작가의 선두로 불리는 샤토브리앙은 다층적인 삶을 살았다. 파리 바닷가 작은 도시 생말로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생애를 마친 그의 대표작으로는 ‘아탈라’(1801), ‘르네’(1802), ‘무덤 너머의 회상’(1848) 등이 있다. 소설뿐 아니라 문필의 전 영역에 걸쳐 왕성한 집필활동을 펼쳤다.
그는 특유의 섬세하면서도 감각적이고 우아하면서도 낭만적인 문체를 구사해 많은 젊은 작가의 추종을 받았다.
작가 생활 외에 프랑스 교황청과 영국·스웨덴 주재대사 등을 역임하면서 정치인으로서도 영향력을 끼쳤다.
프랑스대혁명 때는 반혁명군 쪽에 섰다가 1793년부터 망명 생활을 하기도 했다. 1802년 ‘기독교의 정수’를 발표하고 그 속에 수록된 작품 ‘르네’로 프랑스 낭만주의의 한 획을 긋게 된다. ‘무덤 너머의 회상’을 장장 30여 년에 걸쳐 집필해 후세에 ‘위대한 작가’로 불리게 됐다. 격동기 프랑스의 정치적 흐름 속에서 영광과 고난의 세월을 보낸 그는 최종적으로는 작가의 이름으로만 남겨지기를 원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