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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23일 토요일
제1독서 : 말라 3,1-4.23-24
복 음 : 루카 1,57-66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책에서 인상 깊은 구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실제가 아니라 생각의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그 누구도 생각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이 실재이며, 생각과 같은 가상이라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카페에 있는 사람들을 예로 들며
생각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카페 안에서 실의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마음의 스트레스가 대단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카페 안에 있던 다른 사람은 갓 볶아낸 신선한 커피 향을 즐기며
평화롭게 다른 사람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실제는 카페 안이지만, 이 두 사람이 바라보는 세계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지요.
그 차이는 바로 생각 안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생각 안에서 우리는 지금을 전혀 다르게 살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문제는 이 생각을 실제라고 단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너무 밉습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과 행동으로 미워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전혀 없을까요?
그와 반대로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바로 생각의 차이 때문입니다.
내 생각을 바꾸기 위한 노력, 이것이 지금을 잘 사는 비결이었습니다.
그 생각이 자기 실제의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멀리하라고
강조하셨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생각을 하느님의 생각으로 바꾸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지금 나를 그토록 힘들게 했던 생각은 무엇입니까?
그렇다면 지금 바꿔야 할 생각은 무엇일까요?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천사의 잉태 소식을 믿지 못해서,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천사로부터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
세상의 눈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또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입을 닫아 버린 것입니다.
이제 그의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언제였을까요?
세례자 요한의 명명식 때, 천사의 말대로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글 쓰는 판에 적었을 때였습니다.
세상의 관점이 아닌, 하느님의 관점으로 생각했을 때
비로소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모든 일이 일어난다는 믿음을 갖춰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관점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의 일에 함께하게 됩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구세주의 탄생에 앞서, 요한의 탄생을 전해줍니다.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웃들과 친척들도 그녀의 해산 소식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루카 1,58)
그것은 그들이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감추어진 무언가가 벙어리가 된 즈카르야를 통해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탄생하자 그의 부모와 친지들은 아기가 어떤 이가 될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수행할 사명이 무엇일지 궁금해 합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루카 1,66)
그런데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는 할례를 받고,
사제인 아버지 즈카르야와
아론 가문의 어머니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가문의 이름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은 자비하시다'라는 요한이란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그 순간 즈카르야의 묶였던 혀가 풀리고,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루카 1,65)
왜냐하면, 예상하지 못한 아기의 이름이 명해지면서
즈카르야의 혀가 풀린 사건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관여와 현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루카 1,66)
그렇습니다.
먼저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입니다.'(루카 1,66)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의 손길이 오늘도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자신을 묻고,
우리의 신원과 소명을 찬미하며 살아갑니다.
사실 우리 모두도 이름과 함께 각자의 신원과 소명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요 수도승이라는 신원을 지니고,
그에 따른 직무와 소명을 따라 살아갑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말합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하나의 사명입니다.
이것이 제가 이 세상에 있는 이유입니다.” ([복음의 기쁨] 273항 )
그리고 실존철학자 하이덱거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세상 안에 과업을 짊어진 채 던져진 존재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소명을 과업으로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루카 1,66),
소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귀기울여야 할 일입니다.
본훼퍼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있는 존재이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도 먼저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하여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손길이 늘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루카 1,66)
주님,
당신이 베푸신 자비를 봅니다.
감추어진 무언가가 제게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저의 가린 눈을 열고, 당신의 관여와 현존을 볼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이 오늘도 저를 보살피고 계시오니, 당신 신비 안에 저 자신을 묻습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구원과 사랑을 소명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것이 제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008년 시흥5동에서 본당신부로 있을 때입니다.
주교님께서 제게 ‘지역 교육담당 사제’를 맡으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본당 일과 지역 교육담당 업무를 겸임하는 것은 힘들다고 했습니다.
주교님은 그럼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보좌신부’를 보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본당 일을 나누어서 할 수 있으니
지역 교육담당 업무를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주교님은 ‘보좌신부’를 보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돌아와서 공지사항 때 보좌신부님이 온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교우들은 박수를 치며 좋아했습니다.
1년 동안 혼자 지내던 저도 보좌신부님과 함께 지낼 생각에 기분이 좋았습니다.
보좌신부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준비할 것들이 있었습니다.
신부님의 숙소와 신부님의 숙소에 필요한 가구들을 마련했습니다.
신부님 숙소는 깨끗하게 청소하였고, 가구도 새로이 준비했습니다.
드디어 교구에서 사제 인사이동을 발표하였고,
본당에는 첫 번째 보좌신부님이 왔습니다.
보좌신부님이 처음 오던 날은 성탄이 가까운 겨울이었습니다.
눈이 크고, 온화하신 보좌신부님은 성탄 선물처럼 왔습니다.
신자들이 반갑게 맞이하였고,
주일 학교 학생들과 청년들이 무척 좋아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할 것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축하하기 위해서 준비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별의 인도로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는 곳을 향해
먼 길을 떠났던 동방박사들이 있습니다.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리며
날마다 성전에서 기도하였던 시메온과 한나가 있습니다.
남모르게 파혼하려 했지만,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했던 요셉이 있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순명했던 마리아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도 동방박사들처럼 ‘예물’을 준비해야 합니다.
시메온과 한나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요셉과 마리아처럼 ‘순명’으로 주님의 탄생을 맞이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은
우리들에게는 축복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몸’을 얻으시면서 많은 것들을 내려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몸으로 오시지만 영적인 자유와 순수함을 이야기하십니다.
몸이 가지고 있는 멍에와 짐을 벗어버릴 수 있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참된 행복은 재물, 명예, 권력을 추구함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참된 행복은 가진 것을 나누면서,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일을 하면서,
옳은 일을 추구하면서, 용서를 하면서 다가온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몸에 속해있지만 이미 영혼의 자유와 순수함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몸의 틀을 벗어 버리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아들의 이름을 정해주었습니다.
그 이름은 ‘요한’입니다. 요한은 ‘하느님은 은혜로운 분’이라는 뜻입니다.
요한은 이름의 뜻대로 하느님의 길을 준비하면서 살았습니다.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면서 살았습니다.
오직 사람만이 이름을 정하고,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동물들은 서로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식물들도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사람은 이름을 부르고, 그 이름에 의미를 정하며 살고 있습니다.
저도 이름이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태어나면서 받은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세례를 받으면서 받은 이름입니다.
저는 두 개의 이름을 스스로 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이름들을 모두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세상의 이름은 ‘조재형’입니다.
이 이름의 의미는 ‘균형을 이룬다는 뜻이고,
어느 한 곳으로 치우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인
‘중용’을 지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름의 의미에 맞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이 이름의 의미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또한 제게는 소중한 이름입니다.
사제의 길을 가는 제게는 가장 적합한 이름이기도 합니다.
돈과 명예 그리고 권력을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살아가라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부모님께서 정해주신 이름의 의미를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세례명이 가지는 뜻을 생각하면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인간의 힘이 다 소진된 끝에 비로소 하느님께서 시작하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대림 시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여러 인물들 가운데, 특별한 두 분이 계십니다.
인생을 살 만큼 사셨기에, 이제 슬슬 삶을 정리해야 할 순간에
새로운 삶의 희망을 지니게 된 노인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입니다.
즈카르야라는 이름이 지닌 뜻은 ‘하느님께서 기억해 주셨다.’입니다.
엘리사벳이라는 이름이 지닌 뜻은 ‘하느님께서 맹세하셨다.’입니다.
이름에 걸맞게 두 사람은 거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도 올곧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에 충실했으며 하느님의 뜻에 절대 순명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거룩한 두 사람에게 꽤나 큰 시련을 겪게 하십니다.
예상과는 달리 두 사람에게 늘그막이 되도록 자녀를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나저제나 하면서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지만,
하느님께서는 두 사람이 호호백발이 되도록 그냥 두셨습니다.
놀랍게도 노부부가 세상 뜰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황혼기에야 겨우 아들을 허락하셨습니다.
비록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난 후의 응답이었고,
너무 늦은 감이 드는 응답이었지만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응답에 기쁨과 감격에 찬 어조로 외치고 있습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
아무리 목이 빠지게 기다려도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앞에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하느님을 크게 원망했습니다.
섭섭함도 많았습니다.
“저희가 도대체 뭘 잘못했길래?” 하는 억하심정도 생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하느님께 충실했습니다.
끝까지 하느님께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성전에서 충실하게 봉사했습니다.
항상 기도 안에 살았습니다.
고통스러웠지만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이런 두 사람의 항구한 신앙, 충직한 종의 모습에
마침내 하느님께서 응답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힘을 포기할 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복음의 진리도 인간의 능력을 내려놓을 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녕 하느님을 만나고 진하게 하느님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그냥’ 모든 것을 맡겨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께서 주도하시는 흐름에, 그분의 물결에
그냥 내 존재 전체를 맡길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 체험의 출발점은 어디입니까?
하느님은 내 힘이 다한 곳에서 체험됩니다.
하느님은 내 존재의 비참한 곳까지 내려가
외롭게 되었을 때 비로소 체험되는 존재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며
완전히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풀이 죽을 때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 곳에서
비로소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할례
조욱현 토마스 신부
세례자 요한은 “여드레째 되는 날”(59절) 할례를 받는다.
여드레째 되는 날에 받은 할례는
예수께서 부활하시는 날 모든 피조물이 죽음에서 풀려나는 것을 예시한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아들이 요한이라는 이름을 받은 것은
그 이름이 하느님의 은총 또는 은총을 지닌 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 이름은 요한이 장차 선포할 복음의 은총, 그 은총을 세상에 내리실 주님을 가리킨다.
즈카르야가 요한의 이름을 확인해 주고 입이 열려 말을하고 하느님을 찬미한 것은
그 아기의 이름이 지닌 힘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아버지에게 목소리를 되찾아 주었고, 사제에게 말하는 능력을 회복시켜 주었다.
가브리엘이 잠근 것을 갓난아기가 열었다.
요한이 태어나 할례를 받았을 때, 그의 아버지는 예언자요 사제가 되었고, 말이 쓸모 있게 되었다.
요한이 할례를 받고 이름을 받았을 때,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65절).
그것은 가문에서는 사용하지도 않던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부가 고집하는 것과
성전에 들어갔다가 나온 즈카르야가 벙어리가 되었다가
요한이 할례를 받던 날, 입이 열려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은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80절) 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은 정신이다.
그래야 육체의 지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습을 이길 수 있다.
정신이 육신을 굴복시킬 수 있다. 우리가 그러해야 한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삶이 “오시는 분”(묵시 1,4)을 위해
그 길을 닦고, 준비하는 것임을 공공연히 말하면서 사신 분이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을 갖게 한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오시는 하느님의 아들 탄생은 어떠해야 하겠는가?
그분의 탄생 앞에 우리가 내어놓아야 할 예물은 어떤 것으로 준비해야 하겠는가?
그분의 탄생 자체가 우리 인간의 구원 시작이며, 그분의 탄생은 이미 십자가를 품고 있는 탄생이다.
세례자 요한이 먼저 와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듯이,
우리 자신 역시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의 오심을 준비하는,
길을 만드는 삶으로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지금, 이 순간을 올바로 사는 것이다.
아기의 이름은 요한
반영억 라파엘 신부
요한의 탄생은 그 기쁨이 남달랐습니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 '돌계집'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던
이미 나이가 많은 여인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은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이 일을 해 주셨구나”(루카1,25). 감사하였고,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이라는 이름은 즈가르야가 성전에서 천사로부터 전해 받은 이름입니다.
친지들은 아기의 이름을 조상의 이름을 물려주려고 했지만,
아기의 부모는 하느님께서 주신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요한의 이름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혜로우심을 보여 주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 묵은 이름이 아니라 새 이름으로 태어난 요한은 그 이름값을 하게 될 것입니다.
혈육을 떠나 더 넓은 의미의 형제자매를 형성하게 됩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요(루카3,4; 요한1,27), 능력을 가지고 오시는 분의 길잡이요,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고 하며 구세주 오심을 외쳤습니다.
그야말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어서 자기의 이름을 남기려 하는 법인데
요한은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즈카르야는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함으로서 천사의 말대로 입이 풀렸습니다.
그리고 즈가르야가 한 첫 말은 ‘하느님께 대한 찬미의 노래’였습니다.
그는 이제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선포하게 되고,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1,66) 하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뜻으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사람들은 전통에 따른 이름을 붙이려고 했지만 '안 됩니다' 하며
세상을 거슬러 하느님을 증거한 이름입니다.
그의 이름을 통하여 주님의 이름이 돋보였습니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이름을 통하여 주님을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선구자로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준비하였습니다.
그는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 보고 자기 제자들에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가신다." (요한1,36). 하며 외쳤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라.’는 뜻입니다.
그동안 사람들이 그에게 몰렸지만 이제 새로운 주인공이신
예수님께로 몰려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느님께 부름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허락해 주신 탈랜트만큼 최선을 다해서 일할 뿐입니다.
그는 그야말로 분수를 아는 사람이요,
주제 파악을 잘하여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확실히 지켰습니다.
아마도 그가 자기가 뿌린 씨앗이 자라나 열매 맺는 것을 보고 그 열매까지 먹으려 했다면,
오늘 우리가 기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파견된 사람은 물러설 때를 알고 구원 사업은
하느님께서 내 도움이 없이도 언제든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내 방법, 내 방식을 고집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분명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것을 관리하는 사람이지 주인이 아닙니다.
파견된 사람임을 자각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나를 택하여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성탄이 코앞에 왔네요!
주님을 낳아드릴 마음의 방은 활짝 열렸나요? 아직도 잠겨있어요?
저런…열어주세요! 열어주세요!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주목받지 못하는 아기
심상태 요한 세례자 몬시뇰의 論文
‘에큐메니컬(Ecumenical) 마리아론의 기본 입장에서’
요한은 이웃과 친척들의 지대한 관심 속에서 떠들썩한 축하를 받으며 태어난다.
그도 그럴 것이, 늙은 부부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이 드디어 부모가 되었기 때문이다.
요한의 탄생은 아기 예수가 마굿간에서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하고
쓸쓸히 태어나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다.
바로 이것이 루카 복음사가의 의도이다.
복음사가는 자신의 복음에서 예수의 어린 시절을 소개하면서
줄곧 요한과 예수의 극적인 대비를 하고 있다.
즉 요한의 탄생 예고와 예수의 탄생 예고를 대조해 주며
요한의 어머니와 예수의 어머니의 만남을 통해 두 여인을 비교해 보여 주고
또다시 두 아기의 탄생의 상황들을 번갈아 묘사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生後 여드레가 되는 날은 할례를 하면서 이름도 짓는 날이다.
요한의 할례식에는 다시 축하객들이 그득 모였고,
아기의 이름은 관례대로 아버지의 이름을 딴 ‘즈카르야’로 命名하려 했다.
아버지는 아직도 말문이 닫혀있어, 書板에 ‘요한’이라고 이름을 써야 했다.
바로 그 순간 그의 입이 열려 하느님을 찬미하게 되었다.
탄생 예고 때 바로 터져 나왔어야 할 찬미가
무려 열 달 하고도 여드레가 지나서야 간신히 터져 나온 것이다.
그 순간 즈카르야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는 아마도 벙어리 냉가슴 앓듯
혼자만 알고 있었던 저간의 일들을 모두 털어놓고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하느님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증언하였을 것이다.
이것을 듣고, 보고 있던 이웃들은 모두 놀라움과 두려움에 휩싸였다.
하느님의 권능을 그 자리에서 확인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은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고,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하고 말하였다.
바로 요한은 사람들의 특별한 관심과 이목이 집중 되는
성장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것이다.
복음사가가 요한의 탄생과 할례식,
그리고 성장 과정에서 사람들의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음을
거듭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복음서의 주인공, 우리의 아기 예수는
요한과 같은 관심도 축복도 받지 못하는 지극히 가난한 상황에서
무엇 하나 주목받지 못하는 성장 과정을 겪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네 복음서 어디에도 예수의 성장 과정은 언급이 없다는 것이 그 증거다.
성인이 되기 직전인 열두 살 되는 해까지.
이렇게 해서 별달리 주목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주변인의 처지로 내려오셔서
그들의 희망과 빛이 되어주신 아기 예수님께
우리도 즈카르야처럼 뒤늦은 감사와 찬미를 바친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즈카르야의 의심은 벌인가 축복인가?
박재찬 안셀모 신부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즈카르야가 말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은, 하느님의 천사의 말을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순종으로 그 의심을 버렸을 때 그는 다시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의심을 넘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완성되어 간다는 것을 기억하며
혹시 지금 나는 하느님의 자비를 의심하고 있지는 않은지,
사람을 무턱대고 의심하며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 지 반성하며
이 미사를 온 정성을 다해 봉헌하도록 합시다.
찬미 예수님!
오늘은 재미있는 이야기로 강론을 시작할까 합니다. 제목은 “하와의 의심”입니다.
하루는 아담이 밖에서 아주 늦게까지 돌아다니다가 밤늦게 돌아왔습니다.
하와는 매우 화가 나서 소리쳤습니다.
“당신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죠!”
“그게 무슨 소리야? 이 세상에 여자라고는 당신뿐이잖아?” (맞죠!!)
하지만 이브의 의심은 끝이 없었고 언쟁은 잠이 들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아담이 얼마를 잤는지 누군가가 가슴을 콕콕 찌르는 바람에 잠을 깼습니다.
하와였습니다.
“당신 뭐 하는 거야? 자지 않고...”
“말 시키지 말아요! 지금 갈비뼈 숫자를 세고 있으니까!”
혹시 갈비뼈 하나를 빼서 다른 여자를 만들지 않았을까 의심이 들어 갈비뼈를 세고 있었나 봅니다.
남편이나 아내나 상대방을 의심하는 것은 태초부터 나타난 현상인가 봅니다.^^ 믿거나 말거나.
아마 의심의 원인은 사랑받고 싶은 마음, 나만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자주 부부 상담을 하다 보면, 아내나 남편에게 너무 익숙해져서 첫 마음이 사라지기도 하고,
서로 자주 다투며 내 방식만을 고집해서 상대에 편안함을 느끼지 못해서
자신에게 호감을 갖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쓰고 사랑의 방향이 바뀌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근원적으로는 둘 다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가벼운 의심은 애증과 관심의 표현이기에 나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관심이 더 큰 문제일 것입니다.
그런데 때때로 병적으로 의심하여 의부증이나 의처증에 걸린 이들의 문제는 심각한 것 같습니다.
일종의 망상장애입니다.
이러한 망상장애에는 색정형 망상장애와 질투형 망상장애가 가장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색정형의 경우 보통 연예인 같은 유명한 사람이나
유력한 사람이 자신을 열렬하게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 망상입니다.
이 경우 환자는 망상을 숨기려고 노력하기도 하지만,
상대방에게 전화를 걸거나 편지, 문자, 이메일, 선물을 보내고
심지어 집을 방문하거나 감시하고 끊임없이 접촉을 시도합니다.
이것이 좌절되었을 때에는 오히려 있지도 않은 것을 만들어 내어
모함하거나 우울함과 자신의 좌정을 어둡게 표현하여 관심을 받으려고 합니다.
질투형의 경우 상대방의 흐트러진 옷차림이나 이불에 있는 얼룩과 같은
사소한 증거를 수집해 자신의 망상을 정당화하려고 한다고 합니다.
배우자나 애인이 혼자 외출하지 못하게 하거나 말로 또는 신체적으로 학대를 하고
심지어 배우자를 살해하기도 한다고 하니 참 무서운 병입니다.
이 경우는 배우자와 격리되거나 사망한 후에야 문제가 해소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의심이 이렇게 무서운 병이 되기도 하지만, 의심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합리적인 의심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고, 거짓을 밝히기도 합니다.
신앙의 의심을 통해 새로운 신학을 발전시키기도 하고, 더 큰 믿음에 도달하기도 합니다.
사실 성경을 글자 그대로 읽다 보면 의심이 마치 잘못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는 대목도 참 많이 나옵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16)
물 위를 걷지 못하고 빠져버린 베드로에게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마태 14,31)
야고보서에서도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야고1,6) 등등
의심 많은 토마스 사도에게도 예수님께서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의심했던 토마스는 그 의심으로 말미암아 더 큰 신앙을 고백하게 되고
참으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 그분을 위해 목숨을 바치게 됩니다.
그것은 오늘 복음의 즈카르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심은 믿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도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라고
의심에 대한 벌을 내립니다.
그런데 이 벌은 즈카르야에게 새롭게 하느님을 찬양하는 축복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뜻이나 관습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짓자 그이 혀가 풀려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첫 번째로 한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하느님을 향한 찬양이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우리가 매일 아침기도에서 바치는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내일 복음에 이 대목이 나옵니다.
자매형제 여러분, 신앙생활에 있어 의심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의심한다는 것은 그만큼 관심이 있다는 표시입니다.
어제도 신앙에 대해 의심하는 한 청년이 찾아와 한 시간이 넘게 상담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 의심하는 젊은이들에게 의심하고 또 의심해 보라고 오히려 말해 주었습니다.
그래야 진짜 나의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의문을 품고 묻고 또 공부하는 가운데 진리를 찾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믿으라 하니 믿는 믿음은 뿌리가 약합니다.
오히려 스스로 씨름하며 얻은 깨달음, 나아가 내 힘으로 아무리 씨름하고 알아봐도
알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의 은총이 우리의 신앙을 더 굳건하게 합니다.
즈카르야가 의심을 버리고 순종을 택한 것을 기억하며
우리의 약함을 주님께 봉헌하고 주님의 뜻을 선택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닫혀진 입, 우리의 닫혀진 마음, 우리의 굳어진 삶에 변화가 올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더 굳건히 하십시오.
불가능한 일이란 없으신 주님께 끝까지 믿음을 두고
그분과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며 살아갈 때 다른 사람의 부족함도, 가족의 나약함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인내하고 더 큰 사랑으로 감싸 줄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해 주시고 믿어주시는데, 나도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간섭하지 않고 믿어주고, 구속하지 않고 자유롭게 해 주고, 내 방식대로 고치려고 하지 않고,
함께 하느님의 방식을 찾아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갖고
오늘도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시길 빕니다. 아멘.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세례자 요한의 탄생
이승화 시몬 신부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동시에 계약의 사제를 원했습니다.
하느님이 오심을 알려주는 이
그러나 자신들이 원하는 모습을 원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수행하면서 보여주고
우리는 그저 손뼉 치며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그런 사자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보내주신 사자는 달랐습니다.
제련사의 불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아
먼저 백성을 정화시킵니다.
그래야 그들을 찾아오는 하느님을 맞이할 수 있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먼저 변화하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그 아픔은 비정상을 정상화시키기에
당연히 겪어야 하지만 피하고 싶은 고통입니다.
그러나 이 고통을 지나갈 때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일 수 있습니다.
그러한 희망을 간직하기에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며 이겨낼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태어 날 때에도
사람들은 이름에서부터 문제 제기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주신 이름을 통해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집니다.
즈가리야의 입이 열리면서
사람들은 요한이 무엇이 될지 궁금합니다.
그러나 그를 통해 겪게 될 고통과 아픔이
진정 하느님으로 향하게 만들 것임을 모를 것입니다.
다만 기도하면서 희망을 키워나갈 뿐입니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만큼 살아갈 수 있고
살아가는 만큼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자비에 기뻐하면서
희망을 키워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영광과 고통을 함께 바라보며
우리의 희망을 키워나갈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이 우리 안에 오시어
당신의 뜻을 세상에 알릴 때 동참할 준비를 하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 ‘시몬 신부의 신앙 이야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