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눈을 바라보며
너의 입술에다
너의 얼굴에 투명하게 자란
너의 솜털에다 말 하는 게 아냐.
아무것도 더 이상 쓸 수 없는
검은 벽에다
추락의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밤의 절벽에다
말들이 스스로 몸을 던지는 걸 거야.
이 사랑의 말들
너에게로 곧장 달려가고 싶은 말들
너의 귓속으로 뛰어들며
너를 불태우고 목마르게 하고 싶은 말들.
이 말들
심장의 펄떡거림으로 생긴 말들
피의 흐름의 굴곡을 닮은 억양
몸을 압축시키며 쥐어짤 때
기름처럼 흘러내린 문장들은
너에게 곧장 가지 않아.
너의 뇌를 혼란시키고
너의 눈동자를 고정시키고
너의 귓구멍을 간지럽히고
네 피부의 숨구멍을 모두 열어놓고
너의 콧구멍으로 흘러들고
네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영원히
이별의 슬픔에 빠뜨리지 않을 거야.
입에서 온전한 형태로 나온 말들은
수화기의 작은 구멍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부서지고 조각조각날 거야.
길고 긴 어두운 전화선을 통과할 때
앞단어가 뒷단어를 찾는 부르짖음이
그 좁고 긴 벽에 처절하게 메아리칠 거야.
작고 연약한 토씨들은 그 긴 여행에 지쳐
찢어져 너덜너덜해지고 결국은 닳아 없어져버릴거야.
상상할 수 있겠어?
대개가 잠들어 있는 이 밤에
홍등가처럼 불 밝힌 공중전화박스가 있고
땅속으로 아니면 하늘을 가로질러
이어지는 긴- 긴-전화선.
수천의 낯선 말들이 뒤엉켜 흐르는 동안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전화선이 지나가는 밤의 벌판과 강둑과 산과
텅 빈 쓰레기통 같은 도시의 정적을.
그러고도 이 말들은
너의 전화기를 울리고
어느덧 네가 수화기를 들어올릴 때
네 귓구멍을 통해 곧장
너의 몸 속으로 흘러들어가지 못할 거야.
너의 전화기가 소리치는 동안
말들은 흥분으로 빳빳해지고
시원하게 터져나갈 것 같은 기대감으로
뒷단어들이 거세게 밀어붙이는 전화선 속에서
꽉 막힌 전화통 속에서 들끓고 있을 거야.
너의 전화기가 계속해서 소리치는 동안
너의 소파와 너의 책상과 너의 화분들은 미동도 없을 거야.
너의 책과 너의 침대
너의 속옷들까지 장롱 속에 몸을 숨긴 채
미동도 없을 거야. 다만
너의 벽들이, 가슴에 창문이 달린 너의 벽들이
너의부재를 알리는 듯 낮게낮게 신음할 거야.
전화기는 터져버릴 것 같은
이 말들의 웅성거림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이윽고 음성녹음테이프 속에다 말들을
감금시켜버릴 거야.
말들은 지쳐서 처음의 생기를 잃어버리고
까칠까칠하고 뭉툭하고
잘 들어맞지 않는 어색한 생김새가 되어버릴 거야.
밤이 아닌 대낮에
네가 책상 앞에서 혹은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다가
아니면 화장실에 앉아 용변을 보다가
테이프가 흘려보내는 이 말들을 들었을 때
윤기를 잃은 다 말라비틀어진 이 말들을 들었을 때
전혀 분위기가 아닌
이미 옛말이 되어버린 지난밤의
그 말들을 들었을 때
상상하고 싶지 않아, 너의 표정을
상상하고 싶지 않아, 너의 몸의 크고 작은 반응들을.
[밤의 공중전화] 문학과지성사.1997.
첫댓글 공중전화로 전화를 하기 위해 천원짜리 지폐를 몇 번이고 교환했던 때가 생각납니다. 문득 텅 빈 공중전화를 지날 때마다 예전의 추억들이 눈에 아른거리네요.
이젠 찾기 힘든 공중전화부스...동전이 다 떨어져서 안타깝게도 끊어져버리던 순간들 01:47
전화가 없던 시절 삐삐로 번호가 찍히면 공중전화부스로 달려가 전화하고 했었던 기억이 아련하네요. 휴대폰 하나가 모든 걸 가능케 한 시대인 만큼 밥 나와라 뚝딱하면 밥이 배달되는 시대... 우린 움직이기조차 귀찮아 일반전화도 외면하곤 하지요. 사랑해야만 하지만 사랑이 점점 멀어져가는... 동전의 땡그랑 땡그랑 소리가 아직 귓전을 맴도네요.
땡그랑에서 bp에서 휴대전화로.. 문명은 발전하지만 마음은 외로움만 가득한것만 같다는.. 오늘 하루 펜으로 정성스럽게 편지 한장 쓰고 싶은 욕구가 드네요...
플로우님, 정말 할 말이 많으셨나봐요. 이 긴긴 밤에.......^^*
밤의 공중전화를 보셨거든요. 동전이 떨어져 누구에게도 전화는 할 수 없고. 할 말은 없어도 자꾸 누군가에게 소식을 전하고싶은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