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에 첨부한 글처럼 2호선은 당초 영등포에서 왕십리를 잇는 노선으로 계획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구자춘시장에 의해서 노선이 대폭 변경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5호선의 경우 1호선 종로구간(광화문네거리~신설동)구간과 병행운행할 계획이어서 1호선 설계당시 종로구간의 복복선계획을 충분히 반영하여 설계하였다고 합니다.
잠깐 다른얘기를 하자면 1호선의 경우 1977년 8월 29일까지는 차량기지가 없어서 신설동 임시차고(현 2호선승강장)에서 경정비 업무를 봤다고 합니다.
당초 1호선은 차량기지건설을 않하고, 경정비는 신설동임시차고, 중정비는 철도청 서울공착장(용산동차사무소)에 위탁하려고 했으나 공사기간도중 지하철 건설계획에 따라서 1호선, 2호선, 5호선이 교차하는 지점인 용답동 청계천근처에 차량기지건설을 추진, 1974년 9월 15일에 착공하여 1977년 8월 29일에 서울시지하철차량기지를 1차완성하였고, 2호선개통과 더불어 1983년에 최종완공하였다고 합니다.
얘기가 딴쪽으로 빠졌는데 지하철 건설역사 관련 부분은 나중에 재정리하여 다른게시판에다가 쓰겠습니다.
1970년에서 1971년에 걸쳐서 서울시 지하철 1호선 노선을 결정할 당시 서울시와 교통부는 신중한 시내 교통량조사를 근거로 장래의 제2호선 · 제3호선 등의 노선도 대체로 결정해 두었다.
지하철이 어디를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달리게 되는가 하는 문제는 인근 주민과 지역사회의 이익과 직결되기 때문에, 그 노선의 선정과 공사 착 · 준공의 순서는 엄격하고도 객관적인 기준과 시민공감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서울지하철 제1호∼제5호의 노선이 최종확정된 것은 1972년 12월 31일이었다. 서울시 지하철건설본부에 의한 면밀한 교통량조사의 바탕 위에 일본 철도건설의 최고 기술진으로 구성된 일본철도기술협의회와도 협의하였으며 국무회의에도 보고된 최종안이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註39]
그런데 이른바 서울 3핵도심 개발구상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져 있던 구자춘(具滋春)시장의 입장에서 종전에 결정되어 있던 지하철 제2호선 노선(영등포∼왕십리)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그는 기정의 왕십리∼영등포 노선을 연장하여 을지로∼왕십리∼잠실∼영동∼사당∼대림∼영등포∼신촌∼을지로를 잇는 대순환선으로 2호선 노선을 크게 변경해 버렸으며, 그 취지를 1975년 3월 4일에 있었던 박대통령 서울시 연두순시시 시장실에서 박대통령에게 은밀히 보고하고 재가를 받는데 성공하였으며, 그 날자로 발표하였다. [註40]
그러나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지하철 노선이라는 것이 이렇게 대통령-시장만의 합의로 결정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국내 · 외 권위기관에 그 타당성을 검토시키는 작업을 한다. 우선 국내기관으로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지하철 2호선 건설을 위한 기술 및 경제성 조사」를 용역 발주하였으니, 대통령에게 보고한 다음달인 1975년 4월이었다. 삼핵도시 구상의 장본인인 김형만(金炯萬)이 연구책임자였던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용역보고서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 지하철 2호선 건설을 위한 기술 및 경제성 조사보고서(요약)
1) 기 간 : 1975년 4월∼1975년 5월
2) 연구기관 :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3) 의 뢰 인 : 서울특별시 지하철본부
4) 목 적 : 사업계획, 수송수요, 사업수지 및 경제성 검토
5) 주요 내용
가) 도시현황 및 도시성장 예측
나) 교통현황 예측
다) 수송수요 추정
라) 사업수지 및 사업효과 분석
마) 결론 및 건의
6) 내용요약
가) 도시현황 및 도시성장 예측
① 서울시 현황
면적 605.4㎢, 인구 629만명(1973)
② 도시계획의 기본방향은 현재의 기존도심을 중심으로 하고 영등포 · 영동 · 잠실 등으로 단핵도시를 삼핵도시로 개발
기존도심 : 중추관리기능
영등포 : 상업 및 산업기능
영동 · 잠실 : 상업 및 주거기능
③ 1980년까지 시 인구를 750만명선으로 계획하고 있으나 본연구에서는 1986년 인구를 814만명으로 추정
나) 교통현황 및 특성
① 1974년 지하철 종로선 개통하고 수도권전철과 직통운전
② 1973년말 5,790㎞의 도로(도로율 10.88%) 보유
③ 1974년 현재 8만대의 차량 보유
④ 1973년말 857만 통행(인구 1인당 1.36회 통행)
⑤ 통행인구의 80%(도보 제외)가 버스 이용
⑥ 수단별 통행구상 <표 1-2-4> 참조
⑦ 전통행의 32.1%가 도심과 관련된 통행
⑧ 오전 Rush 2시간에 하루 통행의 36.5% 집중
⑨ 시간별 통행구성
오전 Rush(7시∼9시) 1일 통행량의 36.5%
오후 Rush(17시∼19시) 1일 통행량의 18.9%
오전 Rush(8시∼9시) 1일 통행량의 21.7%
⑩ 통행특성
Rush 집중, 도심 지향적, 버스 의존성
다) 사업계획
① 삼핵도시로 개발코자 기존도심, 영등포, 영동 · 잠실 등 삼핵을 순환연결
② 한수이북(漢水以北)에 편재된 인구 72%를 한수남 · 북(漢水南 · 北)에 적정히 분산키 위한 선도적 역할 ③ 사업내용
총연장 : 48.8㎞
건설기간 : 1975년∼1984년(10개년)
건설투자액 : 2,220억원
라) 결론 및 건의
① 교통수요 증가를 감안시 대량고속교통체계의 건설이 시급
② 교통난 · 건설비 · 시공면에서 편의를 고려하여 가급적 조기착공
③ 4단계로 건설하고 1년 격차로 완공
④ 운임제도는 거리비례제로 하되 운임은 45∼50원이 적정
⑤ 전동차의 국산화 검토
⑥ 건설용 도입외자재에 대한 관세면세」
위의 보고서 내용은 표면은 연구용역이었지만 바로 삼핵도시 개발구상의 지하철로선 결정상에서의 구체화 작업 그 자체였던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당시의 일지에 의하면 위의 용역보고서가 서울시에 납품된 것은 1975년 5월 10일이었고, 5월 15일에 구시장에게 보고되었다. 그리고는 다음날 16일에 국무총리실에 브리핑, 19일에 경제기획원에 브리핑, 21일에 교통부장관에게 브리핑, 6월 15일에 건설부장관에게 순환선인 2호선 노선을 도시계획시설로 결정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강행군을 통해 삼핵도시화 실현-지하철 순환선 건설에 대한 구자춘 시장의 강한 의욕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다핵도시화 구상의 허구성에 대한 도시계획 전문가들의 반발, 또는 1972년에 이미 결정 발표되어 있던 지하철 노선이 그대로 시행되리라고 기대하고 있을 주민의 반발에 봉착하지 않을까에 대한 구시장의 초조감 같은 것도 느낄 수 있다. 순환선(2호선) 노선이 도시계획시설로 결정된 것은 1975년 12월 20일자 건설부고시 제203호였다. 이리하여 지하철 2호선을 순환선으로 한다는 것은 국내 각 부처간에는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국내 기관간의 합의만으로 이것이 결정될 수는 없었다. 아직 당시의 우리나라 기술수준으로는 지하철 건설 자재(차량 포함)의 50% 이상을 외국(주로 일본)에서 수입해 와야 하고 그것도 차관으로 도입해 와야 할 입장이었으니, 일본의 전문기관인 일본철도기술협의회(JARTS)에 의한 타당성 검토를 거쳐야 했다. 특히 1972년에 이미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일반에게 널리 알려져있던 2 · 3 · 4 · 5호선 노선안의 결정에는 일본철도기술협의회도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서울시가 경제기획원장관에게 일본국조사단의 연내파견을 요청한 것은 1976년 7월 26일이었고, 그해 9월 29일에 우선 6명의 예비조사단이 서울에 왔다. 모두 15명으로 구성된 본 조사단이 서울에 온 것은 1977년 4월 20일이었고 5월 24일에 귀국했다. 그들도 2호선을 순환선으로 할 것에 동의한 것이다.
그리고 서울시장은 1975년 3월안으로 일본국 운수성에 의뢰하여 지하철 1호선 당시 일본철도기술협의회의 구성원을 다시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일본철도기술협의회 구성원이 내한한 것은 1977년 4월 21일이었으며 5월 23일까지 체류하면서 지하철 노선 순위결정의 타당성, 새로운 2호선 건설 예정노선의 경제적 · 기술적 타당성 등을 조사 검토한 후 서울시의 삼핵도시개발 구상과 그에 입각한 2호선 노선 결정이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결론짓고 5월 24일에 귀국하였다.
2호선 건설방침이 대통령의 최종재가를 받은 것은 1977년 10월 3일이었고 10월 7일의 시장 기자회견 석상에서 대대적으로 발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