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먹자 골목길에서 나오자 마자 마침 택시 한대가 손님을 내려 놓고 있었다. 하얀 두건을 쓴 아랍인이 우쾌하다는 듯이 기사석의 한국인에게 아랍말로 인사를 하고 있었다.
“아저씨 강남 4거리 오아시스 아랍어 학원요”
택시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내 손에는 도르노 캐밥이 들려져 있었다. 대머리가 시작되는 택시 기사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의 손에도 도르노 캐밥이 들리워져 있었다.
“좀 전에 인천 공항에서 카타르 손님을 한번 태우고 왔는데 마침 캐밥 가게가 있길래 출출해서 먹어보니 옛 추억이 살아나네요”
“캐밥을 드실 줄 아는 분이시군요. 도르노 캐밥에는 역시 콜라 보다 미란다가 음료수로 제격이죠”
행선지가 아랍어 학원이라는 점과 내 얼굴이 유난히 까맣게 그을린 것에 마음이 간 탓이었을까?
택시 기사의 조심스런 질문에 우리는 과거 90년대 리비아 건설 현장에서 근무한 경험을 확인하게 됐다.
열사의 땅에는 4월이면 사막 내륙에서 불어오는 마른 바람이 황사를 동반하고 있었다. 직원들은 사무실에서도 마스크를 착용해야 했다.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면 숙소인 모빌 하우스 방바닥엔 모래 먼지가 수북했다. 창문을 종이로 다 발랐지만 미세 먼지들은 바람을 타고 들어왔다.
"아 ~~ 맨 날 냉동 소꼬리 곰탕도 지겹다. 마누라가 해 준 김치 찌게가 그립구나..."
국내에서 공수해온 최신 비디오 영화에서 밥먹는 장면을 보던 정비팀 윤과장이 직원 휴게실 쇼파에 벌떡 들어 누워 투덜거렸다
"이봐 조 대리! 본사에 식품 컨테이너 보낼 때 돼지 등뼈 좀 보내라고 해.. 젠장 리비아 세관원들이 알게 뭐야? "
윤과장이 식품 자재 조달 담당 조 대리를 보채고 있을 때 구렛나루 때문에 털보라는 애칭으로 불리운 주방장이 직원 휴게실로 냄비를 들고 왔다. 김치 찌께에 자잘한 고깃점을 단 등뼈들이 구수한 국물맛을 내고 있었다.
젓가락으로 양 등뼈의 살점들을 발라내는 시범을 보여 주었다.
돼지 고기 구경을 할 수 없던 이슬람권 국가에서 털보가 해준 양 뼈로 만든 감자탕이 안겨 준 즐거운 하룻밤이었다. 알뜰 살뜰 등골을 빼 먹는 소리가 쏙쏙 거리는 가운데 사막의 밤은 깊어갔다.
" 그저 비행기를 탈수 있다는 사실이 설레여 넙죽 간 곳이 건설현장 캠프의 주방 보조였어요.
어릴때 동네 아이들이 누구네 집 부뚜막에 모여 각종 불량 간식을 만들어 먹던 걸 뒤에서 구경하던 제게 회사 캠프내의 어마 어마한 식자재 창고는 천국이었죠"
그가 배치된 현장 리비아 해안선 동서 사이의 중간 지점이었는데 전국 현장에 건설 자재 운송을 하는 차량들이 중간 기착을 하는 큰 캠프였다.
보조였던 그는 처음 현지 식자재 구매를 위한 장보기 외출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자연히 현지 음식을 밖에서 많이 사먹게 되었다.
특이한 아랍요리의 이모 저모를 경험했다. 향신료 섞는 법, 양고기 부드럽게 재우는 법.아랍식 볶음밥 고소하게 만드는 법 등을 부딪히며 배웠다.
운송의 요충지에 입지한다는 것이 현지인 공로 주변에 자리하게 된 탓에 현지인들의 불청객도 많던 곳이었따.
한번은 캠프에 갑자기 현지인 발주처 감독간 10명이 출장을 가던 중에 공사 진행 과정의 문제 여부를 조사한다는 불시 감사의 명목으로 방문을 하였다.
평소 같으면 닭치킨에 감자 구이로 떼울 텐데 캠프 소장은 그들에게 한식을 먹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발을 동동거렸고 주방장은 마침 본국 휴가 중이었다..
그는 2일 후 귀국할 예정이던 관리부장 송별회 용으로 사두었던 양을 잡고 향신료를 섞어 숯불 구이와 아랍식 토마토 셀러드를 내놓았다.
현지인 감독관들은 만족해 하면서 그에게 털보라는 별명을 지어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워 들었다.
식사에 만족한 덕에 까칠할 현장 감사가 원만히 넘어갔다고 소장은 털보를 치하했다.
2
한창 택시 기사의 과거 무공담을 듣는 사이 차는 강남 4거리에 도착해 있었다. 하늘은 싸리빗질을 한 듯이 깃털 구름들이 옅게 드문 거렸다.
어학원 거리는 금요일 저녁이 되자 포장마차들이 청계천 방향으로 즐비하게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손님 반가웠습니다. 강의 끝나시고 시간 되시면 전화 한 번 주세요”
그가 내미는 콜텍시 명함을 받아 들었다. ‘강숙혜”
낯선 여성스러운 이름이었다.
6층의 아랍어 학원 수업장으로 가려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면서 다른 한 손은 성대를 만지고 있었다.
후두음 발음이 강한 아랍어는 말을 할수록 성대를 피곤하게 한다.
성대의 통증이 더해 질 때 마다 나와 그 날 밤 아픔이 온 몸에 재생되었다..
‘ 선생님 수업을 좀 더 천천히, 쉽게 진행해 주세요. 학생들이 어렵다고 민원이 들어와요“
마지막 수업을 위해 교재를 미리 열어 보면서 학원 교수 부장의 간곡한 부탁을 떠올렸다.
3달 과정으로 기획된 기초 아랍어 교재를 1달 만에 교재 마지막 페이지까지 왔건만 나의 야심찬 교수 전략은 역으로 수강생들의 불만을 사고 있었다.
연습문제, 발음 연습 이런 것들을 나는 생략했으니 자연히 학원에서 지정해 준 아랍어 교재의 진도는 빠를 수 밖에 없었다.
"연습문제 풀이는 가르치는 이의 편의를 위한 면이 많아요. 그런 건 각자 집에서 하세요. 나는 이 시간에 엑기스만 드릴께요"
나의 가르치는 방법이나 공부하는 방식에서도 세상의 통념에 거스르는 뭔가가 있는 듯 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처음 아랍어학과에 입학했을 때 28개 아랍어 알파벳을 외우는 시험에서 여러 번 교수님의 꾸지람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 자네 그 따위로 공부할 거면 생소하고 쉽지도 않은 데다 전망도 신통치 않은 특수 외국어 전공에 4년간 고민하지 말고 일찌감치 다른 전공으로 전향하게나’
흰머리가 희끗한 교수님의 타박을 들을 만큼 내 아랍어 성적도 신통치를 않았다.
하지만 학과 동창회에서 만난 학우들 가운데 아랍어를 기억하고 아랍어와 생계가 연결된 친구는 나 혼자 밖에 없었다.
학창시절 전공 시험이 내일이면 나는 시험 범위를 무시한 채 하고 싶은 과목과 끌리는 범위를 공부했다. 심지어 학점 수강 신청을 하지 않은 다른 인문학 강의를 청강하기도 했다. 아랍어는 받아쓰기 과목은 포기하고 신문을 가져다가 소리내 읽기만 했다. 세상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시험 문제로 반영돼 있었지만 정작 실력을 증진하는 길은 다르다고 여긴 나의 고집 탓이었다.
‘이 꼬부랑 글씨 아랍어 자모를 익히는 시간은 각자 돌아가서 제가 보내 드리는 유튜브 인터넷 동영상으로 익히세요. 저는 어휘의 바다로 여러분을 빠트려 드릴께요“
나는 말꼬리 물기식으로 어휘 확장 설명을 했고 12장으로 구성된 교재의 본문들을 다시 편집해서 하나의 단편 소설로 재구성을 시켜버렸다. 이야기의 흐름으로 외우게 하고 문장 속에 사탕처럼 박힌 단어가 자연스레 암기되게 만드는 전략이었다.
시계는 6시 10분을 넘기고 있었다.
4명의 수강생 가운데 1명은 축제 준비로 나머지 1명은 면접 준비로 결강한다고 했다.
30분이 되자 나는 교재의 마지막 페이지를 힘없이 덮고 그냥 일어설 준비를 했다.
학생없이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외국어 학원의 엘리베이터 1층 단추를 누르면서 그 손의 감촉을 한 번 더 기억하려 했다.
오늘 만큼은 고속버스 터미널로 허둥대며 달려가지 않으리라.
종강의 홀가분함을 이 골목에서 소주 한잔으로 쓸쓸히 자축 하기로 했다. 오늘의 좌절을 오기로 정리하는 나만의 예식이었다. 마침 맞은 편에는 24시간 찜질방의 간판이 믿음직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서울까지 먼거리를 오가는 것도 힘들었고 나의 자신감에 열정으로 화답하지 못하는 수강생들의 근시안적 학습 포부도 야속했다. 나는 패배를 인정하며 때마침 도져 준 성대의 통증을 차라리 감사히 여겼다.
와이셔츠 앞 주머니엔 좀 전에 택시 기사가 쥐어준 명함이 있었다. 아랍어에 대해서라면 차라리 그가 더 배울 자격이 있다고 새삼 느껴졌다.
3
어떻게 익혔는지 아랍어 알파벳을 알고 읽는 숙혜가 신기했다. 쓸쓸한 종강일에 술동무로 함께하고 싶었다.
마침 차고지에 차를 반납하고 나오던 그는 1시간이 안 되어 내가 있는 포장마차로 들어섰다.
요리사의 칼질을 보는 그의 시선이 진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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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락 모락 진해져 가는 오뎅 국물 냄새에 느긋해 지며 나는 구두 속에서 조여 있던 두 발을 꺼냈다. 서늘한 가을 바람을 몸으로 안으며 차고 투명한 소주를 연거푸 2잔 비웠다.
“참 선생님 처럼 아랍어를 할 수 있는 분이 부럽더라구요”
중동 현장 근무 15년의 그가 보내오는 부러움의 눈길을 받으며 나는 쓴 소주를 삼켰다.
매년 200명 이상 전공자가 배출되는 아랍어의 신세가 서글펐던 것이다. 최근에는 고등학교 교과 과정으로 채택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학 입학 점수를 위한 수험 전략에서 잠시 깜짝 인연이 될 뿐이었다.
나는 수강생들에게 나눠줬던 아랍어 학습 유인물을 펼쳐 보았다. 교재의 본문을 가위질 해서 12개 본문을 하나의 줄거리로 억지 이어 붙이기 한 내용에 나 또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선생님 제 잔도 한잔 받으세요”
그는 나를 선생님이라고 존대하며 젊은 시절 리비아 건설현장에서 땀흘리던 때 꼬부랑 글자의 향수를 풀어 내기 시작했다.달게 잔을 비운 그가 소주를 한 병 더 마게를 틀더니 자기 얘기를 시작했다.
2
그의 이름 강숙혜.
70년대 시골 장터 소년이었던 그는 이름 조차 박복하게 불리워 졌다.
'쑥게야 쑥게야 엄마 찾아 와라..'
복숭아 씨앗을 절구질 하는 할머니는 마른 기침을 하며 콧물이 윗 입술에 늘 걸려있던 손자를 그렇게 불러대곤 했다.
쑥게의 할머니는 아이들이 어쩌다 복숭아를 먹고 남은 씨를 깨서 씨 안의 하얀 속을 가져다 드리면 엿으로 바꿔주던 분이었다.
소년의 엄마는 주로 공사판 함바집에서 밥일을 거들곤 했지만 공사가 없는 철에는 새빨간 치마를 입고 진한 화장을 하는 날이 많았다. 5일장이 열리는 날 동네 대포집에서 젓가락 두드리는 소리 요란할 때 아이는 그 앞에 서성였다. 못 볼 것을 들킨 양 그 엄마는 술에 얼얼한 목소리로 아들에게 모진 음성을 퍼붓곤 했다.
얼굴엔 주근께가 많았던 쑥게의 엄마가 고추장 단지를 엎던 날이었다. 며느리를 나무래는 시어미니에게 대드는 쑥게의 엄마는 입에 거품을 물었다.
'우리 살림에 보태 준게 뭐라고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에요?"
쑥게의 아버지는 어느 타지를 떠도는 지는 몰라도 쑥게네는 집을 비운 가장으로 인해 무척 곤궁했다.
고개를 떨구고 시선을 늘어뜨린 쑥게의 왜소한 체구는 동무들 틈에도 잘 끼이질 못하고 주변을 서성거렸다. 소풍을 가는 날에도,수학여행을 가는 날에도 ,쑥게는 동네 담벼락길을 손가락으로 긁으며 헤매곤 했다.
5일장이 열리고 강냉이를 튀우는 상인 근처에 쑥게가 자주 머물곤 했다. 펑 소리가 나고 자루에 튀운 강냉이를 주워 담을 때 쯤이면 주변에 너저분히 흩어진 파편들을 주워 먹곤 했다.
그런 그가 건설사 사막의 현장에서 주방 보조로 일하게 된 것은 학교도 다 마치지 못하고 중국집 배달 소년으로 성장한 진로 탓이었다.
“그날 휴가자들 복귀일에 숙소에서 양고기 파티를 우리끼리 한 사건 때문에 관리과장과 그 날부터 사이가 불편해 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