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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26일 화요일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제1독서 : 사도 6,8-10; 7,54-59
복 음 : 마태 10,17-2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신부로부터 성체 분배 때문에 항의를 들었다는 이야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성체 분배를 제대로 못 한다는 항의가 아니라, 신부가 한 곳에서만 성체 분배한다는 항의였습니다.
그렇게 한 군데에서만 성체 분배를 하면,
다른 곳에 앉아 있는 신자들은 한 번도 신부님께 성체를 받지 못하지 않느냐는 항의라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매번 자리를 바꿔서 성체 분배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항의가 들어왔습니다. 신부가 지난번에 했던 곳에서 또 성체 분배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쪽에 앉은 사람만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졌다고 하더군요.
별의별 항의가 다 있다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항의를 하지 않는 저희 본당 신자들에게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사실 이런 항의를 들어도 저는 옮기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고정된 자리에서 성체 분배를 해야 아직 세례받지 않은 사람,
첫영성체를 하지 않은 어린이들이 안수받으러 오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자리를 계속 바꾼다면 이들의 혼란이 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항의하는 요즘 세대를 종종 봅니다.
자신의 불편보다는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면 어떨까요?
또 무엇보다 사랑이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마음을 담아보면 어떨까요?
얼마 전에 병자성사 갔다가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확장 주차’ 자리를 보았습니다.
요즘 큰 차량이 많기에 배려 차원에서 넓은 주차선이 생긴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아주 작은 경차가 주차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옆에 경차 주차선이 따로 있었고, 텅 비어 있는데도 말입니다.
자기 불편을 따지기보다 함께 사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닐까요? 그 나라가 바로 하느님 나라일 것입니다.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을 맞이한 오늘,
제1독서는 용기 있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스테파노를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말을 듣고 마음에 화가 치민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유다인들이었습니다.
그들 역시 하느님을 섬기고 있었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스테파노의 지혜로운 언변이 그들을 물리쳤고,
이 점이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투석형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과연 스테파노의 죽음을 원하셨을까요?
단순히 자기 마음에 들지 않고, 그래서 화가 난다는 이유로
자기들의 악행을 정당화하는 모습을 인정하실까요?
그런데 지금을 사는 우리도 이런 마음을 간직할 때가 너무 많았습니다.
복음에서도 전해주듯, 우리에게 일러 주시는 주님의 말씀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어제는 하느님의 지상 탄생일이었습니다.
오늘은 교회의 첫 순교자 스테파노 천상 탄일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지상 탄생과 스테파노의 천상 탄생,
이 두 탄생 이야기에는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탄생이 ‘자기 비움’이라는 일종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요,
그것이 ‘타인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구세주는 인간을 위하여 자신을 내놓으셨으며,
스테파노는 인간을 위하여 자신을 내놓으신 분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앞서 있는 하느님의 지상 탄생 없이는 뒤에 있는 천상 탄생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오심으로 얻어진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스테파노는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살았고, 예수님이 죽으신 것처럼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위한 사랑의 순교로 죽으셨듯이,
스테파노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순교로 죽었습니다.
그는 죽어가면서 기도했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사도 6,59)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26)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
이처럼 그는 자신을 죽이려는 이들을 위해서도 불타는 사랑으로 기도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자신을 못 박는 이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루카 23,34) 하고 기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서서 기도했지만,
원수들을 위해서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으며(사도 7,60),
자기를 죽이려는 이들을 위해 죽음으로써, 그들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사랑에 '하늘이 열리고'(사도 7,56), 하늘은 그를 받아들여 사랑의 순교자로 삼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는 비록 목숨 바쳐 순교할 기회는 없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생각과 뜻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이 바로 ‘순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순교’는 믿고 있는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있는 분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자신의 생각 대로 되지 않을 때, 짜증 내거나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 오히려 자신 안에 품은 하느님의 사랑을 퍼 올리면,
우리 안에서 ‘열리는 하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마태 10,22)
이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미움이나 배척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미움과 배척을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미움과 박해를 벗어나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려움’과 ‘인내’를 통하여,
구세주와 협력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신기하게도 ‘어려움’과 ‘인내’에는 고통을 변화시켜
하느님과의 만남이 되게 하는 묘한 이법이 있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주님!
고난과 시련이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되게 하소서.
그 순간이 위기의 순간이 아니라 기회의 순간이 되게 하시고.
그 속에서 당신의 능력과 현존을 체험하게 하소서.
그 속에서 오히려 굳세어지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미움받고 거부당할 때에도, 박해받고 배신 할 때에도
당신과 함께 받게 하시고 당신의 영광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한국 교회에는 없는데 미국 교회에 있는 제도가 있습니다.
‘종신부제’입니다.
한국 교회에서 부제는 사제가 되기 위한 과정으로
1년 정도 있다가 사제 서품을 받습니다.
부제의 직무는 말씀을 선포하는 강론, 혼배성사 집전, 세례 집전, 봉성체가 있습니다.
저는 부제 때, 주로 말씀을 선포하는 강론을 하였습니다.
미국 교회에서 종신부제는 5년간 신학교육을 받은 후에 부제품을 받습니다.
종신부제들은 사제가 파견되지 못한 지역에서 다양한 사목을 하고 있습니다.
종신부제는 예비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수 있으며, 세례성사도 줄 수 있습니다.
혼인예식도 거행할 수 있고, 장례 절차의 여러 예식을 주도할 수도 있습니다.
공동체와 관련 해서 축복예식도 할 수 있으며, 봉성체와 성체 강복 등도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파견된 사제가 미국 교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현지 교구와 한국에서 파견된 사제가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부제는 본당에서 훌륭한 보좌역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도 언젠가 종신부제 제도를 받아들일 때가 오리라 생각합니다.
교회사에서 빛나는 부제들은,
오늘 축일을 지내는 최초의 순교자 스테파노가 있고,
가난한 이들에게 헌신했던 라우렌시오가 있습니다.
그리고 부제의 역할이 축소되었던 중세 시기에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도 부제였습니다.
제가 있는 부르클린 한인성당에도 지난 5월에 종신부제가 탄생했습니다.
어려서 미국으로 이민 온 형제님입니다.
형제님은 주일학교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온화한 성품과 성실함으로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부제품을 받은 후에 매 주일 영어미사에 강론을 하고 있고,
한국어 미사에는 한 달에 한 번 강론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어 미사에 강론은 한국어와 영어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한국어에 익숙하지 않은 청년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본당 주일학교 복사들과 함께 신학교를 방문하였습니다.
학생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지난 17일에는 교우들을 위해서 ‘대림특강’도 해주었습니다.
기혼인 종신부제가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기 위해서는 배우자인 아내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부제품을 받기 전에 배우자와 함께 피정을 하고 있습니다.
부제의 역할이 무엇인지 배우자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첫 순교자 스테파노 부제의 축일을 지내면서
고인이 되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을 생각합니다.
저는 김수환 추기경님과 아름다운 기억이 있습니다.
1999년 저는 적성 본당의 주임신부로 있었습니다.
저는 추기경님께 대림특강을 해주실 수 있는지 편지를 보내드렸고,
추기경님께서는 대림특강은 물론 미사까지 해주시겠다고 답장을 주셨습니다.
무척이나 바쁘신 추기경님께서 기꺼이 시간을 내 주신 것은
적성성당이 당시 서울대교구에서 가장 작은 성당이었기 때문입니다.
강의와 미사를 함께 해 주셨고, 교우들이 정성껏 준비한 저녁까지 맛있게 드셨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따뜻한 사랑을 듬뿍 주시고 가셨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언제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생각하셨고, 그분들과 함께하셨습니다.
해마다 성탄절에는 가난한 분들이 많이 사시는 달동네에 가셔서
성탄절 미사를 봉헌하기도 하셨습니다.
권력의 힘에 밀려서 성당을 찾아오시는 분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힘들고 어려운 시대에 사람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하셨고,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께서 남겨 주신 ‘우산’이라는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삶이란 우산을 펼쳤다 접었다 하는 일이요,
죽음이란 우산을 더 이상 펼치지 않는 일이다.
성공이란 우산을 많이 소유하는 일이요,
행복이란 우산을 많이 빌려주는 일이고,
불행이란 아무도 우산을 빌려주지 않는 일이다.
사랑이란 한쪽 어깨가 젖는데도 하나의 우산을 둘이 함께 쓰는 것이요,
이별이란 하나의 우산 속에서 빠져나와 각자의 우산을 펼치는 일이다.
연인(戀人)이란 비 오는 날 우산 속 얼굴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요,
부부란 비 오는 날 정류장에서 우산을 들고 기다리는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다.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갈 줄 알면 인생의 멋을 아는 사람이요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가는 사람에게 우산을 내밀 줄 알면 인생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비요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건 우산이다.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의 우산이 되어줄 때
한 사람은 또 한 사람의 마른 가슴에 단비가 된다.”
오늘 하루 희망의 우산, 나눔의 우산, 위로의 우산, 친절의 우산이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교환의 신비에 초대받은 우리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첫 순교자인 복된 스테파노의 천상 탄일에
거행하는 신비를 저희가 삶으로 드러내게 하시고
숨을 거두면서도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한
성 스테파노를 본받아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하소서.”
성탄절에 그리고 그것도 주님 성탄 바로 다음 날에
성탄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순교자 축일을 지내고,
첫 순교자 스테파노 축일을 지내는지 그 의미가 오늘 본 기도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세상에 태어나시고 스테파노는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지요.
주님이 세상에 태어나심으로 스테파노를 포함해
우리 인간이 천상에 태어나게 됨을 뜻하는 겁니다.
주님의 모든 신비는 교환의 신비이고 성사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부활의 신비는
주님의 죽음으로 우리 인간이 부활하게 되고,
주님의 성탄과 육화의 신비는
주님의 땅으로 내려오심으로 우리 인간이 하늘로 오르게 되고,
주님의 성탄으로 우리 인간이 천상에 태어나게 되는 신비지요.
문제는 있습니다.
교환이 이루어지려면 그 교환에 동의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하늘과 땅을 교환하자고 하시며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시면
우리는 땅에서 하늘로 오르겠다고 동의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주님께서 땅으로 내려오셨어도
우리가 하늘로 오르는 것에 동의하지 않으면
주님의 성탄은 우리 구원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아무리 구원 열차에 오르라고 초대해도
우리가 그 열차를 타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 오늘 축일로 지내는 스테파노는
이 교환의 제의에 처음으로 응답하여 처음으로 천상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 스테파노에 대해 사도행전은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라고도 하고 “성령으로 충만하였다.”라고도 하는데,
사도행전을 보면 스테파노는 적대자들을 이렇게 초대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물론 그들은 하늘을 보지 못하고, 그 초대에 응답도 하지 않지요.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 분노로 가득 찼기에
하늘 대신 스테파노에게 증오의 눈길을 보냅니다.
스테파노가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초대를 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아버지의 성령이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은 성탄을 지낸 후 첫날인데 스테파노 성인의 순교를 기념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교회 역사에서 첫 번째로 자신의 생명을 바쳐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신 스테파노 성인을 기념하는 날로 정하였다.
스테파노는 사도들을 도와 일했던 성령과 지혜로 가득 차
존경을 받던 일곱 부제 중의 한 사람이었다.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한 분으로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였고,
주님의 수난을 몸으로 체험한 분이시다.
오늘 독서에서 들었듯이
“주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사도 7,59),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사도 7,60)라고
자신을 박해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신 분이시다.
이리하여 스테파노 성인은 그리스도인의 표상으로 칭송을 받으신다.
그리스도인은 복음과 신앙 때문에 고발을 당하였고 죽임을 당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믿음과 순교를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가장 완전하게 닮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순교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가장 완전히 일치될 수 있고,
그분의 가장 완전한 제자가 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순간순간을 항상 하느님 자녀의 자세를 잃지 않고,
모든 어려움에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용감히 이겨나가려는 굳센 의지로 하느님 안에 살려고 했기 때문에 순교할 수 있었다.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17절)
유다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일인 양,
회당에서 그들을 채찍질할 것이다.
기도와 찬양을 바치고 성경을 읽는 그곳에서 사도들을 박해하였다.
사도들이 겪은 고통은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제물이었다.
이러한 삶 속에 성령의 도우심이 있다.
매 순간 구체적인 실천을 통하여 우리가 신앙과 복음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 안에서 모든 것을 함께 하셨던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여야 할 말을 깨우쳐 주신다.
이것을 믿고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의 나 자신과 싸움을 충실히 해나가야 한다.
신앙은 연말에 크리스마스를 지내는 것같이 평화스러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스테파노 순교 축일을 지내는 것으로 알려주듯이
강철과 같이 강해져야 함을 말하고 있는 오늘 축일의 의미를 우리는 깊이 생각하여야 한다.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은 많은 역경과 난관이 있으며,
이에 대처하는 우리 신앙인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느님을 떠나도록 주위에서 온갖 방법으로
우리를 박해하고 있는 이것들을 잘 이겨나갈 수 있도록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겠다.
우리도 충분히 하늘이 열리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상의 비오 신부님께서 미사의 은혜로움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미사 때마다 저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광휘가 빛나며,
천사들과 성모님을 비롯한 성인 성녀들이 영광 속에 서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평신도 신학자 스콧 한 형제도 미사의 은총과 축복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미사에 갈 때 우리는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상징이나 은유가 아니며, 우화나 비유도 아닙니다. 이것은 실제입니다.
성가가 부족하더라도, 강론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모든 미사는 지상에 현존하는 천국입니다.”
우리가 습관처럼 봉헌하는 미사 안에서 하늘이 열리고,
미사 안에서 하느님과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어머니 성모님과 천사들, 무수한 성인 성녀들,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떠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
결국 미사 안에서 천국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 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이런 체험의 원조는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분께서 하늘을 올려다보실 때마다, 하느님 아버지를 뵐 수 있었습니다.
그분과 수시로 통교할 수 있었습니다.
그 힘으로 그 혹독한 고통과 상처, 수난과 죽음까지도 견뎌내실 수 있었습니다.
또 한 분 하늘이 열리는 체험을 하신 분이 있었으니,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스테파노 첫 순교자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스테파노가 순교를 목전에 두고 목격한 천상 광경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사도 7,56)
우리도 조금만 더 정성을 기울이고 집중한다면
스테파노 첫 순교자의 천상 체험을 이 세상에서부터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을 앞당겨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체험은 다른 곳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미사 안에서 가능합니다.
좀 더 지극정성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온몸과 마음을 다해 미사에 참여한다면,
우리 역시 하늘길 열리는 광경을 직접 목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진흙탕 같은 세상 속에 살아간다 할지라도,
한 송이 연꽃처럼 거룩한 삶을 추구한다면,
우리 역시 하늘이 지상에서 천국을 맛보는 은총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스테파노 첫 순교자의 지극히 거룩한 삶 앞에 악인들이 보이는 반응을 한번 보십시오.
그들을 모두 화가 치밀어오를 대로 올라 도무지 통제가 불가능했습니다.
부득부득 이를 갈았습니다. 일제히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귀를 막았습니다.
그들은 일제히 스테파노에게 달려들어 한 마리 짐승을 쫓아내듯 성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이윽고 주먹보다 더 큰 돌들을 들어 그에게 내리치기 시작했습니다.
악인들이 진리와 정의 편에 선 의인들에게 가하는 폭력은
아직도 세계 도처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은연중에 악인들 편에 침묵으로 동조하면서,
그들의 악행에 가담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정의롭지 못하면 자비롭지도 못하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은 성 스테파노 순교자 축일입니다.
스테파노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지혜와 능력에 있어서 따를 자가 없었습니다.
그를 시기한 자들도 그를 넘어설 수 없었습니다.
이때 하느님은 스테파노에게 이 세상 사람들은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스테파노는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용서하신 것과 같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나를 모함하여 십자가에 못 박거나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분들은 어떻게 그런 자비의 마음에 이르게 된 것일까요?
자비는 ‘정의’의 열매입니다. 자칫 정의가 자비와 반대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정의로 심판하여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것은 자비롭지 않은 처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정의와 자비는 결국 같은 선에 있습니다.
‘오은영쌤 육아지침서’에 동생들을 지극히 싫어하는 5학년 딸아이의 모습이 나왔습니다.
동생들을 “없어져 버려!” 혹은 “쟤네 입양 보내!”라고 엄마에게 말합니다.
엄마의 애정을 그리워하면서도 동생들을 낳은 엄마가 매정하기만 합니다.
왜 금쪽이는 동생들에게, 그리고 엄마에게 그리도 모질까요?
자비롭지 못한 이유는 정의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정의롭게 사랑을 준다고 여기지만, 자신은 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의롭다면 더 큰 사랑을 받기 위해 더 노력할 것입니다. 불평만 하지는 않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라는
시를 쓴 송명희 시인이 있습니다.
심한 뇌성마비로 말을 하기도, 움직이기도 힘들지만, 하느님을 “공평하다”라고 노래합니다.
이 가사는 주님께서 불러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공평하다고 쓰라고 할 때는 쓰지 않겠다고 버텼습니다.
뭐가 공평하냐는 것입니다. 이때는 자신의 처지를 친구들과 비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하늘이 자신에게 해준 은혜를 봅니다.
그랬더니 공평함을 넘어서 ‘감사함’이 생겨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라고 노래합니다.
하느님을 정의롭다고 여기게 되면 누구에게나 넘치는 사랑을 받았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오히려 다른 이들이 받지 못한 것들이 보이게 되어
다른 이들을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부모가 불공정하다고 여기는 아이에게 어떻게 사랑을 주어야 할까요?
문자로 사랑을 전달할까요? 그것으로 될까요?
한 아이에게 잘해주면 다른 아이가 질투합니다.
정의롭다면 노력하는 만큼 보상이 주어진다는 것을 믿습니다.
노력해서 인정받습니다. 그 인정은 내가 형제들과 같은 수준이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비로울 수 있습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 동생이 태어나자, 질투가 늘어버린 꼬마 아가씨가 나옵니다.
여기서 금쪽 처방은 아기가 부모처럼 동생을 돌보는 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자신이 동생과 같은 수준이 아니라 부모와 같은 수준임을 믿게 됩니다.
그러자 질투가 사라집니다. 자비로워집니다.
오늘 스테파노가 하늘이 열리고 삼위일체 사랑을 바라봄이 이와 같습니다.
스테파노는 정의롭기에 노력하는 만큼 하느님께서 보답을 주심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을 불쌍하게 바라볼 눈을 얻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이들을 자신들에게 돌을 던져도 그들을 위해 기도해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테파노는 자신이 그런 것처럼 하느님도 사랑에 대해서는 공평하신 분임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느님은 정의로우십니다.
부모가 그렇듯 누구든 당신 수준으로 높여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다만 자신이 정의롭지 못해서 하느님도 공평하지 못하다고 믿는 이들에겐
아무것도 주실 수 없습니다. 은총으로 주어도 믿음의 열매가 맺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끝까지 형제들을 향해 자비로울 수 없습니다.
결국 정의는 하느님 자비를 얻게 하고 하느님 자비는 이웃을 정의롭게 대하게 됩니다.
그것이 모든 이들에게 대한 자비입니다. 결국 정의와 자비는 하나입니다.
자비는 본성상 정의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나비는 모든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성령의 使役
박상대 마르코 신부
어제 주님 성탄대축일과 함께 약 20일간의 성탄시기가 시작되었다.
전례 주년과 전례력에 관한 지침(32-38항)을 보면,
성탄 시기는 12월 24일 제1저녁기도로 시작하여 주님 공현 대축일
(원칙적으로는 1월 6일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2일과 8일 사이의 주일에 지낸다.)
다음에 오는 주일, 즉 주님 세례 축일까지로 정하고 있다.
성탄 대축일은 부활 대축일과 마찬가지로 한 주간의 고정된 “팔일 축제”로 거행되는데
팔일 축제는 1월 1일 천주의 모친 성 마리아 대축일로 마감된다.
성탄팔일축제들은 이 기간에 함께 기념되는 성인들의 축일로 말미암아
그 본뜻이 다소 퇴색되긴 하지만, 미사 중에 낭송되는 성탄 감사송과
8일 동안 노래하는 대영광송이 성탄의 고유의미를 살려준다.
성탄팔일축제의 둘째 날인 오늘은
그리스도 교회 공동체의 첫 순교자로 알려진 스테파노 부제의 축일이다.
스테파노의 순교에 관한 보도는 루카가 기록한 사도행전에 잘 실려있다.
스테파노는 예루살렘 공동체의 일곱부제들 중 하나로서(6,5),
성령으로 가득 차 신망이 두텁고 지혜와 용기로 충만하였다.
스테파노는 하느님의 은총과 성령을 가득히 받아 부제로서 공동체의 살림을 꾸려가는 일 외에도
백성들 앞에서 놀라운 일들과 굉장한 기적들을 행하였다.(6,8)
“자유인의 회당”에서 벌어진 논쟁에서 그리스계 유다인들을 무참히 퇴치한 대가로
의회에 끌려가 그 앞에서 놀라운 설교(7,2-53)를 펼친다.
설교를 들은 의회원들은 이를 갈고 분통을 터뜨리면서 마침내 스테파노를 처형하기에 이른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스테파노가 외쳤던 말을 들어보자.
“아, 하늘이 열려 있고 하느님 오른편에 사람의 아들이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7,56)
“주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주십시오.”(7,59)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7,60)
이렇게 스테파노의 죽음은 그리스도 교회의 모든 순교의 표본이 되었다.
그는 말과 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였던 것이다.
마태오 복음에서 파견 설교(10장)의 절정을 이루는
“박해를 각오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 빈말이 아니라는 실감이 든다.
뿐만 아니라 순교 직전에 스테파노가 외쳤던 말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라가시기 직전에 하셨던
言明과 비슷하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예수께서도 “아버지, 제 영혼은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그리고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카 23,34) 하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제자들을 위협하고 박해하던 사울이 그랬듯이
누구든지 그리스도 신자를 박해하면 곧 예수를 박해하는 것이다.(사도 9,5)
순교자의 영혼 안에 하느님의 성령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성령께서 때가 되면 해야 할 말을 모두 일러 주시기 때문이다.(19절)
예수님 성탄 주변의 모든 일들도 그랬다.
마리아는 하느님 성령의 힘으로 예수를 잉태하였고,
엘리사벳과 즈카르야도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렸던 것이다.
스테파노 부제를 시작으로 열두 사도들과 우리 그리스도교의 모든 순교자들도
성령의 빛으로 말과 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였던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이시다.
이승화 시몬 신부
하느님 사랑이 세상이 드러난 기쁨은
그만큼 세상으로부터의 박해를 알려줍니다.
무언가 변화가 시작된다는 것은
그만큼 충격과 반대가 따라온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에 오신 말씀을 맞이하는 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쁨만큼
고통이 수반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린 만큼
우리가 사랑을 담은 준비를 한 만큼
스테파노와 같이 이적과 표징을 삶으로 일으키고
성령으로 충만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의 사랑에 충만히 머물기에
세상으로부터의 역경과 고통 앞에서도
오직 하느님 사랑만을 먼저 바라볼 수 있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스테파노의 고백은
하느님의 충만한 사랑을 체험한 이가 할 수 있는 고백이며
성탄을 맞이한 이들이 나아가야 할 고백입니다.
만약 유혹에 흔들리고 쉽게 좌절하고 싶다면
먼저 하느님 사랑을 담아야 합니다.
그 사랑을 담을 준비는 대림 시기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나아가는 신앙 여정 중에 늘 해야 하는 자세이기에
그 사랑을 담고 충만함에 머물러야 합니다.
우리가 끝까지 견딜 수 있는 이유는
오직 주님의 사랑 때문이라는 점을 기억하며
오늘도 주님 사랑을 담고 고백하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 ‘시몬 신부의 신앙 이야기’>
이 보나벤뚜라 수녀
12월 26일 성 스테파노 순교자 축일 (마태 19,17-22)
성탄의 기쁨이 아직 충만한 그 다음 날 복음 말씀은 의외로 비장하다.
첫 순교자 스테파노의 죽음을 기념하면서,
제1독서에서는 사도행전의 스테파노 순교 장면을 읽고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박해 예고 말씀을 읽는다.
어제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한 아기가 세상의 구세주이기 때문에,
온 세상이 전부 다 기뻐하며 그분을 맞이할 것이라고들 생각했다.
그런데 세상의 구원자이신 분의 "구원하는 권세"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이들이 그분의 존재와 구원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분을 믿는 이들에게는 박해가 예정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복음 말씀에서 예고하신 대로,
스테파노는 재판정에 끌려가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을 증언하며 논쟁을 벌인다.
그리고 끝까지 귀를 막는 이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바라만 봐도 온 세상의 평화가 몰려오는 듯한 이 아기 예수님 앞에서,
돌에 맞아 죽는 예수님 제자의 모습을 함께 묵상한다.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한 스테파노는 적대자들 앞에서
마치 아기 예수님처럼 무방비 상태였다.
세상의 모든 증오, 폭력, 죽음 앞에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구세주 예수님의 힘은 무엇일까?
적대자들의 공격에 맞짱뜨는 똑같은 힘과 폭력이 아니라,
비폭력과 약함, 선함, 순수함을 통해 믿는 이들 위에 하늘을 열어 보여주는 힘이다.
세상의 적대감과 불의 앞에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한 채 하늘을 바라보며
나서서, 몸으로는 죽어가지만 죽음으로써 사는 부활의 힘이다.
스테파노의 이야기는 성탄 분위기를 깨는 끔찍하고 비장한 이야기가 아니라,
성탄으로 시작되는 우리 부활 스토리의 예고편이다.
[출처] 툿찡 베네딕도 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