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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富 이야기.
- 야보바나
우리나라에서 경제적으로, 삶의 질적으로 국민 전체의 상위 1%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갖고 있을까?
또한 인간들의 삶에서 경제적 1%와 정신적 1% 사이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물질적 1%가 있다면 정신적 1%도 있지 않을까?
한때 한국에서 30대 그룹 회장이었지만, 몇 년 전 기업을 남의 손에 넘기고 타국의 거리에서 회생의 몸부림을 치다가 허무하게 객사로 생을 마감한 제 친구가 있습니다.
친구에 대한 씁쓸한 기억도 있고 해서 오늘은 내가 본 갑부들의 이야기와 돈과 인생의 허무함에 대해서 개인적 경험담을 졸필의 낙서로 남겨보겠습니다.
얘기를 전개하다 보면 보통 사람들의 가정생활 안목으로는 비위에 거슬리는 이해불가 장면도 간혹 나오리라는 예감이 들지만 이야기를 사실 그대로 리얼리즘에 입각하여 전개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있는 그대로 쓰겠습니다.
내가 강의를 받고 있는 예술 대학 건물 옆에는 테니스 코트가 있었다.
유학파 교수들이 가끔 이용을 하고 국내파에는 테니스를 치는 교수가 거의 없던 시절이다.
어쩌다 외국 잡지에서나 보던 그런 광경을 직접 눈으로 본 나는 그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하~ 얀 숏 팬츠와 티셔츠를 입고 스매싱을 하는 멋진 폼!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을 온 초창기 한두 달은 나에게 친구라고는 단 두 명밖에 없었다.
부산 지역에서 최초로 예식장 사업을 시작하여 그 지방 예식장 계통의 대부 격이며 금싸라기 땅인 남포동, 광복동, 서면 로터리 근처 요지에 호텔, 여관, 임대업 빌딩, 등을 여러 개 소유하고 있는 부산 현금 갑부의 아들이며 나와 같은 해에 서울로 유학을 온 친구 한 명과 큰 갑부는 아니지만 그 당시 여의도 mbc 사장 아들로서 상류층 가정에서 살며 신촌에 있는 대학을 다니는 친구, 이렇게 두 명 뿐이었다.
하루는 그 두 친구가 처음 보는 학생 두 명과 함께 내가 다니는 학교를 찾아왔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보니, 두 사람 중 한 명은 대구에서 섬유업체로 시작하여 서울로 진출한 K그룹 창업자의 장 손자였고, 한 명은 국내 소주 업계에서 최고봉 자리를 지키고 있는 母 회사를 기반으로 훗날 건설, 유통, 등등 문어발 식 거대 종합 상사로 성장한 J그룹의 자손이었다.
끼리끼리 어울린다더니, 있는 집 자식들은 이리저리 한 두 다리 건너며 연줄 연줄로 친구의 인연을 맺기도 했는데 그러므로 훗날 우리들과 자주 어울리는 놈들 중에는 갑부 집 자식 두어 명이 더 합류하게 된다.
좌우지간에 그날 우리가 만난 시간이 12시 전이라 아직 술 시간도 아니고 해서 우리는 택시를 타고 두 친구 중에 한 명이 살고 있는 한남동 집으로 갔다.
저녁 술시까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새로 입수한 야동 필름을 소형 영사기로 돌려 본 뒤 그 당시 한국에 고스톱 화투 바람이 막 불기 시작하던 초창기라 고스톱이나 치다가 어두워지면 명동으로 술을 마시러 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촌놈이다.
하지만 나의 부모님도 고향에서 일이십만 평 정도의 농지와 임야를 소유한 사람으로 군내 유명 갑부였고, 귀한 집 아들로 태어난 나는 국민 학교부터 대도시 유학을 해야 했고 용돈도 풍족하게 쓰고 있었으므로 웬만한 도시 부잣집 아이들에게도 꿀리지 않았고 절대 기가 죽은 일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 그 친구 집에서 나는 황소 등짝에 붙어있는 한 마리 빈대 같다는 위축감에 쌓여 벼랑 아래로 급히 추락하는 자신을 들여다보며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초라한 이방인의 심정 비슷한 쓴맛을 보게 되었다.
플레이를 할 줄도 모르면서 내가 그렇게 부러워만 하던 테니스 라켓!
하기야 소수 특별한 사람들을 제외한 한국사람 대부분이 칠 줄 모르던 시절이었지만, 그런 테니스 라켓이 가방 하나에 네 개 씩 다섯 개의 테니스 가방에 담겨 2층 친구 놈 방 앞 거실 귀퉁이에 의기양양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윌슨, 헤드, 가와사키...... 새겨진 이름도 처음 읽어보는 고가의 세계적인 브랜드.
국내에서는 구입하기도 어려운 브랜드!
지금은 개나 소나 모두들 외국을 들락거리지만, 그 당시에는 최상류 부유층에서나 볼 수 있는 해외 여행길에 세관을 통해 들어올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한일 라켓이라는 게 첫 선을 보이던 초창기였지만 그런 브랜드는 그 가방 속에선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라켓 한 개의 현재 물가 가격으로 100 정도만 쳐도 가방 속에 들어있는 20여개의 가격이 얼마인지는 여러분이 계산하시기를.....
대학 1년생의 취미 생활 운동 기구!
하하하하하.........
또 놀라운 사실 하나.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며 음악을 전공하는 친구도 아닌데 악기는 왜 그렇게 많은지?
지금 시가로 치면 한 개에 1000만 원쯤 하는 모델로 빈티지 일렉 기타, 현역 가수들이나 갖고 있을 모델로 역시 1000만 원짜리 명품 야마하 통기타와 야마하 키보드, 드럼 세트가 친구놈 옆방에 시장바닥 싸구려 상품처럼 별 관심도 못 받으며 널브러져 있었다.
밖으로 눈을 돌리니,
너른 마당 한 쪽에 잔디로 뒤덮인 뚜껑이 스르르르르.... 오픈, 클로즈 되면 나타났다 사라지는 풀장이 있어 거지같은 심정으로 서있는 나의 호흡을 비참하게 옥죄여왔다.
아~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부잣집 아들이라고 자부하고 있던 내가 갑자기 물에 빠진 쥐새끼 모습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친구들과 인간적으로 교감을 나누는 사이로 발전하지 않았더라면 내 스스로 초라함을 이겨내지 못해 더 이상 친구 사이를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놈들과 첫 대면 이후로, 그놈들과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어울리고 있었다.
연대, 외대, 한대, 자기들의 캠퍼스에 있어야 할 놈들이 일주일이 멀다 하고 나의 캠퍼스로 원정을 와서는 나의 강의실까지 들어와 이쁜 여학생들에게 침을 질질 흘리거나 소극장에서 밤늦게 까지 강행하는 연극 연습을 구경하며 죽치고 있다가 우리 일행들과 함께 대폿집도 가고, 고생들 한다며 위로의 말도 하고, 내 위신을 세워주려는 듯 거금의 계산도 저희들이 팍팍 하고 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어느 시점부터는 여행도 테니스도 함께 다니고, 술집도 전전하고, 여학생 사냥도 오입도 함께 하고, 때론 종로 YMCA에서 남녀 혼합 서클을 만들어 농촌 봉사 활동도 다니곤 했다.
이렇게 죽이 척척 맞아떨어지며 바늘과 실 같은 사이가 이어지다 보니 처음 대면에서 내가 그들에게서 느꼈던 갭은 차차 없어지고 죽마고우 보다 더 밀접한 관계로 발전하게 되어 우리가 사회인으로 진출하며 흩어지기 전인 20대 거의를 늘 그렇게 놀고 있었다.
강남 쪽이 완전 활성화되기 전까지는 충무로와 무교동, 북창동에 최고급 룸살롱이 있었다.
서울에서 최고급인 특 중의 특 룸살롱은 그 당시에도 회원제, 예약제로 운영하며 잘나가는 왕 언니들이 새끼 마담 서너 명을 두고 있었기에 정치인, 대기업 경영주, 연예인들의 로비 장소로 자주 이용하는 곳이라 일반인이나 그냥 보통의 부유층들은 그 아래 등급 룸살롱을 명동이나 주거지 동네에서 이용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 룸살롱 만해도 하루 저녁 돈이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데.....
그런데 참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그때 우리 나이는 대학 1학년 말이었다.
그 나이에, 나비넥타이에 검정 양복을 입은 40대 지배인의 굽신굽신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으리한 이태리 대리석으로 휘장 한 내실에 은은한 실버 컬러의 고급 조명으로 물들은 특 룸에서 양주를 마셔본 경험이 있는가?
보통 사람은 문 앞에서부터 여러 자격 미달로 제지를 당해 입장조차 할 수 없는 그런 특급 룸살롱에서 말이다.
놀라운 것은 그게 다가 아니다.
술자리를 끝낼 때면, 중후한 중년 지배인이 정중하게 들고 온 캐서에 사인만 하고 나오면 월말에, 집안 내무부 장관 격인 모친께서 보낸 집사가 슬그머니 결재를 해주고 간다는 사실이다.
최고 경영인 남편에게 내조를 하듯이, 사회 경험을 하고 있는 자식의 뒷바라지를 깔금하게 처리해주고 있는 것도 경영인 집안의 노하우인가 하는 생가이 들 정도였다.
차후 후계자가 될 사람에 대한 사회 수업의 일종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 같은 쪼무래기 부잣짖 아들이 그런 내막을 자세히 알 수가 있겠는가?
그 당시에도 앙드레 김은 샛별처럼 떠오른 유명 디자이너였다.
경복궁 옆 옛 보안사령부 근처에도 그의 의상실이 있었다.
훗날 졸업 후엔 나도 방송 연예계로 진출하여 그 사람과 친분을 갖는 관계가 되었지만, 서울 입성 초창기 대학생 시절엔 그 사람의 명성만 익히 알고 있었던 게 촌놈 출신인 나로선 당연한 현실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들은 와이셔츠나 캐주얼 바지 같은 것들까지도 그곳에서 맞춰 입었다.
엄마와 누나, 남녀 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들은 소공동이나 명동 최고급 양복점이 단골이었지만......
앙드레김 가게에는 그들 가족의 체형 사이즈가 보관되어 있기에,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앙드레
김 자기 맘대로 옷감과 컬러를 선택하고 마음대로 디자인을 해서 옷을 만들어놓았고, 가족들은 그에게서 전화가 오면 찾아다 입는 식으로 거의 개인 의상실이나 마찬가지였다.
앙드레 김은 와이셔츠 왼쪽 가슴에 위치한 호주머니와 바지 뒤 호주머니 상단에 andre kim이라는 로고를 확실하게 박아 넣어 자신의 명성을 넓히기도 하며 과시를 했는데, 하루가 멀다 하고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다가 친구 집에서 잠을 자고 학교를 갈 땐, 나는 옷장 가득한 앙드레 김 로고의 친구 옷을 내 옷인 양 마음대로 갈아입고 학교를 갔으며, 그런 모습을 늘 보고도 친구 가족들은 당연하다는 듯 아무 신경도 안 쓰곤 했다.
그 유명한 디자이너, 그 비싼 옷들을 길거리 구루마 표 정도로 취급을 했다.
나는 학교 강의실에서 어깨에 잔뜩 후까시를 주고 돌아다닌 그 옷을 말이다.
나도 그동안은 돈 꽤나 쓰는 놈이라고 속으로 늘 만용을 부리고 있었지만 개뿔!
그들의 일상생활은 내가 여태껏 가보지 못한 행성(行星) 속 세상에서 일어나는 생활 패턴이었다.
그런데 그 갑부 집안 생활과 자녀들의 일상생활 중엔 의외로 검소한 점도 수두룩했다.
어젯밤 늦도록 유흥가를 돌아다니며 술을 푸다가 어느 한 친구 집으로 몰려가 늦잠을 자고, 늦은 아침 일어난 우리의 친구 놈들 네댓 명이 식탁으로 가 앉으면 아주머니가 차려주는 반찬엔 겨우 소고기 뭇국, 생선구이 하나, 총각김치 정도였다.
가택 거주 가사도우미가 두세 명씩이나 있으면서 너무 썰렁한 식탁이라는 생각이 확 들었다.
나의 고급 하숙집 밥상만도 못 했다.
철들기 전까지는 입이 짧았던 나는 그런 식탁을 마주하고는 처음엔 숟가락을 들기가 싫을 정도였다.
아무리 재벌가의 집, 재벌가의 식탁이지만 입맛이 땡기질 않았던 게 사실이었다.
그전에 부산 갑부 친구 놈의 집에서도 그런 느낌을 접한 적이 있었다.
갑부 집 식탁에 대한 나의 화려한 상상이 완전 빗나갔음을 알게 된 검소한 식탁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자주 먹다 보니 먹을 만 해지더라.
참,
그런데 그들은 최고급 맛있는 음식은 주로 외식에서 비싼 돈 주며 다 챙겨 먹기는 했다.
그 당시 한 창 우후죽순처럼 쏟아지는 강남 아파트 단지에는 테니스코트를 갖춘 곳이 더러 나타났지만 거의가 입주자들에 한해서만 사용을 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자주 가는 테니스 코트는 당시엔 변두리 중에도 변두리인 구파발 끝에 있었다.
그곳 산 밑에 있는 모 여대의 농장 부지에 테니스 코트가 있었는데 친구들 중에 한 놈의 집안이 그 대학 재단 집안과 인연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종로에서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다 보면 흙먼지를 들이마시며 버스가 엉금엉금 기어가는 비포장도로도 나와서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우리 갑부 집 아들들은 누구도 불평 한 마디 않고 그곳을 수시로 다녔다.
그럴 때 보면 갑부 집 아들들이라는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테니스를 마치고 버스 정류장에 있는 시골 대폿집에서 늘 족발과 막걸리로 목을 축였는데 그
곳에 한 집은 젊은 부부가 깔끔하게 단장한 식당이었고, 한 집은 할머니 한 분이 허름한 탁자 한 개를 놓고 파전과 막걸리를 팔았다,
우리는 옆집 깔끔한 식당엔 한 번도 가지 않고 항상 할머니의 허름한 가게 초라한 탁자에서 허술한 족발과 막걸리로 목을 축였는데, 이유는 단 하나, 고생하시는 할머니 것을 팔아주자는 공통의 의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얼핏 생각하기에 재벌들의 자식은 인간미가 없고 이기적이고 까탈스러울 것이라는 편협적인 추측과 사시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인식하겠지만 우리 친구드 거의는 소탈한 성격과 반듯한 사고방식, 뜨거운 인간미가 넘쳤다.
어쩌다 보면 보통 가정의 자식들이면서 약아빠지고 까진 놈들보다는 훨씬 순수한 감정과 상식으로 머리와 가슴을 채우고 있는 친구들이었다.
그러한 그들은 밖에서 어떤 경우에 처하더라도 내가 뉘 집 아들이라고 남에게 말을 하거나, 남에게 돈 자랑을 하거나, 상류층 티를 내는 언행을 어지간해서는 하는 것을 못 봤다.
일반인들 생각으로는 은근히 표시라도 내고 싶을 것이지만 그들은 자랑을 하지 않았다.
이미 자신들은 모든 걸 충분히 갖고 있음이 몸에 배어 잘랑질이라는 것을 의식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자신들이 품고 있는 자신감으로 무슨 일이든 부딪히고 장벽을 헤치고 나갔다.
코피가 터지는 상황에 처하더라도 절대 집안 배경을 거들먹거리지 않았다.
사건이 커지고 도저히 어쩔 수 없이 밝혀지는 한이 있더라도.....
하기야 요즘 재벌 2세 어린놈들은 우리 때와 달리 애비 얼굴에 똥칠을 하는 못난이들이 많은 모양이긴 하다.
어느 여름 방학 때 우리 무리들 중에 다섯 명은 제주도 여행을 갔었다.
갑부 집 아들들이니 제주 공항 칼 호텔에 투숙을 하고 호텔 풀장을 이용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남대문 시장에서 군용 텐트와 배낭을 구입하여 장장 15일 동안 배낭 여행을 하며 이름 없는 어촌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숙식을 했다.
구석구석 구경을 하며 걷다가 해가 지면 마을 앞 바닷가에 텐트를 치고 버너로 밥을 해 먹고 또다시 비포장도로를 걷고 걸으며 젊음을 만끽하며 제주 일주를 마치고 왔다.
일반인들의 생각으로는 재벌가의 자식들은 나약해서 그런 고생을 못할 것이라고 짐작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착각일 뿐이다.
그들은 승부 기질과 깡다구가 강하고 건전한 사고방식 또한 온몸에 배어있었다.
재벌 가정에서 부모들의 승부 근성 정신력을 보고 어려서부터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며 성장한 결과인 듯하다.
여담이지만, 예전에는 우리나라 어느 곳에 캠핑을 가더라도 마을 원주민 청년들의 텃새가 없는 곳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바닷가 텐트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보고 꾸역꾸역 모여드는 패거리들은 항상 쪽수가 우리 보다 많았다.
다구리를 붙으면 쪽수로만 보아도 우리가 불리한 건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나 나약할 것만 같은 갑부의 아들들은 절대로 꼬리를 내리는 일이 없다.
그러다 보니 한바탕 난투 뒤에는 코피로 얼굴이 범벅이 된 일도 있었고, 때론 상대의 갈비뼈를 부러트려 경찰서 연행을 당하기도 했듯이 하찮은 것이라도 승부에서 물러서는 일은 없다.
재벌가의 자식들에게는 의외로 검소한 면도 있다.
강남 동네가 떠오르는 샛별이 되다 보니 우리들도 피 끓는 젊음의 호기심에 신흥 유흥가로 술집을 찾아 나선 어느 날이었다.
신사동 뒷골목에서 물 좋은 카페를 물색하며 서성이고 있을 때였다.
빨간 스포츠카 한 대가 물찬 재비처럼 미끄러져 오더니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앞 대형 고급 레스토랑 건물에 멈췄는데, 운전석에서 내린 사람은 스물 두 세 살 정도의 앳된 여자 아이였다.
우리 일곱 명의 사내들은 서로의 놀란 눈을 굴리고 주고받으며 놀랍고 신기하다는 듯 입들을 쩍 벌리고 있었다.
오~
뭐야 이거!
우리 모두의 머릿속엔 그런 투의 생각으로 중얼거리고 있었을 거다.
아리따운 여자아이의 몸매가 유혹적이어서 감탄을 한 게 절대 아니다.
새파란 여자 아이가 몰고 온 빨간 스포츠카의 가격이 수억 원짜리라는 것을 우리 모드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눈들을 휘둥그렇게 뜨고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린 강북에서 택시 두 대에 나눠 타고 왔다.
그렇다면 재벌 2, 3세들의 입을 따악! 벌려 놓은 그 여자는 도대체 어느 집안의 누구일까?
재계 순위 30위 안팎을 맴도는 재벌가의 자식들보다 한 수 위에 있는 그룹 딸내미인가?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정통 있는 갑부 집 어른들은 자식들에게 그렇게 무절제 적인 교육을 시키지 않는다.
그 당시 벼락 부자가 된 강남 어느 졸부의 이야기 한 토막을 하겠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옛날에는, 룸살롱 화장실을 가서 쉬~~ 하고 볼일을 보고 있으면 어떤 녀석이 말도 없이 자신의 등 뒤에서 어깨와 등짝에 사사사삭, 솔질을 해대고 싸구려 향수를 칙칙 뿌려주는 놈이 있다.
그러면, 오줌을 다 싸고 난 손님은 화장실을 나오면서 팁으로 오천 원짜리 아니면 천 원짜리한 장을 돈 통 접시에 놓고 나와도 되고 안 주고 나와도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데 기상천외한 일이 강남 룸살롱에서 일어나 웨이터들의 입과 입을 통해 시중에 퍼진 웃지 못 할 팩트가 있다.
배추밭, 미나리밭, 사과 배 밭에서 반평생 농사만 짓던 농부가 강남 개발에 힘입어 갑자기 100억 200억 졸부가 되어 말로만 듣던 강남 특급 룸갈롱 시찰을 갔다가 화장실에서 얼마를 주고 나와야 하는지 몰라 망설이던 중 양복 주머니마다 채워 넣은 만 원권 다발을 이리 저리 뒤적이더니 그 중 한 다발을 꺼내어 화장실 뽀이에게 내밀며, 가격에 맞게 계산 하시게나! 하더란다. 화장실 뽀이 녀석 기절초풍 한 것은 당연하고 소문이 강남 유흥가로 쏜살 같이 퍼진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듯이 강남 개발 초창기 졸부들의 웃지 못 할 일화들이 횡행하던 시기이니 졸부의 자식들도 덩달아 난리가 났을 터이다.
돈에 대한 개념이 그렇게 가벼워진 졸부들의 아들딸들이라면 자기 과시 행위로 전통 재벌가 갑부 자식들을 충분히 놀라게 하고도 남을 위인들일 것이다.
지금이야, 강남이 아니라도, 한물 간 이태원 밤거리 해밀턴 호텔 주차장이나 강남 대로변만 가 봐도 나이 어린 애들이 람보니기니아나 유명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는 것을 쉽게 목격할 수 있지만 그때만 해도 람보니기아는 아주 특별하고 신기한 것이었다.
갑부의 자식들인 내 친구들 조차 엄두도 내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우리가 남이섬이나 강촌 같은 곳으로 놀러 갈 때면 그들의 어머니나 누나들의 차인 스텔라 정도를 이삼일 빌려서 갔다 오곤 했으니 쓸 데 없는 허세는 절대 있을 수 없는 게 그들 가정의 사고방식이다.
자기과시에 대한 표현방식이 뼈대 있는 갑부들 집안과 졸부들 집안이 확연하게 다르다는 게 보인다.
그들에게는 또 한 가지 특별한 게 있다.
할아버지 대로부터 창업을 한 재벌가 자녀들에게는 가정생활 자체가 경제 교육장이고 경영 교육장이다.
어린 시절부터 그런 가정환경에서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며 성인 뼈로 굵어진다.
교과서 이론적인 지식을 주입하는 대학에서도 배울 수 없는 경제학, 경영학의 현장 교육이다.
그렇게 자란 그들은 돈을 쓸 곳과 안 쓸 곳을 명확하게 구분한다.
어떤 때는 일이백만 원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쓰기도 하지만, 아무리 안면이 오래된 사람, 혹은 중, 고등 동창생일지라도, 저놈은 사고방식이 글러먹은 양아치다, 저놈은 비굴한 인간형이다, 나 하고는 안 맞는다, 판단을 하면, 상대방이 아무리 아부를 떨어도 짜장면 한 그릇 사지 않는 고집도 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 고집은 안 꺾는다.
그럴 때를 보면 냉혈인도 그런 냉혈인간이 없다는 섬뜩한 생각이 들 정도로 철저하다.
까짓것 짜장면 한 그릇 동냥 주는 샘 치고 사줘도 될 텐데 말이다.
하하하하하.........
반면에 자기가 인정하고, 자기가 사귀고 싶은 사람에게는 호텔 일식집에서 포식을 시키고도 모자라 가기 싫은 사우나까지 억지로 함께 가자며 아양과 겸손을 발휘한다.
수많은 사연들과 함께 보낸 학창 시절을 뒤로 하고 각자가 경영 일선으로 들어간 지도 어언 30여년이 흘렀다.
아삼륙으로 어울리던 친구 놈들 중에 K그룹 회장은 얼마 전까지도 건재하게 그룹을 경영하다가 그룹 회장 자리에서 물러난 것이 TV뉴스에 나왔고, 부산 친구는 처음부터 남포동, 광복동, 서면 일대 요지에 건물을 갖고 있는 부친의 현금 부동산 갑부를 물려받은지라 아직도 건재하지만 대부분 친구들은 많은 변화를 맞이했다.
J그룹 회장이었던 친구는 중국에서 재기의 몸부림을 치다가 객사했다는 보도가 뉴스에 나왔었다.
그 쟁쟁하던 그룹이 남의 손에 넘어가고 회생의 길을 모색 할 겸, 잠시 피신도 할 겸 중국으로 건너가 고군분투를 하다가 자국도 아닌 타국 즉, 집 밖에서 죽고 말았으니 객사를 한 것이다. 예로부터 집 밖에서 죽으면 객사라고 하지 않는가!
한 갑부 집안은 일행 중 제일 먼저, 일찌감치 독재 정권에 밉보여 꿈에도 없던 미국으로 도피성 이민으로 훌훌 털고 나가 평범한 삶을 살고 있고, 또 한 사람 갑부 친구는 간암으로 우리 곁을 떠남으로서 요즘은 개도 안 먹는다는 환갑잔치도 못보고 60 세로 생을 마감했다.
또한, 비록 30대 그룹에 비하면 새발에 피도 안 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갑부 축에 들던 여러 친구들, 남대문 시장에서 브X뎅 아동복을 창업하여 그렇게 잘 나가던 친구는 어느 날 경영권을 남에게 빼앗기고 양평 남한강변에서 전원 식당을 하며 낚싯대로 세월을 보내고 있고, 20여 년이 넘도록 잘 끌고 가던 마X틴 관광 회사가 역시 남의 손에 넘어간 친구는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60 중반인 나이에 영업용 택시를 몰고 있다.
돌고 도니까 돈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뒤돌아보면 돈과 인생만큼 허무한 게 없다.
수천억, 수 조원을 주무르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고, 영원히 갈 것 같던 갑부가 하루아침에 반지하 단칸방으로 내몰리는 게 삶의 흐름이다.
더구나 일단 돈이라는 놈을 투자해야 하는 사업가들에게 굴곡은 항상 따라다닌다.
흥망의 앞날을 아무도 예측해줄 수 없는 암흑의 길이 늘 도사리고 있다는 말이다.
그 흐름의 범주에 나도 속해서 놀이공원 롤러코스터 같은 포물선을 몇 번 타봤다.
그렇게 보면 1% 그거 구름 같은 형상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역으로 생각해보면 1% 그거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잡을 기회가 있다는 얘기다.
물론, 도전과 실행도 해보지 않고 골방에 틀어박혀서 정체된 사고 속에 말로만 세상을 비판하고 비관하는 성격의 소유자들에게는 예외일 것이다.
인간은 광활한 우주의 역사에 비하면 지구 위를 잠시 떠돌다 사라지는 벌레나 먼지 같은 존재이기에 먼지가 사라지듯 맞이하는 죽음 앞에서는 1% 아니라 0.01%의 부(富)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천 상병님 말처럼 이 세상에 잠시 왔다 가는 소풍이라면, 진정한 1%는 살아생전에 자신이 만족할 정도의 분수로 행복감을 추구하며 죽기 전에 내 심장이, 내 정신이 하고 싶은 것을 이것저것 주저 없이 실행하고 즐기다 죽는 일이 즐거운 소풍 길을 의미 있게 보낸 사람들의 바람직한 1% 삶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차피 돈이 많고 적고를 떠나서 인간의 有限적 짧은 수명 속에 잠시 머물다 빈손으로 떠날 미물들이지 않은가?
염라대왕 앞에 불려갈 때에서야 좀 더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고, 내 팔 내 맘대로 흔들며 자유분방하게 맘껏 즐기지 못한 아쉬움을 한탄한 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사위어 가는 눈동자를 힘없이 껌뻑, 껌뻑, 껌뻑거리다가
스르르.......
그렇게 눈을 감고 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일 텐데..........
아무도 동행해주지 않을 죽음 그 처절한 고독 속으로 홀로 내팽겨질 몸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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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오늘도 건강하게
즐겁게 지내는것이
좋겠습니다
그럼요
밝은 마음
즐건 마음으로.....
갑부
좋지요
갑부가 되면
무엇이 될까요
소설적인 글이라지만
너무 감동이 묻어납니다
언제나 물질적으로
풍족한 것이 바로
갑부의 길이지요
돈 많은 사람들은
부러워 할 것 없지만
돈이 없는 서민들은
언제나 가난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세상이야 말로
불평등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지요
돈이 있으면 가장 쓰기 쉽고
돈이 없으면 가난할 수밖애
없는 세상이 바로
오늘날의 모습입니다.
언제나 많은 글 늘
감동으로 전하는 마음
언제나 고맙습니다,
오늘도 정말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향필하세요
감사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이지요.
정신적으로 부를 창출합시다.
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