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우리나라의 화가를 소개하게 되었네요. 화려하고 감각적인 서양화에 비해 수묵으로 그려진 한국화는 조용하고 수수하죠. 혹 비교를 하자면 서양화는 푸른 바다 위를 모터보트로 달리는 다이나믹한 흥분, 한국화는 솔잎 향 은근하게 풍기는 오솔길을 조용히 걸어가고 있는 편안함이라 할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고요한 풍광 속에서 심신의 피로를 씻듯 한국화의 우아한 아름다움 속에서 우리는 오래도록 안식을 즐길 수 있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한국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나 모네의 해돋이 만큼 유명하지 못했죠. 이번부터는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한국의 유명한 화가들을 소개하겠습니다.
몽유도원도로 유명한 화가 안견. 그는 신라의 솔거, 고려의 이녕 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조선 초기 최고의 화가라 평가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실 그의 사적인 생활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답니다. 출생년도나 사망한 시기도 알 수 없으며 신분도 막연히 중인이 아닐까 생각되고 있을 뿐이죠.
당시의 왕이었던 세종은 우리의 한글인 훈민정음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음악과 시 등 학문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이 있던 당시가 조선 최고의 태평성대를 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세종이 궁내에 집현전을 세워 학문을 장려했을 뿐 아니라 도화원이라 관청을 설치하여 많은 화가를 길러내었습니다.
당시 도화원의 화가들은 대부분 중인 출신으로 많이 출세를 해봐야 종6품인 별제나 선화까지 오를 수 있었답니다. 하지만 안견 만은 그의 재능을 알아본 세종으로부터 파격적으로 정4품인 체아직호군이란 직책을 받았답니다. 또한 예술을 사랑하는 안평대군의 열렬한 후원을 받아 다른 이들의 질투와 부러움을 사기도 했죠.
안평대군은 세종의 셋째 아들로 시,서,화에 능하였으며, 그의 집은 늘상 예술성을 지닌 선비들이 모여 그와 함께 예술세계를 견주던 곳이 되었습니다. 안평대군은 특히 미술을 사랑하여 중국에서부터 많은 고미술품을 수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특별히 안견의 재능을 아껴서, 중국에서 새로 들어온 먹이나 붓이 있으면 그에게 먼저 선물하고, 어렵게 중국에서 들여온 값비싼 화집이 있으면 그 또한 먼저 보이면서 그의 예술세계 확장을 위해 끊임없이 투자했답니다. 덕분에 안견은 중국의 휼륭한 화가의 화풍을 많이 배울 수 있게 되었고, 중국 화풍을 우리만의 것으로 독특하게 발전시켰답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3일만에 그 내용을 그려낸 것으로 유명합니다. 안평대군은 그 그림을 보고, “자네가 꿈을 꾼 사람 같구만.” 이라면서 칭찬했다고 하죠. 그리고 당대의 문인사 22명이 시문을 지어 그림에 부쳤답니다.
하지만 1453년, 안평대군의 형 세조가 왕위를 노리고 자신의 동생을 강화도로 귀양 보낸 후 사약을 내리는 계유정란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성삼문, 박팽년, 이개 등 당대의 충신이었던 사육신이 죽임을 당하고, 결국 세조가 왕위에 오르게 되죠.
그러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안견은 그를 후원해 주었던 안평대군에게서 고개를 돌립니다. 그렇게 살아 남은 그에게 손가락질할 사람은 없겠지만…. 어쨌든 그는 살아 남아 특유의 독특한 화풍으로 후대의 많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세상 어느 곳을 도원으로 꿈꾸었나 / 은자들의 옷차림새 아직도 눈에 선하거늘 그림으로 그려놓고 보니 참으로 좋다 / 천년을 이대로 전하여 봄직하지 않는가 世間何處夢桃源 野服山冠尙宛然 / 著畵看來定好事 自多千載擬相傳
몽유도원도 ]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도원의 광경을 안견에게 말하여 그리게 한 것으로 안견의 대표작이자 조선회화의 대표작이죠. 그림은 왼쪽 아래의 현실세계 에서 시작하여 오른쪽 위의 도원세계로 올라가면서 전개가 되고 있는 데요. 멀리 있지 않으나 영원히 도달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한 이상향에 대한 기대감과 신비가 너무나 잘 표현되어 있죠. 하지만 너무나 안타깝게도 지금 일본에 소장되어 있답니다.
적벽도 ] 안견의 작품으로 전해오는 여러 그림들 중 가장 큰 작품인 이 작품은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적벽대전이 일어난 곳을 그린 것이라 합니다. 중국에서 이곳을 그린 유사한 그림이 많이 있다고 해요. 오른쪽 위에 신비로워 보이는 산과 그 밑의 무성한 나무들의 모습에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곳인 듯한 느낌이 들죠. 또한 강한 느낌의 적벽과 그 적벽을 감상하는 사람들의 유연한 필치가 대비되면서 안견 특유의 필치가 보이고 있습니다.
어촌석조도 ] 진짜 안견의 그림인지에 대한 진위여부가 가려지지는 않은 작품이지만, 아직까지는 그가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안견의 작품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을 뿐더러 워낙 출중한 화가의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감 때문인 듯해요. 어쨌든 중국화풍의 그림자가 엿보이는 이 작품도 한국화 특유의 여유로움이 물씬 풍기고 있습니다.
연사모종도 ] 안개낀 절에서 들려오는 저녁 종소리를 소재로 하는 연사모종(煙寺暮鐘)은 본래 중국이나 일본의 수묵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라고 합니다. 안평대군의 후원으로 귀하고도 비싼 중국의 서화를 자주 접했던 안견이 중국 화풍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처럼 보이게 하는 작품이죠. 전체적인 공간 구성이나 나무에 대한 표현이 중국 곽히파풍과 비슷하기도 합니다.
사시팔경도 ? 만춘 ] 늦은 봄의 한 정경이죠. 짙은 색의 왼쪽 아래 절벽과 초가집들 그리고 멀리 뒤에 보이는 산 사이에 그리고 오른 쪽 중간 즈음에, 강 건너 있는 기와집과 주변 모습이 삼각형 구도로 그려져 있습니다. 왠지 구름 속에 떠있는 듯한 강 건너 기와집은 현실 세계와는 다른, 인간이 닿을 수 없는 곳 처럼 느껴지네요.
사시팔경도 - 초하 ] 사시팔경도의 제목으로 초봄을 그린 초추에서 늦겨울인 만동까지 총 여덟개의 시리즈가 하나의 화폭에 담겨 있습니다. 경물들 사이에 넓은 수면과 안개를 채워넣어 안견 특유의 한국적 정서가 잘 드러나 있죠. 다소 모호하면서도 신비로운 그림 속 풍광이 보는 이에게 어지러운 현실을 잊을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있습니다.
사시팔경도 ? 초동 ] 비단에 그려진 각각의 그림들이 조금씩 다르게 보이는 건 사진상의 차이도 있겠지만 그림이 그려지는 비단에 색을 입힐 때의 차이도 있답니다. 비단에 배경색을 물들일 때 겨울의 느낌을 더 살리기 위함이라 할 수 있죠. 초겨울에 들어가고 있는 그림 속 산과 나무가 조금은 쓸쓸해 보이네요.
사시팔경도 ? 만동 ] 하늘에라도 닿을 듯 강한 기세로 뻗쳐 있는 산들과 절벽이 장관입니다. 그 안에 가지를 뻗치고 있는 소나무의 기상도 힘있어 보이죠. 늦겨울 우수에 젖은 경치 속에서도 다가올 봄을 기다리는 듯한 희망이 왼쪽 가운데 그려져 있는 폭포수의 흐름에서 느껴지고 있습니다.
사시팔경도 ? 초추 ] 같은 풍경을 약간 위에서 본 듯한 각도로 그려져 있죠. 조선 초기의 풍경화들 대부분은 실제로 존재하는 풍경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으로 그려지는 그림들이었습니다. 이 그림들도 모두 비슷한 구도의 풍경으로 되어 있죠.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 보면 조금씩 틀린 부분들이 보입니다. 새롭게 등장하는 나무나, 붓 필치의 독특함들을 발견하시는 재미도 있답니다.
[ 사시팔경도 ? 만하 ] 앞에 소개된 초하의 그림과 대칭을 이루고 있죠. 사시팔경도의 그림들 모두 쌍을 이루어 대칭구도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늦여름의 조금은 지쳤으나 아직 기세가 꺽이지 않은 듯한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네요. 강한 붓터치가 안견의 기상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