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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테일러 콜리지에게서
존던과 워드워즈를 보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을 봅니다.
영국에 처음 갔을 때 설교단에서 설교를 들었는데 간결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메시지로 전달하시는 분이 당연히 신부님으로 알았습니다. 설교후에 인사를 나누다보니 그분이 변호사로 설교자격증을 지니신 성공회 평신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래 전에 대한성공회의 신도회장성도가 조만도를 인도하고 말씀 선포인 설교를 하셨다고 전해들은 이야기는 기억나지만 최근에 대한성공회는 성직자만이 설교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에서 평신도 설교가를 만나고서는 생경한 마음이 들었었습니다. 사제우선주의에 젖어 사는 제 자신이 되었는가를 스스로 질문하면서 놀랐습니다. 더구나 성공회 신학교에 성소지망생으로 신학생입학이 급감하면서 신도회장성도의 조만도 인도와 설교가로 교회를 인도하셨던 지난 대한성공회의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성소자는 급감하는데 지금과 같은 신학생수급으로는 성직자양성이 어렵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신도의 예수마음으로 삶을 보는 영적 지도력을 높이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목현장중심의 교육원으로 사제양성의 기반을 다지게 된 것입니다. 저처럼 이상주의를 추구하다가 이상주의의 원칙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너무 쉽게 원칙과 방향없이 자연주의로 방향을 돌리지 않으려 했던 이유는 이상주의의 기본 방향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였습니다. 자연주의를 향하되 인간이 지닌 이상적인 원칙을 놓지 않고 이상을 잡으려는 자연주의를 향하는 콜리지로 제게 보였습니다. 제 삶의 궤적과 비슷한 점을 발견하여 제가 놓친 것이 무엇인지를 볼 수도 있기에 콜리지를 저의 뛰어난 선생으로 모시게 된 것입니다.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 선생은 평신도설교가이자 시인이자 문학비평가이자 세익스피어에 대해 깊이 알고 대중강연가이자 당대의 철학자이기도 했습니다. 일찍 콜리지를 만났다면 더 숙고된 성숙한 영적인 삶이 되었을텐데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이제야 콜리지를 만난 것도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콜리지가 평신도설교가로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을 이어가면서 지속적인 글을 썼고 당대의 인식의 지평을 깊이 세웠다는 점에서 친해지고 싶었던 것입니다. 200년 전에 이미 영국성공회에서는 평신도설교가가 있었다는 것이고 평신도설교가가 영국성공회의 오랜 전통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대한성공회의 평신도설교가로 시대를 인도하는 콜리지 같은 성도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콜리지에 대해 깊이 들어가 보고자 합니다.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 Samuel Taylor Coleridge (1772~1834)는 성공회의 평신도 설교가이면서 영국의 낭만파운동을 이끌었던 시인이자 비평가이입니다. 콜리지는 두 살 아래인 웰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4.7.-1850.4.23)와 창조적 공생을 하며 함께 「서정가요집 抒情歌謡集」을 1798년에 간행하여 낭만주의 문학운동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상상력의 정의로 유명한 「문학평전」은 낭만파 시론으로 1817년에 출판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시는 「늙은 선원의 노래 老水夫行 The Rime of the Ancient Mariner」 「크리스타벨 Christabel」 「쿠블라 칸 Kubla Khan」, 「낙담」 1802, 「참회」 1813, 「신탁의 꽃잎」 1817, 등이 있습니다. 로버트 사우디, 콜리지, 워즈워드 3인은 호수 근처에 살았다 하여 호반시인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콜리지STC의 삶은 이상을 향한 삶으로 몽상가적인 기질로 인해 쉬운 삶이 아니었습니다. 소규모 사회의 실험적인 공동체의 실패로 이상사회의 좌절이 주는 고통을 겪었고, 아편에 대한 중독과 워드워즈와의 이별로 인해 그는 고립감과 절망감으로 고통 받았으나 이 시기의 시는 더 가치를 발휘했습니다. 「낙담」은 1802년 작품으로 콜리지의 결혼 문제, 악몽, 질병, 아편 의존성 증가, 워즈워스와의 긴장, 그리고 그의 시적 힘에 대한 자신감 부족이 낙담의 시로 귀결됩니다. 콜리지는 인간존재와 전 우주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본질적인 창조적 원칙을 해명하려는데 관심을 둔 인생이었기에 힘들게 산 인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콜리지는 기본원칙의 원형으로 상상력을 보고 상상력은 인간의 직관적이고 비이성적 오성과 물질세계에 대한 사상을 조직하고 분별하는 능력을 상호조화시키는 수단으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정반대되는 것의 조화를 통해 이상과 개별적인 특수성을 결합시키려 하였습니다. 대단한 성공회적인 이 길을 세워 낸 콜리지인 것입니다. 모든 생명체들이 상호조화된 가운데 그들의 근원을 찬양하는 우주의 내면적 통일성을 깨닫게 되는 것을 제기한 콜리지인 것입니다. 최소한 악몽에서 깨어나 인간생활의 평범한 과정을 경이감과 자비심을 가지고 보게한 콜리지인 것입니다. 이런 결과는 혁명적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괴로움 과정을 겪었던 콜리지의 삶의 결과인 것입니다. 성공회 사제였던 존 콜리지 아버지의 신앙을 받아 성장하지만 유니테리언설교가로 하다가 1814년에 성공회로 돌아와 종교에 관한 주목할만한 저술을 했는데 「평신도 설교」 (1817), 「반성의 도움」 (1825) 및 「교회와 국가의 헌법」 (1830)입니다. 콜리지의 신학적 유산으로 본다면 경전의 지위, 타락의 교리, 칭의와 성화, 하나님의 인격과 무한성에 대한 토론입니다. 당시 성공회 신학의 주요 인물이었던 그의 저술은 여전히 현대 성공회 신학자들에 의해 정기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F. D. 모리스, F. J. A. Hort, F. W. Robertson, B. F. Westcott, John Oman 및 스코틀랜드의 콜리지라고 불렸던 Thomas Erskine 은 모두 콜리지의 영향을 받았고 미국의 애머슨과 소로우가 콜리지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콜리지가 61세 되던 해 1833년에 쓴 「묘비명」은 죽기 직전의 해에 쓴 시입니다. 아마 자신의 죽음 62세, 1834년을 예고한 시라는 생각이 드는 시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인이여 가시던 길을 잠시 멈추시오. 잔디 아래에 누워있는 시인에게 부드러운 가슴으로 읽어주시오. 그리고 콜리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오. 긴 세월 숨쉬는 것조차 힘들어하며 삶에서 죽음을 발견했고, 이제 죽음에서 다시 삶을 발견하는 그를! 평판을 추구했던 것을 용서해 주시고 찬미를 받으려 한 것에 자비를 주시기를 빕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그가 간청하고 그가 소망했습니다. 그대 또한 그러하기를.” 힘든 세월을 살다가 죽은 묘 앞의 묘비명에 이런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의 큰 기쁨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동작동의 국립묘지에 가서 묘비명만 노트에 써가며 하루 종일 죽음에 대해 사람들의 생각을 모았던 날이 기억납니다. 공군묘역의 묘비명들이 아름답게 다가왔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도 하늘과 가까이 지낸 공군이어서 하느님을 향한 열망이 땅과 바다에 있는 사람들보다도 더 컸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콜리지의 묘비명을 읽으면서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해 달라고 그리스도에게 부탁하는 콜리지의 신앙심’이 애뜻하게 다가옵니다. 귀한 친구와의 이별과 사랑하는 이와 함께 지내지 못한 지난간 사랑의 아픔이 사람과 죽음 사이에서 지낸 자신의 삶을 저만큼에서 보는 콜리지가 떠올려집니다. 시인 자신이 더 궁극적인 근원이신 하느님과의 관계로 더 올리지 못하는 신앙인의 절규로 이 시가 다가옵니다.
콜리지는 「요한계시록」에 근거한 자신의 묵시적 경향과 갈망을 드러내는 초기 시들에서 자유의 이상에의 헌신, 사악한 압제자들에 대한 분노와 순결하고 억압받는 이들에 대한 인간애, 인간 조건을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 등 당대의 이성적 요구에 대한 진지한 응답이었습니다. ‘혁명에 의한 묵시’보다는 ‘상상력에 의한 묵시’ 쪽으로 서서히 방향을 돌린 콜리지는 공적 세계와 소통하려는 생각을 포기하고, 대화적 양식의 무운시(無韻詩)를 통해 자연 속에서의 은거, 우정, 가정적 행복 등의 가치들을 찬미하게 됩니다. 운명적인 동무인 워즈워드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상상력을 가미해 인간성의 근본적 법칙을 찾으려 했고 안정적이었다면, 콜리지는 초자연적 사건속에서의 인간을 통해 악의 근원, 악의 경험, 창조적 상상력을 생생한 상상적 현실로 극화하는 비범한 시적 능력을 보여 주었고 신비하고 환상적인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정치적인 시 「프랑스―송가」, 후기의 걸작인 「낙담」등의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명상시가 있고 실험적인 시로도 유명합니다. 콜리지의 「꿈꾸는 사람 (The dreamer)」은 꿈과 현실과 연결시켜 현실을 이상화하려고 하는 콜리지의 비젼을 보게 합니다. “만약 당신이 잠들었다면, 만약 당신이 잠잘 때 꿈을 꾸었다면, 만약 당신이 꿈속에서 천국에 가서 이상하고 아름다운 꽃을 꺾었다면, 만약 당신이 잠에서 깨었을 때 당신 손에 그 꽃이 쥐어져 있다면, 아, 그러면 어떻게 될까?”여기서 콜리지는 더 나아가 이상세계에서 지속적이고자 몽환적 세계를 그리게 됩니다. 이것이 실제로 아편에 취한 시간에 이상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높은 자리까지 도달한 그곳에 대한 시상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의 걸작 「늙은 선원의 노래 (The rime of the ancient mariner)」와 「「쿠블라 칸 (Kubla Khan)」이 그러한 몽환적 세계를 그리면서 인간의 근원적인 삶인 천국을 갈망하는 시인의 낭만적인 꿈을 나타낸 것입니다.
꿈이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났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느님을 경험하며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는 꿈이 현실로 일어나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영으로 우리 마음 속에 쓰여진 것이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천국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만을 만족하게 하는 삶입니다. “여러분 자신들이 바로 우리 마음에 새겨져 있는 소개장이 아닙니까? 그것은 누구에게나 다 통하고 누구든지 읽을 수 있는 소개장입니다(2고린3:2).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시켜 보내신 소개장입니다. 이 소개장은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의 성령으로 쓴 것이며 석판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 속에 새겨진 것입니다(2고린3:3).” 그래서 콜리지는 자유를 향한 열망이 가득찬 삶이었습니다. 자유를 아는 콜리지 였으니까요. 그래서 시련중에서도 하느님을 향한 신앙의 시를 쓴 것입니다. “주님은 곧 성령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2고린3:17).” 콜리지가 “1822년에 레이크지역을 산책할 때 시골여성이 편지를 수신자부담요이기에 안받겠다고 하여 대신 1실링(약 40파운드, 6만원)을 내주교 편지를 열어보니 빈편지였습니다.” 멀리 간 아들의 잘있다는 안부편지로 빈편지인데 가난해서 편지를 받지 못하는 엄마의 심정과 아들의 애뜻한 마음이 들어 있는 이야기입니다. 신약성경은 2/3가 편지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입니다. 편지봉투 안의 글을 읽어야 하느님의 사랑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수신자부담의 편지가 아닙니다. 우편요금을 내지 않고 읽을 수 있는 하느님의 편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께 가 있으면 읽기가 아주 편한 편지입니다. 하느님은 더 나아가 내 자신이 하느님의 소개장이라 합니다. 세상이 나를 보고 하느님을 알게 한다는 소개장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알게 하는 하느님의 소개장입니다. 콜리지는 하느님을 알게 하는 소개장으로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바친 평신도 설교가로 성공회 신앙인이고 시인입니다.
「평신도 설교」의 1817년 작품에서 “함께 우리의 율법을 그분께 끌어당기지 말고, 그분의 율법을 우리에게 이끌어 주소서.” 하느님의 법이 우리에게 이끌어 달라는 요청을 콜리지의 신앙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잘못한 신앙심은 자신들의 법을 하느님께 드리미는 방식인데 반하여 하느님의 법이 우리에게 다가오도록 하느님의 힘이 작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성의 에너지가 자신 안의 조화를 만들고 진리와 일치 한다.” 이성의 작동이 진리와의 일치임을 분명히 하여 이성이 진리에 복무하는 길을 제시하는 콜리지의 식견입니다. 「교회와 국가의 헌법에 관하여」에서 “누가 가장 신성한 의무를 대체하는 것으로” 신성한 의무를 국가의 실현가능태로 본 콜리지입니다. 「욕망」에서 “참된 사랑이 타오르는 곳에서 욕망은 사랑의 순수한 불꽃이 된다. 그것은 우리 육신의 반사작용이기에 더 숭고한 곳으로부터 그 의미를 가져가지만 그 마음의 언어를 번역한다.” 참된 욕망이 순수한 불꽃이 된다는 확신은 신앙이 사랑의 삶으로의 확신으로 이어지는 콜리지입니다. 「심야에 내린 서리」에서 서머싯의 서리내린 밤 풍경을 묘사한 시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보고 들으리라. 그대의 신이 말씀하시는 저 영원한 언어의 사랑스러운 모습과 이해할 수 있는 소리를 신은 태고적부터 가르치고 있다. 모든 것에 그가 있고 그 안에 모든 것이 있음을.”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 있음을 알고 있는 콜리지는 프랑스혁명의 이상론이 폭력으로 파괴되는 것을 보고서 소규모사회를 만드려고 했고, 사우디 Southey 시인과 함께 이상적인 평등사회 Partisocracy 를 펜실베니아 서스쿼래 강변에 공동체를 건설하려고 했습니다. 이 실패로 이후 워드워즈를 만나 강력한 생명의식에 대한 믿음으로 좌절을 극복하게 됩니다. 콜리지의 신앙에 대한 이해를 하려면 이 글을 곰곰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한 충실함으로 정의되는 존재라면, 존재가 감각의 대상이 될 수 없기에 감각의 대상이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 안에 어떤 것이 있고 그것이 내게 행하라 한다면 자신의 행동의 최고규칙을 안과 밖으로 같아야 하고 그것이 모순없이 모든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존재의 법칙이 될 것입니다”(신앙에 관한 에세이에서). 신앙에 대한 이글이 대단히 성공회적인 신앙관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속과 겉이 같은 사람을 세우는 것이 성공회의 신앙입니다. 탐욕적인 세상은 인간의 겉과 속이 달라도 무방하다고 선전하지만 성공회는 속과 겉이 같아야 한다는 신앙적인 삶을 제기합니다.
1798년 워즈워드와 콜리지의 공동시집인 「서정가요집」의 첫머리에 실린 「늙은 선원의 노래 老水夫行 The Rime of the Ancient Mariner」는 죄인이 하느님을 향한 길을 7부로 노래한 것입니다. 혼인식장에 가는 젊은이를 붙잡고 늙은 선원이 자신의 배탄여정을 말하는 것으로 1부가 시작됩니다. 남극빙산에 갇힌 배가 나올 때 알바트로스(신천옹, 날개가 3m가 넘은 큰 새로 바람을 이용해 장시간 날고 바람이 없을 때에는 수명에서 휴식을 취한다)가 따라오는데 늙은 선원이 석궁으로 쏴 죽인다. 2부는 안개가 사라지자 새를 죽인 노수부에게 잘했다고 하다가, 바람이 멈추자 선원들이 분노하여 노수부에게 십자가 대신 노수부의 목에 알바트로스새를 건다. 3부는 유령선이 나타나 죽음의 신과 죽음 안의 생명이 주사위놀이로 선원들을 죽인다. 노수부만이 죽음 안의 생명이 죽음의 신을 이겨 절망 속에서 더 절망으로 산다. 4부는 혐오스럽게 본 바다의 물뱀을 보고 아름다움을 깨닫고 기도한다. 그 순간에 목에 걸린 새가 바다에 떨어져 저주가 풀린다. 5부는 노수부에게 저주가 풀리면서 편안한 잠에 빠지게 된다. 죽은 선원들이 일어나 배를 조종한다. 6부는 고향으로 돌아오며 항구서 부자와 은둔자를 만난다. 7부는 노수부는 은둔자에게 자신이 지은 죄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노수부는 자기가 겪은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마음이 자유로워진다. 그래서 심정고통이 일때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여 심적고통을 던다. 혼인식장에 가는 젊은이에게 노수부는 말한다. “사람과 새와 짐승 모두를 사랑하고, 크고 작은 모든 것을 사랑하라. 우리를 사랑하는 하느님이 그 모든 것을 만들었고 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 젊은이는 그 다음날 아침에 자신이 이전보다 더 슬프나, 한편으로는 더 현명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낀다.” 교회 Kirk에 사는 성직자Kirkman가 저녁기도Vesoers를 바칠 때가 신도들에게 가장 숭고함을 느끼게 합니다. 신도들과 이웃사람들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해가 질 무렵에 하느님께 바치는 회개의 저녁기도는 가장 처절함을 드러내 그 처절함을 하느님께 바치게 되는 성직자의 모습을 보게 되니까요. 그래서 각 교회마다 만도를 노래로 부르는 노래마다 다 다르면서 고요한 특징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밤 11시경에 대전도시의 종합병원 응급실 옆의 환자대기실에서 처절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한 사람이 의자에 바로 앉지 못하고 두 팔로 베개로 하여 자신의 얼굴을 두 팔안에 파묻혀 업드린 자세였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지친 자세로 보였습니다. 동시에 생명에 대해 자신이 아무 손을 쓸 수 없는 간절함이 묻어나는 자세로 보였습니다. 자신의 몸 전체를 하느님께 바치려는 모습이기에 얼굴은 보이지 않고 긴 머리카락과 기대어 엎드린 모습만이 보였습니다. 더 아플 수가 없다는 지경에 이른 처절함을 하느님께 바치는 젊어보이는 이 여성에게 하느님의 자비가 베풀어지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잠간이나마 늙은 선원처럼 간절하게 하느님을 힘이 이 여성에게 미치기를 작은 입술로 빌었습니다.
콜리지는 “목 주위의 알바트 로스”로 성공에 장애가 되는 죄책감의 무거운 짐의 관용구가 되었고, "물, 물, 마실 물방울"과 "슬프지만 현명한 사람"이라는 관용구를 제공했고, "그는 가장 잘 기도하고 크고 작은 모든 것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하는 하느님을 위하여. 그분은 모든 것을 만드시고 사랑하십니다." 고 신심이 두터운 시어를 만든 콜리지입니다. 자신의 신앙생활의 언어가 보편적인 언어가 된다는 것은 하느님 왕국의 언어를 누구나 사용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신앙의 생활화한 하느님의 제자된 콜리지의 삶을 보게 합니다. 제도화되고 박제화된 신앙언어의 반복에서 주는 지루함을 벗어나 한 개인이 하느님을 경험하는 성령체험의 언어가 신앙의 언어가 되어 보편언어로 작동될 때 신앙의 귀한 가치가 드러난다고 봅니다. 목에 걸린 알바토로스는 치명적인 죄로 인해 성공을 취한 인간상을 제기함으로 인하여 죄성을 폭로한 그러면서도 죄성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하는 콜리지는 대단한 사목적인 길을 걸은 것입니다.
* 콜리지의 영적인 멘토 존던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 Samuel Taylor Coleridge (1772~1834)는 성공회의 평신도 설교가로 존던 John Donne(1572~1631) 성공회 사제를 매우 존경했습니다. 콜리지보다도 200년 전에 태어난 존던사제에게서 콜리지 자신의 시의 방향과 삶의 방향을 잡으려고 한 것입니다. 존던은 「갑자기 발생하는 사태에 대한 기도 Devotions upon Emergent Occasions」라는 산문집에 명상 17에 나오는 시가 “나 홀로 섬인 사람은 없다 No Man Is an Island”입니다. 예상하지 않고 갑자기 들이미는 것이 재난이고 고통이고 아픔이고 우연입니다. 우리가 예상하는 필연도 실은 예상으로 오는 모습이지만 실은 예상밖으로 다가오는 일입니다. 예상 밖에 다가오는 일이 바로 갑자기 발생하는 사태들입니다. 예상 밖의 사태가 일어날 때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라는 그 질문을 가지고 존던의 그 유명한 글을 읽어야 제대로 그 글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존던의 이 글이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For Whom the Bell Tolls」 라는 소설 제목의 출처입니다. 시처럼 보이게 하려고 대충 연과 행을 나눴지만 원래가 산문이기 때문에 운율 같은 것은 전혀 없습니다. 콜리지는 아예 “존던의 시에 대하여 On Donne's Poetry”라는 짧은 시를 쓰기도 했습니다. 토마스 머튼 신부는 아예 영성에 대한 책을 쓰며 제목을 “인간은 섬이 아니다 No man is an island”라고 붙여 존던의 이 글을 인용한 것입니다. 명상 17은 “이제 다른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해 부드럽게 울리는 이 종소리는 내게 ‘너도 반드시 죽게 될 거야’ 라고 말해준다”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이 글을 쓸 때 존 던은 몸이 굉장히 아파서 죽을지도 모를 지경이었기 때문에 지금 다른 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 이게 혹시 다른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곧 죽을 자신 때문에 울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였다 합니다. 사실 존던이 살던 영국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교회의 종을 울렸습니다. 누가 죽었는지 확실하게 아는 방법은 교회에 가서 누군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누구든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전체의 일부이다.
만일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유럽의 땅은 그만큼 작아지며,
만일 갑(岬)이 그리 되어도 마찬가지며
만일 그대의 친구들이나 그대의 영지(領地)가 그리 되어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누구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 전체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를 알고자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해서 울리는 것이니!
누군가를 거치고 나에게 오는 말이 아니라 직접 내게 오는 말씀으로 다가오게 하는 존던의 글은 바로 직접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이 내게 오게 하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적인 생활을 하게 합니다. 저 사람이 아프면 내가 아픈거다라고 연결하는 존던의 글이 우리를 더 가깝게 하느님께 가라고 하시는 글로 다가옵니다. 죽은 자를 울리는 그 종소리가 바로 죽은 자인 나라는 것을 가리킨다는 놀라움이 앞섭니다. 죽은 자여 그 종소리로 깨어 일어나시오.
* 콜리지의 영적인 동무 웰리엄 워드워즈
콜리지(1772~1834)의 창조적인 공생의 삶을 살고 콜리지에게 힘이 되기도 했지만 아픔을 준 웰리엄 워드워즈 William Wordsworth(1770-1850)는 콜리지보다도 2살 연하였습니다. 매우 가까운 친구였다가 후에는 고통을 주는 친구가 된 관계입니다. 서로에게 많은 영향력을 선사한 관계입니다. 고통을 받은 시기에 콜리지는 귀한 글이 나왔습니다. 고통이 귀한 글이 나오게 하는 힘이 있기도 합니다. 워즈워드의 「My Heart Leaps Up 무지개」, 「수선화」 등이 있습니다. 콜리지와 함께 영국 낭만주의를 선도한 영국의 계관시인인 워드워즈입니다.
무지개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가슴은 뛰노라.
내 인생 시작되었을 때 그랬고
지금 어린이 돼서도 그러하며
늙어서도 그러하기를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으리.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내 살아가는 나날이 자연에 대한 경외로 이어질 수 있다면.
이 시는 무지개의 아름다움에 대한 설레임과 감탄을 노래하고 있지만, 사실은 무지개로 상징하는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이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표현합니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자라면서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을 느끼기 힘들어합니다. 나이들수록 자연에 더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은 경이로움에서 시작된다(Philosophy begins in wonder)”고 합니다. 강렬한 감정이 즉흥적으로 흘러 넘치는 것에서 시가 나오지만 평온한 가운데 시도 나옵니다. 자연에 대해 어린 시절에 느꼈던 경이로움을 나이 들어서도 간직하고, 여전히 자연을 보며 경이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워즈워드는 위대한 시인입니다.
초원의 빛
한때는 그리도 찬란한 빛이었건만 이제는 속절없이 사라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리. 오히려 강한 힘으로 살아남으리.
존재의 영원함을 티 없는 가슴으로 믿으리.
삶의 고통을 사색으로 어루만지고
죽음마저 꿰 뚫는 명철한 믿음이라는 세월의 선물로.
고통을 하느님의 말씀을 재해석하여 자신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에게 고통을 사색으로 어루만진다는 워드워즈의 글이 정겹게 다가옵니다. 고통을 먼저 사색으로 어루만지는 자세가 먼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나서 하느님께 맡겨 드리는 순서가 아닐까요. 사색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수용하기란 보통의 믿음을 지닌 사람에게는 실제로 어렵지요. 그래서 워드워즈는 이것을 안 사람인 듯 해요. 고통이 오면 그 고통을 사색으로 어루만져 주는 그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색으로 고통을 어루만지다가 어느 시점에 하느님의 빛이 비쳐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하느님의 빛으로 고통을 비칠 때입니다. 하느님이 주신 하느님의 빛으로 고통을 바라 볼 때가 바로 복된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다는 것, 인간의 행복은 이 한마디로 다한 것입니다(톨스토이).” 그러니 삶의 고통을 사색으로 어루만지십시오.
시간이 쌓여야 믿음이 단단해집니다. 시간 없이 믿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시간 안에 죽음이 있으니 믿음은 그 죽음 위에 잇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이 단단해야 죽음을 정밀하게 보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죽음을 바라본다면 죽음 이후까지도 볼 것입니다.
200년 전의 존던사제로부터 방향을 잡아낼 수 있었고 사우디시인과는 공동체사회를 세우려 실천하다가 좌절을 경험했고 워드워즈와 창조적 공생의 삶으로 근원적인 절대자에게로 향하고자 했던 콜리지의 삶이 매우 고통스럽고 아픈 삶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선배와 두명의 동무들이 있었던 콜리지는 그 관게로부터 하느님을 향한 신앙생활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게 성공회 신앙은 일상생활에서의 관게 속에서 살아내는 가운데 하느님을 향하는 데 있는 것이 성공회의 오랜 신앙전통인 것에 기쁩니다. 신앙으로 인간이해를 깊게 들어가는 콜리지의 인생을 다시금 나를 기도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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