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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7. 13. 오늘의 양식 : 성경에 대하여 ( 2 ) / 고영민 총장 <백석문화대>
표어 : 오직 예수. 재림 신앙. 땅끝 선교
삶의 터전에서 드리는 예배
1. 예배의 부름---------- 마음을 정돈하고 예배를 드리는 데 방해가 없도록 합시다. ------------
2. 찬양과 경배 ---------- 250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305 나 같은 죄인 살리신
512 천성길을 버리고 ----------------------------------------------
3. 신 앙 고 백 ---------- 사 도 신 경--------------------------------------------------------
4. 찬 송 ---------- 545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
5. 기 도 ---------- 주의 나라를 위하여
주의 동력자를 위하여
예배자를 위하여 ---------------------------------------------------
6. 하나님 말씀 ---------- 계 10 : 11
다시 예언하라 -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
7. 설 교 ---------- 성경에 대하여 ( 2 ) / 고영민 총장 <백석문화대>
(8) 왜 중세 가톨릭은 성경 번역자를 처형했나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으며,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었다(창 1:4, 12 등). ‘좋았다’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토브’는 ‘선하다, 아름답다, 사랑스럽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인간을 비롯한 온 우주만물을 선하면서도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창조하셨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본래의 창조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악하고 더럽고 추한 모습으로 삶을 이어가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악한 본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때일 것이다.
교회 역사에 의하면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는 자신들의 가르침에 어긋나거나 교리를 반대하는 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가혹하게 고문하거나 죽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성경을 번역한 자들인 경우에는 장대에 묶거나 장작 위에 올려놓고 불태워 죽였다. 위클리프(Wycliffe)의 경우 이미 매장되었던 뼈를 꺼내어 그의 저서들과 함께 불태워졌는가 하면, 틴데일(Tyndale)을 비롯하여 후스(Hus), 크랜머(Cranmer), 로저스(Rogers) 등도 차례로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면 왜 그들은 성경 번역자들을 가장 잔혹한 처형 방식으로 죽였던 것일까?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는 주장하기를, “성경은 천국 열쇠와 함께 자신들에게만 맡겨졌으며, 그것을 읽고 해석하는 것도 사제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였다. 일반 신도들은 라틴어로 된 성경을 읽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소유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오직 교회가 가르치고 신부가 해석하는 것만이 진리요 복음이었으며, 일반 신도는 그대로 믿고 따라야만 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거짓되고 형식적인 가톨릭주의에 과감히 맞서서 개혁의 깃발을 높이 쳐들었던 사람은 독일의 마르틴 루터였다. 그는 ‘오직 교회(Sola ecclesia)’가 아니라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고 외쳤으며, 자신이 직접 원문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Luther Bible). 이로 말미암아 그동안 교회 안에 갇혀 있으면서 사제들의 손에만 들려져 있었던 성경은 누구든지 읽고 배울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그 후 성경 말씀은 칼뱅에 의해 기독교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에서 체계적으로 요약, 정리되어 오늘날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기초가 되었다.
종교 개혁은 한마디로 “본래의 말씀으로 되돌아가자”는 환원 운동이었다. 다시 말하면 성경 말씀을 새롭게 해석하거나 교회 제도를 개편하자는 것이 아니라 중세 가톨릭교회 시대를 거치면서 잘못되게 덧칠해지고 왜곡된 것들을 바로잡고 원상으로 복귀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초대교회 이전 성경이 기록된 바로 그 원점으로 되돌아가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 본래의 생생한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대로 실천하자는 것이었다.
성경책 안쪽 표지에는 붉은 색이 칠해져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피를 상징할 수도 있지만 목숨 걸고 성경을 번역한 위대한 말씀의 영웅들이 흘린 핏자국을 의미할 수도 있다. 믿음의 선진들이 그토록 피 흘리며 쓰고 번역하고 소중히 지켰던 하나님의 말씀 성경! 과연 우리는 이 생명의 말씀을 내 삶 전체와 맞바꿀 수 있는가? 그것은 양자택일의 문제(question)다.
(9) 성경을 기록한 언어들
사람은 다른 동물과 달리 언어를 사용하여 서로 간의 대화를 나누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호모 사피엔스(지혜로운 인간)이다. 인류 언어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은 그 초창기에 소리나 표정, 몸짓 등으로 의사를 소통하다가 그것들이 점차 진화하여 오늘날의 언어 형태로 발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인류의 첫 조상 때부터 완벽하게 체계화된 언어가 사용되었음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아담은 동물들과 하와의 이름을 직접 지었으며(창 2:19∼32), 하나님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기까지 하였다(3:8∼13). 그들의 후손은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난 이후에도 각 지역으로 흩어져 살면서 하나의 공통된 언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교만과 패역의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다(11:7). 이때 지구상의 언어들은 노아의 세 아들의 계통을 따라 크게 세 갈래로 나누어졌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즉 셈의 후손은 아랍어와 아람어, 히브리어, 수리아어 등을 사용하게 되었고, 함의 후손들은 애굽어를 비롯한 아프리카어, 그리고 야벳의 후손들은 아리안어와 아르메니아어, 헬라어, 라틴어, 대부분의 유럽국가의 언어들을 사용하게 되었다.
성경은 세 가지 언어로 기록되었다.
구약성경은 히브리어와 아람어(스 4:8∼6:18과 7:12∼26, 단 2:4∼7:28, 렘 10:11과 창 31:47)로, 그리고 신약성경은 헬라어(희랍어)로 기록되었다. 아람어는 히브리어의 한 방언으로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사용하였다. 신약성경에서 인용된 아람어는 가나나인(막 3:18), 게바(요 1:42), 보아너게(막 3:17), 달리다굼(막 5:41), 엘리 엘리(엘로이 엘로이) 라마(레마) 사박다니(마 27:46, 막 15:34) 등이 있다.
히브리어는 우리말이나 영어와 달리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데, 몸 안쪽으로 끌어당기면서 힘을 주며 쓰기 때문에 이상적인 서법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히브리어는 문장 구조가 간결하고 표현 방식이 다양하기 때문에 감정을 드러내거나 시를 짓기에 매우 적합한 언어이다. 하나님의 위대성이나 대자연의 질서, 삶의 본질과 내면세계의 갈등, 인간의 최고 행복 등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히브리어는 최상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마음을 가다듬고 뜨거운 가슴과 열정으로 읽으려는 자세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한편 신약성경이 기록된 헬라어는 문법구조가 체계적이고 어법이 정확하면서도 관념적이기 때문에 교리나 신학을 논하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언어이다. 특히 알렉산더 대왕의 명령으로 여러 헬라 지역들의 방언들을 수집하여 그 장점을 살려 통합시킨 코이네 헬라어는 누구든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복음이 급속도로 전파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때로 성경 해석상의 문제가 생길 때마다 헬라어 원문의 의미를 찾게 되는 것은 그 언어가 지니고 있는 힘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강하게 암시해주고 있다.
성경에 사용되었던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지금 사어(死語)가 되고 말았지만 현재 이스라엘과 그리스에서는 변형된 형태로 여전히 통용되고 있다. 사실상 번역된 성경과 원문 성경의 차이는 번역본으로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나 나관중의 삼국지를 읽는 것에 비할 수 있다. 무릇 성경을 올바르게 체계적으로 연구하려면 반드시 성경 원어를 알아야만 한다. 이제 서둘러 책을 구입하여 알파벳부터 시작해보자!
(10) 성경은 어떻게 구분되었는가?
성경은 간결하면서도 명확하고 모든 지적인 요구들을 충족시켜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때로 모순처럼 보이고 의문이 제기되는 부분들은 성경 그 자체에 어떤 문제점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제한적인 지식을 가진 인간이 그 의미와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의문을 품어보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성경은 어떻게 배열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구약성경이 배열된 순서는 히브리어 성경과 70인역 성경(영어나 독어, 한글 성경도 포함)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히브리어 성경은 율법(토라, 창∼신), 예언서(네비임, 수∼말), 시가서(케투빔, 시∼대)로 되어 있다.
그러나70인역은 모세오경(창∼신), 역사서(수∼에), 시가서(욥∼아), 예언서(사∼말)로 되어 있다.
히브리어 성경은 정경으로 인정된 순서, 즉 모세오경(주전 5세기, 에스라 시대), 예언서(주전 2세기), 시가서(주후 90년께)를 따르고 있지만,
70인역은 이스라엘 시대, 즉 이스라엘의 과거(창∼에), 현재(욥∼아가, 미래(사∼말)를 순서적으로 배열하고 있다.
예수님 당시에는 시가서가 정경으로 확정되지 않았기(주후 90년께 얌니야 회의에서 확정됨) 때문에 성경을 언급할 때는 “율법과 선지자”(마 5:17, 7:12)라고 하셨다.
신약성경은 어느 정도 70인역의 순서에 맞추어 복음서(마∼요), 역사서(행), 서신서(롬∼유), 예언서(계)로 배열하고 있다. 특히 서신서는 바울 서신과 일반(공동) 서신으로 나눈 다음 바울 서신은 지역 이름(로마 고린도 등)이 있는 서신을 먼저 앞에 놓고 그 뒤에 사람 이름(디모데, 디도 등)이 있는 서신을 놓았으며, 장수가 많은 서신을 앞부분에 배열하였다.
둘째, 성경책의 제목은 어떻게 붙여졌는가 하는 것이다.
히브리어 성경의 제목은 원래 그 책의 첫 단어를 따서 붙였다. 예를 들면 창세기는 ‘뻬레쉬트’(태초에·1:1), 출애굽기는 ‘왜알레 쇄모트’(밖으로 나갔다·1:1), 레위기는 ‘와 이크라’(또 그가 불렀다·1:1) 등이다.
그러나70인역은 책의 내용을 따라 헬라어로 창세기는 ‘제네시스(Genesis)’, 출애굽기는 ‘엑소더스(Exodus)’, 레위기는 ‘레비티쿠스(Leviticus)’ 등으로 제목을 붙였다. 신약성경은 각기 ‘유앙겔리온’(복음서) ‘프락세이스 아포스톨론’(사도들의 활동) ‘에피스톨라이’(서신서) ‘아포칼룹시스’(계시록)로 구분하였다.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성경책의 배열은 연대순서나 책의 중요성에 따라 정해지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셋째, 성경의 장(章)과 절(節)은 누가 언제 구분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원래 옛 성경에는 장과 절의 구분이 없었다. 특히 헬라어 대문자 사본에는 글자까지도 띄어 쓰지 않고 계속 연이어 쓰였고, 바티칸 사본(4세기)이나 알렉산드리아 사본(5세기)에는 각 책이 여러 개로 구분돼 있다.
오늘날의 장과 절로 구분한 사람은 켄터베리 주교 스테판 랑톤이었다(1204∼1205년). 그 후, 솔로몬 벤 이스마엘은 최초로 히브리어 성경의 일부 필사본에 랑톤의 장 표시를 적어 넣었으며(1330년), 로버트 스테파누스는 제네바 성경에 장절을 표시하였다(1551년).
누구든지 성경을 읽을 수는 있지만, 그 내용을 다 이해할 수는 없다. “성경은 단순한 책이 아니다. 반대하는 모든 것을 정복하는 능력을 가진 생명체이다.”(나폴레옹)
(11) 성경엔 오류가 있는가?
성경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신학사상으로 표현될 수 있다. 각기 주장하는 바들을 요약해 보면, ‘성경은 사람의 글이다’(현대자유주의), ‘성경과 교주의 말은 똑같다’(이단사이비종교),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신정통주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보수정통주의) 등이 될 수 있다.
성경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사람이 그것을 기록하고 번역하는 과정에서는 종종 오해와 착각을 일으키는 문제들이 생겨날 수 있다. 역사상 최초로 인쇄되었던 구텐베르크 성경(Gutenberg Bibel)이 출간(1456년)되기 이전 모든 성경은 사람의 손에 의해 필사되거나 번역되었다.
성경을 옮겨 쓰다 보면 어떤 경우에는 착시현상에 의해 몇몇 단어나 문장을 빠뜨리거나(Haplography) 혹은 중복할(Dittography) 수 있다(삼상 9:16, 겔 40:9). 그런가 하면 단어의 순서가 뒤바뀜으로써 ‘에돔 사람’이 ‘아모리 사람’(삿 1:36)이 되는가 하면 유사 음이나 유사 문자가 혼동되어 ‘목초지’가 ‘큰 바위’(삼상 6:18), ‘나의 주’가 ‘사람’(17:32)이 되기도 한다.
원래 히브리어에는 자음만 있었으며 모음은 정확한 발음을 위해 후대(주후 8세기쯤)에 맛소라 학파에 의해 붙여졌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율법의 일점일획’(마 5:18)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모음 부호를 의미한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에서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임을 나타내고 있다.
히브리어 문자들에는 획의 모양을 세밀하게 보지 않으면 혼동하기 쉬운 것들이 있으며(아람과 에돔, 삼하 8:13), 모음 부호를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 의미가 정반대가 되는 경우도 있다(‘눈을 감았던 자’가 ‘눈을 뜬 자’로도 해석될 수 있다, 민 24:3).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는 필사나 사본 문제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은 없다. 그 이유는 성경을 옮겨 쓰고 보존하는 임무를 맡은 서기관들이 자신들의 업무를 철저히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혹 어떤 오류가 발생했을 때에는 즉시 그 사본들을 다 모아 불태워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약 성경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원래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성경 기자들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들려주고 참된 복음이 어떤 것인가를 전해줄 목적으로 복음서와 서신들을 기록하였다. 이러한 책들은 일일이 손으로 필사되어 예배나 회람용으로 전해졌는데, 이때 그 내용들을 옮겨 쓴 사람들은 서기관처럼 전문 필사가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연히 사본상에 많은 오류와 차이점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러한 사본상의 문제점들이 성경의 기본적인 진리나 핵심적인 내용들을 수정하거나 손상시키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성경에서 “한 획이 빠지는 것보다 하늘과 땅이 사라지는 것이 오히려 더 쉬울 것이기”(눅 16:17, 사역) 때문이다.
루이스 월리스(L Wallace)는 철저한 무신론자로서 기독교를 악의적으로 공격하였다. 그는 기독교를 반박할 자료들을 얻기 위해 성경을 읽다가 오히려 눈물로 회개하고 한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그것이 저 유명한 벤허(Ben Hur)다. 오늘도 성경은 수많은 기적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옮긴이 의견
성경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한 하나님 자신의 창조적 산물이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일점일획이라도 바꿔서는 안 된다는 성경상의 기록을 근거로, 성경의 모든 내용에는 오류가 전혀 없다(마5:18). 그러나 성경 무오성은 성경 사본이나 번역본이 오류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12) 성경 번역에 어떤 오류가 있는가
각 나라와 민족마다 그들만의 독특한 언어와 고유의 문자가 있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거나 발음할 때는 종족이나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중 미국군은 중국인과 일본인을 구별하기 위해 Liewelyn(남자이름)이나 lollipop(막대사탕) 등을 발음시켰다. 그 이유는 일본인은 L 발음을, 중국인은 R 발음을 잘 못하기 때문이었다. 성경에도 그와 비슷한 일화가 있다.
길르앗과 에브라임 사람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들을 구별하기 위해 ‘십볼렛’(곡식의 눈)이라는 단어를 발음하게 한 적이 있었다. 길르앗 사람들은 제대로 발음했지만 히브리 방언을 사용했던 에브라임 사람들은 강한 악센트를 사용하여 ‘씹볼렛’이라고 발음하였다. 결국 도망치던 4만2000명의 에브라임 사람들은 입다의 군사들에 의해 무참히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삿 12:6).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 예수님의 재판 광경을 쳐다보면서 불을 쬐고 있었다. 한 여종이 다가와서 “당신도 저 나사렛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닌 사람이지요?”(막 14:67) 하고 물었다. 베드로는 강하게 부인했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의 ‘말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제자라고 몰아세웠다(마 25:73). 왜냐하면 베드로는 당시 회당이나 예루살렘 지역에서 사용했던 세련된 히브리어를 사용하지 않고, 교육수준이 낮은 서민층에서 통용되던 투박한 아람 방언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문제들이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도 일어난 적이 있다. 제네바(Geneva) 성경(1560년)은 창세기 3장 7절(‘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에서 ‘치마’를 ‘반바지’로 번역했으므로 반바지 성경으로 불렸다.
주교(bishop) 성경(1568년판)은 예레미야 8장 22절(‘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에서 ‘유향’을 당밀(糖蜜·treacle)로 잘못 번역함으로써 당밀 성경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두웨이 레임즈(Douay Rheins) 성경(1610년)은 예레미야 9장 22절의 ‘유향’을 송진 덩어리(Resin)로 번역해서 송진 성경으로 불렸고, 흠정역(KJV·1702년)은 시편 119편 161절(방백들이 무고히…)에서 ‘방백들(princes)’을 ‘인쇄공들(printers)’이라고 잘못 번역해 인쇄공들 성경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주교 성경(1632판)은 십계명 중 일곱 번째 계명을 인쇄하면서 not를 빠뜨려서 ‘간음할 지니라(Do adultery)’로 번역함으로써 ‘사악한 성경’이라는 악명을 가지고 있다.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일점일획이나 한 단어, 한 문장도 결코 소홀히 하거나 빠뜨려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7)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뱀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3:4∼5)라고 말했다. 즉 완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생략하거나 고쳐서 첫 조상을 교묘히 유혹했던 것이다. 성령과 그리스도께서는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계 22:18)라고 말씀하셨다.
아무리 작은 점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를 옮기거나 바꾸면 전혀 다른 뜻이 될 수 있다. ‘번역’은 ‘반역’이 되고 ‘너’는 ‘나’, ‘님’은 ‘남’이 된다. 만일 예수님께서 “자신을 팔 자”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가룟 유다가 “나?” 대신 “나!”라고 답했었더라면. 말 한마디는 천국과 지옥을 판가름한다.
8. 기 도 ---------- 받은 은혜와 귀한 사명을 통하여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자가 되기 위하여 ------------------------------
9. 찬 송 ---------- 245 저 좋은 낙원 이르니 ------------------------------------------
10. 폐 회 ---------- 주기도문 ----------------------------------------------------------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철길은 왜 하나가 아니고 둘인가?
길은 혼자서 떠나는게 아니라는 뜻 이랍니다.
멀고 험한 길일수록 둘이서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구요.
사랑을 한다는 것은 둘이 만나 행복하게 하나가 되는 것이지만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둘 사이에 알맞은 거리가 필요 해서 라고도 합니다.
아름다운 사랑을 위하여 건강하게 행운이 가득한 주일 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잠 13:9).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