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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삶을 위한 질문 (민13:25-33) 이 시간에 “성공적인 삶을 위한 질문”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이 세상에 좋은 학습법이 많이 나와 있지만 가장 좋은 법은 문답식 학습법이라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 교리들이 문답식으로 가르쳐진 것도 선조들의 큰 지혜입니다. 그것은 학습자로 하여금 깊이 생각하게 만들어 예습과 복습이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태어나 가장 많은 것을 배우는 때가 5세 안팎의 유치기라고 하는 것도 역시 그 때 아이들이 가장 질문을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시사저널에서 2006년도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이 누군지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전 mbc 아나운서였던 현 성신여대 손석희 교수가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한 말이 대단히 의미심장합니다. “제가 한 것은 질문밖엔 없습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질문을 통해서 국민들의 시선을 집중시켰고 그 결과 최고의 영향력 있는 언론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늘 질문해야 합니다. 좋은 질문을 많이 하는 성도는 잠시 동안은 방황하지만 결국은 더 견고한 믿음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날마다 자신에게 질문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날마다 해야 할 질문은 무엇일까요? 1.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사람이 무엇을 보느냐 하는 것은 그 인생을 좌우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관점이라고 합니다.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본문의 이스라엘의 정탐꾼들도 두 종류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열 명은 부정적인 관점이었고 두 명은 긍정적인 관점이었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들은 부정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서 보니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를 만큼 잘 살뿐 아니라 체구도 거대하고 힘도 세고 용맹스럽고 성벽도 크고 높은 것만 보였습니다. 그러나 두 명의 정탐꾼들은 믿음의 관점을 가졌기 때문에 동일한 사실이지만 하나님이 예비하신 아름다운 것으로만 보였고 그러므로 속히 가서 그것을 취하자고 하였습니다. 즉 열 명은 육신의 눈으로만 본 것이고 두 사람은 신령한 눈으로 본 것입니다. 그 결과 부정적인 보고를 사람들과 백성들은 광야에서 다 죽었고 믿음 가진 두 사람만이 가나안에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 보아야지 잘 못 보면 실패한다는 말씀입니다. 남편도 선원이 되어 배를 타다 죽고 큰 아들도 역시 선원이 되어 바다에서 죽은 어느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막내만큼은 절대 선원으로 만들지 않으려고 멀리 이사 와서 사는데 막내마저 선원이 되겠다고 합니다. 목사는 그런 일이 왜 있는가 살펴보기 위해서 심방을 갔습니다. 목사가 그 가정에 심방 가서 보니 그 집에는 넓은 바다에서 파도와 싸우며 나아가는 멋진 배와 선원의 그림이 붙어 있었습니다. 누구라도 그 그림을 보면 바다의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을만큼 매혹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저 그림을 당장 치워 버리십시오.” 그런데 그 그림을 치워버리자 작은 아들의 선원이 되겠다는 생각도 사라지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가 하면 18세기 초 영국에 윌리엄 캐리라는 행상이 있었습니다. 소달구지에 물건을 싣고 다니며 기회 있는 대로 주머니에서 세계지도를 꺼내 보며 "나는 먼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그것이 나의 평생소원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 혹은 엉뚱한 공상가라고 빈정거렸습니다. 그러나 캐리는 그 후 인도에 갔고 후세사람들은 그를 현대선교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보느냐? 하나님을 보느냐? 사람을 보느냐? 되는 것을 보느냐? 안 되는 것을 보느냐? 희망을 보느냐? 절망을 보느냐? 보는 것이 우리의 삶을 정하고 목표를 정하고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창13:14-15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하셨습니다. 2. 나는 무엇을 듣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무슨 말을 듣고 삽니까? 성경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적용하면 세상 말을 들으면 세상 사람이 되고 만다는 말씀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귀가 있어 듣지만 구별해서 잘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의 말을 들었습니까? 믿음의 말을 하는 여호수아와 갈렙보다 불신의 말을 하는 열 명의 말을 더 들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불행한 길을 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듣는가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말을 들으면 믿음의 사람이 되지만 불신의 말을 들으면 불신의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두 가지 소리가 다 들려옵니다. 그러나 가려들어야지 아무소리나 다 들어서는 안 됩니다. 불신의 말, 부정적인 말, 악평하는 말, 원망의 말은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대신 믿음의 말, 긍정적인 말, 칭찬의 말, 감사의 말, 은혜로운 말은 귀 기울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도 마귀가 시험하는 소리는 말씀으로 깨끗이 물리치셨습니다. 로마로 가는 죄수 호송선에 바울이 탔습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생명에도 타격과 손해가 있으리라. 그러나 백부장은 하나님의 종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들었습니다. 그 결과 유라굴로라는 거대한 광풍을 만나 2주간이나 사경을 헤매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귀는 아주 하나님의 말씀에 고정시켜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어느 시골에 사생아로 태어난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소년의 아버지가 누구일까 하며 수군거렸습니다. 가까이 지내는 친구도 없었습니다. 소년은 학교에서도 따돌림을 당해 너무 외롭고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그 소년이 교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교회에서도 사람들이 자기를 사생아라고 할까봐 숨어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의 어깨를 잡으며 "넌 누구의 아들이지?" 하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목사님의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처음 부임하신 목사님의 질문이기에 이제는 꼼짝없이 탄로 나게 되었구나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아 그렇지, 하나님 아들이지, 하나님 아버지 닮았어.” 라고 어께를 두드려 주었습니다. 이 말에 소년은 변화되었고 그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하여 미국 테네시주에서 주지사를 두 번이나 했고 사회와 교회에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소년의 이름은 벤 후퍼, 그는 사생아라는 소리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붙잡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말을 듣고 있습니까? 항상 진리만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3.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열 명의 정탐꾼의 말만 들은 이스라엘 백성은 우왕좌왕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목적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로 나온 목적은 오직 하나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중간에서 그 목표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소리가 바로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소리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나 교회 안 나가, 나 예수 안 믿어’ 이런 소리입니다. 그런 말은 해서는 안 될 소리입니다. 이 소리는 지옥 가는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자꾸 하면 습관 되요. 자꾸 하면 유행 되요. 그러면 나도 죽고 남도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인생의 목표가 있습니까? 목적지가 뚜렷하고 나아가는 분명한 방향이 있습니까? 아직도 그리스도인 중에 자신이 어디서 와서 무엇을 위해 살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저 되는대로 방향도 없이 목표도 없이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시대의 조류에 따라 사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저 천국을 향해 나가는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가는 사람입니다. 시1:1-2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한 것처럼 진리의 길 바른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아담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처럼 우리들도 자신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보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듣는가? 그리고 나는 지금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은 우리 인생의 운명을 좌우할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로 가는 가장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복 받는 계산 방법
(민수기 13:25-33)
설교 : 문성욱 목사
세상을 살아가면서 계산을 잘하느냐 못하느냐, 판단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서 삶의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미국의 최북단에 위치는 알래스카주는 원래는 러시아 땅이었는데 재정이 바닥난 러시아는 불모지로 보이는 알래스카를 관리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아 미국에 제안한 끝에 미국의 스워드 국무장관은 1867년 알래스카를 총 720만 달러에 구입했습니다. 그러나 이 거래가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러시아는 후회하고 미국은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알래스카는 미국으로 가는 항공기의 중간 착륙지점으로 활용되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뿐 아니라, 미국 석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곳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또 수많은 산림과 천연가스, 석탄, 금, 등의 지하자원과 연어 등을 비롯한 수산자원을 통해 막대한 수입을 가져다주는 보물단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개인이나 가정이나 회사나 국가나, 계산을 잘못해서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있으나마나한 것이라면 별로 상관이 없지만, 개인의 일생을 좌우하는 일이거나,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경우나,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계산을 잘 해야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예수님께서도 ‘계산’을 잘 해야 할 것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가 망대를 건축할 때, 가진 것이 준공할 때까지 충분한지 비용을 계산하지 않겠는가?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찌니라.”(눅14:28,31,32)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무대포식 삶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잘 계획하고 그에 따라, 열심히 노력하는 삶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되는대로 살아가지 말고 잘 말고 잘 계산하며 살아갈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계산방법은 세상의 계산방법과 다릅니다. 세상적인 계산 방법은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하지만 하늘나라 계산 방법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합니다. 세상적인 계산 방법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유나 재능이나 경험 등을 더하는 방식입니다만, 하늘나라 계산 방법은 하나님을 더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조차, 하늘나라 계산 방법보다 세상적인 계산 방법을 따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역사를 염두에 두지 않거나, 하나님의 능력을 계산에 넣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계획을 세울 때, 하나님의 역사를 여러분의 계획 속에 넣습니까? 여러분이 어떤 것을 결정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여러분의 결정 속에 넣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특별히 ‘복 받는 계산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가나안 땅의 정복에 앞서 12명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이들은 40일간 가나안 땅을 돌아보고 포도 한 송이가 달린 가지를 베어 두 사람이 막대기에 꿰어 가져왔습니다. 40일간의 정탐을 마친 12명의 정탐꾼들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포도송이를 보여주며 가나안 땅은 살기 좋은 땅이라는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28-29절에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주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주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주하더이다.” 여기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단어는 접속사 ‘그러나’입니다. 이 접속사는 불신앙의 접속사입니다. 망하게 하는 접속사입니다. 그런데 이 ‘그러나’라는 접속사 뒤에 ‘보았다’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살기 좋은 땅이라는 것은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 땅의 성은 너무나 크고 견고하고 거기에는 거인의 후손인 아낙 자손이 살고 있어서 메뚜기 같은 우리는 올라가서 그들을 절대로 이기지 못한다고 보고하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백성들은 안심시키며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니 두려워하지 말고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고 보고하였습니다.
12명은 똑같은 사명을 가지고, 똑같은 행동을 하면서, 똑같은 기간 동안, 똑같은 산을 보았고, 똑같은 사람들을 보았고, 똑같은 장소를 보았고, 똑같은 과일을 보았고, 똑같은 땅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똑같이 본다 할지라도 어떤 눈으로 보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별 볼일 없지만 영적인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눈으로만 보지 말고, 믿음의 눈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현재만 보지 말고, 영광스럽게 펼쳐질 미래를 보시기 바랍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이 40일 동안 잘못 본 것이 아닙니다. 정확히 보았습니다. 견고한 성들과 몸집이 큰 아낙 자손들을 초라한 자기 백성들의 모습만을 보았습니다.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려도, 아무리 계산을 하고 또 계산을 해도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계산은 매우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계산에서 빠뜨린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빠뜨렸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빼먹고 계산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다른 10명과는 달리, 하나님을 그들의 계산에 포함시켰습니다. 두 사람은 그 동안 인도해주신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까지 인도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분명히 이루어 주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의 능력을 그들의 계산에 넣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무엇인가를 계획할 때, 10명의 정탐꾼들처럼 하나님의 능력은 배제한 채, 계획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포함하여 계산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벳세다 광야에 모인 오천명의 무리를 보시고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때 빌립은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라고 정확히 계산된 대답을 했지만 그의 계산 속에 예수님의 능력과 예수님의 역사를 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라고 주님께 대답했습니다.
비록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는 5,000명을 먹일 수 없었지만, 안드레는 그 적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다가 예수님의 능력을 넣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안드레의 계산대로, 이 작은 오병이어로 남자만 5,000명을 먹이고, 12바구니나 거두는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오병이어는 예수님을 계산에 넣었던 안드레를 통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예수님의 능력을 빼놓은 빌립의 계산방법만을 따랐다면, 결코 오병이어의 기적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 보면,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똑같이 예수님을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안드레처럼 예수님을 계산에 넣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는가 하면, 빌립처럼 예수님을 계산에 넣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똑같은 교회처럼 보이지만, 주님을 계산에 넣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주님을 계산에 넣지 않는 교회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15년 만에 이렇게 놀라운 부흥과 성장이 있기까지는 조건이나 환경이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전진했더니 정말 우리의 믿음대로 놀라운 기적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새 성전을 건축하고, 노인 병원을 짓고, 학교를 세워서 후학을 양육하는 꿈을 갖고 기도하니까 너무 큰 망상을 하는 것 아니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우리는 인간의 계산과 더불어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역하심을 계산에 넣어서 기도하고 지금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업을 할 때나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날 때, 주님을 생각하시고 주님의 능력을 기억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능력 있는 사람을 부르기 전에, 돈을 가지고 일을 시작하기 전에,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계산속에 넣으시기 바랍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가정이, 우리 교회가 주님의 크고 놀라운 역사를 계산속에 넣는다면, 그 역사가 우리 속에 실제로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일본의 뇌성마비 시인 ‘미즈노 겐조’는 입과 눈알만 움직일 수 있고, 온몸을 꼼짝할 수 없는 불구자였습니다. 그가 눈짓으로 혹은 입술로 ‘아이우에오’를 짚어가며 쓴 시집이 있습니다. 그 시집 이름이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입니다. 그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사랑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은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꾸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십자가는 -(마이너스)가 아니라 +(플러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우리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함께 하심을,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계산에 넣고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한다면, 하나님께는 우리 앞에 가로막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복 받는 계산을 하는 방법을 배우시고 익히셔서 눈에 보이는 것만을 계산하는 10명의 정탐꾼이 아니라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계산에 넣었던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복 받는 계산을 함으로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조용기목사 / 거인과 메뚜기 (민 13:30-33)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거인과 메뚜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광야를 지나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의 변경까지 왔습니다. 그 곳 가데스
바네아에서 12명의 족장을 선택하여 가나안 땅을 40일 동안 정탐하고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때 그 땅을 정탐하고 돌아오는 12명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켜놓고는 모두 다 그 땅을 악평하여 보고했습니다. 민수기 13장 30절로 33절에 보면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그들의 말 중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그들 자신을 가나안 땅의 백성에 비교해 볼 때에 메뚜기 같다고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또한 강조해서 원수들이 보았을 때도 그렇게 보았을 것이라고 보고를 했습니다. 자기 자신들을 메뚜기로 본 저자와 백성은 거인들이 버티고 있는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없을 뿐더러 지레 겁을 먹고 애굽으로 도망가려고 한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사람을 사용하셔서 가나안 땅을 점령케 하실 수 없을 뿐 아니라 또한 그러한 사람들에게 복을 내려 주실 수는 더더욱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 성도들도 자기 자신을 메뚜기로 보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성공이나 축복이 있을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적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그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는가는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메뚜기로 보는 사람이 어떻게 환경에 있는 거인인 적을 정복하고 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첫째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옛날 육체의 사람으로 보아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옛날 육체의 사람은 이 세상에 원수 마귀와 모든 우리 대적들 거인에 비교하면 메뚜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영적이요, 거인으로 지음을 받았지 메뚜기로 지음을 받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사람은 물질로 지음 받은 것이 아니라, 영으로 지음을 받았고 영은 거인입니다. 육체가 메뚜기지 영은 메뚜기가 아닙니다. 영이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을 동안에 인간은 세상의 지배자였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로 28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
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거인이요, 땅과 바다와 만물을 다스리는 지배자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어떻게 메뚜기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타락했을 때 영이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지배자적인 주권을 다 잃어버리고 순식간에 인간은 노예 생활로 돌아간 메뚜기가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짐으로 그들의 생애 속에 불안과 공포가 점령하고 불안과 공포의 노예가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땅은 저주를 받아서 수고롭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만 먹고살며 수고로움과 고생이 그들 삶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육체적으로 병들고 연약해지고 노쇠해지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러한 사망의 노예였습니다. 삶의 불안과 공포, 삶의 수고와 고생, 이 모든 것이 인간 생활에 거인으로 달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거기에 견주어보면 자기 스스로는 말할 수 없이 비참한 메뚜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그러므로 거인이 변하여 메뚜기가 되었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무능 무기력한 인간으로 보고 있을 때에 인간은 절대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날 모든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의 거인들을 보고 자기들이 메뚜기라고 생각한 것처럼 오늘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가기 마음속에 마귀나 질병이나 저주나 고통이나 생활고의 메뚜기로 자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들은 원래부터 하나님께서 메뚜기 같은 비참한 인간으로 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직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타락한 연고로 말미암아 영이 육체가 되어 버림으로 인간은 메뚜기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생각하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우리들은 또다시 영이 살아남으로 거인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5장 16절로 17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러므로 이전 것인 우리 타락한 메뚜기 같은 인간은 지나갔습니다. 이전의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십시오. 타락한 메뚜기와 같은 무능력한 인간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와서 사십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너희는 저를 이겼나니 이는 너의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다고 말한 것입니다. 세상에 옛날 거인으로 다가와서 우리를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마귀나 죄, 버림받은 심정, 질병과 슬픔, 고통, 저주와 가난, 죽음.. 이와 같은 거인들이 모두 다 이제는 우리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합니다. 왜? 우리가 육체로 있을 때 그것들이 우리를 지배했지만 이제는 육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된 바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으로 다시 부활한 인생들은 거인으로 부활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그 속에 들어와 계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고 천지와 만물을 다스리는 예수께서 그 속에 들어와 있고 그리스도와 함께 그 인생을 사는 자는 이제 메뚜기가 아니고 거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 5장 17절에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노예가 아니라 왕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메뚜기가 아니라 거인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운명의 노예가 아니라 운명의 지배자인 것입니다. 환경의 종이 아니라 환경을 다스리는 왕으로서 여러분과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용서와 의 안에서 왕 노릇 하는 거인들이 된 것입니다. 화해와 은혜로 성령 충만한 거인들
이 된 것입니다. 기쁨과 치료로 생명이 활기찬 거인들이 된것입니다. 저주에서 해방되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거인들이 된 것입니다. 천국과 영생을 얻은 거인들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메뚜기로 보는 사람은 이제는 비참한 존재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바로 입구인 가데스바네아까지 왔는데 그곳에서 일단 하나님을 의지하고 들어가기만 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다 점령할 수 있는데 그만 자기 자신을 메뚜기로 보았습니다. 가나안 땅의 원수들은 거인으로 보고 자기 자신을 메뚜기로 보았습니다. 자기 자신을 메뚜기로 본 이상 좌절감을 가지지 아니할 수 없으며 절망하지 아니할 수 없으며 뒤로 물러가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메뚜기가 어떻게 거인을 정복합니까? 그래서 그들은 모두 다 뒤로 물러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 우리들도 한 가지인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어떠한 존재로 보는 가? 이것은 여러분 우리의 운명과 미래를 좌우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우리가 메뚜기로 보고 있는 이상은 우리는 '나는 못한다, 나는 안된다, 나는 할 수 없다.' 뒤로 물러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옛 사람이 죽고 신령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서 영적인 존재가 되고 다스리는 자가 되고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심으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우리는 거인이 된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운명과 환경을 보고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때문에 십자가를 통하여 내가 하나의 종교를 얻은 것이 아니라 얼마나 크나큰 변화가 나의 속에 다가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절실히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변화된 것을 알지 못하면 이 사람은 항상 종교를 가진 메뚜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점령하지 못합니다.
세번째로,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않는다고 성경이 말한 것을 우리가 깊이 새겨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모든 사람이 타락한 육체지만 이제 예수 믿고 난 이후로는 아무 사람도 육체로 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육체가 아닙니다. 저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영이 죽었기 때문에 그는 육체인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라서 살며 육체로 살다가 육체로 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육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거듭나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신령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신령한 존재는 언제나 지배자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신령한 존재로 있을 때는 모든 것을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육체가 되자 신령한 존재로서 살 때 다스리던 모든 권한을 빼앗겨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그러므로 절대로 우리 자신을 육체대로 알아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에 작정해야 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죄악의 노예이다. 죄를 이길 수가 없다. 죄가 오면 별 도리가 있느냐! 그러므로 죄를 짓지, 마음으로 원이로되 육체가 약하도다. 그것은 메뚜기 사상입니다. 거인의 사상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을 얻었습니다. 이러므로 죄가 오면 예수 이름으로 우리가 대적하면 죄가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을 처 버리고 말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이긴 거인이지 죄에 정복당한 메뚜기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속에 거인 사상으로 꽉 들어차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이 세상에 경쟁이 심하고 아무리 고통스럽고 경제적으로 환경 여건이 나빠서 버림받은 심령이 다가와도 우리는 버림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같이 계시고 성령이 우리 속에 함께 계시며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로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버림받은 메뚜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메뚜기 사상입니다. 우리는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버림받은 존재가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슬프고 병든 존재가 아닙니다. 나는 기쁨이란 없고 행복하지 않다. 나는 언제나 슬프고 심신이 병들고 처참한 지경에 있다. 이렇게 메뚜기 사상을 가지고 있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메뚜기들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거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슬픔에서 해방된 사람이며 예수께서 우리 연약하신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셨으므로 우리는 병에 해방된 사람인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기쁨이요, 그리스도가 나의 충만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건강인 것을 알고 이것을 믿고 진행해 나갈 줄 알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저주받고 낭패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생존 경쟁을 하는 동안에 시험에 들 수도 있고 어려움에도 처할 수가 있습니다. 하는 일이 잘 안 되기도 하고 부도가 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인생 종말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두려워서 물러가면 그것은 메뚜기 사상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원수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보다 더 위대한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예수님이 우리 속에 와서 계시고 성령이 우리를 도와주시고 예수께서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라 이 축복 속에서 믿음으로 나아가면 운명과 환경은 또 정복당하고 변화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의 현실적인 눈앞에서 무슨 부정적인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당장 그것을 시인하고 받아들이고 낙심하고 뒤로 물러가서는 안됩니다. 눈을 들어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는 메뚜기가 아닌 거인으로서 다가올 모든 원수를 이기고 나아갈 수 있다는 신념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죽음의 절망을 처한 인생도 죽음을 바라보고 떨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죽음 저 건너편에 주께서 우리를 위해
서 예비한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이 있는 것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환영하시고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죽음의 절망에 허덕이며 죽음을 바라보고 그를 시인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부정적인 것을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들으면 반드시 낭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바로 우리가 메뚜기에서 거인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메뚜기 사상에서 거인의 사상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러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바로 메뚜기 사상 때문인 것입니다. 그 메뚜기 사상은 12 정탐꾼 중에 10명만 가진 것이 아니라 그 말을 들은 모든 백성들이 모두 다 거인 앞에서 메뚜기가 되어서 뒤로 물러가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메뚜기 사상은 바로 버림받은 사상이요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를 받는 사상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옛사람은 죽고 장사 지낸 바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기 자신을 항상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인생에서 메뚜기 시대는 지나갔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예전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라 새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그러므로 새로운 사상, 거인의 사상으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넉넉히 이기는 거인의 사상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도 보라 새것이 되었다. 새것이 되었음으로 새것으로 생각하고 새것으로 말하고 새것으로 행동해야 됩니다. 왜 낡은 것으로 생각하고 낡은 것으로 말하고 낡은 것으로 행동해야 되는 것입니까? 새것으로 생각하고 새 말을 하고 새 노래를 하고 새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가 하나님께 찬미해야 될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인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늘 내 영혼아 야웨를 찬미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미하라 내 영혼아 야웨를 찬미하고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죄를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가 같이 계심으로 나는 이 삼중 축복을 항상 누리는 독수리와 같은 사람이다. 거인이다. 하나님의 은택이 늘 나와 같이 계시고, 죄의 용서함과 치료와 축복이 나와 늘 생활에 같이 계셔서 나는 독수리 같은 사람이지 메뚜기가 아니다. 이 사실을 우리 스스로 마음속에 끊임없이 인식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완전히 변화 받았다는 사실을 매일 같이 인식하고 인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되었는데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우리가 새롭게 변화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죄악의 사람도 못박혀버리고 버림받은 사람도 못 박혀버리고 슬픔과 질병의 노예된 사람도 못 박혀버리고 저주와 가난의 사람도 못 박혀버리고 죽음과 영원한 지옥의 사람도 못 박혀버렸습니다.
그리고 죽어서 장사 지내버리고 부활할 때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부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새로운 피조물인 것입니다. 새로운 사상, 새로운 말, 새로운 행동을 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그러므로 여러분 스스로가 이제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나는 용서받은 의인이라는 것을 시인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성령이 내 속에 있다는 것을 시인하고 감사해야 됩니다. 그러고 나는 이제는 슬픔과는 인연이 없다. 그리스도가 나의 기쁨이다. 질병과 연약과 고통에서 나는 해방된 사람이다. 나는 저주와 가난에서 해방되고 자유를 얻은 사람이다. 죽음과 인연이 없고 영원한 천국이 나의 것이다. 오중복음을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입으로 시인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빼앗으려는 원수 마귀가 얼마나 많습니까? 원수 마귀가 와서 우리 생각에서 오중복음을 빼앗고 삼중축복을 빼앗고 우리 마음속에 메뚜기 사상을 잔뜩 집어넣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나안 복지를 놓쳐 버리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우리 마음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켜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난다고 말한 것입니다. 마음속에 메뚜기 사상이 들어오면 그는 모든 생활에 실패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신령한 사람으로서의 거인이 들어와 있으면 여러분은 그 가운데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생각을 하면서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믿습니다로 나가면 거인이 모든 환경과 운명을 짓밟아 승리해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예수 안에서 거인으로서 거듭난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와 같이 계셔서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놓지 않고 성령이 오셨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돕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항상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고 나아가면 성령께서 그 능력의 기름부으심으로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 달은 이번 달보다 내년은 금년도보다 더욱 나아지는 꿈을 우리 마음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꿈이 없는 개인과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합니다. 우리 대한민국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으로 북한을 얼싸안고 북한의 모든 동포들을 살리고 남북 통일을 할 수 있는 꿈을 가지고 하나로 합쳐 있으면 절대로 김정일이가 우리를 쳐들어오지 못합니다. 우리가 꿈을 잃어버리고 사분 오열이 되고 낙심하여 메뚜기 사상으로 꽉 들어차고 패배의식으로 꽉 들어차면 언제고 김정일은 일선에 배치한 그 수백문의 대포를 열어서 서울을 가루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마음에 우리가 거인의 사상을 가지고 믿음으로 꿈을 가지고 있을 동안에는 아무도 우리에게 손을 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꿈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또 기도와 믿음과 찬양이 있습니다. 우린 매일 같이 어려움을 당하면 주님께 기도하고 항상 그리스도에게
감사하고 항상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성경에는 우리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미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경배하자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하면 감사할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문은 넓혀지고 찬미하면 찬미할수록 하나님의 궁정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 마음속에 항상 감사와 찬미가 넘쳐야지 우리 입술에 원망과 불평과 탄식, 고통스러운 말이 나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감사로 넘치고 찬양으로 넘칠 때 하늘 나라 문은 열리고 하나님의 궁전에 들어가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 히브리서 10장 38절에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
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메뚜기 사상을 가진 사람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거인의 사상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심으로 우리가 들어가자. 그 땅은 우리의 것이다. 그 땅 주인은 떠나갔다.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다. 가자!
거인의 사상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갔지만 메뚜기 사상을 가진 사람은 뒤로 물러가서 광야에서 다 시들어서 죽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여러분과 나 영적인 선민을 위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새로운 가나안 땅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우리의 가나안 땅은 바로 십자가 밑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담 이후로 광야에 쫒겨 나가서 고생하는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그 모든 광야의 저주를 감당하시고 주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룩해 주신 것입니다.
민수기 13장 30절에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
리라 하나"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도 이 거인의 사상만 가진다면 기도를 통해서 십자가 밑에 나아가서 우리에게 준 가나안 땅을 점령할 수가 있습니다.
민수기 14장 8절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고 말했는데 과연 십자가 밑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있습니다. 그 속에 용서의 젖과 꿀이 흐르고 사랑과 성령의 젖과 꿀이 흐르고 기쁨과 치료의 젖과 꿀이 흐르고 아브라함의 축복의 번영함의 젖과 꿀 같이 흐르고 영생과 축복의 젖과 꿀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그 가나안 땅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개를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면 몸 찢고 피 흘려 이루어 놓은 가나안 땅에 젖과 꿀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나안 땅에 메뚜기 사상을 가진 사람은 들어가지 못합니다. 거인의 사상을 가진 사람은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메뚜기 사상을 가지고 나는 못한다. 나는 안된다,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무능력자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물러가는 사람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사람,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거룩한 신령한 사람이 된 것을 아는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침노에 들어갑니다. 세례 요한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가 빼앗느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침노에 들어가면 오늘날 모든 우리 가나안 땅을 우리가 소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를 메뚜기로 볼 때에 원수들은 우리를 더욱 얕잡아 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우리가 주 안에서 거인이 된 것으로 볼 때에 우리의 운명과 환경은 우리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민수기 14장 9절에 말씀을 기억하십시요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들은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예수를 믿고 믿습니다로 나아가는 여러분에게는 오직 하나님께서 같이 하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점령할 따름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고 성령을 얻되 넘치게 얻는 축복을 주님께서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마음속에 메뚜기가 되어 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바라보고도 자기들은 메뚜기로 힘이 없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아담은 거인으로 만들어졌으나 타락하여 메뚜기가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거듭 났을 때는 다시 거인들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버지 거인의 꿈을 갖게 도와 주시옵소서. 거인의 믿음을 갖게 도와 주시옵소서. 거인의 사상을 갖게 도와 주시옵소서. 거인의 말을 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거인으로서 행동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 성도들 중에는 한 사람도 메뚜기 사상 가진 사람 없게 도와주시고 여호수아와 갈렙같이 들어가서 가나안 땅을 점령하게 도와 주시옵시고 십자가 밑에 기도하고 믿음으로 나아가서 젖과 꿀이 흐르는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땅을 점령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신유기도-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여! 주님 앞에 제가 기도합니다. 우리 아버지여! 주의 백성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 거인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오히려 마귀는 메뚜기입니다. 질병도 메뚜기입니다. 저주도 메뚜기입니다.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이를 대적합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너희 모든 질병과 고통은 떠나갈지어다. 너희 환경의 가난과 저주와 슬픔은 물러갈지어다.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 모든 성도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거인들로 만들어 주신 것을 감사하옵나이다. 믿음의 거인들로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오니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으로 축복하셔서 모든 질병에서 해방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모든 슬픔에서 놓여남 받게 도와 주시옵소서. 모든 저주에서 해방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아브라함의 축복으로 채워 주옵소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기사와 이적이 오늘 나타나서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며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기적이 오늘 나타나게 도와 주시옵소서. 오 보혜사 성령이여 바람 같이 불 같이 생수 같이 오늘 우리 가운데 지금 운행하시고 크나큰 기적을 베풀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