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론의 등장은, 아라한에게 파산을 선고하고 나온 새로운 대중운동의 출발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과감한 도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 『금강경』본문에 “무여열반”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사실 이것은 소승 아라한들의 “멸절에의 동경”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승 보살들에게는 바로 이 멸절에의 동경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생도 무아다. 사도 무아다.
생사에는 생사라고 하는 고유한 본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열반에도 열반이라고 하는 고유의 본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생사의 윤회의 止滅이 곧 열반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윤회는 삶의 현실이다.
그 삶을 벗어나는 죽음이 그 삶의 행복을 보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살들이 추구하는 삶은 무엇인가?
윤회의 현실이 곧 열반이라고 하는 생각의 회전이다.
이 생각의 회전은 또 무아의 부정의 부정, 부정의 끊임없는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열반이 생사의 고리 밖에 자리잡을 실체적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다.
생사가 곧 열반이다. 생사즉열반!
이 사상은 곧 번뇌가 곧 깨달음이라고 하는 “번뇌즉보리”의 과감한 생각으로 비약하게 되는 것이다.
번뇌 그 자체가 죄가 아니요, 번뇌 그 자체가 중생구원의 자비로 化하는 것이 곧 대승이다!
첫댓글 생각의 회전이 아니라 자력이니깐 부정되는 것임
당연한 것인데 뭐가 과감하다는 것인지
아비달마가 엉터리로 해석한것을 용수보살께서 바로 잡으신거죠
도올이 끼워맞추기는 대단하네요
사실 개방귀인데... 걍 계속 관망해 보죠...
가급적 스스로 생각해 이치를 구하면 더 좋거든요. 안잊어먹게 되니까요... 그런데 굳이 개방귀 운운한 것은...걍 맞다고 간주한 결과, 파고들어 생각해 보려는 시도조차 안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일단 찔러는 본 거라는...
"생사 즉 열반"이나 "번뇌 즉 보리"란 말은, 적당하지 않아요. 다만 충격요법등 어떤 필요에 따라 특정한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극단적 표현이 사용되었을 뿐입니다. 그런 이유로 있는 표현을 가지고, 생각의 전환 운운은 우스운 일입니다. 만구 꿈나라에 있는 거죠...
화엄경에 "일체 번뇌를 알면 무상정등각을 이룬다"는 말이 있어요. '무상정등각'이, '지혜 즉 보리'의 완성이죠? 그런데 번뇌가 무상정등각이란 말은 엄어요... "번뇌가 지혜"란 말과, "번뇌를 알면, 지혜"라는 말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번뇌를 떠나, 지혜가 있지 않다"는 말이, "번뇌가 지혜"란 말은 아닌 겁니다. 생사와 열반을 함께 말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예요.
위에서 제가 지적한 바와 같이 분명히 알면, 생각의 전환 운운하며 위의 본글과 같이 논리를 전개한 글에 동의하기는 어렵습니다. 고요2님에게 제시했던 말을 좀 더 분명히 하여 다시 가져와 봅시다...
<<
A라는 구체적 법이 괴로움임을 알고, 괴로움인 A라는 구체적 법이 어떻게 있는지 알며, 괴로움인 A라는 구체적 법의 소멸을 알고, 괴로움인 A라는 구체적 법의 소멸이 어떻게 가능한지 안다...
>>
이상은 "일체 번뇌를 알면 무상정등각을 이룬다"와 다른 말이 아니죠. 밝혔듯, 위의 말은 아함경이나 니까야에 나오는 사성제 정형구입니다. 즉 대승은, 단지 특정 부파의 '소멸이라는 상태를 절대시하는 견해'를 비판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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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비판을 자제한 것은, 기억하기님이 도올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반발하기 쉬워요... 그래서 몇 번이나 그냥 넘어갔던 겁니다. 우리는, 법과 관련하는 한은, 특정 개인을 좋아하지 않아요... 단지 그 조건과 견해를 살필 뿐이죠...
니까야나 아함경을 보면, "산냐와 함께 하지 않는 중생"이 나옵니다. 그러한 중생을 두고, 부처님께서는 "그 중생들은 식이 발생하면 곧 죽는다"고 설명하셨습니다. 니까야나 아함경에 나오는 내용이예요. 이러한 "산냐와 함께 하지 않는 중생"과 관련하여...과거에 금강경 대승정종분과 관련한 글에서, 대승정종분에 거론되는 중생에는 "소멸"이라는 상태가 포함된다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
도올의 글을 보면 불교를 중화사상 밑으로 보면서 불교를 우롱하는 느낌을 저는 많이 받아요
서양이 인도철학을 무시할려고 나타낸것이 역사적고찰을 통한 무시예요
헌데 도올은 그방법을 계속 써먹고 있어요
소승이 먼저 일어났는데 후대에 대승이 일어나서 새로운 무엇을 내놓았다는 둥
역사적 고찰을 등장시킬 필요도 없는데 그걸 등장시켜서 니까야를 선전하곤하죠
사실 니까야는 불교에 있어서 초등학교 교과서 수준이예요
도올이 니까야를 선전하는 의도는 매우 영악한 짓이예요
자기도 알거든요 니까야가 불교에 있어서 우스운경전이라는 것을
아는 인간이 초기불교 운운한다는게 더 역겨운 것이죠
그러면서 불교를 은근히 중화사상 밑에 둘려는 의도가 너무 얄및다는 것이죠
도올은 난데없이 니까야를 등장시켜서 석존을 아라한으로 폄하시키죠.
도올에 있어서 석존은 노자나 장자수준예요.
도교는 중국에 있어서 변방이예요.
성리학이 핵심이죠.
도올에게 있어 불교는 잘쳐주어야 석존이 노자나 장자수준이니 불교는 성리학의 밑바닥아니겠어요.
성리학과 불교는 완전히 다른 학문이예요.
오히려 성리학이 과학적이죠.
달라이라마가 불교가 과학이라고 도올에게 대답했을때 도올은 속으로 웃었을거예요. 멍청하다고..
불교가 과학이다라는 말은 하면 안되요.
불교는 철저한 종교적 틀속에 있어요.
대부분 남방불교에서 불교가 과학이라고 떠벌려요.
티벳불교까지 불교가 과학이라고 말하니 답답할 뿐입니다.
기독교가 왜 과학하고 그렇게 싸울까요?
종교는 과학적으로 증명할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근데 왜 불교가 과학이라고 멍청한 말을 하냐구요.
예술도 과학이라고 말하지 않아요.
종교는 더더욱 아니예요.
인간의 마음을 과학으로 측정할수가 없어요.
불교의 가르침은 신앙으로 가기위한 방편이예요.
신앙이 없는 말장난은 아니라는 것이죠.
도올은 불교적 신앙이 없는 말장난을 자꾸 하니깐 싫어하는 거예요.
도올은 그냥 수준높은 개똥철학일 뿐이예요.
인터넷에서도 개똥철학자들이 많잖아요.
위에서 [우리는, 법과 관련하는 한은, 특정 개인을 좋아하지 않아요... 단지 그 조건과 견해를 살필 뿐이죠...]라고 적지 않았습니까? 그런즉 비웃지도 않습니다. 단지 이미 스스로 알고 있는 것에 입각해 문제를 충분히 발견할 수 있음에도, "참으로 옳다"고 감탄하게 되는 조건을 살폈을 뿐입니다.
그럼 개방귀란 말은 뭐냐? 비웃은거 아니냐? 그건 법과 관련해 적은게 아닙니다. 어떤 의미로냐? 개방귀라는 것은...학자 명함을 달고, 책을 지어 팔아먹고 심지어 그걸로 TV강의등까지 하는 경우...글자를 가지고 기존의 만구 지 생각에 끼워맞추려고만 하지 말고, 뭐라도 좀 공부해서 해야 한다는 뜻이죠. 그게 양식이 있는 행동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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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내용 구구절절 다시 지적하기는 그렇구요. 별 즐거운 일도 아니라, 흥도 안나고... 지나간 거는 걍 지나간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