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개국조 주몽(朱蒙)의 탄생설화 >
옛적에 천제께서 그 아들을 부여 고도에 내려 보내어 임금이 되게하니 이가 곧 해모수라. 그가 하늘로서 내려올 제 오룡거(五龍車)를 탔으며 시종자 1백여인이 다 백학(白鶴)과 채운(彩雲)을 타고 위에 떴는데 풍류 소리가 구름 가운데를 움직이는지라. 웅심산(熊心山)에 머물다가 10여 일을 지나 내려왔는데 두상(頭上)에는 조우관을 쓰고 허리에는 용광검(龍光劍)을 매었으며 아침이면 정사를 보고 저녁이면 하늘로 올라가니 세상에서 이를 천왕랑(天王郞)이라 하였다. 북부여 서북편에 청하(淸河) 하백(河伯)이 있고 하백의 따님에 유화(柳花)· 훤화(萱花)· 위화(葦花) 셋이 있으니 모두 얼굴이 곱고 자태가 아름다웠다.
그들이 하루는 그 근처 못가에 나가 놀다가 해모수왕을 보고 즉시 수중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왕은 말채찍으로 땅을 그어 방을 만들고 자리를 베풀어 그 용자의 염려(艶麗)한 유화를 유치(誘致)하여 비를 삼으려 하니 하백이 처음에는 크게 노하여 사자(使者)를 보내 그 무례함을 힐책하더니 왕을 용궁에 맞아 앉히고 여러 가지 행한 이적이 분명 천제의 아드님인 줄 안 뒤에는 예를 갖추어 성혼하였다.
뒤에 왕은 유화부인을 버리고 홀로 용거에 몸을 붙여 하늘에 올라가거늘 하백은 그 장녀가 이미 임신된 고로 이것이 가문에 큰 욕을 끼친 것이라 생각하여 끄나풀로 그 주둥이를 매어 잡아당기어 그 길이가 석 자나 늘어나게 하고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 귀양 보내었다.
이때 동부여왕 김와(金蛙)가 고기잡는 이의 고함을 듣고 쇠그물로 잡아내게 하였더니 비로소 잡고 보니 한 여자아이, 세 번이나 그 늘어진 주둥이를 문질러 내리니 그제야 말문을 연지라, 왕은 하느님의 자비(子妃)임을 알고 깊은 방 속에 가두어 두었더니 일광이 비치든지 하면 몸을 피하고 그러면 해그림자가 또 따라가 비치고 이러하여 애를 배었다.
신작(神雀) 4년 4월 어느 날이다. 이 유화부인이 좌액(左腋) 밑으로 알 한 개를 낳았다.
왕이 기괴하여 개와 돼지에게 주니 먹지 않고 노상에 버리니 우마가 피하고 또 들에 버리니 금수가 와 덮어주며 기르고 비록 음침한 날이라도 한 광명이 그 알 위에 나타났다.
왕이 그 알을 다시 그 어미에게 보내어 따듯한 곳에 두었다니 한 옥동자가 그 알 속에서 나왔다. 울음소리가 웅장하며 골격이 비범하며 한 달도 못되어 말을 할 줄 알았다.
점차 장성함에 ‘활을 잘 쏜다’하여 이름을 주몽(朱蒙)리하고 하였다. 이 아이가 후일 왕국에 고구려 왕국을 건설한 시조 동명성왕이 된 것이다.
< 아래 그림을 보면 삼국시대에는 일본도 우리나라가 점령했다. 일본 남부는 가야국이, 중부는 백제와 신라가, 북부는 고구려가 점령하고 실제 일본 영토는 1/3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아래 지도에서 보면 고구려가 한창 국토를 확장하던 시절에는 중국일부, 몽골, 소련의 일부가 모두 한국의
영토 였는데 그때 통일이 되어야 하는 것데---.

고구려의 도읍지
고구려 초기의 도읍은 졸본으로서 주몽이 그곳에 건설하였습니다. 그뒤 고구려 2대왕 유리왕때 부여의 침공을 받자 지형이 험하고 도읍지에 딱인 국내성으로 도읍지를 옮깁니다.
국내성은 그뒤 장수왕이 즉위할때 까지 고구려의 도읍지 였습니다.
장수왕때는 광개토대왕이 넓혀놓은 영토를 지키기위해 외교정책을 펼쳤죠. 그리고 남쪽으로 진출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고구려의 남쪽이면 신라와 백제 입니다.
그 결과 중국과 멀고 또한 신라,백제와 가까운 평양성이 도읍지에 딱 알맞죠. 그래서 장수왕때 도읍을 평양성으로 옮긴 것 입니다. 그 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할때 까지 고구려의 도읍이 였습니다. 정리하자면 고구려의 수도는 졸본성->국내성->평양성 이지요.
첫댓글 중국놈들 고구려땅이 지거라고
가슴아픈 우리의땅 독도라도 지키자구요!!!
분단의 비극이 한많은 나라로 역사까지 왜곡당하는 아픔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