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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면 모든 꿈이 길몽 |
관혼상제 지혜 얻는 한국인의 꿈누구나 꿈에 매여 본 경험이 있다. 이상한 모습의 엄청난 괴물이 뒤에서 쫓아오고, 발 밑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가 한없이 뻗어 있어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도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건만 두 다리는 꼼짝을 않았던 꿈. 간밤에 꾼 꿈이 하루를 지나는 동안 그날의 일과와 너무나 흡사해 마치 꿈속에서 예언을 들은 듯한 경험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살아오면서 한번도 가보거나 경험하지 않은 세상이나 동네 거리를 거닐고 있으나 왠지 친숙한 느낌과 낯설지 않는 여정이 펼쳐지면 그 느낌은 더욱 각별하다.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이 불가사의한 꿈에 큰 관심을 가져왔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느 민족보다도 꿈을 많이 꾸고, 꿈의 해몽이 다양하다고 한다. 또 임산부나 그 가족들은 대부분 새로 태어날 아기에 대한 꿈을 꾼다. 이런 예가 우리 민족에겐 일상적이다 보니 아예 ‘태몽’이라는 독립된 단어가 존재한다. 태몽은 외국인에게는 그리 흔하지 않다고 한다. 해마다 이때쯤이면, 우리네 할머니들은 손주에게 “우리 아가, 간밤에 좋은 꿈꾸었느냐?”며 꿈 인사부터 하셨다. 우리 풍습에서는 그렇게 꿈이 현실의 생활 깊숙이 자리잡고 있으며 삶 자체가 꿈에 연계되어 이어져 온 흔적을 쉽사리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조상 때부터 꿈과 함께 살아왔다고 해도 좋을 만큼 옛 선조들은 꿈의 지혜로 인생의 길흉을 미리 알았다. 꿈은 삶의 철학으로서 우리 민족의 문화와 함께 오랜 세월의 변화 속에서도 끊임없이 뿌리의 틀을 이루며 전해 내려오고 있다. “꿈은 포장지에 싸인 선물” 꿈이 흥미로운 이유는 꿈의 배경이 주로 꿈꾸는 사람에게 익숙한 장소일 때가 많다는 것이다. 꿈속의 풍경은 상상력이 만들어낸 최고의 풍경이다. 그래서인지 화가들이 꿈에 본 풍경에서 작품의 영감을 받은 경우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탈리아의 초현실주의자 조르지오 데 키리코나, 벨기에 초현실주의자 폴 델보 같은 화가는 꿈속의 분위기를 포착하는 방면의 대가들이다. 꿈에 대해 정리하면 첫째 꿈은 기억의 회상, 일어날 일에 대한 경고, 예지의 역할을 한다. 둘째, 꿈을 꾸는 사람의 심적 갈등과 같은 내적 문제를 나타내는 경우다. 그러나 가장 많은 형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경험이나 상황들의 전개, 그리고 ‘가위’ 눌리는 꿈이다. 즉 꿈은 극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부정적이며 유쾌하지 않은 기억으로 남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우에는 잠을 자고 난 후에도 몸이 개운하지 않다. 수면을 취한다는 것은 충분한 휴식을 위한 것이 가장 주된 목적이기에 오히려 꿈을 꾸지 않고 숙면을 취하는 것이 가장 좋은 법이다. 무의식의 표출 “개꿈은 없다” ‘꿈은 포장지에 싸인 선물처럼 매일 밤 우리에게 주어지지만, 그것을 풀지 않고 내버려두기 일쑤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꿈에 사로잡혀 있고, 꿈을 신기해하고 때로는 두려워하기도 한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찾아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문명과 상징체계를 연구해온 학자 루시 구디슨은 자신의 저서 <여자들의 꿈 The Dream of Women>에서 이렇게 말했다. 프로이트는 ‘꿈은 무의식에서 보내는 뒤틀린 메시지’라고 말한다. 칼 구스타프 융은 ‘꿈은 영원한 원형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꿈을 무의식으로부터 지혜를 가져다주는 매체로 보았고, 깨어 있는 동안의 부족함을 메워주며 미래에 대한 희망과 지침을 제공한다고 보았다. 프리츠 펄즈라는 학자는 꿈에 나오는 모든 것은 바로 너라고 한다. 그러나 꿈이 무엇이든간에 중요한 것은 꿈을 받아들이는 자세다. 이미 많은 학자들이 지적했듯이 꿈은 무의식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의식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기에 때때로 우리는 꿈을 꾼 후 “내가 왜 이런 꿈을 꾸었지?”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우리가 의식했다가 망각했거나 무시했거나 억압, 억제해버린 것들이다. 또 어떤 내용 중에는 우리의 이생의 개인적 경험을 넘어 인류 전체가 원시시대 이래 경험해오고, 개인의 세포 속에 잠재된 대물림의 경험과 기억도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며 꿈속에 나타난다. 융은 이런 것을 가리켜 ‘집단무의식’이라고 했다. 신경정신과 치료에서 꿈을 통해 과거나 전생의 기억을 이끌어내는 예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건 ‘해몽’이 아니라 버리기 모든 꿈은 의식과 무의식의 기억의 영상이다. 그러니 엄밀히 말해 무의미한 ‘개꿈’은 없는 셈이다. 그러면 그 꿈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 기억을 지혜롭게 해석해 삶에 활용했던 선인들과는 달리, 요즘은 현실에 대한 욕망과 집착을 꿈의 해몽을 통해 메꿔가려는 사람들이 많다. 꿈에 매여 허황한 투자를 한다거나, 현실의 노력은 하지 않은 채 커다란 결과만 갖고 싶은 욕심이 그것이다. 마음수련은 산 삶의 기억과 무의식의 기억을 버리고 자신의 참된 본성을 깨닫는 수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꿈은 곧바로 나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다. 중요한 것은 수면으로 떠오른 의식, 무의식의 영상들을 버려나가는 것이다. 내 모습을 인식하고 버리는 것이다. 맑은 마음으로 본성을 깨친 사람들은 순리로 살아감을 알기에 꿈 해몽이 필요 없다.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며 순리로 살아가는 사람에겐 꿈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도대체 꿈이 뭐길래… “꿈은 과학이다”사람이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갖는 수면은 과학적 분석을 근거로 그 단계를 분류해 볼 수 있다.수면의 단계란 잠이 얼마나 깊이 들었나 하는 정도를 나눈 것이다. 수면에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두 가지 상태가 있다. 급속한 안구운동이 일어나는 수면을 렘수면((REM: Rapid Eye Movement), 그렇지 않은 수면을 비렘수면(NREM: Non-Rapid Eye Movement)이라 부른다. 일반적으로 잠을 자기 시작하면 비렘수면 상태가 먼저 나타난다. 비렘수면은 뇌파의 종류에 따라 4단계로 구분된다. 1단계에서 4단계로 진행될수록 점차 깊은 잠에 빠지게 된다. 잠이 들기까지 정상인의 경우, 보통 30초에서 7분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잠을 청하는 동안 졸리면서 뇌파는 느려져 알파파가 나타나고 뇌파에서는 깨어 있을 때 주로 나타나는 베타파와 알파파가 사라지고 보다 촘촘한 쎄타파가 많이 나타난다. 1단계 상태에서 꾸는 꿈은 내용이 그리 길지 않고 간단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꿈을 꾸고 있는 상태의 사람들을 깨우게 되면 잠들었다고도 하지 않고 꿈을 꿨다고도 하지 않는다. 이때 꾸는 꿈은 거의 기억에 남지 않는다. 가벼운 잠이 들면 뇌파는 점점 더 느려지고 방추 모양의 작고 빠른 파가 나타난다. 뇌파가 아래위로 삐쭉 튀어나온 특징적인 뇌파인 ‘K복합’이라는 것도 보인다. 이 2단계 수면 중에 있는 사람도 깨우면, ‘잠이 들었다’고 하지도 않고, 꿈을 꾸었다고 하지도 않는다. 간혹 짧은 생각들을 기억해내는 일이 있다고는 한다. 3~4단계에서는 델타파라는 비교적 느리고 진폭이 큰 뇌파가 나타나는데, 이때의 잠을 델타수면 혹은 서파수면slow-wave sleep이라 부른다. 이 정도가 되면 ‘잠에 취했다’고 할 만큼 꽤 깊은 잠에 빠진 상태이다. 이렇게 잠에 취한 사람을 세게 꼬집어 깨우게 되면 여기가 어느 곳인지, 지금이 몇 시인지 등이 헛갈린다. 이때에는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생각도 뒤죽박죽이라고 한다. 이 시기에 잠에 문제가 생기면 야뇨증, 몽유병, 야경증, 악몽 등이 나타나기도 한다. 잠들고 나서 한 시간 반 정도 지나 뇌파를 살펴보면, 전체적으로는 1단계의 수면파와 비슷한데, 톱니 모양의 파가 덧붙여 나타난다. 분명히 잠들었는데도 뇌파의 모양은 깨어 있을 때와 유사하다 하여 이러한 수면을 역설 수면paradoxical sleep 혹은, 이때 신속한 안구운동이 관찰되므로 렘수면이라고도 한다. 또한 비렘수면(5%)에 비해 렘수면(60~90%)에서 꿈을 잘 기억하기 때문에, 렘수면을 꿈수면이라고도 부른다. 이 시기 동안은 심장도 빨라지고, 숨도 가쁘게 쉬고, 혈압도 오른다. 렘수면은 30분 정도 지속되다가 다시 서파수면이 이어진다. 밤새 잠을 자는 동안 서파수면과 렘수면이 교대로 나타나는데 하룻밤에 5~7차례 렘수면을 경험한다. 가위 눌린 꿈, 렘수면기 증상과 유사“간밤에 가위에 눌려 잠을 설쳤다.”고 호소하는 사람이 있다. 뭔가 알 수 없는 또는 달걀귀신처럼 보이는 형체가 목을 압박해 가슴이 답답해진다, 정신은 멀쩡한데 일어나려고 애를 써도 몸이 좀처럼 움직여지지 않는다, 더 이상 견디기 어렵다고 느낄 때 잠이 깨 ‘위기’를 모면한다, ‘가위’는 자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귀신을 말한다. 그렇다면 ‘가위에 눌렸다’는 말은 정말 잠 귀신으로부터 괴로움을 당했다는 말일까.흥미롭게도 가위에 눌린 증상은 렘수면기에 나타나는 증상과 유사하다. 렘 시기는 의식이 깨어 있지만 근육은 완전히 이완된 단계다. 또 꿈을 활발하게 꾼다. 그래서 정신이 멀쩡하게 느껴지고, 달걀귀신이 덮치는 듯한 악몽에 시달리며, 몸을 움직일 수 없다. 한편 렘수면기에는 호흡이 불규칙하게 변한다. 이때 목이 조여오거나 가슴에 누가 올라탄 느낌이 들 수 있다. 더욱이 코를 골다 순간적으로 호흡이 멈추는 일이 일반인에게도 빈번히 일어난다. 이 시기에 악몽이 겹치면 영락없이 가위에 눌리게 된다. 그러나 이런 해석만으로는 불충분한 면이 남아 있다. 모든 렘수면기에 항상 ‘가위눌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특정 시기에 무엇 때문에 ‘가위눌림’이 일어나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꿈을 깨고 나를 버리니 꿈 같은 삶이 있다마음수련과 꿈에 대하여마음수련을 하며 산 삶의 기억을 버린 수련생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 중의 하나가 “꿈을 꾸지 않고 숙면을 하게 되었다.”는 경험이다. 꿈을 꾸는 경우도 마음수련을 한 후에는 확연히 줄어들며 어느 정도 몸과 마음이 확연히 정립이 되는 시점에는 거의 꿈을 꾸지 않는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다. 마음수련과 꿈의 관계를 살펴보면, 기본적인 1과정만 거쳐도 꿈은 현저하게 줄어들게 되며, 4과정까지 마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꿈을 꾸는 횟수가 거의 없다는 의견이 상당수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을 상대로 추론해 보면 4과정을 마친 후 일정 기간이 지나거나 5, 6과정을 수련하는 사람들에게서 전혀 다른 형태의 꿈의 양상들이 일어나고 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꿈의 형태를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이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일상 속에서 살아온 그날 그날의 바람이나 모습들이 꿈에서 연결되어 형상화되는 경우다. 이러한 경우에 마음수련을 한 사람들은 쉽게 그 자국을 지울 수 있다. 특히 5과정 이상의 사람인 경우에는 이런 꿈을 꾸는 경우가 눈에 띄게 적다. 간혹 본인도 모르게 꿈을 꾸더라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는 게 대부분이다. 두 번째는 현재의 삶의 이전에 대한 기억된 흔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경우이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표현하거나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겠으나 혹자는 전생의 기억들이라고 단정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살아오면서 한번도 경험하거나 일어나지 않은 일 또는 상황들이 전혀 거부감 없이, 오히려 더욱 친밀하게 재연된다는 느낌까지 드는 것은 인연의 과정으로 설명하는 방법밖에는 없을 것이다. 이 두 번째의 경우에서도 마음수련 5과정 이상인 사람들에게는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5과정 이상의 수련생들과 대화해 보면 모두 다음의 세 번째 경우와 혼돈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위 두 가지를 합친 것과 같은 형상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꿈을 자주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수련의 과정이나 개인적인 차이에 따라 그 형태는 다를지라도 수련을 하는 도중에 그때의 상태에 따라 깨침, 증득, 버림, 가짐, 바람, 변화 등의 많은 현상들이 꿈으로 연결되는 경우인 것이다. 단언적으로 결론 짓기에는 어려움이 있을지 모르나 마음수련과 꿈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현실과 결부된 현상이 꿈으로 나타나는 경우와 두 번째로 자신의 의식과 무관한 내면적인 현상들이 꿈으로 연결되는 경우, 세 번째, 마음수련을 한 사람들만의 현상일지도 모를 수련의 과정과 연관된 경우로 정리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간과하여서는 안 될 것이 있다. <하늘의 소리로 듣는 지혜의 서>에도 나와 있듯이 수련의 단계가 높아가도 꿈은 꿀 수 있다는 점이다. 단지 그것이 본마음, 진아의 꿈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은 사람과 다른 점이다. 진아의 꿈은 기억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꿈의 측면에서 볼 때 마음수련의 효과를 절감하게 된다. 마음수련 이전의 삶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꿈을 꾸며 꿈을 이루기 위해 꿈속에서 살아왔다는 느낌이다. 삶을 살되 삶 속에 내가 있지 않고 참 삶을 사는 방법을 깨치기 전에는 깨고 나면 그만이요 허황되기까지 한 꿈속에 살았다. 꿈을 깨고 나를 버리니 이렇게 꿈 같은 삶이 있음을, 참 삶을 갖겠다는 꿈마저 버리고 나니 이토록 아름다운 삶이 있음을, 사람들은 꿈을 좇아 삶을 사나 그 꿈 버리고 나를 버리니 모든 사람들이 찾아 헤매던 영생천국, 불국토가 내 안에 있음을, 꿈이 아닌 있음으로 실상으로 존재함을 알겠더라. 눈 감으면 생각나는 모든 것은 나의 삶에 생긴 것이나 나는 그것의 노예가 되어서 그것이 참인 줄 알고 인생을 살다가 있었지요 근심 걱정 괴로움 슬픔도 일체가 그것이었는데 꿈 깨니 나는 그냥 있었어요 <하늘> 글·새온 / 자유기고가 나의 꿈 이야기·‘벌레꿈’으로 깨친 생활의 지혜수련을 하기 전에 나는 이사 다니는 습관이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가 제일 좋은 곳인데 그걸 모르고, 늘 다른 동네가 더 좋아 보였던 것이다. 이웃과 친해지고 집에 정이 들만 해졌을 때 셋째 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그 아이가 세 살이 되도록 사경을 헤매며 몹시 아팠다. 툭하면 토하고 열나고 늘 병원을 달고 살았다.아이가 그 지경이니, 엄마인 나도 제정신일 리가 없었다. 병원에 다녀도 차도가 없었다. 꿈자리도 사나워서, 밤이면 조그만 벌레들이 집안 가득 우글거리는 꿈도 꾸었다. 자연스럽게, 사는 터가 나빠서 애가 고생을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집을 팔고 공기가 조금 더 맑은 딴 동네로 이사를 갔다. 그래도 아이는 계속 아팠다. 나중에는 내게도 심장병 증상이 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리석기 짝이 없던 시절이다. 엄마가 심지가 굳지 못하고,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흔들려대니, 아이인들 건강할 리가 없었다. 꿈은 잠재의식의 발로라고들 하지만 우리네 보통사람들이 지난밤의 꿈에 따라서 그날의 기분이 좌지우지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꿈 해몽하는 법을 안다. 너무나 간단하다. 모든 꿈은 100% 좋은 꿈이다. 예를 들면, 며칠 전에도 우리 집에 벌레가 우글거리는 꿈을 꾸었다. 10년 전, 집안에 우환이 들끓던 시절의 그 재수 없던 꿈과 똑같은 꿈을 또 꾼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꿈 따위에 시달릴 내가 아니다. 꿈을 꾸고 내게 들었던 느낌은, ‘우리 집의 근심걱정이 나가는 꿈이다. 근심걱정거리들이 나가려고, 집안 구석구석 숨어 있던 벌레들이 모두 기어나온 것이다. 아니면, 돈이 들어오려는 거다. 돈 벌레가 우글거리는 걸 보면.’ 꿈속의 벌레들이 소중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다가 어젯밤에 나는 또 다른 꿈을 꾸었다. 집에 귀한 손님이 오신다기에 어느 방에서 주무시면 좋을까 걱정을 하는 꿈이었다. ‘우리 집이 누추한데 어떤 방을 드리나?’ 하며 쩔쩔매고 있는데 그 손님이 ‘나는 이 방이 좋네요.’ 하며 제일 작은 방을 택했다. 나는, ‘그래요? 그 작은 방이 좋을 리가 없는데.’하며, 손님이 좋다고 한 작은 방에 들어가 보았다. 세상에, 그 방에서 바라다 보이는 경치는, 현실 세계에는 없고 꿈속에나 있을 법하게 근사하게 펼쳐진 푸르른 청산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나는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그러면서 행여나, 꿈에 본 청산을 잊을까 싶어서, 시집 <순리>를 꺼내어 ‘청산’이라는 시를 읽었다. 청산은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 멀리 딴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지금 사는 곳이 청산이고, 내 마음속의 청산이 진정한 청산이건만, 없는 청산을 그리며 사는 나의 어리석음을 보다못해, 내 잠재의식이 내 뒤통수를 한 대 때린 것이다. 그 꿈을 꾼 후, 나는 빌딩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사는 게 아니라, 청산에 산다. 꿈을 꾼 것도 나요, 그 꿈을 해몽하는 것도 나이다. 그러니 나는 늘 청산에 산다. 잠을 자나, 꿈을 꾸나, 바쁘게 하루를 보내거나,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건 내 마음속의 청산은 늘 그 자리에 있다. 홍명현 / 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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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꿈을 버리면 모두다 길몽 ~ ^^
글쵸~
악몽도 버리면 길몽~~~.. 차~암 쉽죠오옹!! ㅋㅋ
좋다..ㅎㅎ
꿈꺄니 나는 그녕 있었어요
우와 버리면 모두 길몽! 멋지다..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