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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4:1~6 성령 안에서 하나 되자 25.1.5 주일낮 설교
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성령 안에서 하나 되자”입니다.
올해 우리 교회 표어는 “성령 안에서 하나 되는 교회”입니다. 이 표어를 정한 것은 우리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해서가 아니라 요1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가 저들도 다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것임을 기억하여 마지막 때를 사는 우리가 성령 안에서 더욱 하나가 되어 한 마음 한 뜻으로 행하길 원하여 정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하나 되는 것이 아니고 무조건 하나되자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각각 다른 생각, 다른 연령, 다른 성별의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기 위해 모인 신앙의 공동체입니다. 세상의 모임이나 단체는 직업별로, 나이별로, 지역별로, 또는 같은 정치성향, 같은 취미에 따라 모이겠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을 초월해서 모이는 곳이 교회입니다. 빈부귀천, 남녀노소, 동향동문 상관없고 아무 조건 없이 누구든지, 얼마든지 함께 할 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의인들의 모임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발견하고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되심을 깨닫고 영생의 소망을 가진 자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나오는 자는 어떠해야 한다고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인자가 온 것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게 하려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죄인들이 교회의 구성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면서 열두 사도를 부르셨는데 그 부류가 제각각입니다. 대부분이 고기 잡는 어부들이었지만 그중에는 세리와 열심당원이 함께 있었습니다. 즉 이들은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는 지금의 여당과 야당처럼 도무지 맞지 않은 이들이지만 그러나 예수님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므로 함께 할 수 있었고 실제로 하나 되었습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꿈꾸고 같은 비전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분명한 주인, 확실한 스승이자 선장으로 모셨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안디옥 교회가 세워졌을 때도 그렇습니다. 그들도 당시 사회적 신분으로는 도무지 하나 되기는커녕 함께 할 수도 없었던 주인과 종의 관계도 있었고 피부색이 다른 인종도 있었지만 이런 모든 사정을 초월하여 함께 모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안디옥 교회의 리더인 선지자와 교사로 사역했습니다. 행13:1입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또한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이자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의 뜻을 앞세우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들의 하나됨이 가능했던 이유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 된 것입니다. 모래와 시멘트를 혼합하면 어떻게 됩니까.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시멘트가루는 먼지처럼 날려 버리고 좀 더 센 바람이 불면 모래도 날려 버립니다. 그대로는 절대 하나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물을 부으면 돌덩이처럼 단단하게 굳어집니다. 이처럼 제각각 다른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하나 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3절 이하에 보시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십니다. 나와 아무런 상관없을 것 같은 형제자매가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의 몸을 이루는 지체임을 깨닫게 하고 함께 머리되신 예수님을 따르게 하고 자신의 죄인됨을 깨달아 비우고 낮아지게 하고 그리하여 섬기며 순종하게 합니다. 그렇게 하나 되게 합니다. 올해는 성령 안에서 우리 모두 하나가 되길 소원하고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각각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에 붙들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에 붙들리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거라사인 지역에 귀신 들린 청년은 귀신에게 붙잡혀 무덤가에 거하는데 힘으로는 아무도 그를 제압하지 못합니다. 쇠사슬로 묶어놓아도 그것을 끊어버리므로 감당하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사울왕도 악한 영에 사로잡혀 평생을 시기와 질투심에 끌려 다니는 삶이었습니다. 마침내 전쟁터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우리가 주변을 돌아보면 어떤 사람은 육신의 정욕에 붙잡혀 살고 있고 탐욕에 붙잡혀 사는 사람도 있고 게임에 붙잡혀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술에 붙잡혀 살고 어떤 사람은 노름에 붙잡혀 살고 어떤 사람은 마약에 취해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라는 족쇄에 발목이 잡혀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잘못된 신념이나 거짓된 사상에 붙잡혀 일평생 속고 헛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탈북자들이 한국에 오면 처음에는 달라도 너무 다른 것에 어리둥절하다가도 이내 자신들이 그동안 속고 살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 억울함에 분노를 금치 못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인 사회주의 국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폭력과 살인, 방화와 거짓도 정당화 시킵니다. 지금도 그들의 나라가 지상낙원이라며 속이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영에 붙잡힌 것이 아니라 거짓과 어둠의 영에 붙잡혀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하나님 말씀에 붙잡혀 살았습니다.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성령의 감동으로 십자가와 부활에 붙들려 살았습니다. 초대교회성도들도 성령에 붙잡혀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실지라도 성령으로 충만하여 이끌리셨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술사들이 말하기를 거룩한 신이 함께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바로왕은 요셉을 처음 만났을 때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자를 우리가 어디서 만나리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에 붙잡혀 살아갈 것입니까?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의 영에 붙잡혀 사는 자입니다. 우리가 사모하고 힘써야 할 것이 있다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그 충만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야 성도가 성도다울 수 있고 목사가 목사다울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왜 성령 충만해야 합니까?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고전2:10).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영으로 알듯이 하나님의 사정은 하나님의 영으로 아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정을 알게 해주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성령님을 약속하실 때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내 말을 기억나게 하고 생각나게 하여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리라고 했습니다(요16:13). 성령님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시고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가르쳐주시기 때문에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알고 경험해도 그가 어디서 왔는지를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왜 사는지를 모르고 심판이 있음을 모른다면, 비록 세상을 잘 몰라도 영생이 있음을 알고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알고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알고 구원의 길을 아는 자라면 누가 더 지혜로운 자이겠습니까. 성령은 이처럼 우리에게 행할 것과 나아갈 길을 알려주시기에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령 충만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사명을 깨닫습니다. 본분을 깨닫습니다. 따라서 분명하고 온전한, 삶의 목적을 알게 합니다. 그 목적이 우리를 이끌어가게 되고 삶의 소망을 갖게 됩니다. 꿈을 꾸게 됩니다. 돈을 벌어도 왜 버는지, 어디에 써야 하는지, 그 목적이 분명해집니다. 무엇이 본질인지,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가 있음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하면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시간을 값지게 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억할만한 시간들로 채울 수 있습니다. 헛되이 보내지 않고 의미 있는 시간들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가장 늦게까지 살아있었던 사도요한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는 또 하늘이 열리는 환상도 경험했습니다. 계1:10입니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계 4:2에서는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라고 합니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할 수 있었을까요. 성령에 감동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성령에 감동될 때 우리가 주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나라를 보는 것도 가능할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요엘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여(행2:17) 설교하기를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일군이 필요하여 일곱 집사를 세울 때도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뽑아 세웠습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라고 했습니다(행6:5,6). 우리도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성령에 감동되어 성령의 인도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가 함께 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몸인 교회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12:13절입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한 몸인 즉 같은 기쁨이 있고 같은 아픔도 있고 같은 성취감도 있고 같은 꿈도 꾸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의 짐을 지는 것입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 사이에 친구, 동무라는 말은 그의 짐을 대신 지기 위해 등을 내어주는 자란 뜻이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성경은 고전12:26절에서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당시 사회에서 유대인과 헬라인이 함께 된다는 것, 종과 자유인이 하나 된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입니다만 한 성령 안에서 가능했습니다. 서로의 아픔과 슬픔을 돌아보고 서로의 기쁨과 행복을 나누는 것이 불가능한 사회였지만 그러나 성령 안에서 교회는 가능했습니다.
동일한 성령으로 인도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디도와 함께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였음을 고백합니다. 고후12:18에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라고 했습니다. 동일한 성령, 동일한 보조라고 했습니다. 한 성령 안에서 행하므로 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모두 동일한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 되길 축복합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거룩한 영이 아닌 다른 영도 있음을 말씀합니다. 거짓 영이 있고 미혹하는 영도 있습니다. 한 마디로 더러운 영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영을 다 믿지 말고 그 영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분별하라고 했습니다(요일 4:1). 요한 계시록에서는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계16:13). 마지막 때가 되면 진리에서 떠나 거짓 영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거짓 선지자가 많이 활동할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나 단체가 진리의 영을 따르는지, 미혹의 영의 인도를 받는지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을 이끄는 영이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영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도받고 성령으로 사랑하고 성령으로 기도하는 자가 되길 축복합니다. 올 한 해는 성령 충만하여 사랑 가운데서 한 몸을 이루어 성령으로 함께 행하는 교회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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