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속에 수 많은 걱정들이 쌓여갈 제
당신의 위로가 제 영혼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시편94,19).
시인의 “걱정”과 주님의 “위로”가 대조된다.걱정은 마음을 산란케 하는 산만한 생각들이다(139,23참조).걱정은 단순히 지니가는 생각이 아니라 시인의 마음을 산란케 하여 지치게 만든다.주님의 자애가 그를 지탱해 주듯이(94,18)주님의 위로가 그를 기쁘게 해준다.위로는 히브리어로 복수형인 ‘타느후밈’인데,이 단어는 마음의 만족뿐만 아니라 잠정적인 스트레스와 슬픔을 해소한다는 개념도 담고 있다(Tale).주님의 위로는 걱정하는 그를 기쁘게 변화시켜 준다.그래서 바오로 사도는,“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12,12)라고 말한다.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하느님은 우리에게 번영과 역경을 허락하신다.번영은 역경에 대한 대응책이며 우리가 역경에 의해 무너지지 않도록 하고,역경은 우리가 번영 때문에 믿음이 약화하지 않도록 한다.’하느님은 종종 우리에게 고난과 고통의 경험을 허락하시고 그리하여 그분의 자비로 우리를 치유하실 수 있다(아우구스티누스).
시편 94편의 전체적 의미: 94편에서 “보복하시는 하느님”(1절)이라는 표현은 매우 독특하고 비복음적이라 충격적이다. 성경의 그 어느 곳에서도 직접적으로 주님을‘보복하시는 하느님’으로 부르지는 않는다(단 예레51,56에서‘응보의 하느님’으로 부름).그렇지만 성경에서 하느님의 보복이나 되갚음에 관해 언급하는 곳들은 있다(이사35,4;66,6;예레51,6;시편28,4;137,8등 참조).시인이 하느님께서 보복해 주시기를 바라는 사람들은“거만한 자들”(2절),“악인들”(3절),“나쁜 짓 하는 자들”(4,16절),“미욱한 자들/미련한 자들”(8절),“악한”(16절),주님은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고 말하며(7절),법규를 거스리고(20절),의로운 이들의 목숨을 빼앗으려 하고 무죄한 이를 단죄하여 피 흘리게 하는(21절)자들이다.이런 부류의 사람들 때문에 시인은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19절).하느님께서 이들에게 보복해 주시지 않으면 시인으로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그렇지만 시인은 근심 중에서 그의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여 하느님의 위로를 느끼고 기뻐하며 주님을 자신의 산성이요 반석으로 확신하는 신앙인이다.신앙인들에게 현실적인 근심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위로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것은 그의 고통을 하느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악인들에게 보복하시는 하느님은 시인에게는 위로하시는 하느님이다.거기에 시인의 신뢰근거가 있다.마찬가지로 교만한 자들이 악행을 저지르는 불의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보복을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심판해 주실 것을 믿으며 기도하는 사람들이다(신명32,35;로마12,19;히브10,30참조).
(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 23-3 시편 90-150편/전봉순 著/바로오딸)
주님께서 부르십니다
10. 이 모든 것이 중요합니다.그런데 제가 이 교황 권고를 통하여 되새기고자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건네시는 성덕의 소명입니다.이 소명을 주님께서 개인적으로 여러분에게 건네십니다.“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11,44;참조;1베드1,16).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이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크고 많은 구원의 수단을 갖춘 모든 그리스도인은,어떠한 생활 신분이나 처지에서든,하느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성덕에 이르도록 저마다 자기 길에서 주님께 부르심을 받습니다.”
11. “저마다 자기 길에서”라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말합니다. 도달할 수 없어 보이는 성덕의 표양들 앞에서 우리는 좌절하여서는 안 됩니다.분명히 도움이 되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증거들이 있지만,우리가 그대로 모방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이러한 모방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염두에 두신 그 유일하고도 특별한 길에서 벗어나게 이끌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중요한 것은,신자들이 저마다 자기 길을 식별하고,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안배해 주신 개인적 은사인(1코린12,7참조)자신의 최고 장점을 발휘하는 일입니다.자신에게 해당되지 않는 어떤 것을 모방하려고 애쓰는 것은 사람을 지치게 할 따름입니다.우리는 모두 증인이 되도록 부름받았지만 증언하는 방식은 매우 많습니다.실제로,위대한 신비가,십자가의 요한 성인은<영혼의 노래>를 쓰면서 모든 이에게 천편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규정들을 피하고자 하였습니다.그는 모든 사람이 저마다“자기 길에서”도움을 얻을 수 있는 구절들을 노래하고자 설명하였습니다.하느님의 생명은“어떤 이에게는 이런 방식으로 또 어떤 이에게는 저런 방식으로”전달되기 때문입니다.
12.이 다양한 형태들 가운데“여성의 고유한 자질”도,하느님의 성덕을 이 세상에 반영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되는 성덕의 여성적인 형태들도 드러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합니다.대다수 여성이 무시되거나 소홀히 여겨지던 시대에도 성령께서는 성녀들을 일으켜 주셨습니다.그들의 매력은 교회 안에 새로운 영적 활력과 중대한 개혁을 불러 일으켰습니다.빙엔의 힐데가르트 성녀,비르지타 성녀,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리지외의 성녀 데레사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그러나 저는 무명의 또는 잊힌 모든 여성도 떠올립니다.이들은 각자 길에서 힘찬 증언을 하며 가정과 공동체들을 지키고 변모시켜 나갔습니다.
13. 이로써,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바쳐 하느님께서 영원으로부터 우리 각자에게 바라신 유일무이한 계획을 받아들이는 열의와 용기를 북돋워야 합니다.“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예레1,5)
(현대 세계에서 성덕의 소명에 관한 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한국천주교주교회의)
원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상황에 개입하지 않는 활동이다.가솔린 통에 다가가는 베트남 승려,몸통에 양팔이 묶인 이적 행위자를 총검으로 찌르는 벵골의 게릴라 사진 등 인상적일 만큼 대성공을 거둔 동시대 포토저널리즘이 공포감을 자아내는 이유는 부분적으로 사진작가들이 다음과 같은 인식, 즉 사진이냐 살아 있는 피사체냐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진을 선택하는 것도 타당하다는 인식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상황에 개입하면 기록할 수 없고,기록하면 상황에 개입할 수 없다.지가 베르토프의 위대한 영화<카메라를 든 사나이>는 사진작가의 이상적인 이미지를 보여줬다.쉴새없이 움직이는 사람,즉 주마등 같이 펼쳐지는 갖가지 사건 속으로 개입해야겠다는 생각이 생길 수 없을 만큼 민첩하고 빠르게 뛰어드는 사람,그런 사람이 바로 사진작가라고.히치콕의 영화<이창>(1954)은 사진작가의 이런 이미지를 보완해 준다.제임스 스튜어트가 연기했던 어느 사진작가는 한 사건에 깊숙이 연류된다.그것도 카메라를 통해서. 그도 그렇 것이 그는 다리가 부러져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었던 것이다.이렇듯 당분간 움직일 수 없는 처지였기에 그는 자신이 목격한 일에 대해 아무런 행동을 취할 수 없었고,그래서 그에게는 사진을 찍어놓는 것만이 의미가 있었다. 비록 몸으로 사건에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그는카메라를 사용함으로써 사건에 연류된다.카메라는 일종의 관측소에 불과할지 모르나,사진을 찍는 행위에는 수동적으로 관찰한다는 것 그이상의 의미가 있다.사진을 찍는 행위는 남을 훔쳐보며 성욕을 느끼는 관음증처럼 때로는 노골적으로,현재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더욱 부추기는 방법이다.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대상 그 자체,(적어도‘멋진’사진을 찍을 때까지라도)지금 모습 그대로 변함없이 존재하는 대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행위이며,사진으로 찍어놓아야 할 만큼 그 피사체를 흥미롭게 만들어 주는 그 무엇인가(예컨대 남에게는 고통이나 불행이더라도 내게는 흥미로움을 주는 상황)와 공모하는 행위인 것이다.
(사진에 관하여29-31쪽/수전 손택/이재원 옮김/이후)
물을 조금만
더 넣거나 덜 넣어도
커피 맛이 확연히 달라졌다
돌이켜보건데
한 사람을 이해하는데
커피 타는 정도라도
그 마음을 헤아려 주지
못한 것은 아니었던가?
(커피를 타면서/손해목)
늘~
행복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