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의 시인들 | 김전한
독일 빵은 맛나다 외
편지가 왔다
그대의 일상이 건너왔다
뒤셀도르프의 원칙을 전해 주었다
독일 빵을 얘기해주었다
라인강의 베란다에서 독일 빵을 이등분하고 있다 하였다
독일 빵은 갈색이다
독일 빵은 크고 거칠다고 하였다
준비 안된 그대는 혀 천장이 다칠 만큼
독일 빵은 완고하다고 하였다
독일 빵이라고 중얼거려 보았다
뒤셀도르프를 궁글려 보았다
고약한 독일 빵
그러나 나는 그 고약함마저도 사랑하게 되었다
그대 머무는 동안
나도 독일식 체계로 사물을 보기로 했다
당신의 작은 흔적도
내게는 중요한 일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잠원동 독일 빵집에 앉아 편지를 썼다
견고한 갈색의 문장으로 답장을 보냈다
독일 빵은 맛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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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
아홉 살의 아이는 동생들보다 늦게 잠들고 일찍 일어나야 했다. 사월이라 하지만 몽골의 바람은 화살촉처럼 가혹하다. 아이는 물을 길어와 불을 지핀다. 양고기를 삶기 위해 물을 끓여야 한다. 둥근 양푼 속에서 따뜻한 기운이 번져온다. 희미한 기포가 한 방울씩 올라온다. 아이는 물방울을 바라보다 설핏 잠이 든다.
아이의 아비는 독살을 당했다. 아이는 복수라는 단어를 검붉은 눈동자에 새겨 넣었다. 졸린 눈을 뜨고 보니 양푼 속 물방울이 부르르 떨고 있었다. 아이는 가장이 되어야 했다. 그의 이름은 테무진이다. 아이에겐 심약한 동생이 있었다. 테무진은 망설임 없이 동생을 살해한다. 가족에게 짐이 되는 건 용서할 수 없었다. 처음으로 핏빛이 검다는 걸 알았다.
아이는 성장하여 부족장이 되었다. 영혼을 묶어둔 우정이 있었다. 두 개의 태양이 공존할 순 없었다. 그는 그렇게 믿었다. 친구의 목을 부러트려 목숨을 끊어버렸다. 아이는 광활한 평원을 통일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징기스 칸~! 이라 불러주었다.
마침내의 시작이었다. 둥근 양푼 속의 기포들은 와르르 끓어올랐다. 칸의 군사들은 만리장성을 넘었다. 북경은 칸의 들끓는 괴성에 피바다가 되었다. 삼백일 밤낮으로 북경 문명인은 인육으로 버텨야 했다. 둥근 양푼 속의 기포는 끓어 넘쳤다. 들끓는 물살은 양푼 밖으로 튀어나올 듯 몸부림쳤다. 희미한 기포에서 시작된 아이의 핏빛 시선은 페르시아의 도시인을 몰살시켰다.
칸은 도교의 선지자를 불렀다. 영생불사의 약은 가져왔는가. 대답은 명징하였다. 그런 약은 없습니다. 여인을 절제한다면 잠시 연장은 가능하겠지요. 칸의 정념은 멈추지 않았다. 현대인 200명 중 한 명은 칸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유전학적 증거가 있다.
양푼 속의 기포는 흘러넘쳤다. 이쯤에선 양고기를 넣어야 한다. 그러나 물은 저 혼자 끓고 있다. 피바람의 여정은 멈추지 않았다. 유럽이 도륙되었다. 백색인들에게 몽골리안은 괴물과 동의어였고 악마였고, 지옥이었다.
불패, 불사의 칸은 산책 중 말에서 떨어졌다. 그의 죽음은 싱거웠다. 칸이 낙상하는 순간, 아이는 짧은 비명을 지르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들끓는 양푼 속의 물살이 아이의 손등을 덮쳤다. 아이는 잠에서 덜 깬 혼곤한 눈으로 게르의 실내를 훑어보았다. 심약한 동생이 달려와 아이의 손등에 약을 발라주었다. 아비는 양고기를 들고 들어왔다. 아이는 양고기를 양푼 속에 던져 넣었다. 들끓는 양푼 속은 가까스로 진정 되었다.
아이는 게르의 천막을 열고 나갔다. 찰나와 억겁의 얇은 막을 아이는 지나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왔고 태양은 떠올랐다. 따사롭게 느껴졌다. 멀리서 말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영혼의 친구가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복수라는 단어 대신, 처음으로 인생~! 이라는 단어를 중얼거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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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전한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시나리오 작가와 영화감독으로도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