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얘기114 -기타) 을묘년편
단재 신채호선생이 가장 큰사건이라 일컫는1135년 묘청의 난이 일어난다.
1495년3월20일부터 연산군이 친정하였다.
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나 왜국이 강성해진 싯점이다.
1675년 숙종이 즉위하여 조정에 피바람이 예고된다.사도세자는 1735년생이다.
1975년 을묘년 베트남이 통일되던그해.
한국엔 고교생 야구스타가 탄생한다.
최동원(崔東原, 1958년 5월 24일 ~ 2011년 9월 14일)은 대한민국 前 야구 선수이자 감독이다.아버지는 최윤식이고, 어머니는 김정자이다.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인 신현주와의 사이에 아들 최기호를 두었다. 막내 동생 최수원은 한국야구위원회[KBO] 심판 위원이다. 최동원의 가족들은 역할을 분담하여 그의 훈련을 도왔을 정도로 전폭적인 지원을 한 것으로 유명한데, 특히 아버지 최윤식의 헌신은 자주 인구에 회자된다.
최동원은 “아버지는 6·25 전쟁으로 한쪽 다리를 잃어 의족을 하고 다녔다. 당신께서는 축구 선수가 되고 싶어 하셨지만 할아버지의 반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나에게는 ‘네가 운동을 하고 싶다면 시켜 주겠다’며 아낌없이 지원해 주셨다”라면서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드러냈다.
아버지는 집에 안테나를 별도로 설치해 일본 고교 야구와 프로 야구 중계를 보게 할 정도로 아들에게 헌신적이었지만, 최동원이 프로 구단에 입단하는 과정이나 연봉 협상 과정에서 구단과 갈등을 빚을 때면 일부 언론으로부터 아버지가 아들의 문제에 지나치게 간여한다는 비난을 받곤 하였다.
최동원(崔東原)은 1958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고교시절: 중학 시절부터 최동원은 특별한 선수였다. 어린 나이에도 빠른 공과 낙차 큰 커브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부산지역 중학야구계 ‘넘버 원’ 투수는 최동원 차지였다. 1974년 경남고에 입학해선 부산을 넘어 전국구 스타로 등극했다.
그를 스타로 이끈 건 ‘보험’과 ‘노히트 노런’이었다. 경남고에 입학하자마자 최동원의 아버지 최윤식 씨는 아들을 ‘팔 보험’에 들게 했다. 손목이나 팔꿈치, 어깨 등에 장애가 발생할 시 보험금 50만 원이 지급되는 ‘팔 보험’은 당시로선 매우 생소한 보험이었다. ‘보험’ 하면 화재보험, 생명보험만 떠올리던 시절인지라, 최동원의 팔 보험은 금세 장안의 화제가 됐다.
보험이 최동원의 이름을 전국에 알린 계기가 됐다면 1975년 전국우수고교초청대회 경북고전에서 기록한 노히트 노런은 최동원의 이름이 한국야구계의 중심에 서는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노히트 노런을 달성한 뒤, 다음 날 선린상업고등학교[현 선린인터넷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도 8회까지 노히트 노런을 이어가 17이닝 노히트 노런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고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또 제9회 국회의장 배 쟁탈 전국 고교 야구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최우수 선수가 되었고, 화랑대기에서는 준우승하며 감투상을 받았다. 이듬해 3학년 때는 4개 도시 고교 야구 대회, 청룡기 우승을 이끌기도 하였다. 노히트 노런으로 최동원은 순식간에 전국고교야구 투수 랭킹 1위에 등극했고, 그런 최동원을 가리켜 야구계는 ‘야구 천재’ ‘야구 신동’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투수’라며 극찬했다.
경남고 시절부터 전국구 투수로서 유명했다. 동 시대의 라이벌이었던 김시진은 최동원이 가장 좋았던 시절로 경남고 1~2학년을 꼽을 정도.
경남고 시절 전국을 평정했던 최동원은 자신이 가고 싶은 대학을 고를 수 있었다. 모든 대학이 그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최동원은 경남고 선배들이 많은 고려대에 입학하길 원했다. 고려대는 초고교급 투수 최동원이 제 발로 걸어오자 크게 기뻐하며 장학금을 약속했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고려대 입학은,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벽에 부딪힌다. 최동원의 고려대 입학을 한사코 막는 ‘보이지 않는 움직임’이 있었던 까닭이다.
“고려대 입학을 주도했던 이들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이에 고향에 있는 동아대학교 진학을 하려했으나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로 진학을 거부받았다. 군대라도 빨리 다녀오려고 육군 경리단의 문을 두드렸지만 그 곳에서도 받아줄 수 없다고 했고, 고위 관계자의 공작에 의해 결국 연세대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고 한다.
2·연세대학교 시절, 1978년 대통령기 전국대학야구대회 준결승에서 동아대학교와의 맞대결에서 임호균과 18회 연장 승부는 굉장히 유명했다. 14회까지 0:0으로 진행되자 서스펜디드 게임이 선언되고 다음날로 이어져 결국 연세대학교 김봉연의 솔로홈런으로 최동원의 연세대학교가 1:0으로 승리를 거뒀다.
연세대학교 시절
그리고 사건이 벌어진다. 1979년 3월 21일, 대통령기 쟁탈 동국대와의 준결승에서 공군을 제대하고 2학년으로 복학한 박철순이 선발로, 3학년인 최동원이 마무리로 출전하였다. 이날 각각 2점씩 실점하여 경기는 4:2로 패배하였다. 경기에서 지자 연세대 선배들은 패배의 책임을 물어 최동원을 구타하였다. 이때 허리를 잘못 구타하여 팬티가 피범벅이 되고 허리 아랫부분이 시커멓게 죽을 정도로 큰 부상을 입는다. 근 100일 동안 움직이지도 못하고 집에서 요양해야 할 정도였다고. 이 과정에서 학교는 구타사실을 은닉하기 위해 최동원이 무단이탈했다는 언플을 한다.
연세대학교 시절 무시무시한 구위로 국제대회에서 맹활약하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스카우터들이 그를 주목했고,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계약까지 했으나 병역특례 혜택을 받은 뒤에도5년 동안 국내에서 그것도 아마에서만 활동해야 대체복무로 인정되는 병역법 때문에 바로 해외에 나갈 수 없었던 점이 크게 작용했다. 병역말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계약이 최하급이었다는 말이 있지만 이건 사실과 다르다. 4년에 옵션 20만 달러 포함 총액 61만 달러계약인데 이정도 금액이면 최하급이 아니라 오히려 특급대우다.
그 당시 블루제이스 측에서 해외 언론에 밝힌 최동원의 프로필을 보면 그를 당장 메이저 전력감으로 평가하며 메이저 평균 수준의 직구와 커브 그리고 메이저 상위 수준의 슬라이더와 제구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라는 말도 있고 당시 나온 기사로는 토론토 수상이 직접 한국에 최동원을 위해 병역 면제를 건의했다는 말이 있지만 이건 그냥 단순히 최동원 선수를 알고 있고 관심을 가지고 있다던 기사에서 와전된 것, 블루제이스 측에서 계약 위반이라며 법정행 카드까지 들고 나오며 그후 몇년 동안이나 포기하지 않았으나 결국 최동원은 해외 진출을 포기하고 1983년에 롯데 자이언츠와 계약하게 된다. 다른 말로는 당시 프로야구 최대 흥행카드인 최동원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가면 흥행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 생각한 높으신 분들의 압력이 있었다 카더라
3. 실업 시절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최고 수준인 3,000만 원의 계약금을 받고 1981년 실업야구 롯데 자이언트에 입단했다.그때부터 롯데 자이언트의 에이스가 되었다. 1981년 롯데 자이언트가 소화한 팀 이닝이 36경기 324이닝이었는데 그중 206이닝을 신인이었던 최동원이 소화, 17승 4패를 기록하며 팀을 코리안시리즈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는 팀을 위해 코리아 시리즈에서 불태웠다.
81년 실업야구 코리아시리즈 6차전까지 모조리 등판,
1차전 9이닝 3실점 완투 敗
2차전 7이닝 무실점 (2회부터 구원 등판) 敗[23]
3차전 7이닝 3실점 (5회부터 구원 등판) 무
4차전 7⅓이닝 3실점(희대의 기록인 1경기 1승 1세이브를 기록) 勝[24]
5차전 3이닝 무실점(7회 구원 등판)勝
6차전 9이닝 4실점 완투. 勝
코리아시리즈 6경기중 6경기 등판 42⅓이닝 2승 1패 1세이브. 방어율 2.45
김시진, 장효조 등이 포진되어있던 육군 경리단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면서 롯데가 실업야구 마지막 코리아시리즈에서 우승을 하는데 일조했다.
특이사항으로 4차전때 7이닝까지 선발 등판하다 휴식을 주기위해 8회초 1루수로 보직을 변경했고, 8회말 2사 만루상황에서 구원등판해서 깔끔하게 막아 1경기 1승 1세이브를 기록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도 연출한다.
롯데의 우승과 더불어 최동원은 실업야구 최우수선수, 최다승리투수(17승), 신인투수상을 수상하며 3관왕을 차지했다.
1981년 시즌이 끝나고 실업 팀이던 한국전력공사에 이적하여 선수생활을 이어갔다. 이유는 세계(아마추어) 선수권 대회가 1982년에 있었는데 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소속 팀이었던 롯데는 프로로 전환하였기에 아마추어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던 것. 그래서 날라다니는 선수들을 실업팀에 임시로 입단을 시켰고 이는 임호균, 심재원, 이해창, 김재박. 장효조 등이 한국프로야구 원년에 데뷔를 하지 못한 이유다. 세계선수권대회가 종료된 후, 다시 최동원은 (프로로 전환한) 롯데에 입단했다.
4. 프로 시절
입단 당시 사진. 옆에 있는 이는 당시 박영길 롯데 감독.
최동원의 프로야구 첫 시즌은 '부진했다'는 평을 받았다. 본인 말로는 연봉협상때문에 몸관리를 하지 못해서라고. 1983년 시즌종료후 하루에 천개가 넘는 공을 던지며 몸관리에 들어갔다고 kbs 다큐멘타리에 코멘트했다
최동원이 불멸의 선수로서 자리매김한 경기는 1984년 삼성 라이온즈와의 한국시리즈이다.
당시 롯데 감독이었던 강병철 감독은 한국시리즈를 준비하면서 1, 3, 5, 7차전에 등판하도록 최동원에게 지시를 내린다. 이에 대해 너무 무리하는게 아니냐고 묻자, 강병철 감독은 무척이나 미안한 표정으로 두고두고 회자되는 "동원아, 우짜노 여기까지 왔는데"라고 했다. 결국 최동원은 "네, 알았심더. 한번 해보입시더"라고 답변하고 이를 수용한다.
그리고...
1차전 선발 등판 완봉승. 3차전 선발등판 12K 완투승, 5차전 선발등판 완투패, 6차전 구원등판 구원승, 7차전 선발등판 완투승
5경기 등판 4승 1패 40이닝 투구 평균자책점 1.80 WHIP 1.08.
6차전 경기에서 구원승을 거둔 뒤 인터뷰에서 그는...
인터뷰어: 최동원 투수! 컨디션 어땠어요?
최동원 : 글쎄요. 허허. 어제보다 좋았다고 할까요?
인터뷰어 : 무리 아니었습니까?
최동원 : 무리였죠. 무리지만 팀이 이길 수 있다면... 이제 올해 마지막 시합이잖습니까. 그래서 최대한 힘 있는데까지는 열심히 해가지고... 마 저희들이 노력한 만큼의 어떤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무리라는걸 알죠. 알지만도 마 나갈 수 있는 한 끝까지 나가서 이기야죠.
그리고 롯데 자이언츠는, 아니 최동원은 우승했다.
7차전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그는...
인터뷰어 : 최동원 투수, 지금 제일 하고 싶은 말이 뭐에요?
최동원 : 아이고~ 자고 싶어요.
마지막 7차전에서는 5번 유두열이 힘이 떨어진 김일융을 상대로 역전 쓰리런 홈런을 치면서 우승하게 되는데, 사실 6번으로 나오려던 것을 기록원이 실수로 5번으로 적었고 강병철 감독은 그냥 그대로 가자고 했다 한다. 어찌되었던 이 뜬금포에 2009년 나지완이 로페즈를 제치고 한국시리즈 MVP를 받은 것과 비슷한 논리로 유두열이 한국시리즈 MVP가 되는 해프닝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라는 의견도 있지만, 최동원이 1984년 27승 다승왕, 탈삼진왕으로 정규시즌 MVP로 이미 선정되었으므로 한국시리즈 MVP까지 독식하기는 좀 그렇다는 이유로 유두열이 MVP가 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진실은 저 너머에...[
어쨌든 최동원은 1984년 한국시리즈 때 5경기 등판 중 홀로 4승을 거두며(1패) 롯데를 극적인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국내 유일한 기록이다.이 당시 혹사에 대한 후폭풍이 경기 종료 후 바로 나타났는데 리포터가 마운드를 내려온 최동원에게 달려가 지금 무얼 가장 하고 싶냐고 묻자 자고 싶다고 답변한 일화가 유명하다.또 우승을 한 당일 밤에 롯데 구단 우승축하파티에 참석한 최동원이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코피를 쏟아버렸다는 것. 단순히 어깨나 팔꿈치에만 무리가 간게 아니라 몸 전체 피로도가 심각했을 가능성이 크며, 그 한국시리즈 선발4회 구원1회 총5회 등판이라는 기록이 얼마나 무식한 혹사였는지 눈치챌 수 있는 대목이다.
84년 한국시리즈를 배경으로 한 최동원 영상
결국 1984년의 혹사는 이후 최동원의 선수생활을 갉아먹게 된다. 하지만 본인의 선수 생명까지 바쳐가면서 구단에 우승을 안겨준 선수에 대한 롯데의 태도는……. 이 때문인지 아래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 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렇게까진 안던질거다"라는 말도 남겼다(…).
최동원의 선수 생활 중 중대한 고비를 맞이한 것이 1988년으로, 바로 이 때 가장 먼저 선수협을 만들려고 했다. 그 결정적 계기가 당시 해태의 투수 김대현이 이순철과 함께 승용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리다 휴게소 진입 도중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이 때 최동원은 선수들의 복지를 위해 선수협을 구성하려 했으나 당시 7개 구단들의 반대로 실패로 돌아갔다. 이 사건 이후 연봉협상 등의 이유로 마찰이 심하던 롯데 구단과 완전히 틀어지게 된다. 선수협의 여파로 최동원은 삼성의 김시진 등의 거물투수와 트레이드를 당하게 된다. 이 당시의 트레이드는 규모와 네임밸류에서 역대 최고로, 롯데의 '최동원-오명록-김성현'과 삼성의 '김시진-전용권-오대석-허규옥', 그리고 추가로 롯데의 '김용철-이문한'과 삼성의 '장효조-장태수(투수)'의 총 규모 5대6의 트레이드가 이뤄졌다.
이후 인터뷰에서 롯데에 관한 질문에서 최동원은 "그래요. 롯데는 처음부터 나와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요. 이런 상태에서 프로 롯데라고 믿음이 갔겠습니까. 그래도 나는 롯데를 위해 1984년을 통째로 바쳤어요. 하지만, 그 대가가 무엇이었습니까. 그 대가가."라는 것으로서 짙은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렇게 롯데에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최동원은 야구를 더이상 못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미국으로 출국한다. 이후 1989년 후반기부터는 삼성에 복귀하지만, 신혼여행 및 야구를 떠나 방황하면서 체중은 불어나고 그에 더해 전체적인 훈련량이 모자랐던 것 + 그 전까지의 혹사의 여파로 구속도 떨어지고 제구도 안 잡히게 되는 전체적인 기량 하락으로 이어졌고, 지금 관점으로 본다면 야구선수 치고는 이른 나이에 은퇴했다.인터뷰로는 당시 감독이던 김성근 감독이 가더라도 1년 더하고 가라고 말렸으나, 자신이 강력하게 은퇴를 요청했다고 한다. 히익 만약 1년 더 있었다면 최동원을 불펜으로 굴렸겠지.
완투율은 70%가 넘었고 규정이닝의 2배를 뛰었다. 그리고 승리를 챙기지 못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전성기가 조금 지나서 프로 데뷔했고 프로팀 실력이 영 좋지 않아서 어쩔수 없이 감독이 미친듯이 굴렸고 미친듯한 성적을 거뒀다는것.
이후 동생인 최수원 심판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이미 어깨 인대 2곳이 끊어져 있었다고 한다
♧ 스포츠인만 다루면 애초 초심을 잃기때문에 이때부터 두각을 나타낸 팝그룹을 소개한다.
스웨덴의 그룹. 1970년대에 기억하기 쉽고 따라 부르기 쉬운 곡들을 발표하여 유럽의 음악 인기 순위를 장악했다. 그룹의 멤버들은 작사 및 건반 연주를 맡은 베니 안데르손(1946. 12. 16 스웨덴 스톡홀름~), 작사 및 기타 연주를 맡은 비외른 울바에우스(1945. 4. 25 스웨덴 예테보리~), 그리고 보컬을 담당한 앙네타 펠트스코그(1950. 4. 5 스웨덴 이왼쾨핑~)와 아니프리트 링스타트(1945. 11. 15 노르웨이 나르비크~)로 구성되었다.
그룹 결성
그룹 결성 이전부터 수많은 포크와 팝 프로젝트를 함께 작업했던 안데르손과 울바에우스가 1969년에 링스타트와 펠트스코그를 만나면서 그룹 형성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4인의 그룹 구성원들은 음악 작업을 함께하는 사이였을 뿐만 아니라, 안데르손과 링스타트, 울바에우스와 펠트스코그가 각각 데이트를 하면서 두 쌍의 연인으로 발전했다. 이 남녀 혼성 4인조는 카바레 공연을 주로 하는 페스트포크(Festfolk)라는 그룹명으로 데뷔했다.
'페스트포크'라는 이름은 거의 동일한 발음을 가지면서도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는 면에서 채택되었다. 스웨덴어 'festfolk'는 파티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면서, 약혼한 커플들이라는 의미를 갖는 1970년대 속어 'fastfolk'를 뜻하기도 한다. 울바에우스와 펠트스코그는 1971년에 결혼했고, 뒤이어 1978년에는 안데르손과 링스타트가 결혼했다. 패스트포크라는 그룹 이름으로 스웨덴에서 인기를 얻는 데는 실패했지만, 1972년에 '비외른과 베니, 앙네타와 아니프리트'라는 그룹명으로 녹음했던 노래 〈피플 니드 러브 People Need Love〉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전성기의 활동
다음 해에 이 4인조 남녀 혼성그룹은 싱글 〈링 링 Ring, Ring〉으로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출전할 스웨덴 대표를 선발하는 대회에 참가하여 3위에 입상했다. 그 성공에 힘입어 그룹 매니저인 스티그 안데르손은 그룹 구성원들의 이름 첫 글자를 따서 'ABBA'라는 별명을 만들었다. 밴드는 1974년 유로비전에 다시 출전했고 〈워털루 Waterloo〉라는 노래로 대상을 차지했다.
유로비전에서 승리를 거둔 지 1년여 만에, 그룹은 1975년에 발표한 〈아바 ABBA〉로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맘마미아 Mamma Mia〉와 〈에스 오 에스 S.O.S.〉 등의 싱글은 유럽, 오스트레일리아,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또한 이 그룹은 4인조 그룹의 카리스마를 활용하기 위해 새롭게 떠오르던 뮤직비디오라는 매체를 이용했다. 1977년 발매된 아바의 앨범 〈어라이벌 Arrival〉이 디스코 열풍이 한창인 미국에 소개되었고, 그 앨범에 수록된 곡들 중 하나인 〈댄싱 퀸 Dancing Queen〉은 미국에서 1위 싱글이라는 영광을 차지한 아바의 유일한 곡이 되었다.
그 곡은 따라 부르기 쉽고 디스코 클럽 분위기와도 잘 맞았다. 〈앨범 The Album〉(1978)은 일종의 일탈을 보여준 앨범이었다. 그 앨범의 곡들 가운데 돋보이는 싱글 〈테이크 어 챈스 온 미 Take a Chance on Me〉는 비록 직설적이면서 종교적 합창음악 같은 분위기를 풍겼지만 매우 훌륭한 곡이었고, 같은 면의 다른 곡들은 아트록을 암시했다.
그룹의 해체
한편 그 앨범의 뒷면은 〈금발머리 소녀 The Girl with the Golden Hair〉라는 제목의 '미니 뮤지컬'(mini-musical)로 채워졌다. 〈앨범〉이 그룹의 예술적 진전을 이루는 동안, 울바에우스와 펠트스코그가 〈불레 부 Voulez-Vous〉(1979) 발매에 앞서 이혼함으로써 그룹 내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울바에우스와 펠트스코그 커플은 자신들의 결별로 인해 밴드 활동에 영향을 주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이 당시 발매된 〈슈퍼 트루퍼 Super Trouper〉(1980)는 이전 곡들에서 볼 수 없었던 침울함이 배어 있었다. 특히 그런 분위기는 〈위너 테이크스 잇 올 The Winner Takes It All〉과 〈레이 올 유어 러브 온 미 Lay All Your Love on Me〉 같은 곡들에서 두드러진다.
안데르손과 링스타트도 〈비지터스 The Visitors〉(1981)를 녹음하는 중에 이혼했다. 이 앨범에 담긴 노래 〈원 오브 어스 One of Us〉의 레게 리듬은 그룹에 만연했던 어두운 분위기가 그대로 드러났다. 이 두 번째 결별은 아바에게 너무 많은 고통을 안겨주었고, 1982년 밴드는 해체되었다. 아바의 그룹 해체 이후에 펠트스코그와 링스타트는 솔로 활동으로 제법 성공적인 출발을 했다. 울바에우스와 안데르손은 작사가 팀 라이스와 공동작업으로 〈체스 Chess〉(1984)를 만들었다.
이후 최근 히트곡만 모아 메릴스트립주연의 맘마미아 영화를 대성공시킨다.
YouTube에서 'ABBA : Waterloo (German TV) HQ' 보기
https://youtu.be/BoeAqeKW5W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