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대구에서 태어나고 대구에서 제일모직에서 5년간 직장생활을 하면서
계산성당에서 1980년도 세례를 받았지만
대부분 수도권에서 직장생활을 하였고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서울교구나 수원교구의 본당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수도권이나 그곳에서 좀 떨어진 곳 배론이나 배티 그리고 나바위같은곳을
절두산에 가끔씩 갔었고 주어사가 있었던 곳에 짓고있는 천진암도 가보았고
미리내 삼성산 하우현 그리고 해미도 다녀갔다
그런데 도무지 영남권에 대한 복음전파는 전혀 알수가 없었는데
몇년전에 농촌살이로 문경에 오면서 그곳에 있는 아전출신이 복자품에 올라서
시내에 그 분의 묘소와 함꼐 성지가 조성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프랑스 신부가 그곳을 다녀가셨다는 것을 알게되는데
문경 산악지역에 있는 어느 교우촌에는 왜지에서 박해를 피해 떠나온 이들이 살았다고 한다
한때 문경교우촌을 이끌던 이윤일 요한은 관원에 체포되어서
대구감영으로 끌려와서 관덕정에서 순교하십니다
그는 잠시 관덕정에서 유해를 모시다가 지금은 절두산 순교성지에 모셔져있다고 합니다
경기도 양평등지에서 유학자들이 모여서 청나라에서 건너온 천주교서적을
연구 토론하였고 이로 인해서 그들중 한분이 청으로 가는 사절단에 합류해서 중국에서
조선인으로 첫세례자가 됩니다
이들은 혈연관계를 이용해서 그들이 사는 충청도 내포지방과 호남지방으로 퍼져나가게되는데
그곳에서 박해가 일어나서 이를 피해 뿔뿔이 한양이나 충청도 경상도 내륙지방으로 흘어들어와서
산간지역에서 교우촌을 형성하면서 살게되는데
그들중에는 경상도지역으로도 내려 오게되는데
며칠전에 다녀온 밀양의 명례성지도 그 가운데 하나인셈이다
부산지역이나 진주지역으로도 교우촌이 있었다고 한다
요번 제가 지금 소속되어있는 평리성당에서 노인대학인 아름대학에서
가을 성지순례로 다녀온 밀양의 명례성지도 다분히 그 의미가 크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전국적으로 교우촌이 없는 곳이 드물정도이지만
아직도 재정적으로 약해서 이를 운영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교우촌중에서는 관리가 전혀 되지 않고 그곳에 있는 땅조차 확보하지 못하기 떄문이라고 한다
지난 문경에 있을떄에 문경출신 복자의 묘가 있는곳에서
안동교구장을 모시고 미사를 드린적이 있어서 저도 참석했었지요 문경읍내에 있는
문경성당교우들과 함꼐, 그곳에서 전국성지를 투어하는 무리를 만나게됩니다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이글을 쓰면서 순교자들에 대해서 다시 살펴보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 어렵지만 이런수준으로 유지될수가 있는것도
다 순교자의 희생덕분이라 여겨집니다
제가 요즈음에 관심이 있는 부분은 지방의 성지와 공소이고요
그리고 도시에는 구역모임이라는 것입니다
조선시기에는 특히 박해시절에는 사제없이 평신도회장을 중심으로 하는 교우촌이었고
이는 점차 공소로 발전해 나갑니다
지금 생각으로는 지금 어려움속에 있는 천주교회가 이런 수준이라도 유지되기를 바랄뿐입니다
그런의미에서 도시의 구역공동체가 이런 역할을 하기를 바랄뿐입니다
지금 여기 대구 평리성당에서도 새롭게 구역모임이 일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참석하는 이들은 대부분 나이드신 자매님들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떻게 하기가 어려운 환경이지만
지금보다 더 열악한 시기인 그 박해시절에도 그분들은 교우촌을 중심으로 공동체생활을 해나갔던
것이지요
조선에서의 박해는 복음의 씨앗이 전국적으로 퍼지게된 계기가되었다고합니다
우리보다 200년이나 먼저 복음의 씨가 뿌려진 일본은
임진왜란이후 도꾸가와막부에 의해서 천주교인들이 전부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그들은 다시 일본으로 돌아올것을 기대하면서 가까운 동남아시아로 피해가기에
그곳에서도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지만 임진왜란때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과 함께 들어온 선교사들로 인해서
추방자들중에서 조선인도 있었다고 하지만 조선땅을 밟지 않았는지 그 기록은 조선 어디에서도 남아있지
않는다
지금 본당이 어려운시기라면 아마도 구역모임이 활성화되어야 하는 시기일것입니다
하느님은 어려운시기에도 놀라운 방법으로
복음의 씨를 퍼트리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