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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꿈꾸는 살기 좋은 환경-우희종 교수
창간 20주년 기념특집 | 불교, 이상사회를 꿈꾸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치통을 과소평가하는 지식인의 말이다.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야말로 모든 생물을 포괄하는, 훨씬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진실이다. 나의 자아는 사유에 의해서는 당신의 자아와 본질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밀란 쿤데라 《불멸》(1990) 중에서
들어가며
붓다의 깨달음은 연기법이라고 하는 세상의 연기실상이었고, 이는 그 어느 것도 고정된 실체로서 영원한 것은 없으며 단지 끝없는 관계망 속에서 변화하며 펼쳐지는 관계의 집합임을 강조한다. 또한 붓다는 그러한 깨달음을 통해 세상의 고(苦)를 이야기했다. 이고득락의 가르침이 의미하듯이 불자가 세상을 바라볼 때 늘 고통에 주목하는 것은 당연하다.
연기실상과 삶의 현장에서 고통의 문제의식을 지닌 불자에게 살기 좋은 환경이란 그리 어려운 질문은 아니다. 연기 현상은 생명체나 무생물이라는 구분을 넘어 적용되는 우주 원리로서, ‘유정무정 실유불성’의 상호 존중의 시각을 제시하며 동시에 고통을 없애도록 만들어가는 것이 살기 좋은 환경에의 헌신이다. 어찌 보면 동물이 살기 좋은 환경이 사람이 살기 좋은 환경인 것이다.
한편, 환경이라는 말은 환경 속에 있는 특정 존재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환경문제라는 표현 중에는 이미 인간의 환경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세상은 인간만이 있거나 인간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기에 환경이란 말 자체가 생태계 구성원들에게는 폭력적이다. 지금은 환경이라는 표현 대신에 보다 넓은 의미로 생태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불자에게 살기 좋은 환경이란 관계지향의 생태지향으로 간략히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말하면 이미 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환경/생태 문제가 우리에게는 매우 심각한 도전이고 또한 늘 현재진행형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환경문제는 생태계 파괴로 상징화될 수 있고, 이는 우리 근대 과학문명의 산물이다. 신이 중심이었던 서구의 중세로부터 인간을 되찾아온 데카르트의 합리적 이성과 그에 근거한 과학문명의 시대가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생태계의 많은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는 현실이다.
그렇기에 또 다른 맥락에서 살기 좋은 환경을 논의하는 것은 근대에 대한 성찰을 의미한다. 근대의 사상적 기초를 만든 데카르트가 이성을 지닌 인간만을 생명으로 보고 동물이란 단지 기계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했던 사유방식이, 비록 시간이 흐르면서 외형적인 개선과 시도가 많이 있었지만, 근대문명을 이루고 있는 기본 틀로서 작동하면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자 동시에 앞으로의 숙제를 남긴 셈이다. 근대를 넘어선 살기 좋은 환경을 고민하는 것은 자연스레 포스트휴먼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게 된다.
우리의 근대문명은 2000년 2월 멕시코에서 열린 지구환경 국제회의에서 파울 크루첸이 언급한 것처럼 ‘인류세(anthropocene)’로 규정될 정도로 지구 생태계에 한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인류세가 생태계에 미친 영향은 이미 많이 논의되어 누구라도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기에 반복된 기술은 생략하지만, 이 짧은 글에서는 지구 구성원 모두가 상생하고 생명의 가치가 보다 존중되는 바람직한 환경을 위해서 필요한 것에 대하여 생각을 나눠보고자 한다.
1. 근대 사회에서의 생각
1) 현대문명에 기인한 환경문제
생태계 문제로서 다양한 측면에서 다양한 주제와 사안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러한 다양하고 중층적인 생태 문제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산화탄소 급증에 의한 지구온난화, 새로운 질병의 창궐, 많은 동식물의 멸종, 미세먼지나 미세플라스틱 환경오염 등 그 어느 사안이건 나타난 현상으로는 독립된 것이지만, 발생과 대처에 있어서 공통 기반이 있음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그 중심에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뉴욕에서 열린 ‘2019 UN 기후행동 정상회의’에서 스웨덴의 10대 소녀 ‘그레타 툰베리’는 기후변화 대처의 긴급함을 호소했고, 각국 정치인들의 무관심과 나태함을 질타했다. 그런 툰베리에 동의하며 함께 행동하려는 움직임 역시 국제적인 호응을 일으키고 있어, 노벨 평화상 수상까지 거론될 정도다. 또한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미국의 대표적 거대기업이 된 구글(Google) 직원들이 회사에 기후변화에 대한 행동을 요구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다.
비행기를 타고 온 미국 출장 중에 호텔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데, 호텔 창문 너머로는 비행기의 끊임없는 이착륙이 보인다.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 발생에 비행기가 얼마나 많은 기여를 하고 있는지도 종종 언급되고 많이 알려져 이제 낯설지 않다. 툰베리도 이 점을 늘 상기시킨다. 그러나 나 역시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왔고, 이곳에서 한 회의 내용도 한두 나라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전 세계 여러 나라와의 관련성 속에서 진행되었다. 세계화 흐름 속에 좁아진 지구가 지탱하고 있는 것은 인터넷과 같은 가상세계 때문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높은 이산화탄소의 발생 덕분인 셈이다.
지구온난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제 정상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논의해왔고 다보스 포럼에서도 검토되어, 각국은 이산화탄소 저감을 위한 대책을 수립했다. 각국은 유예된 일정 기간 후에 약속된 이산화탄소 저감 조치를 실행해야 하지만, 실질적인 이행이 얼마나 이뤄질 것인지는 미지수다.
또한 이산화탄소 규제에 의한 산업개발이 제한되는 저개발국으로서는 각국의 개별 상황이 거의 반영되지 않는 국제 규제 역시 이미 어느 정도 이산화탄소 발생에 기반한 개발이 진행되어 이제는 정보산업 등의 저-이산화탄소 발생 산업으로 이행되고 있는 강대국의 횡포로 받아들이면서 반발도 많다. 표면적으로는 지구를 보전한다는 것이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기존 국제질서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기득권 국가들의 논리이기도 하다.
이는 새로운 핵보유국에 대하여 기존 핵보유국들이 반발하면서 평화를 내세워 비핵화를 요구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핵 실험에 전념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지구의 허파라고 불리는 아마존 개발을 서두르고 있어 국제적으로 우려와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브라질 정부와 국제사회 간의 긴장도 동일한 맥락이다.
2) 인간중심주의의 문제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갑’이 되지 못하고 ‘을’의 위치에서 신의 횡포 속에 신음하던 중세 당시, ‘보다 살기 좋은 환경’을 위한 시도와 행동은 신으로부터 인간을 되찾아 세상의 ‘갑’의 위치로 이전시킨 근대적 사유에 있었다. 이제는 근대적 사유의 폐해 속에 또 다른 ‘보다 살기 좋은 환경’을 위한 시도와 행동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데카르트는 인간 이외의 생명은 기계로 파악한 바 있다. 근대에서 인간이 지구 주인이 되어 생태계 내의 모든 생명체 존립 위기의 원인이 된 현실 밑바탕에는, 생태계 내의 수많은 동식물을 생명이라고 하면서도 그들 생태 구성원에 대하여 단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자원으로서 생명 없는 기계로 바라보는 데카르트적 기계론이 우리에게 내재화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인간이 세상의 주인이 되는 근대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한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 충족을 바람직한 사회적 가치로 자리 잡게 했고, 또한 이를 위한 무한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생산성과 효율 극대화를 이루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신자유주의의 가치가 존중되는 현실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환경과 생태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허약한 지식인들의 글이나 관념적인 이상론으로 전개되었을지언정 정작 구체적 행동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이렇게 문제 개선이 무수히 거론되고 이제 어린 10대 소녀까지 국제정치 무대에서 환경문제와 생태계 복원을 위한 우리의 행동을 하소연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은 표면적으로 거론되는 경제적 이유를 넘어 생각해볼 지점이 있다.
‘보다 살기 좋은 환경’을 위한 변화가 이처럼 가시적 모습을 유도해내지 못하는 것에는 경제적 이유 외에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의 데카르트적 사유체계를 대체할 사고방식이 부재하다는 점이다. 아니, 부재라기보다는 이미 제시되어 있건만 과학문명으로 일컬어지는 근대적 사유의 유혹을 넘기가 어렵고, 또 구체적 행동으로 실행할 의지가 부재하다고 할 수 있다.
3) 욕망의 확대와 재생산의 문제
근대식 사유의 가장 큰 장점이랄까 매력은 인간 욕망에 충실하다는 점이다. 갈애(渴愛)로 표현되는 무한한 인간의 생물학적 욕망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면서 그 욕망에 충실한 많은 이들의 열광적 환영이 있다. 그런 인간 욕망 만족의 결과가 지금의 지구적 환경파괴의 기원이고, 그 결과로서 인간이 살기 힘든 환경 조성으로 이어지게 되는 순환 및 재생산 구조가 되어 버렸다. 살기 좋은 환경을 말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인간 중심 사고와 생물학적 욕망에 대한 성찰, 그리고 행동 없이는 결코 이뤄지지 않는다.
살기 좋은 환경에 있어서 욕망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욕망이야말로 뭇 생명을 꽃 피워 아름다운 생태계를 이루고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다. 욕망이 이렇게 문제가 되는 것은 오직 인간이 지구 생태계의 주인이라는 착각과 더불어 그런 욕망 속에 갇혀 끌려가면서 지구 생태계를 인류 존재의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모습 때문이다. 욕망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은 생명 존중과 더불어 근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생명에 대한 권리 보장이라는 차원에서 포스트-휴먼을 고민하고 동시에 동물권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2. 포스트휴먼 시대의 생명
1) 생명존중은 고통을 공감하는 것
현재 생명에 대한 현대과학의 일반적 정의는 생명체는 물질적 형태를 지니고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한 대사작용, 자기복제, 그리고 진화하는 특징을 지니는 것으로 한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는 지극히 물질적인 관점으로써, 근대의 합리적 이성에 근거하여 철저히 유물적이고 동시에 기계론적 관점이자 분석적이고 환원주의적인 입장이다. 이러한 관점은 근대적 보편성을 전제로 한 전형적인 거대담론(meta-discourse)의 방식이다.
하지만 생태학적 관계성에 의존해서 다양한 형태의 각각의 존재 및 삶의 형태로 나타나는 뭇 생명체는 보편성에 근거한 거대담론 방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보편 개념으로 생명체를 설명하는 입장에서 생명의 존엄성이란 그저 나와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혹은 나와 같은 생명체이기 때문에 존중해야 한다는 식의 결론만을 얻게 된다.
지구 생명체의 시발(始發)은 언제부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자리에 생명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과거 이 우주가 시작된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고, 현대 천체물리학이 말하듯 약 138억 년 전의 우주 대폭발(Big Bang)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모든 생명체가 지금 이 자리에 각기 고유한 개체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우주 시작과 더불어 비롯되어 그 이후 면면히 내려온 지속성(연속성)이라는 우주와 생명의 역사를 필요로 한다.
《시간의 역사》에서 스티븐 호킹 박사가 말하듯이 우주 대폭발 이전에 대해서는 인간이 논할 수 없다면, 최소한 우리 모두는 각기 138억 살의 나이인 셈이다. 물론 이것은 인간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에 해당된다.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서 일정 기간 지구상에 존재하다가 소멸하지만, 이렇게 죽음이 전제된 유한한 생명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역사성은 각 존재의 현재 모습에 반영되어 있으며 또한 앞으로 태어날 미래 세대의 모습에 반영된다. 지금 현존하는 생명체와 앞으로 존재할 미래의 생명체는 과거의 생명체가 남긴 시간의 흔적을 담고 연결된다. 이는 사람과 동물이 다르지 않다.
상호의존 관계성에 의한 생명체는 타인과 구분되는 배제의 관계 속에서 동시에 타자와의 열려 있는 관계에 의해서만 존재 가능하며, 자족적으로 존재할 수 없기에 관계의 종료에 따른 생명체의 소멸이라는 죽음을 태생적으로 지닌다. 동물은 지구 생태계 내의 지위에 따라 다양한 경로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만, 저마다의 ‘생로병사’라는 삶의 과정을 겪는 생명체에게 죽음이 필연적이라는 것은 생명 존중이 단지 죽음을 피하거나 오래 살게 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한편, 유기체적 생명체가 무기물과 다른 점은 생명체는 고통을 느끼는 존재다. 인간과 동물의 몸은 그냥 단순한 물체이거나 고깃덩어리가 아니라 살로 이뤄진 활동 주체이자, 의식 형성의 기반이다. 죽은 생명체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듯이, 생명체의 몸을 살아 있게 만들어주는 최소한의 기본 작용은 신체가 겪고 느끼는 통증에 있다. 따라서 생명윤리 내지 생명존중의 문제는 죽고 사는 생사의 문제라기보다는 고통을 느끼는 주체의 문제임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동물 역시 초보적인 논리에 근거한 이성 작용을 하고 있고, 사람과 동일한 사유체계는 아닐지라도 그들 나름의 인식체계로 자연을 이해하고 살아간다. 또한, 정신지체장애자와 같이 이성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 인간도 인간으로서 권리가 존중되듯이 이성 능력만으로 동물을 차별할 근거는 없다. 신이 곧 자연(Devssive natura)이라는 범신론을 주장한 스피노자를 비롯하여 근래에는 《동물 해방》을 쓴 피터 싱어나 모든 생명체를 민주주의 구성원으로 포함시키는 게리 스나이더와 같은 이들도 있듯이, 이성 능력으로 차별화가 부정되는 지점을 넘어 인간과 동물의 공통 기반으로서 고통에 주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농장 동물에 있어서 불필요한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이 생명존중이자, 동물복지와도 이어지는 생명윤리의 기반이다.
2) 인류세 속 고통의 주체인 동물
먼저 가축 살처분에서 논의의 시발점인 인간사회와 동물 간의 관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근대사회를 이루고 있는 기본적인 세계관은 인간 중심으로 이뤄져 있으며 지금은 인류세(Anthropocene)로까지 일컬어진다. 인류세의 기초를 이룬 데카르트는 합리적 이성을 강조했고, 동물을 기계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사람과 동물은 감정을 가진 존재이자 타자와 공감할 수 있는 존재다.
사람과 동물에서 희로애락의 감정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고 그 차이에 대한 논의도 있지만, 동물 역시 고통을 느끼는 주체임은 부정하지 못한다. 사회생물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대넷과 해체주의자인 데리다를 중심으로 언어를 바탕으로 사람과 동물의 인식에 대하여 논의되는 와중에 잠시 언급된 것처럼, 고통 역시 정신적인 고통(suffering)과 신체적 통증(pain)으로 나눠서 살펴볼 필요가 있고, 동물도 정신적 고통을 느끼는 것은 더 말할 나위 없다.
무기체와 다른 유기적 생명체인 동물과 인간의 공통 기반이 고통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통증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이에 대한 공감 능력으로 각각의 구성원들에게 생태계 내의 적절한 위상을 부여할 때, 근대의 휴머니즘이 만들어낸 인간 중심의 인류세에서 동물권의 기본적인 위치가 바로 자리 잡을 수 있으며, 현재 지구 생태계 내 지위라는 맥락에서 산업 현장과 연계될 수 있다.
존재 차원에서 생태계 내의 대등한 구성원이라 해도 생태계 내에서는 먹이사슬의 형태로 존재하기에 모든 구성원이 대등한 권리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고통을 느끼는 존재라는 관점에서 권리에 대한 접근을 한다면, 생태계 내의 자연스러운 위치에 준하는 권리 내지 존중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현장에 구체화시킬 필요가 있다.
3) 고통의 주체로서 동물과 복지
가축들에게도 그들답게 살아야 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 1970년대 영국을 기점으로 시작하여 유럽연합(EU)으로 확대되고, 국내에서도 동물보호법이 있어 제3조에 동물보호 기본원칙과 동물 학대 행위를 명기하고 있으나, 구체적 지침과는 거리가 멀다. 더욱이 국제적으로 각 동물의 살처분 규정이 부족하나마 마련되어 있지만, 국내에서는 시급성을 이유로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심지어 생매장까지 이뤄졌다.
동물복지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면, 동물이 건강하도록 돌보는 것, 동물이 고통과 학대를 당하지 않는 것, 동물에게 적절한 주거환경 제공, 관리, 영양 제공, 질병예방 및 치료, 책임감 있는 보살핌, 인도적인 취급, 인도적인 안락사 등 동물의 복리와 관련한 모든 것을 제공하는 인간의 의무(미국 수의사협회), 동물이 건강하고 안락하며 좋은 영양 및 안전한 상황에서 본래의 습성을 표현할 수 있고 고통, 두려움, 괴롭힘 등의 나쁜 상태를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질병예방, 수의학적 처치, 적정한 축사, 관리, 영양, 인도적 취급 및 도축 · 살처분 필요(OIE, 세계동물보건기구) 등 다양하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다양한 생태적 지위에 있는 각각의 동물복지라기보다는 포괄적 언급에 그치고 있는 점이다. 반려동물과 농장동물 내지 산업동물로 불리는 가축, 실험동물, 동물원을 포함한 레저용 동물 등, 각각에 적합한 동물복지 개념을 각 나라나 문화권에 맞추어 세부적으로 재정의하고 사회적 합의를 도출할 필요가 있다.
4) 생태계 약자로서의 동물과 사회 약자
인류세(Anthropocene)라고 불릴 정도로 인간 중심의 근대사회에서 동물은 약자이다. 생태계 파괴나 인간 욕심에 의해 많은 동물이 멸종을 겪는다. 이런 상황에서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란 약자에 대한 공감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감 능력과 어느 정도 함께 간다고도 볼 수 있다.
생명을 존중하고 동물을 사랑한다는 것은 생명체가 지닌 고통을 함께하며, 약자에 대한 배려와 관심을 담는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은 자연스레 4차산업 등의 구호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포스트-휴머니즘에 반영된다. 포스트휴머니즘은 근대사회의 기본 가치인 휴머니즘(Humanism)이 기반하는 인간 중심의 사고(Antrop-ocentrismo)를 넘어서려는 사상이나 운동으로 볼 수 있다.
비록 이러한 논의의 시발을 미셸 푸코(M. Foucault) 등의 포스트모더니즘을 거쳐 1990년대로부터 볼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인공지능(AI) 및 관련 4차산업 분야의 대두와 함께 활발하게 논의되었고, 이는 포스트휴머니즘이 기본적으로 인간과 앞으로 예상되는 인간과 유사한 기계구조물 간의 관계 설정을 담고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포스트휴머니즘이 과학기술에 의한 인류의 증강을 담고 있는 트랜스-휴머니즘과 혼동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장차 자율적 인공지능의 등장이 예상됨에 따라 인간 중심 사고를 벗어나야만 하는 위기에 처한 인간이 부딪히게 되는 첫 질문은 인간이란 무엇이며,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요소가 무엇인가일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은 인간과 소통하며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AI를 어떻게 보며, 이들과의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에는 그리 이견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트랜스휴머니즘이 철저하게 인간 위주의 근대적 사유방식을 담고 있듯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의식 역시 스스로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 위주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포스트휴머니즘 논의에서 제기된 여러 논의점은 인간 삶의 터전인 지구 생태계의 다양한 구성원들에 대한 무시 내지 삭제를 전제한 논의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논의의 중심이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되, 논의의 지평을 AI와 인간으로 국한시키는 것은 지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지구 생태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구성원들의 상호의존성은 생태학의 기본적인 바탕을 이룬다. 따라서 지구 생태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종류의 생명체들, 동물, 식물, 세균 등등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의미를 간과한 채 AI에 의한 사회변화를 거론하는 것은 지양할 필요가 있다.
5) 지구건강과 생명
이러한 움직임은 2010년경에 시작되어 현재 국제보건기구에서 취하고 있는 기본입장인 사람-동물-환경의 통합건강(One Health)을 넘어 최근 들어 제시된 지구건강(Planetary Health) 개념에 담겨 있다. 지구건강의 개념은 2015년 록펠러 재단과 의학 전문지인 《랜싯(Lancet)》의 공동 제시로 시작되어 야생동물보존협회가 함께하고, 하버드 대학에서 학부강좌로 자리 잡았다.
생태문명(Ecological Civilization)의 접근과도 일맥상통하는 이 개념은 인간 문명과 더불어 이러한 문명이 가능하도록 한 자연 생태의 건강성이란 관점을 지닌다. 단지 인류를 위협하는 질병이 없는 사회보다는 생태계 구성원 모두의 건강성(wellbeing)을 지향하며, 특히 지구적 규모로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는 인류 지식의 구조와 지배체제에 대한 우려를 담는다. 기존의 ‘세계 건강(Global Health)’과의 차별성을 보여, 인류문명의 근간인 자연 생태적 중요성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2008년 에콰도르 제헌의회는 안데스와 아마존이라는 생태계에 의존해 살아야만 하는 자신들의 입장에 따라 숲속 동물들에도 생존권을 보장하는 취지로 자연에 권리를 부여하는 ‘자연권’ 헌법을 제정했다. 자연이 인간을 위한 종속적 활용가치만으로 그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본질적 가치(valor intrinseco)가 있음을 헌법을 통해 인정함으로써,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모든 생물에게도 ‘지속해서 존재하고 재생하며 진화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인간 중심적 관점이 아닌 생명과 생태 중심의 관점에서 사유해야 하는 흐름은 이미 독일도 2002년 ‘국가는 미래 세대의 관점에서 생명의 자연적 기반과 동물을 보호할 책임을 가진다’는 내용을 세계 최초로 헌법에 명시해 동물권을 보장함으로써 자국 내의 공장식 사육이 개선된 사례로부터도 잘 알 수 있다. 후기산업사회에서 점차 인간 이외의 생태계 구성원에 대한 권리 인정과 존중이라는 인식은 분명하다.
생태계 내에서 사람과 동물의 위치를 결정적으로 차이 나게 한 지점으로서 인지과학자들의 주요 연구대상인 단순 인지작용이 아니라 메타 인지(meta-cognition)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관점에서 생명체의 생태적 지위를 결정할 차이는 신체적 통증에서 찾을 수 있다. 생명체의 특징 중의 하나는 ‘개체 고유성(individuality)’에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개체 고유성을 이야기하면서 정신적인 자기를 쉽게 생각하지만 신체적 자기에 대해서는 간과하기 쉽다. 하지만 생명체 각각의 개체 고유성은 오히려 신체 고유성에서 그 특징이 두드러진다.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생명체의 정신작용은 철저히 신체의 감각기관에 의존해서 외부와의 관계 속에 형성된다. 외부 자극-반응-기억-망각의 형태로서, 뇌신경계라는 닫힌 물질적 구조에 근거하는, 물질화되지 않은 신체 일부로 볼 수 있다. 동일한 외부 자극-반응-기억-망각의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면역계라는 열린 구조 속에서 신체적 자기를 형성한다.
6) 고통과 동물권
바람직한 환경을 위한 인간과 동물의 공동 생존 모색이야말로 진정한 포스트모더니즘 논의의 출발점이지만, 이에 선행되어 고려되어야 할 것은 동물권의 확보다.
통증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이에 대한 공감 능력으로 각각의 구성원들에게 생태계 내의 적절한 위상을 부여할 때, 근대의 휴머니즘이 포스트휴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진정한 휴머니즘을 이루게 될 것이다. 어찌 보면 이는 인류세를 만들어 낸 인류의 책임과 의무이기도 하다. 이때 중요한 것은 단지 인지 활동이 아니라 프란스시코 발레라 등이 지적하듯이, 생체적 몸이라는 물리적 기반이라면, 몸은 통증으로 자신을 드러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굳이 몸을 강조한 메를로 퐁티나 생명 정치(biopolitics)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인간과 동물의 몸은 그냥 물체이거나 고깃덩어리가 아니라 살로 이뤄진 활동 주체이자, 의식 형성의 기반이다. 몸을 몸으로 만들어주는 최소한의 기본 작용은 신체가 겪고 느끼는 통증에 있다. 공감이란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가능할 것이다. 동물권을 되찾는다는 것은 지구 생태계 내에서 동물들의 권리를 인간과 같이 끌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간이 다른 생태계 구성원들에 대하여 취했던 특권을 내려놓아 동물 수준으로 스스로 맞추는 것을 의미한다. 동물을 주체적 존재로서 사랑한다면 그들 눈높이에 우리를 맞추는 것이다.
3. 나가면서
인류세에 대한 자각과 성찰, 그리고 무엇보다 행동이 요구된다는 누구나 쉽게 말할 수 있는 이런 답변이 정작 힘을 발휘하려면, 이런 문제를 제기하고 답을 찾는 이들의 작은 실천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환경 자원을 남용하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이 대기업과 생각 없는 이들만의 행위라고 착각한다면 살기 좋은 환경은 영원히 신기루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환경문제를 이야기한다면서 이미 수없이 거론되는 환경 위기 사례를 굳이 다시 열거하면서 반복해 기술하거나, 거창하게 유명인들의 발언을 가져와 글을 꾸미는 행위 자체가 지극히 비환경적이자 반생태적 행위임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불필요한 그런 행위로 인해 종이와 잉크를 만드는 자원의 불필요한 자원이 소비되고 더 나아가 그것을 읽는 이들의 시간마저 빼앗는 것이다. 길고 장황한 동어반복의 글쓰기 행위에 있는 것 역시 불필요한 욕망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 의식이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내기 위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셈이다.
결론적으로 오래된 불교의 가치이자 모든 문화권의 현인들이 강조해온 소욕지족의 가치가 다시 한번 언급되어야 한다. 특히 불필요한 언설의 낭비를 경계하며 지금 이 자리의 삶의 소중함을 강조한 선사들의 불립문자와 일상에 대한 재발견은 강조될 필요가 있다.
근대 사유를 통한 인류세가 만들어낸 지금의 환경문제가 결국은 생태문제이자 인간만이 아니라 지구 구성원 모두의 안위를 힘들게 하는 것임을 인지할 때 신자유주의를 넘어선 다음 시대의 생각 틀(paradigm)에 대한 고민과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는 요즘 인공지능과 유전공학의 발전을 목전에 경험하면서 거론되는 포스트휴먼 논의와 연계된다. 사물과 인간이 연결되어 그 경계가 허물어지고, 인간의 우월성이 자율적 기계에 의해 부정될 수 있음은 인류세에 길든 이들에게는 충격일 수는 있지만, 생태계에 대한 인간의 오만함을 인지하고 있던 이들에게는 그리 낯선 상황은 아니다. 그 점에서 살기 좋은 환경 논의는 포스트휴먼에 대한 성찰로 이어져야 하고 동시에 생명존중과 동물권이 그 중심에 자리해야 한다.
다만 살기 좋은 환경이라는 주제를 고민하면서 생태계 위기를 살피는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만물은 서로 돕는다’는 사유체계의 아나키스트들이나, 특히 연기실상에 익숙한 불자들에게는 더욱 그렇지만, 우리가 길든 인간 중심과 신자유주의의 욕망에 대항하는 일상생활에서 게으름 실천이다. 지구 구성원 모두가 행복하게 되기 위한 첫걸음이 게으름과 느림이기에 게을러서 짧게 글을 쓰는 것 자체도 살기 좋은 환경에 대한 실천이다.
인생, 서둘러 살지 말자. 불자에게 익숙한 연기실상과 욕망의 무상함의 가치는 시대를 넘어, 온갖 환경 파괴와 생태계 교란이 빚어지고 있는 인류세에 있어서 더욱 빛난다. 우리부터 장황하고 방만한 삶의 모습으로부터 간략하고 분명하게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이웃과 공유하며, 불필요한 고통을 야기하는 모든 현상을 줄이기 위하여 참여하고 행동하면서 노력하는 것이 지구 구성원 모두의 상생과 생명존중의 살기 좋은 환경에 대한 지름길임을 믿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과 글이 아니라 실천이자 행동이다. ■
(이 글은 2016년 대한민국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 내용을 포함함. 2016S1A5A2A03926283)
우희종
서울대학교 수의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수의학과 졸업, 일본 동경대학교 약학부, 생명약학 협동과정 석사, 박사. 미국 Wistar Institute 겸임연구원, 하버드대 의대 연구강사 등 역임. 저서로 《생명과학과 선》이 있고, 공저로 《인류의 스승으로서의 붓 다와 예수》 《욕망, 삶의 동력인가 괴로움의 뿌리인가》 등이 있다. 불교평론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