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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통가리오산 트레킹을 하다가 정상 부근에서 어린 아이를 배낭에 메고서 등반을 하는 한 부부를 만났습니다.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조금 더 가다가 한 젊은 부인이 아주 어린 아기, 갓난 아기 수준의 아기를 가슴에 안고서 산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와 저런 아기를 데리고 등산을 다하네’ 감탄이 나왔습니다.
처음 보는 젊은 아기 엄마이지만 그 여인은 자기 세계가 분명히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린 아이와 함께 산행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진취적인 면이 있고, 자기 훈련이 되어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아이의 안전만 생각했다면 집안에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이를 안전하게 보호할 자신감이 있다는 자기 신뢰가 있기에 차갑고 바람 부는 산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녀양육은 부모된 자의 가치관에 따라서 다 다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최선과 최상의 양육을 하려고 합니다. 부모가 최선을 다한다고 할지라도 자녀가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장만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농사가 힘들다고 해도 자식 농사보다 힘든 것이 없다’는 말을 합니다.
우리 믿는 자의 자녀 양육의 최고 목적은 우리 자녀를 예수님처럼 성장하는 것, 예수님처럼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자랐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과 자료는 없습니다. 오직 누가복음 2장에 조금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함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42)
예수님의 아기시절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장하면서 51절에 보면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를 “순종하며 받으시더라”고 했습니다. 가정에서 효성스러운 아들의 모습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성장을 함축적으로 설명하기를 52절에 설명합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우리 자녀들도 예수님처럼 육체적인 성장, 지적인 성장, 사회성이 있는 성장, 그리고 영적인 성장이 균형있는, 전인적 성장이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성장은 저절로 된 것일까요?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육신적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의 성장에 있어서 모범적인 역할을 다 했을 것입니다.
그 한가지 예로, 해마다 유월절이면 예루살렘 순례여행을 할 정도로 율법을 준행하며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린 예수님을 양육하는데에 부모의 역할을 다하고자 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자녀의 양육에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기 위해서 부모로써 어떤 역할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부모는 자녀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그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로 어떤 부모가 데리고 온 어린 아이들은 갓난 아이들을 말합니다. 자기 스스로는 예수님께로 나올 수 없는 아기들입니다. 이들을 부모가 데리고 왔습니다.
왜 데리고 왔습니까?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의 자녀들을 훌륭한 랍비(선생님)에게 데리고 가서 축복을 받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때에 랍비들은 아이들의 머리에 손을 얹어서 축복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관습 때문인지, 아니면 아이에게 무슨 질병이나 문제가 있어서 그렇게 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많은 부모들이 자신들의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러니 그 현장의 상황이 어떠했겠습니까? 그곳은 어수선하고 떠들썩했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웃고, 울고, 떠들고 야단법석을 떨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단속이 필요했습니다. 떠드는 아이들을 꾸짖고 그 부모님을 책망했습니다. 너무 소란스럽고 무질서 했기 때문에 말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수행하는 제자들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제자들의 행위를 저지하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사실에서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예수님께로 데리고 와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로 나오는 것을 막아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교회를 섬길 때입니다. 제가 지도하는 아이 중에서 똘똘하고 쾌활하고 리더쉽이 있어 고2때에는 학생회 회장까지 했습니다. 그런 아이였는데, 고3이 되자 아들이 교회에 나오지를 않는 것입니다.제가 아이를 만나 물어보니다. ‘부모님이 대학에 입학한 후에 교회에 나가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은 교회에서 아주 활동을 열심히 하는 집사님들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이제 40대의 중년이 되었을 것입니다. 대학을 졸업을 하고 어떤 회사에 취직을 했는지, 지금은 어떤 사람이 되어서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궁금합니다.
부모님은 세상살이에서 이래도 저래도 된다는 타협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무리 그래도 분명한 선’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아버지가, 우리 엄마가 그때에 그렇게 했지’하면서 타협하고, 신앙에서 떠나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에 의해 아이가 컨토롤 될 수 있을 때에 이런 신앙의 분명한 선을 보여주고,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춘기를 지나고 대학생이 되면 그때에는 부모라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하겠습니다.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로 나아와서 배우고, 쉬고, 맡기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믿는 일에 최우선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을 유치원에 보내고, 학교에 보내듯이 예수님께로 나아오게 하십시오. 신앙인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책임이 부모 된 자에게 있습니다.
2. 부모는 성경을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식 위주의 교육을 추구합니다. 좋은 대학을 들어가서 좋은 직장을 가지도록 도와줍니다. 이게 교육의 전부가 아니지 않습니까? 열심히 공부를 하고 학문을 쌓는다는 소중합니다.
세상의 이치와 우주 만물의 질서를 아는 것은 참으로 귀합니다. 많이 배우고 익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다가 우리 자녀를 절름박이 지식인을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모른다면, 신앙이 바탕되지 않는다면 절름발이 지식에 불과합니다. 잠언 1:7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창조주 하나님을 배우고 알고 깨달을 수 있는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세상의 지식이나 학문과 더불어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성경은 가정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읽는 것부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기초입니다. 부모가 매일 성경책을 잡고 읽고 묵상하는 모습이 자녀들에게 보여져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교육의 시작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지성이 잘 연마됩니다. 그 증거가 유대인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은 세계에서 가장 지성이 발달된 민족입니다. 그들을 불과 1450만 명이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680만명이 미국에 거주합니다.
놀라운 것은 노벨상 수상자가 지금까지 950여명인데 그 중에 20% 정도, 200여명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미국의 대학교수 중 25%가 유대인입니다. 그 외에도 각계각층에서 지도력을 발휘하는 저명인사들 중에 유대인의 비율이 월등하게 많습니다.
특별히 재계와 정치계에서는 그 어떤 세력도 대항하지 못하는 막강한 인맥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이 세계적인 석학과 지도자들이 많이 나오는 것을 두고서 학자들의 견해는 선천적인 결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뇌 자체가 좋아서 그런 게 아닌 다분히 후천적인 노력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교육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제가 유대인 교육에 관한 다큐를 보는 가운데, 이스라엘 대학의 도서관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조용한 도서관과는 달리 아주 시끄러운 도서관을 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혼자서 책을 조용히 보고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사실이 정말 그러한 지를 동료나 랍비들과 토론하면서 자기 생각을 정리하면서 정체성을 정립해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교육을 한마디로 하면 쉐마교육, 하나님의 말씀교육입니다. 신명기 6:4-9에서 “이스라엘아 들으라”(쉐마 이스라엘)입니다.
유대인들은 자녀들에게 아주 어릴 적부터 율법을 가르칩니다. 얼마나 철저한가 하면, 아이가 사물을 분간할 무렵에 성경책을 주고, 그 겉표지에 꿀을 발라놓습니다. 그러면 아이가 성경책을 가까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가 알아듣든지 그렇지 못하든 성경을 읽어줍니다. 켜가면서 말씀을 공부하고 암송하고 실천하다 보면 지성이 계발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핵심인 예수님을 모르고도 유대인들은 놀라운 지성의 사람이 되었는데, 성경의 핵심주제인 예수님을 알고 믿는 우리가 성경을 가까이하고 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링컨 대통령은 잘 아시는 대로 위대한 그리스도인 입니다. 그의 생애를 연구한 전기 작가는 말하기를
“그는 훌륭한 지도자가 될 만한 그 어떤 조건도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두 가지를 주셨다. 하나는 가난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의 어머니였다”
라고 했습니다.
한번은 링컨이 가장 절친한 친구였던 빌리 헌던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었습니다. “나는 어려서 글을 잘 모를 때부터 어머니가 성경을 읽어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네. 지금도 내 마음 속에는 통나무집에서 어머니가 성경을 읽고 기도하던 소리가 울리고 있지. 오늘 내게 속한 모든 것은 천사 같은 내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네”
성도 여러분, 가정에서부터 자녀들이 성경을 접하도록 하십시오. 부모님이 먼저 읽으십시오. 가정예배 때에 성경을 읽으십시오. 자녀들과 함께 말씀묵상을 하십시오.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전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3. 부모는 자녀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남겨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이 있습니다. 시골 깡촌에서 출세한 사람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말을 쓸 수 없다고 합니다. 대신에 ‘강남에서 용난다’는 것입니다. 깡촌에서, 지방에서 출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수도권이나 서울도 안됩니다. 모든 부의 집합지인 강남의 자녀들이 출세하고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몇 년 전부터 한국사회의 큰 이슈 중의 하나가 ‘수저론’입니다. 누구는 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나오고, 어떤 사람은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타고난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회구조 속에 있다고 한탄하며, 흙수저들은 희망없는 삶 속에 신음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못한 흙수저라도 신앙을 겸비한 사람이라면 금수저보다 나은 초일류의 멋진 삶을 살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 16:26)
아무리 재벌이 되고, 큰 권세를 얻어도 영생을 얻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런 말을 합니다.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조금 주는 것이요, 공부시키는 것은 조금 더 주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을 물려주는 것은 전부를 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
저는 우리 자녀들이 세상적으로 좀 못나고 부족해도 하나님 앞에서 신앙이 확실하면 어떤 상황이나 조건 속에서도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 멋지게 그리고 영향력 있게 살 수 있다고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하면서 맨 마지막에 문안인사를 합니다. 그 중에 한 가정을 소개합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롬 16:13)
이 루포는 초대교회의 헌신된 일꾼으로 쓰임받은 사람입니다. 그 어머니를 두고서 바울은 내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낳은 어머니가 아닙니다. 믿음의 어머니, 기도의 어머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을 위해 헌신된 섬김이 있었기에 그렇게 문안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교회를 섬겼으니 자신의 자녀와 가정을 위해서는 오죽했겠습니까?
이런 루포와 어머니가 신앙의 멋진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이 가정에 신앙을 심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믿음의 유산을 심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루포의 아버지입니다.
그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대신 골고다 동산을 올랐던 사람입니다. 바로 구레네 시몬입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지는 동안 예수님을 목격하고 예수님을 영접한 은혜를 누렸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 신앙의 유산을 아들과 아내에게 물러주었습니다. 그리고 부부는 자식들(루포와 알렉산더)에게 전수해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자식 상팔자’라는 말을 합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말도 합니다. 그만큼 자녀를 키우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땅에 태어나서 이 이로다 소중하고 복된 사역도 또한 없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늦다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 자녀를 예수님께로 데려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양육하며 믿음의 본을 보여주는 부모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눈물로 기도의 씨앗을 심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다음 세대에 위대한 신앙의 유산을 남기는 멋진 부모님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께서 오실 때에 564, 2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