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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과 안익태 그리고 애국가
(1) 손기정을 사랑하는 어느 독일인의 글
다음 글은 슈테판 뮐러(Stepan Muller)라는 독일인이 자신의 개인 홈페이지(www.sc-town.ag.vu/)에 올린 글인데 일본인을 〈[원숭이〉라고 표현했다는 문제로 일본 유학생 중 한명이 일본의 어느 게시판에 올렸다. 그 후 그 독일인의 사이트는 해킹 당하고 작성자의 개인 정보가 유출당해 일본의 우익들로부터 테러에 가까운 협박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자 한국인 유학생도 그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한국어로 그 사이트의 문제가 된 글을 번역해서 올린 것이다. 전문을 보자.
―당신은 감동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가.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지도를 펴기 바란다. 아마 당신이 알고 있을 중국과 일본 사이에 한반도가 있고 그곳에 한국이라는 나라가 보일 것이다.
이야기는 이 조그만 나라의 어느 마라토너가 중심에 있다. 이 나라는 지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중국과 일본이라는 두 무력에 의존하는 나라 사이에서 놀랍게도 2000년간 한 번도 자주성을 잃어본 적이 없는 기적에 가까운 나라다. 그리고 이럴 경우 이 한국인들은 나라 대신에 "민족"이라는 표현을 쓰기를 좋아한다.
베를린 마라톤 우승자는 웃음이 없다. 왜일까? 가슴의 일장기(日章旗)가 말해준다.
어느 여름날 우연히 본 한 장의 이 사진 때문에 나는 이 나라, 아니 이 민족의 굉장한 이야기에 빠져들고 말았다. 1936년 히틀러 통치 시절, 베를린에서 올림픽이 열렸고 그 때 두 일본인이 1위와 3위를 차지하였다. 2위는 독일인이었다. 헌데 시상대에 올라간 이 두 일본인 승리자들이 표정…!. 이것은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슬픈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불가사의한 사진…!.
무엇이 이 두 승리자들을 이런 슬픈 모습으로 시상대에 서게 했는가.
과거도, 그리고 현재도 가장 인간적인 유교(儒敎)라는 종교가 지배하는 이 나라 아니 이 민족은, 이웃한 죽음을 찬미하고 섹스에 탐닉하는 일본인에 대해「영리한 원숭이」에 불과하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며 불행히도 이 인간적인 품위를 중시하는 자부심 강한 민족이 이 원숭이들에게 "강간(强姦)" 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침략, 즉 식민지로 떨어지고 말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당시 대부분의 불행한 식민지의 청년들은 깊은 고뇌와 번민에 개인의 이상을 희생하고 말았고, "손(孫)" 과 "남(南)" 이라고 하는 두 청년들 역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이 두 청년들은 달림으로써 아마도 자신들의 울분을 표출해야만 했는지도 모른다.
이 두 청년들은 많은 일본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마침내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달렸을 것이다. 달리는 내내 이 두 청년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들은 승리했고 시상대에 오를 수 있었지만 그들의 가슴에는 조국 한국의 태극기(太極旗) (이 국기는 대부분의 나라의 그것이 혁명이라든가 투쟁이라든가 승리 또는 위대한 황제의 문양인데 비해 우주와 인간과 세상 모든 것의 질서와 조화를 의미한다,) 대신에, 핏빛 동그라미의 일장기가 있었고, 스탠드에 역시 이 핏빛 일장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손기정은 월계관을 벗어서 일장기를 가리고 있다.
이때 이 두 청년의 표정이란! 그들은 깊게 고개를 숙인 채 한없이 부끄럽고 슬픈 얼굴을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뉴스를 전한 일본 검열하의 한국 신문 eastasia(동아일보를 지칭하는 듯)는 이 사진 속의 일장기를 지워버리고 만다. 이 유니크한 저항의 방법…. 과연 높은 정신적인 종교 유교의 민족답지 않은그런데 원숭이 일본 정부는 이 신문사를 폐간시키고 만다.
이 우습고도 단순하면서 무지하기까지 한 탄압의 방법이란….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가.
마침내 이 민족은 해방되고 강요당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무서운 또 한 번의 전쟁을 치른 후, 한강의 기적 (한국인들은 지구상에서 일본인들을 게을러 보이게 한 유일한 민족이다)을 통해 스페인보다도 포르투갈보다도 더 강력한 경제적 부를 이루고 만다.
그리고는 1988년 전두환 장군 (이 나라의 또 한 가지 놀라운 점은 군부 쿠테타를 일으킨 박, 전, 노라고 하는 세 명의 장군들이 남미나 여타 3세계의 그것들과 달리 각자 부흥과 번영과 민주화라고 하는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는데 있다)에 의해 수도 서울에서 올림픽을 개최하는데 이른다.
불과 50년…. 태극기조차 가슴에 달 수 없었던 이 나라 아니 이 민족이 올림픽을 개최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개막식, 성화를 들고 경기장에 들어선 작고 여린 소녀 마라토너로부터 성화를 이어받은 사람은 그 날 너무나 도 슬프고 부끄러웠던 승리자, "손" (손기정)이었다, 노인이 되어버린 이 슬픈 마라토너는 성화를 손에 든 채 마치 세 살 먹은 어린 애와 같이 훨훨 나는 것처럼 즐거워하지 않는가!!
어느 연출가가 지시하지도 않았지만 역사란 이처럼 멋지고도 통쾌한 장면을 보여줄 수 있나 보다.
이 때 한국인 모두가 이 노인에게, 아니 어쩌면 한국인 개인 개인이 서로에게 얘기할 수 없었던 빚을 갚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극적이게도 서울 올림픽 도중에 일본 선수단은 슬픈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쓰러져 죽음을 기다리는 히로히토 일왕의 소식을….
한국인들의 종교 유교는 인간, 심지어는 죽은 조상에게까지 예를 나타내는 종교다. 이 종교의 보이지 않는 신이 인류 역사상 (예수나 석가도 해내지 못한)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기를 바랬다. 이처럼 굉장한 이야기가 이대로 보존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집념과 끈기, 그리고 폭력과 같은 단순함이 아닌) 놀라운 정신력으로 그들이 50년 전 잃어버렸던 금메달을 되찾고 만 것이다.
서울 올림픽이 끝나고 4년 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황"이라고 하는 "손" 노인과 너무나 흡사한 외모의 젊은 마라토너가 몬주익 언덕에서 일본과 독일의 선수들을 따돌리고, 마침내 더 이상 슬프지 않은, 축제의 월계관을 따내고 만 것이다.
경기장에 태극기가 올라가자 이 "황" 은 기쁨의 눈물과 함께 왼쪽 가슴에 달린 태극기에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는 스탠드로 달려가 비극의 마라토너 "손" 에게 자신의 금메달을 선사하곤 깊은 예의로서 존경을 표한다.
"황" 을 가슴에 포옹한 "손" 은 말이 없다. 나는 이 이야기를 접하고는 인간에 대한 신뢰에 한없이 자랑스러움을 숨길 수 없었다.
인간이란, 이 한국인 아니 이 ‘한국 민족’처럼 폭력과 거짓과 다툼이 아니라 천천히 그러나 불굴의 의지로써 자신들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것이 비극적인 눈물로 시작된 역사일지라도 환희와 고귀한 기쁨의 눈물로 마감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상 어느 민족도 보여주지 못했던 인간과 국가와 민족의 존엄을 이 한국인 아니 한국 민족이 보여주지 않는가.
도서관에 달려가라, 그리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시상대에 선 두 한국인의 사진을 찾아라. 당신은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인간이 될 것이다.
붙임 : 슈테판 뮐러는 "샬타첼로" 라는 재즈그룹의 리더이며 손기정 옹의 추모음반도 냈었고 내한공연도 한 바 있다.
(2) 손기정 기념 새 음반, “위대한 손기정, Greatson”
독일 실내악단 손기정 추모 헌정음반 ‘42.195…’ 발매 입력 2005-03-16
독일인 5인조 퓨전재즈 실내악단 ‘살타첼로’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생을 추모하는 헌정음반 ‘42.195 그레이트 손’(사진)을 냈다. ‘위대한 손기정-마라톤 맨’ 등 네 곡의 헌정곡을 담은 음반은 한국 굿인터내셔널과 독일 파인톤사에서 10일 동시 발매됐다.
‘살타첼로’의 리더이자 작곡가인 페터 신들러 씨는 “손 선생의 우승 당시 모습을 그린 ‘어느 독일인의 글’을 4년 전 인터넷에서 읽은 뒤 감명을 받아 헌정 곡을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어느 독일인의…’은 2001년 독일 한국대사관 홈페이지에 올려져 누리꾼(네티즌) 사이에서 화제가 됐던 독일 언론인 슈테판 뮐러 씨의 기고문으로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하고도 일장기 앞에서 저항의 의미로 고개 숙였던 식민지 청년 손기정의 사진을 보고 쓴 글. ‘그들은…한없이 부끄럽고 슬픈 얼굴을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뉴스를 전한 일본 검열 하의 한국 신문 eastasia(‘동아일보’를 지칭하는 표현)는 이 사진 속 일장기를 지워 버리고 만다.’
음반에는 베를린 올림픽 당시 아나운서의 중계 멘트, 우승 직후 손 선생의 인터뷰 육성 등도 함께 수록됐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3) 손기정을 키운 김교신 선생
1936년 8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올림픽의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孫基禎, 1912∼2002) 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듣게 된 순간 조선 땅 전체에 기쁨이 넘쳤다.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올림픽의 영웅 손기정은 기억하여도 손기정 선수의 뒤에 김교신이란 선생님이 있는 줄은 잘 모르고 있다.
올림픽에 출전할 당시 손기정은 양정학교(養正學校)의 학생이었다. 일본 동경에서 학업을 마친 후 김교신 선생은 양정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지리과목의 교사이면서 손기정 선수가 속한 반의 담임이었다. 선생은 교실에서 절반은 지리를 가르치면서 절반은 민족의 혼을 깨우치는 정신교육을 베풀었다. 손기정 선수 같은 경우 김교신 선생의 정신교육이 맺은 열매라 할 수 있다. 손기정 선수가 올림픽의 마라톤 경기에서 금메달을 받게 된 이후 이런 말을 했다.
“우승의 성공은 작전에 있지 않고 정신에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정신이 곧 양정학교 교실에서 담임선생으로부터 교육받은 정신을 일컫는다. 베를린 올림픽이 있기 전 해 동경에서 열린 선발대회에까지 따라 간 김교신 선생은 자전거를 타고 손기정 선수를 따라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달렸다. 마지막 코스에서 손기정 선수가 기력을 잃고 쓰러질듯 하였을 때에 뒤 따르던 담임선생님인 김교신 선생은 큰 소리로
“기정아, 기정아, 힘을 내라. 조선을 생각하라.”
하고 외쳐 힘을 북돋아 주었다는 말은 널리 알려져 있다.
(4) 베를린 올림픽 경기장에서 최초로 부른 애국가
❶안익태와 손기정의 만남
안익태의 말에 의하면, 1936년 6월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악상이 떠올라 "애국가"를 작곡하였다고 한다. 1936년 7월 스트라우스는 자신이 작곡한 "올림픽 찬가"를 직접 지휘하여 발표하였고.며칠 후 8월 1일 히틀러가 참석한 개막식에 당당히 입장한 안익태는 개막식 직후 메인 스타디움 서북쪽 코너에 웅성웅성 잡담하고 있는 손기정, 남승룡 등 조선 동포들을 발견하였다.
무조건 뛰어 가서는 구깃구깃 악보를 펴더니 손기정, 남승룡 선수에게 다짜고짜로
"내가 여러분들을 위해 조선 응원가를 만들어 왔으니 함께 부릅시다."
라고 했고, 어리둥절해 하는 조선 선수들 7명과 함께 안익태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를 불렀다.
❷올림픽 경기장에서 최초로 부른 애국가
1936년 8월 1일 히틀러가 막 퇴장하고 없는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 서북 코너-이 곳이 바로 세계 최초로 지금의 우리나라 애국가가 발표된 곳이었다. 그리고 8월 9일 일장기를 가슴에 단 손기정 선수가 영국 선수를 제치고 세계신기록으로 메인스타디움으로 들어올 때, 손기정의 눈에 제일 먼저 띈 광경이 '두세 명의 청년들과 안익태가 거의 미친 듯이 큰 소리로 애국가를 부르는' 광경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히틀러가 직접 영광의 금메달을 걸어 줄 때에도 손기정 선수가 '세상에서 가장 고뇌스러운 표정을 지었던' 까닭이 저 쪽에서 들려오는 안익태 무리의 애국가 소리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적어도 이 날 손기정에게는 독일 군악대가 연주하는 일본 국가 "기미가요" 보다 저 쪽 스터디움 한켠에서 들려오는 "애국가" 소리가 더 크게 들렸던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 사회부장이었던 현진건 씨가 이 손기정 선수의 기분을 알았는지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신문에 냈고, 그 때문에 동아일보는 무기 정간되었다. 이 현진건 씨는 2005년에 와서야 '독립유공 대통령 표창'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일본 여권을 가지고 독일에서 만났던 두 조선 청년의 만남 - 이 만남이 적어도 손기정에게는 평생에서 가장 큰 충격이었다. 수십 년 뒤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스터디움을 다시 찾았을 때에도 그 때 안익태를 만났던 서북쪽 코너 좌석에서 한동안 앉았다가 왔다. 손기정에게는 히틀러보다도 안익태가 더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손기정은 그 이후 일본말을 일체 쓰지 않았으며, 누구에게 사인해 줄 때에도 한글로 "손기정"이라고 써 주었다고 한다. 참, 말년에 일본 말을 한번 쓴 적이 있기는 있다. 일본의 최고문학상인 "아쿠다카와" 상까지 받은 젊은 재일교포 여류작가 "유미리"를 만났을 때였다.
손기정은 유미리에게 일본말로 "너의 할아버지는 훌륭한 장거리 선수였다"라고 말해 준 적이 있는데 유미리가 간 뒤에 "친구의 손녀가 한국말을 모른다고 해서 중간에 통역을 붙일 수야 없지 않는가?" 라고 하여 주위를 숙연하게 했다. 유미리는 나중에 그 말을 전해 듣고 물론 눈이 퉁퉁 붇도록 울었다.
안익태는 이 악보를 즉시 샌프란시스코 한인 교회로 보냈고, 이 악보는 이승만 박사를 통하여 상하이 임시정부에 전달되었고, 그 이후부터는 "애국가"가 올드랭사인 외국 민요 가락에서 우리나라 청년 안익태가 작곡한 곡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안익태는 1936년 10월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서 1937년 6월에 템플대학 음악대학원에서 음악학 석사학위를 취득한다. (아마도 이 때 졸업논문 대신 제출한 악보가 "애국가" 합창 부분을 추가한 "한국환상곡" 악보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1937년 11월 헝가리 부다페스트 국립음악학교에 특별연구생으로 들어가서 "코다이"의 지도를 받고, 주위의 도움으로 1938년 2월 아일랜드의 더블린 국립교향악단을 직접 지휘하여 세계 최초로 "한국환상곡"이 발표된다.
안익태가 지휘하는 한국환상곡의 가장 큰 특징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 연주되든 합창 부분의 애국가는 반드시 한국어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초연 때 더블린 합창단은 물론이고 나중에 일본에서 한국환상곡을 지휘할 때에도 일본 합창단에게 한국어로 애국가를 부르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