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계종 화쟁위원회가 최근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아쇼카선언)’을 발표한 것과 관련해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이 “화쟁위의 아쇼카선언은 불교고유의 법을 부정하는 것”이라며 이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에 대해 조성택 고려대 교수는 “화쟁위의 아쇼카선언은 사회를 통합하기 위한 불교적인 처방”이라고 반론을 펼쳤다. 그러자 마성 스님은 본지에 재반론을 보내와 “조성택 교수를 비롯해 일부 학자들이 종교다원주의의 함정에 빠져 있는 것 같다”고 다시 비판에 나섰다. 편집자
다음은 마성 스님의 재반론 전문.
‘아쇼카 선언’에 발목 잡힌 한국불교
조계종 화쟁위원회(위원장 도법 스님)가 발표한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21세기 아쇼카 선언’(초안)에 대한 필자의 문제 제기 이후, 이 선언문 초안 작성에 직접 간여했던 고려대 철학과 조성택 교수가 반론을 제기했다. 또한 거의 동시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형조 교수와 한국교원대학교 박병기 교수가 ‘아쇼카 선언’의 취지에 동조하는 글을 <불교신문>에 기고했다.
조성택, 한형조, 박병기 세 교수 모두 종교다원주의자인 것 같다. 그들이 주장하는 기본 논조가 종교다원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종교다원주의에 토대를 둔 ‘아쇼카 선언’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이번 논쟁의 핵심은 종교다원주의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아쇼카 선언’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종교다원주의의 함정에 대해서만 언급하고자 한다.
기독교 종교간대화, 유일신론 입장서 출발
먼저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란 무엇인가. 다원주의는 자기 완전성의 주장에 폐쇄적으로 갇혀 있기를 거부하고, 열린 종교이기를 희망한다. 또한 다수의 참종교를 인정한다. 그러나 종교 간의 대화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곧 종교다원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타종교와의 대화에도 여러 가지 유형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개종을 목적으로 타종교인과 대화할 수도 있고, 다른 종교와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할 수도 있다.
기독교가 타종교와 대화하는 자세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즉 절대주의인 배타주의와 상대주의인 포괄주의로 구분된다. 배타주의는 기독교만이 참된 종교라고 믿는 것을 말한다. 포괄주의는 기독교 외에 타종교에도 참된 신앙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배타주의자이든 포괄주의자이든 모두 신은 하나라는 유일신론의 입장에 서 있다.
포괄주의는 다시 차등 포괄주의와 동등 포괄주의로 나눈다. 차등 포괄주의는 기독교가 상대적으로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는 입장이고, 반대로 동등 포괄주의는 다른 종교도 기독교와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전혀 없다는 입장이다. 종교다원주의는 종교적 포괄주의에 속한다. 기독교적인 다원주의는 역사적으로 차등 포괄주의 입장에서 동등 포괄주의의 입장으로 변천한 것이다.(황대우, ‘세계교회협의회(WCC)와 종교다원주의: 1990년의 바르 선언문(Baar Statement)을 중심으로’)
대표적인 기독교 종교다원주의자 존 힉(John Hick)은 종교 다원성(religious plurality)에 대해 “신뢰할 만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자라면, 신이 지역적인 주관자가 아닌 우주적인 주관자(universal sovereignty)이며 한 인종의 아버지가 아니라 전 피조물의 아버지가 된다는 점을 깨달아 이상의 사실과 관련시킴으로써 하나의 새로운 의미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이 전 인류의 창조주이며, 인류에 대해서 무한한 사랑을 가지고, 기독교인과 그들의 구약 시대의 영적 조상들만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인간 남녀를 구원하려고 하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다.”(존 히크, <기독교 신앙의 중심(Christianity at the Centre)>, 이근홍 역, 전망사, 1983, 192쪽)
이와 같이 종교다원주의의 출발점은 모든 종교의 공통분모인 “신”의 개념과 인류의 보편적 구원이라는 개념이다. 존 힉은 모든 종교 간의 상이성을 신에 대한 그들 각자의 고유한 사유 방식으로 간주함으로써 기독교를 상대화하고 종교의 다양성과 다원성의 근거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는 기독교가 그리스도 중심적 패러다임에서 하나님(神) 중심적 패러다임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황대우, 위의 글) 다시 말해서 종교다원주의는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개념 아래 다른 종교와의 대화를 모색하고 있다.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종교평화선언, ‘기독교 바르 선언’ 모방
법응 스님은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21세기 아쇼카 선언’은 세계교회협의회에서 1990년 발표한 ‘바르 선언(Baar Statemnet)’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바르 선언’에 나타난 종교다원주의에 대해 “대다수의 한국교회와 교인들은 종교다원주의를 지지하기 보다는 오히려 거부하고 배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 가운데 다수 교단들(major groups)은 세계교회협의회가 종교다원주의를 지향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세계교회협의회를 지지하는 반면에 몇몇 소수 교단들(minor groups)은 다수 교파와 정반대의 판단으로 인해 격렬하게 그것을 반대한다.”(황대우, 위의 글)
바르 선언문의 본론인 ‘종교적 다원성에 대한 신학적 이해’(A Theological Understanding of Religious Plurality)라는 제목 아래, “종교적 다원성에 대한 우리의 신학적 이해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 처음부터 만물 속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더불어 시작된다. 성경은 만국과 만민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에 대해 증거 하는데,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은 온 인류를 포함한다.”(바르 선언문)이런 측면에서 보면 바르 선언은 종교다원주의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다음 문장은 “사람들은 그들 가운데 임재하시고 활동하시는 하나님께 언제 어디서나 응답해 왔으며,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그 만남에 대해 증언해왔다. 이런 증거를 통해 그들은 구원이나 완전성이나 깨달음이나 신적인 인도나, 안식이나, 자유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발견해왔다고 말한다.”(바르 선언문) 이 대목은 기독교 외에 타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는 종교적 포괄주의의 전형적인 주장이다.
이처럼 세계교회협의회에서 발표한 ‘바르 선언문’은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이 세계를 주재한다는 전제 아래 타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열러 있다는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 내부에서조차 찬반으로 나뉘어져 격렬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황대우는 “바르 선언문은 세계교회협의회가 더 이상 기독교 중심의 구원관을 견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과감하게 포기한다고”(황대우, 위의 글)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또한 그는 “바르 선언문이 … 타종교에 비해 기독교가 우월하다는 입장의 다원주의, 즉 차등 포괄주의 입장이 아니라 모든 세계 종교를 동가(同價)의 것으로 보는 동등 포괄주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황대우, 위의 글)라고 비판하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기독교는 구원 교리에 관한 한 배타적 종교이다. 그리고 그 배타적인 구원 교리를 견고하게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실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의 지상 사역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은 인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유일성의 근본이기 때문에 기독교를 배타적 종교로 만드는 핵심이다. 하지만 구원에 관한 이러한 기독교의 종교적 배타성이 결코 타종교와의 대화 자체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구원의 길로서 기독교의 배타성과 유일성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떤 형태로든 타종교와의 대화는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구원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참된 계시를 가진 기독교는 타종교나 이단에 비해 상대적 우월성이 아닌 절대적 우월성을 갖고 있으며 기독교의 이러한 절대적 우월성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선포되고 가르쳐져야 한다. 그러므로 타종교와의 대화는 그것이 일종의 전도 수단 가운데 하나인 한 그 자체가 거부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황대우, 위의 글)
참으로 소름끼치는 내용이다. 이것이 현재 한국 기독교 목사들이 갖고 있는 타종교관이다. 그런데 조계종 화쟁위에서 이 ‘바르 선언문’을 모델로 ‘21세기 아쇼카 선언’을 작성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 ‘바르 선언문’을 기독교 내부에서도 받아들이지 않는데, 불교계에서 이와 같은 선언을 한다고 해서 기독교에서 받아들이겠는가? 처음부터 실현 불가능한 이슈를 들고 나온 것이다. 그 단적인 예는 ‘아쇼카 선언’ 초안이 발표된 이후 지금까지 기독교에서 전혀 반응이 없다는 것이다.
종교다원주의의 현란한 말에 속아선 안돼
우리 불교도들은 종교다원주의에 담겨져 있는 숨은 의도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한다. 종교다원주의의 궁극적 목표는 유일신(唯一神) 아래 ‘헤쳐 모여’라는 것이다. 절대자 혹은 신을 인정하는 자라면, 신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하든 상관없다는 것이다. 신의 이름은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교다원주의의 논리는 궁극적 실재(The Reality)는 오직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어떤 형태의 믿음을 갖고 있든 궁극적으로는 동일하다는 입장이다. 산의 정상에 오르는 길은 다양하다는 비유가 바로 그것을 말한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의 대화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도들은 이러한 종교다원주의의 현란한 말에 속아서는 안 된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 자이나교, 짜르와까(인도 유물론) 등은 종교다원주의에서 말하는 타종교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치밀한 숨은 의도를 알지 못하고 거기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는 ‘하나의 종교(One religion)’로 통일시키는 것이다. 그들은 그 하나의 종교를 이루기 위해 종교다원주의라는 명분을 들고 나온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러한 종교다원주의의 음모를 모르고 불교도가 동조한다면 어리석은 것이고, 그것을 알면서도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한다면 훼불(毁佛) 행위에 해당된다. 어느 네티즌은 ‘아쇼카 선언’이 쿠데타이지만, 그들이 들고 나온 명분에 반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한국불교는 ‘아쇼카 선언’에 발목을 잡혔다. 타종교와 대화를 하겠다는데 어떻게 반대하겠는가? 반론을 제기하면 아집에 사로잡힌 편협한 불교근본주의자로 몰아세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왜 조계종 화쟁위에서 굳이 이 선언을 끝까지 관철하겠다고 하는지, 그 숨은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조성택 교수는 반론문에서 “종교평화선언은 우리의 짝사랑이거나 ‘넋두리’가 아니라 불교계의 대사회적 아젠다의 선점이며 갈등과 분쟁을 극복하고 상생과 공존의 사회를 위한 불교정신의 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위 내용을 통해 비로소 이번 ‘아쇼카 선언’이 ‘아젠다의 선점’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선험적 종교다원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한국의 다종교상황에서 종교대화운동의 실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슈를 들고 나온 것은 바로 화쟁위에서 불교 안팎으로 헤게모니(hegemony, 패권, 주도권)를 잡겠다는 것이다. 타종교와의 대화가 목적이 아니라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불교의 미래를 걱정하는 올바른 불교도라면, 두 눈 부릅뜨고 화쟁위의 행보를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팔리문헌연구소장
첫댓글 마성스님 수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저 분들 허구한 날, "무슨 결사" "무슨 선언" "무슨 위원회" 만들어 놓고
어디 한 가지도 제대로 실천하는 것 보지 못했어요,
민중이 얼마나 현명한 지 모르고 있어요,
종교다원주의는 구원의 다양성은 긍정하지만 서로가 상대의 세계관 자체를 긍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의 이념은 " 종교적 카리스마"입니다. 독단론에 속하지만 "자연과 생명의 실상을 밝혀 인류 평화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세계관을 바탕으로 비롯되기 때문에 종교간의 평화는 근본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화합하되 동조하지 않는 격(和而不同)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불자들에게 최소한
불교에서 믿음의 대상은 무엇인가? 불교의 세계관은 무엇인가? 등 통일된 신행체계를 명백히 전하고
교육하면서 종교다원주의 및 전법의 원칙을 논해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비불교적인 형태를 용납하기 때문에 정법을 수호하려는 의지가 약한 것입니다.
불교의 화쟁사상의 근원은 원효입니다. 뜻을 바르게 알고 사회적 치유에 적용해야 합니다.
1) 서로의 모든 입장을 긍정하고 2) 아집과 법집을 부정하고 3) 일심으로 회통하는 사상입니다.
이 사상이 사회의 여러 방면에 적용될 수 있지만 종교간에는 적용되기 어렵지요. 대부분의 종교는 지독한 아집과 법집으로 채워진 독단론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일심으로 회통하는 그날이 오기를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 아미타 아미타파_()()()_
구원의 길로서 기독교의 배타성과 유일성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떤 형태로든 타종교와의 대화는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구원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참된 계시를 가진 기독교는 타종교나 이단에 비해 상대적 우월성이 아닌 절대적 우월성을 갖고 있으며 기독교의 이러한 절대적 우월성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선포되고 가르쳐져야 한다. 그러므로 타종교와의 대화는 그것이 일종의 전도 수단 가운데 하나인 한 그 자체가 거부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종교다원주의 속의 숨은 의도...정신차립시다...나무아미타불 아미타 아미타파_()()()_
부처님과 같은 당당함으로 저희들을 지도해주시는 많은 스승님이 출현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상대방의 이해정도와 문제에 맞추어 뜻을 펼쳐야 합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을 알아 그들에게 그것을 갖기 위해 현실적인 삶에서 불교사상에 의한 실천행이 있음을 보여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산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 현 생활에서 불도의 길을 걷게하여 포교 할 수는 있지만
우리들이 그 곳까지를 인정하여 대등하게 가는 것은 아닌줄 압니다.
부처님께서 처음도 포교이며 끝도 포교라 하셨습니다.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에 사상적으로 절대 그들과 화합할 수 는 없다고 봅니다.
'아젠다의 선점' 시작이 이러하니 과정도 결과도 좋은 성과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열심히 잘 살고보니 결과가 선점에 와 있더라' 이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불교는 부처님의 지혜를 믿는 종교이다.- 라고 정목스님께서는 선언하셨습니다. '아쇼카 선언'에는 그와같은 지혜가 없기 때문에 선견지명이 있으신 스님들께서는 그 점을 우려하시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절대로 말이 통하지 않고, 반성할 줄 모르고, 남의 말은 듣지도 않고, 제 할말만 하는 사람, 게다가 앞뒤가 다르고, 뒷말이 많고, 진실하지 않고, 교묘하게 사람을 이용하는 사람과 다투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어??' 하다가, '설마 사람이 그렇게 야비하고 사악하기 까지 하겠냐?' 고 허술하게 판단하고 적절하게 대응 못하고, 지나치게 나홀로 관용을 베풀다가, 제대로 뒤통수 야무지게 맞는 일이 일상에서도 있지 않습니까? 그럴 경우
결국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는 게 맞습니다. 손뼉도 마주 쳐야 소리가 나는 법을 모르는 사람 없는데, 허공에 대고 한 손만 내민다고 어느 세월에 나머지 손을 기대하겠습니까? 편협하고 독선적이나마 저렇게 이론적으로 무장된 사람들이 타종교에 많은데 비해서 우리 불교는... 늘 스님께서 왜 불교의 요체와 신행체계를 그리도 강조하고 공부시키시는지 그 절박하신 심정을 통감합니다. 심훈의 상록수에서 여주인공 채영신이 절규하는 장면도 떠 오릅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우리가 불법승 삼보를 믿고 따르는데, 훌륭하신 스님들께서 저희들이 불과 법을 제대로 알게 잘 이끌어주시고, 앞장 서주시면 든든하겠습니다.
개인적인 성향이 다툼을 싫어해서 평화로운 불교에 귀의했는데, 막상 불자되고 나니 왜이리 불교가 흔들리고, 밀리고, 혼란스럽고, 패배주의에 젖어 있는지, 정말 속상합니다. 타종교와의 평화선언보다 더 시급한 일이 불교내부에 있는 것 같습니다. 역사책에서 읽었던 나라를 구하고 민중을 구하던 그 서슬퍼런 스님들의 기상이 그립습니다. 훌륭하신 스님들께서 반드시 정법수호와 정도를 가는 길을 가르쳐 주시리라 믿습니다. 여기 아미타파에서 정목스님께서 우리에게 대승불교의 정수를 가르쳐 주시듯이... 법신 보신 화신의 지혜를 성취하신 아미타 부처님께 귀명합니다. 일심광명.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감사드립니다.
타 종교에 대해 우리불교만 안이한 생각 .으로
너무 너그러운. 아니면 너무 고차원적 대응으로 도
이심전심으로 통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는사람 막지 않고 가는사람 잡지 않는 우리 불교..의 처사로는 좀 안타깝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드립니다...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불교에서 타 종교간의 화합은 불교가 짝사랑하는 격이라 생각합니다.
교리자체에도 그렇지만
특히 한국기독교의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으로는 화합은 어렵습니다.
불교내에서도 통일된 신행체계나 법요집이 없이
한글, 한문 발음도 다르게 표기되어 불자들이 혼돈을 하고있는데
중요한 불교내의 문제부터 해결과 타종교와의 평화선언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제 두 친구의 손자 손녀가 같은 학교 같은 반이 되었습니다.
친손자는 그 반에 반장이고 다른 친구의 외손녀는 부반장입니다.
1~5학년까지 그런대로 잘 지냈는데 6학년이 되어 외손녀가 반장에게
이제부터 네하고 못놀겠다고 한답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너는 교회를 나가지 않아 그런다고......
외할머니인 친구가 교회 권사인데 알게 모르게 그 손녀도 골수 예수쟁이가(죄송하지만 저는 이런 표현을 많이합니다)
되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어릴때부터 외갓집에 함께 살아서인지 할머니 친구인 저를 많히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할머니는 교회에 나가지 않아 싫다" 라는 들었을때 질릴정도 아이가 곱게보이지 않았습니
과연 우리 불자들의 손녀 손자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소통이다 화합이다 아무리 떠들어도 근본적으로 그들의 생각을 바꿀수 없습니다.
우리 불자들이라도 부처님의 지혜를 믿고 바르게 실천하며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거대 자본 권력 앞에선 누구나 손을 잡게 되나 봅니다. 사상 이데올로기에 이어 인간 역사에 가장 뿌리깊은 종교 이데올로기를 형성하여 이리도 교묘하고 골깊게 자리잡아가고 있으니... 부처님 정법에 대한 믿음을 더욱 견고히 하게 되는 시절입니다. 바른 믿음과 바른 수행과 바른 실천을 몸소 행하시는 스님과 아미타파님들의 힘과 기운 모두 부처님의 가피라 믿습니다. 고맙습니다. 덕분입니다. 나무 아미타 불 ()()() 꾸벅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앞의 마성스님의 아쇼카 선언을 읽은 소감은 화쟁위원에서 진심으로 받아들여 고칠것은 고치고 보강해야할 것은 보강하여 우리 불자들이 그 글을 절입구에 새겨 천년이 가도 정말 실천하고 싶은 글이 되기를 빌었습니다
주위에 보면은 부처님의 사상에 매료되어 불교를 선택하여 열심히 공부하다가 스님들의 공부와 행에 실망하여 불교를 떠나지도 못하고 외도공부에 맘을 돌리고 스님을 펌하하고 자기식으로 공부하여 아상만 높아가는 불자들이 많습니다 조계종 종단에 계시는 스님들은 지금 불자들의 마음을 바로 읽으시고 부처님의 법이 바른 정법으로 보존되어 가게 하여 주시기를 서원합니다
감사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목 스님이 계시고 아미타파에서 공부하시는 선배님들 도반님들이 계시기에 감사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
종교간에는 화이부동이 정답이라고 봅니다.
결사, 선언 위원회 만들어 정치를 하려는 분들이 많더군요.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참으로 시원한 말씀 들으니 감사 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