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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10월25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청주] 나는 아니야.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로마 7, 18 - 25ㄱ
† 복음 : 루카 12, 54 - 59
★ 바오로 사도는 우리 각자는 선을 바라면서도 악으로 기울어지는
나약하고 비참한 존재임을 알린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
없이는 우리 모두 죽음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자연 현상을 보고서 일기를 예측하고 그에 맞는 대비를
하는 것처럼, 각 시대에 벌어지는 일을 보면서 그에 맞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다른 차가 뒤에서 들이받는 사고를 자주 당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왜 이렇게 운이 없는지, 또 자기 차를 들이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운전이 서툰지 늘 그들만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그의 운전 습관을 보면서, 운이 없거나 운전이 서툰 사람들을
자주 만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곧, 운전할 때에 급하게
제동하는 습관이 있어서 뒤에서 따라오던 차들이 들이받는 사고가 자주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 친구는 이렇게 충고하였습니다. “자네는 자신의
운전 습관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아직도 잘 모르고 있다네. 세 번이나
비슷한 사고를 당했는데도, 급제동의 습관은 여전하니 참으로 답답하네.
그 습관을 버리지 않으면 똑같은 추돌 사고를 피하지 못할 것이네.”
단순한 이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만일 사고가 날 때마다
그 사고를 자신의 운전 습관을 고치라는 하나의 표징으로 알아들었다면,
더욱 안전하게 운행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한 채 운이 없다거나 다른 운전자들을 탓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많은 불행한 일은 우리의 잘못된 습관과
행동을 고쳐야 한다는 경고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자연 현상을
보고서 날씨를 예측하고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알면서, 왜 일상의
사건들을 보고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모르느냐고
책망하십니다.
모든 사건에는 모난 부분을 고쳐 나가라는 암시가 있는 법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그러한 데에서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는 한편, 어리석은
사람은 오히려 불평과 불만만 쏟아 놓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나는 아니야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신부님
2013년 다해 10월25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 루카 12,54-59
나는 아니야
어르신들은 지혜가 많으신 분입니다. 많이 배우지 못해 지식은
풍부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분도 삶의 경험에서 나오는 지혜는
늘 차고 넘칩니다. 제비가 낮게 날고 있는 것을 보면서 비가 올 것을
예상했고, 개미의 움직임을 보면서 장마에 대비했습니다. 서쪽에서
밀려오는 구름을 보고 비를 예상하고 남풍이 불면 더위를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이렇게 지혜 있는 사람들은 자연의 징조를
읽어냈고 거기에 맞는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의
지혜에 밝은 사람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무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기적들과 가르침을 통해서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거기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니
관심 부족이 아니라 외면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바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옛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기득권을 누리고 싶었기 때문에 시대의 뜻을 올바로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시대의 징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알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체하였습니다. 그래서 위선자라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시대의 뜻은 겉모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새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 바뀌기를 기대하지
말고 먼저 내가 변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환경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의 어둠을 탓하기보다 하나의 촛불을 밝히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 첫 번째 할 일을 오늘 복음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재판관에게 가기에
앞서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루카12,58)는 것입니다. 화해를 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재판정에 서서 판결을 받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마태5,24) 고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 질 때까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됩니다”
(에페4,26)권고 합니다. 더더욱 판결을 받아 감옥에 가게 되면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말씀이든 ‘나는 아니야’ 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어떤 말씀이나 강론을 들으면 “저 얘기는 아무개를 두고 하는
얘기야!” “그 사람이 들어야 하는데” 하고 자기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대의 징표를 읽는 사람은 “모두가 나를 두고
하는 말씀이야!”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시작합니다.
세상의 지혜를 찾지 말고 주님의 뜻을 잘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심판의 마지막 날이 언제 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이순간은 회개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진정한 변화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그러므로 한 순간도 헛되이 하지
않기를 빕니다. 단풍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곧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겨울을 맞이할 것입니다. 아름다움의 절정에는 내려놓아야 할 과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주님께서는 세상의 관심사를 따르지 말고
“395 + 627 = ????” 라는 문제를 받으시면 어떻게 계산하십니까?
대부분 맨 뒤 일의 자리부터 차례로 계산해서 정답을 맞힙니다.
즉, 일의 자리인 5와 7을 더한 뒤에, 그 결과 값 중에서 1이 십의
자리로 올라가서 10과 2를 더하지요. 그리고 다시 1이 백의 자리로
올라가서 계산하면 ‘1022’라는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앞의 자리부터 계산한다면 어떨까요? 물론 지금처럼 숫자의 크기가
작으면 어렵지 않겠지만, 큰 숫자를 더할 때에는 뒤에서부터 계산해야
빠르고 정확한 답을 낼 수 있습니다.
이 숫자 계산을 떠올리면서 ‘어렸을 때부터 작은 것부터 차근차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었구나!’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 모습은 너무나 큰 것을 쫓고 있습니다. 많은 재물과 높은
자리, 그래서 세상 사람들을 눌러 지배하려는 권위만을 얻으려고 애를
씁니다. 이러한 욕심과 이기심이 과연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행복하기 위해서 그러한 것들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것들이 채워질수록 더 불행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낮은 자리부터 숫자를 계산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낮은 자리를 선호해야
합니다. 사람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닌, 오히려 섬기는 모습으로
사랑해야 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고 ‘비가 오겠다.’고 말하고, 남풍이 불편 ‘더워지겠다!’
고 자연의 이치를 풀이하는 것처럼, 주님께서 제시하는 올바른 길에
대해서도 스스로 판단하고 제대로 걸어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연의 이치를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요? 과거 선조 때부터 이어진 많은
경험을 통해서 얻은 이치인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제시하신
올바른 길 역시 많은 경험들이 축적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길이 바로
진리의 길이며, 참 행복의 길임을 많은 성인 성녀들의 삶을 통해서
증명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경험을 따라가려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무엇이 이렇게 중요한 경험을 뛰어넘는 것일까요? 바로
앞선 글에도 말했듯이 우리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또 나의 욕심과
이기심이 집중되어 드러나는 세상의 것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입니다.
그 때문에 참 진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더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관심사를 따르지 말고, 당신께서 힘주어 강조하셨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실천하지 못할
때, 먼 훗날 주님 앞에 나아가서 커다란 낭패를 당할 수밖에 없다고
하시지요. 즉, 그 사랑의 빚을 마지막 한 닢까지 다 갚기 전에는 결코
어두운 감옥에서 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관심사를 뛰어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이 길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에도 과감하게 주님의 관심사에 함께 집중할
때, 주님과 함께 하는 진리의 길, 행복의 길을 당당하게 걷게 될 것입니다.
가끔 달리던 차를 세우고 내려서 뒤를 돌아보면 분명 내가 달려왔던
길이지만 전혀 달라 보일 때가 있다. 앞에서 보는 풍경과 뒤돌아 보는
풍경은 다르다. 그래서 가끔 쉬어 갈 필요가 있다(김희영).
한적한 길. 이러한 길에서 스스로를 되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에 대한 정의
인터넷에서 우연히 보게 된 글입니다. 내용이 좋아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이 글을 보시고 더욱 더 사랑하는 오늘이 되셨으면 합니다.
1. 사랑은 이해하는 것이니, 영어로 옮기면 understand이다. 즉 이해라는
것은 under라는 전치사와 stand의 결합으로 상대의 밑에 서라는 의미이니
내가 밑에서 올려다볼 때 상대를 이해할 수 있다.
2. 사랑은 존경하는 것, 즉 respect로 상대를 올려다보는 것 자체가
존경이다. 상대를 소중한 존재, 소중한 인격체로 바라볼 때를 존경이라
할 수 있다.
3. 사랑은 대답하는 것, 즉 respond로 상대가 부를 때 대답하는 것이다.
상대가 부를 때 대답하고 필요로 할 때 찾아가는 것이 사랑이다.
4. 사랑은 책임지는 것, 즉 responsibility로 책임지는 일이 사랑이다.
서로가 책임을 지려면 서로를 잘 알아야 하며 역지사지가 되어야 한다.
5. 사랑은 주는 것, 즉 give로 마음도 주고 기꺼이 나의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어야 한다. 받는 기쁨도 크지만 주는 기쁨은 그에 비례하여 더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 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바른 마음만이 바른 판단을 하게 합니다.'
2013년10월25일 연중 제 29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루카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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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2천년 전이 아닌,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을
보시면 어떻게 말씀하실까?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똑똑해진 세상에
똑똑한 모습으로 살고 있다고 자처하고 있는 오늘의 세상. 시간과
함께 인류의 두뇌는 더욱 고급스럽게 진화가 되어왔고 세상은
다방면으로 종합적 발전을 이루어 왔다. 이 속도라면 인류의 두뇌로
가능하지 않을 것이 없을 것처럼도 보이는 세상이다. 이러한 오늘의
세상을 바라보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옳은 것을 스스로 잘
판단하면서 잘 살고 있다고 칭찬해주실까?
그런 답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편해졌으면서도 동시에 복잡해진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체제도 조직도 기계도 편리한 세상을 도모하기 위해 발전해왔지만
결과적으로 더욱 복잡한 구조에 살아야 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또한 전쟁도, 빈곤도, 기아도, 잔인한 폭력도, 부당한 차별도 여전하다.
한마디로 더욱 고급화되고 지능적인 부조리의 세계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만큼 우리는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가 힘든 조건의 삶을 살고 있음이다.
혼란이 올 때는 전통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전통이란 무엇인가?
교회가 오랜 시간을 통해서 얻어낸 지혜이자 힘이고 확신이다.
고리타분하고 답답한 과거에 묶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무지와
오류 속에서도 끝내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을 존중하고 본받으라는
이야기다.
그 지혜와 힘과 확신은 무엇인가?
간단하다.
바른 마음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하는 마음, 이타적인 마음, 함께 하려는 마음, 사랑과 희생의
마음과 같은 아름다운 마음이다. 비록 하느님을 몰랐어도, 하늘을
두려워할 줄 알고, 땅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 좋은 사람들이 보여
주었던 그런 마음이다.
교회도 교회의 정체성과 역할과 소명을 잊어서는 안 된다. 늘 자신을
뒤돌아 보고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삶이어야 한다.
그 구성원들도 구성원답게 신앙이 가르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마음밖에는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 올바른 마음을 위해서는 그분께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우리가 삶 안에서 내리는 크고 작은 판단들이 최소한 악한 결론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항상 복음을 떠올리는 우리여야만 한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서울]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2013년 다해 10월25일
어제는 신도림동 성당에서 미사를 하고, 견진교리를 하였습니다.
오랜만에 본당에서 미사를 드리니 제가 사제라는 것을 더욱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역시 물고기는 물속에 있어야 자유롭듯이 사제들은
신자 분들과 함께 지낼 때 더욱 기쁜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예쁜 꽃을 피우는 나무,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 나무들을 보면 나무의
줄기가 목재로 쓰기에는 부족한 것을 봅니다. 줄기에 모여질 양분들이
꽃과 열매로 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부모들도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에 많은 것을 내어 놓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까지 우리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사랑은 끊임없이 주는 것인가 봅니다. 신앙은
우리들이 하느님께 봉헌하고, 믿음을 고백하는 것 같지만, 신앙은
하느님께서 늘 우리를 위해서 사랑과 자비를 주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는 ‘식별’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삶의
모든 문제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세상은 돈을 목적으로
하고, 이윤을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돈과 이윤을 추구하기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도 합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은
잊혀지기도 합니다.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 질병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 외롭고 절망 중에 있는 사람을 생각할 시간이 없습니다.
신앙인이라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식별의 기준은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나침반의 바늘은 늘 같은
방향을 향해서 움직입니다. 어둔 밤을 항해하는 배들이 기준을 삼은
북극성은 늘 움직이지 않고,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들을 같은 방향으로 인도해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일의 날씨는 예보하면서,
내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알지 못하느냐!’ 믿음, 소망, 사랑이
우리를 참된 식별에로 인도해줄 것입니다. 세상의 뜻을 헤아리는
만큼,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외모를 가꾸려는
마음만큼, 내면의 정신을 키우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
만큼, 어떻게 살아야 될까를 고민하라고 하십니다. 재산을 늘리려고
노력하는 만큼, 하늘에 보화를 쌓도록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제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종교는 어떤 학문보다 인간이기에 기본
2013년 다해 10월25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종교는 어떤 학문보다 인간이기에 기본
우주세계의 온갖 분야를 사람들은 깊게 열심히들 연구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면서 정작 사람은 무엇인가의 주제는 희미합니다.
고작해야 심리학 의학 분야지만 이는 사람의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존엄한 인간인 이유나 인간 내면의 문제 등은 종교로 넘기고 마네요.
사람이면 사람을 제대로 배우고 다음에 다른 걸 배워야지 않나요?
그렇다면 종교는 어떤 학문보다 인간이기에 기본적 문제가 아닌가요?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루카 12,56~57)”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의 매일 묵상 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맞지 않아도 되는 매
2013년 다해 10월25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
복음 : 루카 12,54-59
< 맞지 않아도 되는 매 >
몇 년 전에 수단에서 선교하다가 휴가차 한국에 들어온 신부님이
공항을 통과하는데 얼마나 애를 먹었었는지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때는 신종플루가 한창 유행할 때였습니다. 저도 그 때 휴가차 한국에
들어왔었는데, 공항에서 일일이 체온을 재는 것을 통과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신부님은 본의 아니게 신종플루 의심환자로 지명을 받아
공항에서 오랜 검사를 받아야 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수단에서
케냐로 나오는 비행기에는 에어컨이 없어서 그 안이 찜통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견디기 힘든 더위 속에 있다가, 케냐에서 한국으로
오는 대한항공엔 에어컨이 너무 잘 나와 비행기 안에서 그만 감기가
들어버린 것입니다. 콧물이 자꾸 나와 훌쩍거리니 승무원들이 보며
신종플루 의심환자로 신고한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성경에
하느님 나라에는 어떠한 불완전한 것도, 어떠한 더러운 것도 들어올
수 없다고 합니다(계시 21,27). 그렇게 거룩했던 세례자 요한까지도
하늘나라의 가장 작은 사람보다도 못하다고 합니다. 이는 완전히
완전해지지 않으면 절대 들어갈 수 없는 나라가 하느님나라라는
뜻입니다. 더러운 것은 다른 것도 더럽히고, 마치 하와가 자신의 죄를
아담에게 옮겼듯이 죄는 다른 이를 죄짓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시대의 징조를 풀이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하시며,
어떤 사람이 재판관 앞으로 향하는 장면을 이야기합니다. 즉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올 것을 알고 빨래를 걷고 널어
놓은 것들을 치우는 등의 대처를 하고,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질 것을
알아 그에 대한 대비를 하는 것처럼, 자신을 고소한 사람과 재판관
앞까지 가기 전에 그와 함께 합의를 보라고 합니다. 만약 합의를 보지
못하면 결국 감옥에 갇히고 마지막 한 닢까지 갚지 않으면 절대 그곳에서
나올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감옥은 마지막 한 닢을 갚을 수 있다면 나올 수 있는
감옥을 의미합니다. 즉 지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바로 마지막까지 해결하지 못한 죄가 있다면 연옥에서 그 보속을 다
할 때까지 결코 나올 수 없으리란 해석밖에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감옥에 갇히기 싫다면, 심판관 앞까지 도달하기 전에 미리 합의를 해야
하는 것처럼, 죽기 전까지 자신의 모든 죄를 미리 깨끗이 씻고 보속을
최대한 다 해서 연옥생활을 되도록 하지 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왜
당하지 않아도 되는 고통을 아무 대책도 없이 당해야 하겠습니까?
이태리에서 교구차로 굴리던 오래된 라노스를 폐차해야 할 때가
왔었습니다. 그 때 여러 서류들을 준비했어야 하는데, 그 중에서도
그 차에 관련된 모든 공납금을 다 냈다는 증서가 필요했습니다. 즉
딱지 떼여 돈을 내지 않은 것이 있어서도 안 되고, 세금이 밀린 것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만약 그런 것이 있으면 먼저 그것이 해결될
때까지 절대 차를 폐차시켜주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하늘나라 들어가기에 부족한 면이 있다면 반드시
그 값을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완전한 것이 있다면 심판관
앞에 다다르기 전에 모든 보속을 치르는 것이 현명합니다. 왜냐하면
연옥의 고통은 그렇게 간과해버릴 간단한 고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치릴로는 이렇게 연옥의 고통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괴로움을 한데 합친 것보다 연옥의 아주 미소한
괴로움이 더 혹독합니다.”
저는 그래서 비르짓다의 7기도를 바칩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묵상하며, 하루에 7방울씩을 보속하는 것입니다. 성녀에게 내려주신
이 기도를 12년 동안 매일 바치면 연옥에 가지 않는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벌써 그것을 바친 지가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기복신앙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전 죽기 전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해결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많은 이에게 추천했지만, 끝까지 하는 사람은 아직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신자라고 해도 연옥의 고통에 대해 그렇게 심각하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세상 모든 고통을 합친 것보다 크다고
하는데도 말입니다.
전대사를 받거나 죽기 직전에 병자성사와 전대사를 받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아니면 사랑의 실천이나, 기도와 희생으로 나의 잘못들을
최대한 보속하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 연옥이 하늘나라를 위해 거쳐야하는
곳이기는 하지만, 굳이 맞지 않아도 되는 매를 맞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도 시대의 징조를 안다면, 대비할 줄도 아는 것이 현명하리라 믿습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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