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김춘복의 성장소설 ‘토찌비 사냥’(7)
부산고등학교 합격자를 발표하는 날이었다. 주석중과 나는 점심을 먹던 길로 발표현장으로 갔다. 고교에는 그만한 공간이 없는지 이면도로에 면한 중학교 교무실 벽면에다 붙여 놓은 두루마리 방이 저만치 바라보였다. 일대에는 합격 여부를 확인하려 몰려든 학생과 학부형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인파를 비집으며 서슴없이 상위권 쪽으로 올라가는 주석중과는 달리 나는 간이 두 근 반 세 근 반 뛰며 꼴찌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꽤 한참을 올라가도 내 이름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미 쓰라린 경험이 한 번 있는 지라 영락없이 고배를 마시는구나 싶었다. 그때였다. “복아 니 이름 여기 있다.”하고 주석중이 저 위쪽에서 다급하게 손짓을 해댔다. 52등이었다.
나는 입학한 뒤 국어 영어 국사 이외의 과목과는 영원히 결별했다. 나는 서라벌예대 문창과로 진학을 굳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으나 짝지였던 김용원 역시 영어 수학 과목 이외는 담을 쌓다시피 했다. ‘민주통일 열사 바우 김용원을 말한다’라는 부제목을 단 수필 <그날이 올 때까지>의 한 대목을 인용해 본다.
“그와 내가 앉은 뒤쪽 출입문에 면한 맨 뒷자리는 수업시간에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딴전을 피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선생님이 눈치를 채고 우리 쪽으로 다가올라치면 앞에 앉은 학생이 신호를 해주도록 조직해 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안심하고 딴전을 피울 수 있었다. 그 딴전이란 나는 국어 영어 동양사 시간 이외는 소설책을 읽는 것이었고, 그는 자기에게 필요하지 않는 미술 음악 체육 같은 시간에 영어나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이었다.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해방을 맞아 고향 함안으로 귀향한 그는 급우들의 평균 연령보다 세 살이나 더 많았지만 전혀 그런 티를 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격이 또한 지극히 단순하고 소박해서 아무런 격의없이 친구들과 잘 어울렸다.
그날은 벽사 이우성 선생님의 동양사 시간이었다. 선생님 강의는 마치 책의 내용을 그대로 암송하듯 90분 내내 불필요한 허사라고는 단 한 마디도 들어볼 수 없는, 언제 들어봐도 완벽 그 자체였다. 그때 선생님은 갑자기 말문을 닫더니 김용원을 노려보며 뚜벅 뚜벅 걸어오시는 게 아닌가. 앞에 앉은 학생과 내가 동시에 신호를 보냈지만 김용원은 고개만 바로 들었을 뿐 보고 있는 수학책은 숨기지 않는 것이었다. 빨리 숨기라는 뜻으로 허벅지를 툭 건드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벽사 선생이 학생에게 손찌검을 하신 것은 아마도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당신이 정작 괘씸하게 여겼던 것은 선생이 다가감에도 불구하고 ‘할 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버르장머리 없이 버티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용원의 생각은 또 달랐다. 쉬는 시간에 ‘왜 숨기지 않았느냐’는 나의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죗값은 달게 받는 게 옳지 어떻게 거짓을 보여줄 수 있노’
이렇듯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변명 따위의 군더더기를 덧붙이는 일이 없었을 뿐 아니라 무슨 일이든 한 번 한다고 마음 먹으면 끝장을 내고야 마는 성격이었다. 언젠가 물리 시간에 선생님이 ‘인간이 자연을 정복.....’운운한 말을 그는 두고 두고 곱씹었다. ‘말도 아이다.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다이.......! 위대한 자연을 어떻게 인간이 정복할 수 있단 말고? 정복하는 기 아이라 이용하는 거라.
이용!‘
그는 내가 쓴 작품을 가장 먼저 읽는 애독자이기도 했다. 한 번은 가역반응이라는 단편을 써서 보여줬더니 집에 가서 읽는 내내 우스워 죽을 뻔했다고 실토하는 것이었다. 이유인즉슨 주인공인 ‘나’가 실의에 빠져 방안에 드러누워 있으면서 천장에 무수히 찍혀 있는 파리똥 자국을 헤아리는 장면이라든지 석양무렵에 뒷산에 올라가 통금예비 싸이렌이 울릴 때까지 방황하다가 어느 바위에 앉아 낮에 달구어진 열기가 상기 식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실의를 극복하고 재기를 다짐하는 장면 등은 바로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듬해 쥐도 새도 모르게 검정고시에 응시하여 전국 수석의 영광을 차지한 그는 연이어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에 당당 합격함으로써 전교생의 선망의 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