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어집주 (論語集注) - 1 - 학이(學而) - ⑤ |
1 | 子曰 道千乘之國하되 敬事而信하며 節用而愛人하며 使民以時니라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천승의 나라(제후국)를 다스리는데 일을 경건하게 처리하면서 (백성에게) 믿음을 주고, 씀씀이를 아끼고 사람들을 사랑하며 백성을 부릴 적엔 때(농번기를 피함) 에 맞게 해야 하니라.”고 하셨다.
○ 道, 治也. 馬氏云: “八百家出車一乘.” 千乘, 諸侯之國, 其地可出兵車千乘者也. 敬者, 主一無適之謂. 敬事而信者, 敬其事而信於民也. 時, 謂農隙之時. 言治國之要, 在此五者, 亦務本之意也.
道는 다스린다는 말이다. 마씨가 말하길, “800집에서 마차 한 승을 낸다.”고 하였다. 천승이란 제후의 나라인데, 그 땅에서 병거 천승을 낼 수 있는 나라라는 것이다. 敬이라는 것은 하나에 주안점을 두어(집중하여) 다른 곳으로 (빠져나) 가는 것이 없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일을 공경하고 믿음을 얻는다는 것은 자기 일을 공경하되, 백성들에게서 신뢰를 받는다는 말이다. 時란 농한기의 때를 말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는 이 다섯 가지에 있는데, 또한 근본에 힘쓰라는 뜻임을 말한 것이다.
或問道之爲治 何也 朱子曰 道者治之理也 以爲政之心言也 曷爲不言治 曰治者 政敎法令之爲治之事也 夫子此言者 心也 非事也 혹자가 묻기를, “道를 治라고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주자가 말하길, “道라고 하는 것은 다스리는 이치이니, 정사를 하는 마음으로써 말한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治라고 말하지 않은 것인가? 治라고 말하는 것은 政敎와 法令을 다스리는 일로 삼기 때문이다. 공자께서 여기에서 말한 것은 마음이지 일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車乘之說 疑馬氏爲可據 馬說八百家出車一乘 包氏說 八十家出車一乘 一乘甲士三人 步卒七十二人 牛馬兵甲芻糧具焉 恐非八十家能給也 주자가 말하길, “수레의 숫자에 관한 설은 마씨가 믿을만한 것 같다. 마씨는 800家에서 수레 1승을 낸다고 말했고, 포씨는 80家에서 수레 1승을 낸다고 말했다. 수레 1승에 갑사가 3명이고, 보졸이 72명이니, 소와 말과 병장기와 갑옷, 그리고 꼴과 식량을 갖추려면, 아마도 80家가 능히 갖출 수 있는 바가 아닐 것이다.”라고 하였다.
此等處 只要識得古制大意 細微處亦不必大段費力考究 이러한 등등의 부분은 그저 옛 제도의 큰 뜻만 알면 되고, 세미한 곳은 역시 대단히 힘을 써서 상고하고 연구할 필요가 없다.
朱子曰 自秦以來無人識敬字 至程子方說得親切 曰主一之謂敬 無適之謂一 故此合而言之 身在是則其心在是 而無一息之離 其事在是則其心在是 而無一念之雜 주자가 말하길, “진나라 이래로 敬이란 글자를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정자에 이르러 바야흐로 친절하게 말하길, ‘하나에 주안점을 두는 것을 일컬어 敬이라 말하고, 다른 곳으로 가지 않는 것을 일컬어 一이라고 말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이를 합쳐서 말한 것이니, 몸이 여기에 있으면 그 마음도 여기에 있어서 한순간도 떠남이 없고, 그 일이 여기에 있으면 그 마음도 여기에 있어서 한 생각도 섞임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覺軒蔡氏曰 敬該動靜 主一亦該動靜 此章敬字乃是主動而言 각헌채씨가 말하길, “敬은 動과 靜을 다 갖춘 것이고, 主一(하나에 주안점을 두는 것) 역시 動靜을 다 갖춘 것이다. 그러나 이 장의 敬자는 도리어 動에 주안점을 두고서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敬事而信 疑此敬是小心畏謹之謂 非主一無適之謂 朱子曰 遇事臨深履薄而爲之 不敢輕不敢慢 乃是主一無適 누군가 묻기를, “일을 공경하여 믿음을 받는다는 말에서, 여기의 敬은 조심하고 두려워하고 삼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主一無適(하나에 주안점을 두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지 않음)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의심됩니다.”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일을 만나면 깊은 물가에 임한 듯 얇은 얼음을 밟는 듯 조심하여 그것을 행하는 것이니, 감히 가볍게 보지 않고, 감히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 마침내 主一無適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如何信了方能節用 曰 無信如何做事 如朝更夕改 雖商鞅之徒 亦不可爲政 要之 下面三事 須以敬信爲主 누군가 묻기를, “어째서 믿음을 받으면, 바야흐로 능히 재물 쓰기를 절제할 수 있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길,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일을 할 것인가? 예컨대 (정령이) 朝變夕改라면, 비록 상앙의 법가들 무리라고 할지라도, 역시 정사를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요컨대, 아래의 세 가지 일도 모름지기 敬과 信을 주안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敬以事言而信則無不盡也 曰 信是與民有信 期會賞罰不欺其民 淺言之 則魏文侯之期獵 商君之徙木 亦其類也 누군가 묻기를, “敬은 일로써 말한 것이지만, 信은 해당되지 않음이 없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길, “信은 백성과 더불어 믿음이 있는 것이니, 모임을 기약하고 상과 벌을 줌에 있어 자기 백성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위문후가 사냥의 약속을 지킨 일과 상군(상앙)이 나무막대기를 옮긴 자에게 상을 준 일도 역시 그러한 부류다.”라고 하였다.
胡氏曰 發於己敬 則施於民者信 호씨가 말하길, “자신에게서 피어나는 것이 敬이라면, 백성에게 베푸는 것은 信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古聖王所以必如此者 蓋有是五者而後 上之意接於下 下之情方始得親於上 上下相關方可以爲治 若無此五者 則君抗然於上而民蓋不知所向 有此五者方始得上下交接 주자가 말하길, “옛날 聖王께서 반드시 이와 같이 했던 까닭은 대체로 이 다섯 가지가 있은 이후에 윗사람의 뜻이 아래에 접속되고, 아래의 사정이 바야흐로 비로소 위에 친밀해질 수 있어서, 상하가 서로 관련되어야만 바야흐로 다스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 다섯 가지가 없다면, 임금은 위에서 제멋대로(抗然) 하고, 백성은 대체로 향할 바를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니, 이 다섯 가지가 있어야만 비로소 상하가 서로 접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勉齋黃氏曰 敬事而信 敬與信對也 節用而愛人 儉與慈對也 此皆治國之要道 故兩句言四事而各以而字貫之 使民以時 又慈中之一事 故獨系於後 但言所存未及治具 故曰務本 면재황씨가 말하길, “敬事而信에서 敬과 信이 짝이고, 節用而愛人에서는 儉과 慈가 짝이다. 이것들은 모두 나라를 다스리는 중요한 道이기 때문에, 두 구절에서 네 가지 일을 말하면서 각자 而자로 그것들을 꿰었던 것이다. 使民以時는 또한 慈 안의 하나의 일이기 때문에, 홀로 뒤에다 붙였는데, 다만 보전해야 할 바만 말하고서 다스리는 도구에는 미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근본에 힘쓴다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左傳農隙 杜氏註 謂各隨時事之間 是也 경원보씨가 말하길, “좌전에서 農隙에 대하여 두씨가 주석을 달아 말하길, 각자 계절의 일을 따라 하는 그 사이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農隙이다.”라고 하였다.
前四章是爲學之本 此五者是治國之本 앞의 네 장은 학문을 하는 근본이고, 여기의 5가지는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다. |
2 | ○ 程子曰: “此言至淺, 然當時諸侯果能此, 亦足以治其國矣. 聖人言雖至近, 上下皆通. 此三言者, 若推其極, 堯ㆍ舜之治亦不過此. 若常人之言近, 則淺近而已矣.” 정자가 말하길, “이 말은 대단히 얕았지만(알기 쉽다), 그러나 당시 제후들이 과연 이렇게 할 수 있었다면, 또한 그 나라를 족히 다스렸을 것이다. 성인의 말은 비록 지극히 가깝지만, 위아래로 모두 통한다. 이 세 가지 말씀을 만약 끝까지 미루어 나간다면(擴充, 推理), 堯舜의 다스림도 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보통 사람의 말이 가깝다면, 곧 천근할 뿐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謂平實而非甚高難行者 신안진씨가 말하길, “(至淺이란) 평범하고 착실하되 너무 높거나 행하기 어려운 것이 아님을 일컬어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近足治諸侯之國 極可致堯舜之治 言近而指遠也 신안진씨가 말하길, “가까이로는 제후의 나라를 족히 다스릴 수 있고, 극단적으로는 堯舜의 다스림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니, 말은 가깝지만 가리키는 뜻은 먼 것이다.”라고 하였다. |
3 | 楊氏曰: “上不敬則下慢, 不信則下疑, 下慢而疑, 事不立矣. 敬事而信, 以身先之也. 『易』曰: ‘節以制度, 不傷財, 不害民.’ 蓋侈用則傷財, 傷財必至於害民. 故愛民必先於節用. 然使之不以其時, 則力本者不獲自盡, 雖有愛人之心, 而人不被其澤矣. 然此特論其所存而已, 未及爲政也. 苟無是心, 則雖有政, 不行焉.” 양씨가 말하길, “위에서 (일을) 공경하지 않으면 아래에서는 태만하고, 믿음을 주지 않으면 아래에서는 의심하고, 아래에서 태만하고 의심하면, 일은 세워지지 않는다. 일을 공경하고 믿음을 얻는 것은 자기 몸으로 그것을 먼저 행하는 것(솔선수범)이다. 주역에 이르길, 제도로써 절제하면, 재물을 상하게 하지 않고, 백성도 해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대개 사치스럽게 쓰면 곧 재물을 상하게 하고, 재물을 상하게 하면 반드시 백성을 해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백성을 사랑함에 있어 반드시 재물을 절약하는 데에 먼저 힘써야 한다. 그러나 백성을 부림에 있어 제 때에 맞춰서 하지 않으면, 즉 그 근본(농사)에 힘쓰는 것은 스스로 다함을 얻지 못하게 되니, 비록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지라도, 사람들은 그 은택을 입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그 보존해야 할 바를 논한 것일 따름이고, 정치를 하는 것에는 아직 미치지 않았다. 진실로 이러한 마음이 없다면, 비록 정령과 제도가 있다 하여도 행해지지 않을 따름이다.”라고 말하였다.
楊氏: 名時字中立 號龜山 延平人 程門高弟 양씨는 이름이 時이고, 자는 中立이며, 호는 구산이다. 연평 사람이고, 정자 문하의 수준 높은 제자다.
新安陳氏曰 力本謂農事 신안진씨가 말하길, “근본에 힘쓴다는 것은 농사를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所存謂爲政者之心 未及爲政之條目 如禮樂刑政紀綱文章 乃爲政之條目也 楊氏此說本於伊川 伊川曰 敬事以下論其所存 未及治具 故不及禮樂刑政 신안진씨가 말하길, “보존해야 할 바란 위정자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정사를 하는 조목에 미치지 못했다는 말에서, 예컨대 禮樂과 刑政과 紀綱과 文章 같은 것이 곧 정사를 하는 조목인 것이다. 양씨의 이 학설은 정이천에게서 본받은 것이니, 정이천은 ‘일을 공경한다는 것 이하는 그 보존해야 할 바를 논하였을 뿐 다스리는 도구에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禮樂과 刑政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라고 말했다.”라고 하였다. |
4 | 胡氏曰 凡此數者 又皆以敬爲主 愚謂五者反復相因 各有次第 讀者宜細推之 호씨가 말하길, “무릇 이 몇 가지는 또한 모두 공경함을 주인으로 삼는다.” 고 하였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다섯 가지는 돌이켜서 다시 서로를 바탕으로 삼는데, 각자 순서(차례)가 있으니, 독자들도 세밀하게 미루어보아야 마땅하다.”
胡氏: 名寅 字明仲 號致堂 建安人 호씨는 이름이 寅이고 자는 명중이며, 호는 치당이고, 건안 사람이다.
朱子曰 敬事而信 是節用愛人使民以時之本 敬又是信之本 要之 本根都在敬上 若能敬則下面許多事 方照管得到 自古聖賢自堯舜以來 便說這箇敬字 孔子修己以敬 是最緊要處
주자가 말하길, “敬事而信은 節用과 愛人, 그리고 使民以時의 근본이고, 敬은 다시 信의 근본이다. 요컨대 근본이 모두 敬 위에 있는 것이니, 만약 능히 敬할 수 있다면, 곧 아래의 수많은 일들은 바야흐로 그에 따라 관리될 수 있을 것이다. 자고로 성현들께서는 堯舜 이래로 곧 이 敬자를 말씀하셨는데, 공자께서도 자기수양을 敬으로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제일 긴요한 부분이다.”라고 하였다.
問反覆相因 朱子曰 始須是敬 能敬方能信 能敬信方能節用 能節用方能愛人 能愛人方能使民時 是下因乎上 然有敬於己而不信於人者 故敬了又須信 亦有信於人而自奢侈者 故信了又須節用 亦有儉嗇而不能愛人者 故節用了又須愛人 又有能愛人而妨農時者 故愛人又須使民時 使不以時 却是徒愛也 是上因乎下 須看能如此 方能如此 又看能如此又不可不如此之意 反覆推之 方見曲折
누군가 돌이켜서 다시 서로 원인(바탕)이 된다는 것에 대하여 물었다. 주자가 말하길, “처음은 모름지기 敬이어야 한다. 능히 공경할 수 있어야만, 바야흐로 믿음을 얻을 수 있고, 능히 敬과 信을 할 수 있어야만, 바야흐로 재물 쓰기를 절약할 수 있으며, 능히 재물 쓰기를 절약할 수 있어야만, 바야흐로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능히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야만, 바야흐로 백성을 때에 따라 부릴 수 있게 된다. 이는 下가 上을 원인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敬할 수 있어도 남에게서 信을 받을 수 없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敬을 다한 후에 다시 모름지기 信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남에게서 信을 받았어도, 스스로는 사치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信을 받고서 다시 모름지기 재물 쓰기를 절제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검소하고 아끼면서도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르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재물 쓰기를 절제한 뒤에도 다시 모름지기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을 능히 사랑할 줄 알면서도 농사지을 때를 방해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사람을 사랑한 뒤에도 다시 모름지기 때에 맞춰서 백성을 부려야 하는 것이다. 때에 따라 부리지 않는다면, 이는 도리어 헛되이 사랑하는 것일 뿐이다. 이런 것들은 上이 下를 원인으로 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이와 같이 할 수 있음을 살펴보아야만 비로소 이와 같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이 할 수 있고, 또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을 살펴보고서, 반복하여 미루어 나간다면, 바야흐로 그 曲折을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潛室陳氏曰 晦庵說五者反覆相因 如何是反覆相因處 蓋從敬事而信起說作下去 是如此而後 能如此 如人能敬 則做事專一自能信 旣能信 則必欲所行孚於民 自然能節用 旣能節用 自然不傷財而至於愛人 旣能愛人 自然能使民以時 這是如此而後能如此 是自上而下相因如此 如自下面說作上來 則是如此而又不可不如此 如以敬去做事 便不敢苟簡胡亂去做 須要十分好方止 旣得好 便不至於苟簡變更 這便是能信 然做此一事時久 或昏 或爲權勢所移 或爲利害所動 前日出一令旣如此 今日又變了如彼 這便不是信 便有妨於敬 所以著別下工夫於信去補這敬 然只知信 或出一政堅如金石 行一令信如四時 更不可移易 此固是好 然而自家奢侈之心 或有時而生 不能節用 要如此廣用 則是所令又反其所好 却有害於信 故又須著去節用方得 然只恁底節用 不知有箇中底道理 則或至於豚肩不掩豆 澣衣濯冠以朝 心下已有所吝嗇 則凡民有飢荒 不能去發倉振廩恤貧濟乏 至於築城鑿池思患預防不可已底事 亦吝嗇了 不捐財以爲之是 知節用而不知所以愛人 則節用又成落空了 此節用所以不可不愛人 然旣愛民又須使民以時 如春來當耕 夏來當耘 秋來當斂 便當隨時使去做 至冬來間隙之時 方用他得 不然則所謂力本者不獲自盡 雖有愛民之心而民不被其澤矣 此自下相因而上如此 잠실진씨가 말하길, “회암(주자)은 5가지가 반복하여 서로 원인이 된다는 것에 대하여 어떤 것이 반복하여 서로 원인이 되는 부분인지 말하였는데, 대체로 敬事而信에서부터 말을 시작하여 아래로 내려갔으니, 이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후에 비로소 이와 같을 수 있다’는 식이다. 예컨대, 사람이 능히 敬할 수 있다면, 일을 함에 오로지 몰두하여 저절로 信을 얻을 수 있으니, 이미 능히 信을 얻었다면, 반드시 행한 바가 백성들에게 믿음을 받기를 바라서 자연히 능히 재물 쓰기를 절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능히 재물 쓰기를 절제할 수 있다면, 자연히 재물을 상하게 하지 않고서 사람을 사랑함에 이를 것이다. 이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면, 자연히 백성을 부림에 있어 때로써 할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이와 같은 이후에 능히 이와 같을 수 있다.’는 식으로서,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가면서 서로 원인이 됨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만약 아래에서부터 말하여 위로 올라간다면, 이것은 바로 ‘이러하다면 또한 이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식이다. 예컨대 敬으로써 가서 일을 한다면, 곧 감히 구차하게 대충하거나 함부로 어지럽게 할 수는 없고, 모름지기 대단히 좋게 한 후에 비로소 그만두는 것과 같은 격이다. 이미 좋게 할 수 있다면, 곧 구차하게 대충하여 이것을 변경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능히 信을 얻을 수 있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 하나를 하면서 시간이 오래 지나면, 혹은 어리석기 때문에, 혹은 권세에 떠밀려서, 혹은 이해관계에 흔들렸기 때문에, 전날에 내놓은 政令이 이미 이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다시 저렇게 변경하였다면, 이것은 곧바로 信이 아닐 뿐더러, 또 敬에 방해됨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별도로 信에 공력을 쏟아서(下) 이 敬을 보완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信이라는 것이 혹여 政令을 하나 냄에 마치 金石과 같이 굳세고, 政令을 하나 행함에 마치 사계절과 같아서 더는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면, 이것은 본래 좋은 일이지만, 그러나 자기 스스로 사치하는 마음이 혹시라도 어느 때에 생겨서 재물 쓰기를 절제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만약 이와 같이 널리 재물을 쓴다면, 이는 명령하는 바가 또한 그가 좋아한 바에 반하는 것이라서, 도리어 信에 해가 됨이 있기 때문에, 다시 모름지기 가서 재물 쓰기를 절제해야만 비로소 괜찮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저 이렇게 재물 쓰기를 절제할 뿐, 中庸에 맞는 도리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간혹 ‘돼지 어깨고기가 제기(豆)를 덮지 못하고, 낡은 옷과 관을 빨아 입고 쓰고 조회에 나가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는데, 마음 아래에 이미 인색한 바가 있다면, 무릇 백성이 굶주리고 흉년이 들어도, 가서 창고를 열어 가난하고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휼할 수 없을 것이다. 성을 쌓고 연못을 파더라도 미리 막아서 그치게 할 수 없는 일을 걱정함에 이른다면, 이 역시 인색한 짓이다. 재물을 내어놓지 않는 것을 옳은 것으로 여기면서, 재물 쓰기를 절제할 줄만 알 뿐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른다면, 節用을 이루는 것마저 또한 허탕 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재물 쓰기를 절제함에 있어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미 백성을 사랑하고 있더라도, 또한 반드시 백성을 부림에 있어 때에 맞추어서 해야 하는 것이니, 예컨대 봄이 오면 마땅히 밭갈이를 해야 하고, 여름이 오면 마땅히 김을 매야 하며, 가을이 오면 마땅히 거두어들여야 하듯이, 마땅히 때에 따라서 가서 하도록 해야 한다. 겨울이 와서 여가가 있는 때에 이르면, 바야흐로 그들을 부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른바 근본(농사)에 힘쓰는 것이 스스로 다함을 얻지 못하게 되니, 비록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지라도, 백성들은 그 은택을 입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래로부터 서로 원인을 삼으면서 위로 올라감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