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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대기 연구
문제 제기
신라 중대(654~780)는 29대 태종무열왕대부터 제36대 혜공왕대까지로, 태종무열왕과 그 직계 후손이 재위한 시기였다.
중대 초기 신라는 당과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켰다.
그러나 당이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려는 야욕을 보이자 신라는 이를 무력으로 물리치고 드디어 삼국통일을 달성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이전보다 영토와 인구가 크게 늘어나고, 발달된 선진 문물을 수용함으로써 이후 100여 년에 걸쳐 유례없는
번영을 이룩하였다.
중대는 흔히 신라가 전성을 이룬 황금시대로 일컬어지지만, 연구 자료는 그 전후 시기에 비해 빈곤하다.
주요한 금석문이 다수 발견되었고, 한반도와 주변국가간의 관계가 긴박하게 전개되었던 삼국시대에 비해, 연구가 활발치
못한 편이다.
또 선종의 등장이나 후삼국의 성립과 관련하여 비교적 자료가 풍부한 하대와도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중대 연구는 그 성립기와 말기에 몰려 있는 편이다.
중대는 축출된 진지왕의 손자인 김춘추金春秋와 망국의 유민인 김유신의 연합세력에 의해 성립되었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647년 상대등 비담毘曇의 난 진압을 계기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비담으로 대표되는 구귀족에 대해 김춘추·김유신의 신귀족 세력이 승리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중대 왕실의 성립과 이들에 의해 이룩된 삼국통일의 문제에 집중하거나, 혜공왕 대의 정변을 살피면서 중대 말기의 정치사가 주로 검토되었다.
그러나 중대는 신라사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삼국통일 후 신라의 극성기였다.
미술사에서는 석굴암·불국사·성덕대왕신종 등 우수한 걸작들이 많이 만들어지던 시기였다.
더욱이 중대는 정치적 측면에서 전제왕권시대라고 인식하여, 그 전후를 각각 귀족연합, 귀족연립의 시기로 이해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띠고 있다.
중대기 신라사는 대체로 해방 이후에 연구가 활성화되었다.
1950년대에 정치기구에 대한 기초적 분석이 시작되면서 1980년 무렵까지 정치사, 정치제도, 골품제 등을 중심으로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 가운데 귀족회의의 의장인 상대등과 집사부중시에 대한 연구는 신라사의 변천과정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였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1980년대 이후에는 기왕의 연구가 보다 심화되면서, 상업, 수공업, 군사제도, 지방 통치제도, 촌락문서, 도성제 등으로
주제가 다양해졌다.
이에 따라 문헌자료와 함께 금석문, 목간 등의 자료가 중시되었다.
또 통일신라의 중세 봉건제사회설이 대두하여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러한 연구들을 통해 새로운 시각이 제시되는 한편, 반론과 반비판이 이어져 중대기에 대한 이해의 폭이 크게 확대되었다. 여기서는 정치적 측면에 초점을 두고, 중대의 의미, 신라삼국통일론, 중대 전제왕권론의 실태, 중대 말기의 정치변화 등
으로 나누어 살펴보려 한다.
중대의 의미
태종무열왕 김춘추에 의해 개창된 ‘중대’는 『삼국사기』에 나타난 시기 구분의 하나였다.
『삼국사기』에서는 신라사를 시조 혁거세로부터 28대 진덕여왕까지의 상대上代(서기전 57~서기후 654), 29대 태종무열왕부터 36대 혜공왕까지의 중대中代(654~780), 37대 선덕왕宣德王부터 마지막 56대 경순왕까지의 하대下代(780~935)로 구분
하였다.
곧 상대가 711년의 기간이라면, 하대는 155년, 중대는 가장 짧은 126년 간이었다.
『삼국사기』와 함께 한국고대사의 양대 사서라고 할 수 있는 『삼국유사』에서도 신라사를 세 시기로 구분하였다.
혁거세부터 22대 지증왕까지를 상고上古(서기전57~서기후 514)라 하고, 23대 법흥왕부터 28대 진덕여왕까지를 중고中古
(514~654)라 한데 비해, 29대 태종무열왕부터 마지막 경순왕까지를 하고下古(654~935)라 하였다.
신라사를 세 시기로 구분하면서, 태종무열왕의 즉위를 시대구분의 하나의 기점으로 인식하였음은 『삼국사기』와 『삼국
유사』가 같다고 하겠다.
태종무열왕은 진골眞骨로서 처음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삼국사기』에서는 그로부터 경순왕까지를 진골이라고 하여, 그 이전의 성골聖骨에서 왕통이 변화된 것으로
인식하였다.
곧 태종무열왕의 즉위는 진골왕의 출현인 동시에, 전과는 다른 새로운 시기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성골과 진골의 차이를 밝히려는 연구가 있었고, 그가 축출된 진지왕의 손자라는 점이 주목되었다.
『삼국사기』에서는 혜공왕의 죽음으로 중대가 끝나고 선덕왕이 즉위하여 하대가 시작되었다고 함으로써 그 이전의
중대와 구별하였다.
이에 따라 중대를 설정한 이유와 함께 그 구분의 시점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일찍이 삼대三代의 변화에 주목한 학자들은 이를 왕계의 차이라고 파악하였다.
중대가 무열왕계라는 점에서 그 전후의 나물왕계와 구별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삼대의 구분은 무열왕계를 강조한 데 특징이 있는 만큼, 무열왕계를 운위할 필요가 있는 시대가 어디였을까에
의문을 표시하였다.
삼대의 구분을 국인國人이 하였다는 데서 신라 중대 혹은 하대일 것이라는 견해가 제기된 반면, 고려 혹은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다.
따라서 전자는 『삼대목三代目』의 편찬을 그 근거로 든 반면, 『삼대목』의 삼대가 헌강왕· 정강왕·진성왕의 3대를 가리킨다고 한 견해도 있었다.
삼대의 시기 구분을 왕계의 변화로 파악한 뒤 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삼대의 구분이 신라 사회 자체의 변질과정에 대한 파악으로 심화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이러한 결론이 삼대의 구분법과
어긋나는 경우 아무런 집착도 없이 이를 포기 혹은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정치적 측면에서 혜공왕 10년(774)을 하대의 기점으로 설정한 견해가 대두하였다.
이는 식민사학의 극복이라는 당시의 과제와 관련하여 많은 지지를 받아 통설화되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에 영향을 받아 중대나 하대의 기점 또는 종점을 소급시키거나 끌어내리기도 하였다.
즉 무열왕계 혹은 중대의 범위를 확대하여, 진덕여왕대에서에서 선덕왕宣德王대까지의 138년간(647~785)을 그 시기로
설정한다던가, 혜공왕을 앞선 경덕왕 16년(760)을 하대의 기원 혹은 하대의 성립을 예고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선덕왕(780~785)대를 중대와 하대의 과도기로, 그 이후의 원성왕 대를 실질적인 하대의 시작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나타난 삼대의 구분은 왕통에 의한 것이었다.
나아가 중대는 곧 태종무열왕 직계 국왕의 집권시대였다. 따라서 무열왕계 혈통이 아닌 진덕여왕은 물론, 성덕왕의 외손
으로 혜공왕을 이어 즉위한 선덕왕도 중대의 범위에 들 수는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신라삼국통일론
신라 중대에 일어난 최대의 사건은 삼국통일의 달성이었다.
이 시기의 역사 전개에 대해서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했다고 하는 신라삼국통일론이 일반적이지만, 신라는백제만
통합하였다는 백제통합론이 제기되어 있다.
더욱이 후자는 신라와 발해를 남북국으로 이해하였다.
나아가 신라삼국통일론은 전근대사학에서 나온 것인데 비해 남북국론은 근대사학의 것으로 평가하면서, 7세기를 고대와
중세의 분기점으로 이해하기도하였다.
이처럼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해서는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대립되어 있다.
신라삼국통일론은 신라 당대인이 처음 주장하였다.
이른바 삼국을 통합하여 한 집안을 이루었다는 삼한위일가三韓爲一家 의식이 그것이다.
여기서 삼한은 삼국을 말하며, 등장 시기는 7세기 종반었다.
신라는 당과 함께 668년 평양성을 공략한 후 곧이어 고구려 유민들의 반당운동을 지원하였고, 670년에는 고구려 유민집단
을 금마저(전북 익산)에 안치하고 안승安勝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였다,
이어 674년에는 안승을 보덕왕報德王으로 삼았다가 684년에 신라에 완전히 흡수하였다.
백제의 주민과 그 땅은 고구려 멸망 후 벌어진 대당전쟁을 통해 신라에 병합되었다.
이에 신라 중대왕실은 삼한일통三韓一統을 그들의 정통성의 근저로서 삼았다.
신문왕대에 당의 사신이 무열왕의 태종太宗 칭호가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묘호와 같다며 바꿀 것을 강요하자 신라는
태종무열왕이 일통삼한一統三韓의 위업을 달성하였음을 들어 거부하였다.
또 혜공왕대에 행한 5묘제 개편에서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을 백제·고구려를 평정한 왕이라 하여 대대의 불천지주(世世不
毁之宗)로 삼았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전국을 9주로 나누었다.
소백산맥 이남 지역을 신라 영역으로 설정해 3개의 주를 설치하고, 옛 백제 지역에 3개의 주, 한강 유역 등을 고구려 남쪽
경계라 하여 3개의 주를 두었다.
그리고 왕의 직속 중앙군단인 9서당誓幢을 만들면서 고구려인으로 3개, 백제인으로 2개, 신라인으로 3개, 말갈인으로 1개
의 서당을 편성하였는데, 이 또한 삼한일통 의식의 반영이었다.
신라인들의 이 같은 의식은 발해의 등장으로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였다.
발해는 건국 직후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통교하였다.
이에 신라는 건국자 대조영大祚榮에게 대아찬의 관등을 수여하였다.
신라 조정에서 대조영에게 진골의 대우를 해준 셈이지만, 관등이 5등관에 불과하였다.
그 뒤 발해는 734년 신라와 한 차례 전쟁을 치루었다.
발해의 무왕이 장문휴張文休를 시켜 산동반도의 등주를 습격하자 당은 이에 맞서는 한편, 신라로 하여금 발해의 후방을
남에서 공격케 하였는데, 신라군은 눈을 만나 절반 이상의 사망자를 내고 퇴각하였다.
그러나 양국은 줄곧 대립하지는 않았고 일정한 한도 내에서 교류하였으며, 신라는 일본을 통하여 발해의 여러 사정을
입수하였다.
이무렵 발해는 일본과의 교섭에서 자국을 ‘고구려’라고 불렀다. 발해가 고구려 계승을 표방한 것은 신라삼국통일론을
부정하는 것이다.
발해가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면서 일통삼한론一統三韓論에 도전하자 신라 지배층에서는 신라삼국통일론을 더욱 강조
하게 되었다.
신라삼국통일론은 이처럼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오늘날까지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부분의 국사 개설서는 남북국론을 취하면서도 신라삼국통일론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신라삼국통일론에 대한 비판은 민족주의 사학에서 강하게 제기되어 오늘날 까지 이어지고 있다.
논점은 대략 다음과 같은 3가지였다.
영토적 불완전성, 외세와 결탁한 비자주성, 백제만 통합한 이국통일二國統一이라는 것 등이었다.
신라삼국통일론에 대한 비판은 조선 후기 한백겸, 유득공, 김정호 등에도 나타나는데, 유득공은 신라와 발해를 남북조
내지 남북국이라 보았다.
이는 신라삼국통일론을 근본적으로 부정한 것이다.
더욱이 민족주의 사학자인 신채호는 1908년에 발표한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 신라의 ‘통일’을 부정하고 이어지는
시기를 신라와 발해의 ‘양국시대兩國時代’ 라고 보았으며, ‘이종異種을 불러들여 동종同種을 멸함은 도적을 끌어들여
형제를 죽임과 다를 바 없는’ 행위라고 매도하였다.
이처럼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연구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신라의 통일을 부정함으로써 발해사를 민족사로 자리매김할 논리적 여지를 마련하려는 견해와, 신라통일의 의의를 인정
하면서도 발해를 민족사로 적극 인정하려는 주장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문무왕이 671년 당의 장수 설인귀에게 보낸 서한에서 언급한, “내가 고구려와 백제 양국을 평정하면 평양이남
백제 토지는 모두 신라에게 주어 길이 평안하도록 하겠다(我平定兩國 平壤已南 百濟土地 並乞你新羅 永爲安逸).”고 한
김춘추와 당 태종 이세민의 합의 내용이 쟁점이 되었다.
이를 백제 영토로만 이해한 경우, 신라 조정의 전쟁 목적은 삼국통일이 아니라 백제병합이었고, 신라가 고구려 영역을
차지하지 못한 것은 본래 의도가 그러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고구려 영역을 둘러싼 비판은 신라삼국통일론에 집착함으로써 야기된 불필요한 것이며,
이 시기를 남북국시대로 인식한다면 굳이 신라에 대한 영역 축소를 아쉬워하거나 논란한다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신라삼국통일론을 부정하는 시각에서는 7세기 말 이후의 신라국가의 명칭을 ‘후기 신라’로 부를 것을 주장하였다.
삼국은 원래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지 못하였고, 발해와 신라는 서로 이질적인 실체였다고 한다.
7세기 종반 이후의 신라를 통일신라라는 말 대신 ‘후기 신라’라고 부르자고 하면서 8세기 이후 신라인들은 발해 지역을
이역異域으로 간주하면서 시종 대립적인 관계였다는 것이다.
이는 남북국이라고 할 때의 ‘후기 신라’와는 용어는 같으나 개념은 다르다.
그 밖에 삼국의 정통을 신라로만 보면서 고려, 조선은 고구려, 백제의 역사적 유산이 아닌 신라가 남긴 유산을 이었을
뿐이라고 하여 ‘후기 신라’ 대신 ‘대신라大新羅’라 한 경우가 있고, 학술적 가지는 없지만 동북공정의 차원에서 제기된
‘중국고구려사’론도 있었다.
신라삼국통일론에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통합한 영토의 불완전성이었다.
7 세기 중반의 영역 경계를 기준으로 볼 때 신라가 통합한 것은 고구려 영역 가운데 지금의 임진강 이북 대동강 이남 지역
과 강원도 북부지역에 한정하였다.
그나마 신라가예성강 서편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여 본격적인 경영을 한 것은 734년의 당과 함께 발해와 전쟁을 수행한 뒤
에 당이 대동강 이남 지역을 신라의 영역으로 승인한 뒤부터였다.
이러한 사실을 중시한 연구자들은 신라의 통일은 사실상의 백제 통합이었으며, 신라의 전쟁 목적도 실제는 백제통합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신라에 들어온 고구려 유민도 적었고 나아가 삼국통일이라고 하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신라삼국통일론을 지지하는 연구자들은 고구려 지역, 고구려 주민이라 할 때 그 기준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삼국 말기를 기준으로 하면 이들 지역과 주민은 고구려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지만, 고구려의 범위나 신라의 범위는
고정적이 아니라 가변적이었다는 반론이 있었다.
삼국 말기를 기준으로 보면 신라가 취한 고구려 영역은 작지만, 5세기와 6세기 전반을 기준으로 볼 경우 통일신라 영역의
상당 부분은 고구려의 것이었다고 한다.
통일기 신라의 1/3을 구성한 것이 고구려적인 것이었다는 것이다.
671년 문무왕이 당의 장수 설인귀에게 보낸 서한은, 648년(진덕여왕 2)에 입당한 김춘추와 당 태종의 대화에서 당 태종이
고구려와 백제 양국을 평정하면 평양 이남 백제 토지는 모두 신라에게 주겠다고 한 약속을 당이 지키지 않았음을 공박한
내용이다.
이 서한은 설인귀가 671년 1월에 신라가 신의를 배반하고 당을 공격한 것을 비난한 데 대한 문무왕의 답신이었다.
여기서 평양 이남 백제 토지는 백제 토지만이 아니라 고구려 영역 중 평양 이남 지역과 백제 토지를 주겠다는 의미로 해석
된다.
이는 고구려를 멸할 시 신라의 작전 범위가 평양 이남이고, 당군의 작전 범위가 평양 이북인데서 온 약속이었던 것이다.
735년(성덕왕 34)에 당이 대동강 이남 지역을 신라의 영토로 인정한 것은 당이 사전에 그러한 약속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
이다.
삼국의 주민들은 오랫동안 접촉함에 따라 서로 익숙하게 되었지만, 삼국 말까지도 서로 동족으로 여기는 의식이 형성
되었다는 적극적인 증거는 없다.
그렇지만 삼국 말기에는 삼국인 자신들에 의해 세 나라가 하나의 범주로 파악되었다.
동질적인 성격을 지닌 삼국의 주민을 합친 것이므로 이는 통합이 아닌 통일로 보아야 한다.
7세기 후반, 전쟁의 종반부에서 당과 대결을 벌이면서 삼국의 주민들은 자신들의 동질성을 자각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의 구체화한 형태가 일통삼한 의식이었다.
이는 삼국인들의 결집이라는 현실적인 필요성에 따라 신라 조정에서 먼저 표면에 내세웠고, 뒤에 점차 확산되었다.
‘중대 전제왕권’론의 실상
신라 삼대의 의미에 대해서는, 상대를 대체로 나물왕계, 중대를 무열왕계, 하대를 원성왕계(부활 나물왕계)로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는 왕계로 파악한 것이며, 정치제제의 변천이란 측면에서는 상대를 귀족연합기, 중대를 전제왕권기, 하대를
귀족연립기로 파악한 견해가 제기되어 통설화되었다.
즉 중대에서 하대로의 변화는, 중대의 전제주의에서 상대의 귀족연합적 정치형태로 복구하려는 경향을 띤다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하대는 상대의 귀족연합 그대로일 수는 없고 엄밀히 말하면 귀족연립적인 정치형태라고 하였다.
이처럼 상대, 중대, 하대에 따라 정치형태가 귀족연합 → 전제왕권 → 귀족연립으로 변천되어 갔다는 주장은 신라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많은 지지를 받아 왔다.
그러나 이 주장은 일련의 연구의 결과로서 제시된 것이 아니라 주창자의 초기 논문에서 미리 설정된 결론이었다.
따라서 그의 이후의 연구는 이를 증명하는데 모아졌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주장을 하게 된 논거이다.
김춘추는 진덕여왕이 죽은 뒤 상대등 알천과의 경쟁에서 김유신의 무력적 힘을 배경으로 즉위하여 태종 무열왕이 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전제왕권이 성장하고 있음을 나타내며, 전제왕권의 확립을 가져온 사건은 신문왕대라고 보았다.
신문왕 즉위 원년(681) 8월에 왕의 장인 소판 김흠돌金欽突의 난이 일어났다.
김흠돌은 신문왕이 즉위한 지 막 1개월이 되는 시점에 파진판 흥원, 대아찬 진공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임을
당하고, 딸은 출궁되었다.
신문왕은 병부령 김군관을 이를 알면서도 보고하지 않았다고 하여 불고지죄不告知罪로 목베고 난의 가담자를 지엽枝葉
까지 찾아 죽임으로써 전제왕권을 확립하였다고 하였다.
삼국통일 직후 신왕의 즉위 초를 틈타 왕의 장인이 반란을 일으키고, 왕비가 폐출되었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주장과 정치적인 데 이유가 있다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신문왕대에 신라는 9주 5소경제를 확립하고, 영 - 경 - 대사 - 사지 - 사를 기본으로 하는 5등관제를 확립하였다.
또 시위부를 개편하고, 지방관을 감찰하기 위해 외사정을 지방에 파견하였다. 나
아가 관료들의 경제기반을 마련해 줄 목적으로 687년(신문왕 7)에 문무관료들에게 토지를 주었다가 2년 뒤에는 귀족들
에게 주던 녹읍祿邑을혁파하고 세조歲租를 지급하였다.
그 뒤 757년(경덕왕 16) 3월에는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리에게 주던 월봉을 없애고 녹읍을 부활시켰다.
녹읍은 귀족들의 경제기반을 마련해준 조처였다.
따라서 이의 혁파는 귀족들의 경제기반을 약화시키려 한 것으로, 귀족세력에 대한 왕권의 승리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
적이다.
그러나 이의 혁파가 국가의 민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기 위한 기도였다는 해석도 제기되었다.
중대 전제왕권설의 근거로는, 귀족회의 의장인 상대등上大等과 집사부의 장관인 중시中侍의 정치적 역관계 변화가 주목
되었다.
상대등은 병부령兵部令에 이어 법흥왕 18년(531)에 설치된 신라의 최고 관직이었다.
상대등의 임무는 총지국사摠知國事 곧 국무를 총리하는 것으로, 귀족회의를 주재하거나 관리의 인사행정을 주관하였다.
상대등이 주재하는 귀족회의는 화백和白으로 불리며, 대등大等이 그 구성원이었다.
따라서 상대등은 귀족세력의 의견을 대변하며 국왕과는 대립적이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중대가 되면 왕권 강화에 따라 집사부 중시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정치의 뒷면으로 물러났다가, 하대에 다시 실
력자로 등장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중대에는 상대등이 퇴조한 대신 집사부 중시가 권력의 핵심으로 부각되면서 국왕-집사부 중심의 전제정치가 행
해졌다고 보았다.
중시는 651년(진덕여왕 5)에 설치되어 왕정의 기밀사무를 관장하였다.
이는 당의 제도를 수용한 것으로 648년 김춘추의 입당을 계기로 설치되었다고 판단된다.
집사부의 기능에 대해서는 최고 관부라는 견해가 대표적이지만, 중앙 부처의 총무처와 같은 기관으로 이해한 견해가 있고, 고려의 중추원이나 조선의 승정원에 비기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따라서 전자가 중시를 국무총리로 이해한 반면, 후자는
총무처장관이나 국왕의 비서실장으로 이해하였다.
또 집사부의 활동을 분석하여 중시가 총무, 비서기관, 대외외교, 정책기획을 담당하였다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중시의 임기는 중대 3년, 하대 4년 정도에 불과하였다.
중시의 이러한 잦은 퇴임은 왕의 안전판이자 방파제로서의 구실을 충실히 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왕의 안전판이라는
것은 국왕의 혈연적 측근자를 임명한 데서 찾을 수 있고, 방파제적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것은 국왕을 대신하여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자주 퇴임한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중시의 퇴임은 중대만이 아니라 하대에도 별 차이가 없었다.
하대에도 여전히 국왕 측근의 인물이 중시에 취임하고, 국왕이 져야 할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자주 퇴임하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대 전제왕권설을 뒷받침한 것은 집사부가 신라의 최고 관부이며, 집사부가 주요 행정 관부를 총괄하였다는
데 있었다.
곧 그 장관인 중시는, 국왕과 행정을 분담하는 일반 관부의 중간에서 위로는 왕명을 받들고 아래로는 여러 관부를 통제
하는 수상의 지위라고 하였다.
그러나 집사부 중시는 관등이나 임기, 승진의 면에서 결코 상대등을 능가하지 못했으며, 국무를 총리할 처지도 아니었
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나아가 집사부 또한 최고 관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신라의 주요 관부는 집사부 산하의 기관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국왕과 병렬적으로 결합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비판 속에서 마침내 집사부가 신라의 최고 관부라는 주장이 주창자에 의해 철회되었다. 집사부는 신라의 핵심
관부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집사부가 신라의 최고 관부였다는 관점에서 제기된 중대 전제왕권설은 재검토를 요하게 되었다.
다음은 집사부의 임무에 대해서이다.
집사부의 장관인 중시가 천재지변을 이유로 빈번히 교체되었다는 사실이 지적되었다.
일본학계에서는 이에 대해 중시가 정치적 책임을 진 것은 정책을 결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행정관료의 장관으로서 정책
집행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상대등은 귀족의 대표자로서 정책 결정의 중심이었으므로 문벌귀족 집단으로부터 정치적 책임을 추궁 받는 일이
없었다고 하였다.
중시가 정책 집행의 책임을 졌다는 견해는 국내 학계에서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 견해를 수정하여 중시가 책임을 진 것은 정책 집행의 실패 때문이 아니라, 정책 결정에 참여하였기 때문
이라고 하였다.
중시는 국왕의 정책 결정에 조언자로 참여하였고, 천재지변에 의한 퇴임은 국왕이 져야 할 책임을 대신 진 것이라고
하였다.
중시의 퇴임을 국왕의 안전판이라 본 것은 견해가 같지만, 정책 집행 때문이냐 결정 때문이냐 하는 것은 신라의 권력
구조상 커다란 차이였다.
이에 대해 정책의 집행은 해당 관부에서 하는 것이며, 정책의 결정은 집사부가 아니라 대아찬 이상의 주요 중앙 관부의
장관으로 구성된 귀족회의(화백)에서 했다는 견해도 있다.
귀족회의를 정책결정기구가 아닌 귀족들 의견 대변 기구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었지만 귀족회의가 기껏 귀족들의 의견을
대변하는 기관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사부가 국왕 측근의 핵심 관직이었던 만큼 국왕의 국정운영에 대한 기획의 임무를 맡았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천재지변은 곧 국왕의 국정
운영의 부실 내지 정책의 실패에 기인한다고 여겨졌고, 이로 인해 중시가 빈번히 퇴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 견해를 따르면, 국왕을 중심으로 한 집사부, 귀족회의, 상대등의 상호관계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고 한다. 해
당 관부의 소관인 간단한 정책 결정은 관부 자체 내에서 처리하였으나, 중대한 일일 경우 정책의 기획은 국왕 측근의
관부인 집사부에서 담당하였다.
이 같은 사실은 천재지변을 이유로 중시가 퇴임함으로서 국왕의 안전판의 구실을 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집사부에서 기획된 정책은 주요 중앙관부의 장관으로 구성된 귀족회의로 넘겨졌고, 여기서 이를 심의하여 결정하였다.
그러나 귀족회의에서의 결정이 곧 집행에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국왕의 재가를 받음으로서 비로소 효력이 발생하였고,
각 관부에서는 이제 이를 집행에 옮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시와 상대등은 각각 왕권과 귀족회의를 대변하며 대립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임무를 분장한 상태에서
왕정에 협력하는 과정에서 정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앞으로 좀 더 많은 사례가 찾아지면 정책 결정의 실태가 분명히
밝혀질 것이다.
중대 초반 삼국통일을 달성한 이후 왕권은 전에 비해 현격히 강화되었다.
그리하여 일종의 전제왕권을 구축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태종무열왕과 문무왕 부자의 집념과 노력으로 통일의 대업이
달성되어 무열왕계 왕통의 권위가 고양된 점,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왕권 강화에 저해되는 일부 유력한 진골귀족을
성공적으로 제거한 점, 통일전쟁 기간에 맺어지기 시작한 지방세력과의 연계를 한층 강화함으로써 그 지지 기반을 확대
한 점, 국왕의 비서기관에 해당하는 집사부를 중심으로 정치체제를 정비하고 유교정치이념을 도입·강행함으로써 관료
제가 발달한 점 등이 주목 되었다.
그러나 이는 중대 왕권의 강화 요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
이후 전제왕권 내지 전제정치의 개념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었다.
1980년대 중반 화엄사상이 중대 전제왕권의 사상적 근거가 되었는가 하는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그 개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논의가 공전하였다.
한편, 전제왕권 또는 전제정치의 개념을 추구하여, 전제왕권은 견제기구가 있었으며, 이는 중고 말부터 형태가 갖추어
지기 시작하여 하대 귀족연립시기에도 꾸준히 전개된 체제라 규정하고, 중대 전제왕권은 국왕 1인의 독재가 아니라
관료제도와 소수 귀족세력의 지지와 타협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견해가 있었다.
또 동서양 제국의 사례 검토를 통해 전제정치의 특징을 추출하고 진평왕대를 그 기점으로 설정한 견해도 제기되었다. 나
아가 전제정치 또는 전제왕권이란 용어가 중대를 나타내는 매우 유용한 개념이지만, 상대적 제한적 의미로 사용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되었다.
중대의 국왕은 앞선 시대와 비교하면 확실히 강력한 군주이지만, 결코 전제적이지 않았고, 화백회의체를 조정하려 했을
뿐 무력화시킨 것은 아니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그 개념을 상대적 의미로 파악하여, 대체로 강력한 왕권 강화 정도로 파악한 듯하다.
한편, 전제정치는 국왕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국왕 1인이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형태이나, 왕권 강화와 같은 상대적인
개념이 아닌 절대적인 개념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특징이 나타나는 것은 폭군정치이므로 전제정치와 구별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중대 전제왕권설의 주창자가 30여 년 만에 밝힌 개념이란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상대적인 개념’, ‘절대적인 개념’과 같은 용어나, 당시의 정국 실태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되었다.
중대 전제왕권의 특징으로 김씨 왕족의 족내혼, 왕위의 장자 상속제와 태자 책봉제, 중국식 묘호의 사용이 흔히 지적
되었다.
그러나 왕실의 족내혼은 중고 시기에도 널리 행해졌으며, 장자 상속제나 태자 책봉제도 중대에 와서 처음 이루어진 것
이 아니고, 왕비 출궁도 반란에 의한 경우가 아닌 한 무자란 이유로 출궁을 서슴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는 반론이 제기
되었다.
성덕왕의 첫 왕비인 성정왕후나 경덕왕의 첫 왕비인 삼모부인의 예가 그러하다는 것이다.
정치기구 분석의 결과 중대도 그 전후 시기에 비해 정치형태상 차이가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귀족회의는 여전히 정책결정기구로 기능하고 있었고, 중시는 정책 기획의 실패를 책임지고 국왕을 대신하여 빈번히
교체되었다는 것이다.
군주 1 인의 독재적 권력의 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관료제도나 귀족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한 사람의
군주에게 권력이 집중된 정치형태’ 또는 ‘군주 1인에 의해권력의 행사가 이루어지는 정치형태’로 규정하기에는 한계점이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중대를 ‘국왕 중심의 집권적 관료체제’라 하든가, ‘골품제 아래 전개된 군주정치의 전형’이었다는 견해는 그 대안으로
제기된 것이다.
또 경덕왕대의 관호개혁과 지명개혁은 전제주의적 경향을 나타내는 것이며, 혜공왕 대의 이의 복고는 그 반동이라고
이해하지만, 『삼국사기』 직관지가 하대의 상태를 거의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정치기구에 대한 분석도 상대등이나 집사부 중시와의 관계만이 아니라, 재상제도, 성전사원 등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
한 연구는 기왕의 주장을 보완하거나 새로운 측면을 개척한 성과로 주목될 수 있다.
중대 말기의 정치 변화
7세기 말, 중대의 마지막 왕인 혜공왕이 재위하던 시기는 정치적인 격동기였다.
혜공왕은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으므로 처음 모후인 만월부인이 섭정하였다.
즉위 초인 왕 3년(767) 7월에는 일길찬 대공이 동생 아찬 대렴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왕궁을 33일 간이나 포위하였으나, 결국 왕군에 의해 토벌되고 9족이 죽임을 당하였다.
이후 6년 8월에는 대아찬 김융이, 11년 6월과 8월에는 각각 이찬 김은거, 이찬 염상·전 시중 정문 등이 반란하다 죽임을
당하였다.
또 16년(780) 2월에는 이찬 지정志貞이, 2개월 뒤인 4월에는 상대등 김양상金良相이 이찬 김경신金敬信과 함께 거병하여
김지정 등을 죽였으나, 왕과 왕비는 난병에게 살해되었다.
이와 같이 혜공왕대에는 전후 6 차례나 되는 대란이 줄을 이으면서, 혜공왕마저 시해되고 말았다.
혜공왕의 시해자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두 기록이 남아 있다.
김지정의 난병이 시해하였다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과, 김양상과 김경신이 시해하였다는『삼국유사』 경덕왕·
충담사·표훈대덕 조의 기록이 그것이다.
김지정이 반란하여 그 병사들이 혜공왕을 죽였다고 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전자보다 후자를 주목하였다.
혜공왕의 시해자를 보다 분명하게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연구자들은 김양상을 혜공왕의 시해자로 지목하게 되었고, 여기서 그의 정치적 성격을 소급시켜 이해하게
되었다.
곧 그는 이전부터 반혜공왕파反惠恭王派의 거두였으며, 마침내 혜공왕을 시해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혜공왕 시해의 주체를 어떻게 파악하는가 하는 것이 이 시기의 정치사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전제가 되었다.
그러면 김양상은 반왕파의 중심 인물이고, 혜공왕을 시해한 장본인이었을까?
김양상이 혜공왕을 시해하였다는 관점에 선 연구에서는 그 이전 김양상의 행적을 반왕파의 그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상대등에 취임하는 774년(혜공왕 10) 9월을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시기로 이해하였다.
이로써 사실상 중대는 막을 내리고, 하대가 도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혜공왕 10년 정권교체설의 근거로 다음의 3가지
사실을 지적하였다.
767년(혜공왕 3) 왕의 즉위를 전하는 사신으로 당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시중을 지냈을 만큼 친왕적인 인물이었던 김은거
가 775년(혜공왕 11)에 반란을 일으킨 것은 반왕파가 정권을 장악한 데 대한 반항이었다.
혜공왕 재위 16년 중 10년 간에 파견된 견당사절遣唐使節 11회 중 8회가 왕 10~13년에 이르는 4년 동안에 파견되었다.
즉 혜공왕 10년부터는 매년 2회씩의 견당사절이 파견되었으며, 곧 신라 국내의 정권교체와 관련이 있다.
마지막으로, 777년(혜공왕 13) 4월에 김양상이 상소하여 시정時政을 극론한 것은 견당사절을 자주 파견한 것과 같은
혜공왕의 중대왕권 복구운동이 계속된 것에 대한 경고였다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이들 주장은 모두 문제가 있음이 지적되었다.
김은거의 경우에서와 같이한 인물의 성격을 고정적으로 파악할 수도 없거니와, 김양상의 상대등 취임 전 해에도 견당
사절이 2회나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김양상을 반왕파로 파악하는 관점에서는 그 이후의 김양상의 행동을 반왕파의 그것으로 밖에는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결국 김양상이 혜공왕을 시해한 장본인으로 반왕파의 핵심적 인물이란 주장은 혜공왕 10년의 상대등 취임 사실만
주목할 뿐 그 이전 김양상의 활동을 고려치 않았다.
그래서 상대등 취임 전의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 없이 상대등에 취임한 사실만을 부각시키는 것은 전체적인 상황을 고려
치 않은 일면적 고찰이란 비판이 제기되었다.
김양상이 상대등 취임 이전부터 반왕파였다면, 혜공왕 10년 정권교체설은 보완이 필요하다.
또 김양상이 상대등 취임 이후 반왕파의 거두로 등장하였다면, 변절한 이유도 설명이 필요하다.
문제는 김양상이 혜공왕의 시해자였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를 단서로 하여 그가 상대등에 취임하는 혜공왕 10년을 정권이 탈취된 해이며 중대가 종말을 고한 정권교체의
시점이었다고 파악한 데 있는 것이다.
나아가 당시의 정국에서 김양상만 주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었다.
초기 연구에서 간과한 성덕대왕신종 명문에서는 김양상과 함께 그 상위 인물인 김옹金邕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이들이 봉덕사 성전奉德寺成典의 장관으로서 성덕대왕신종 주조의 공동책임자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당시의 정치사를 살필 때는 이들 자료를 아울러 검토하여야 보다 정확한 이해가 가능하다.
김양상은 중대 말 정치사를 이해하는 핵심적 인물 가운데 한 명이 분명하다.
그는 혜공왕이 죽자 왕을 이어 선덕왕宣德王으로 즉위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양상보다 우위의 실권자인 김옹金邕의 존재가 밝혀졌다. 성덕대왕신종 명문에서 김옹과 김양상의 보다 자세한
이력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으나, 이에 대해 연구자들의 관점은 상반된다.
김옹을 김양상과 같은 반왕파로 파악한 견해가 있는 반면, 김옹을 근거로 김양상의 성격까지 친왕파로 해석한 견해가
그것이다.
하대의 기점을 경덕왕대까지 소급시킨 견해가 바로 전자의 관점에 선 연구라면, 후자의 연구는 김옹과 왕실의 관계를
통해 친왕파임을 증명하려 하였다.
김옹은 760년(경덕왕 19) 4월에 염상을 대신하여 시중에 취임하여 763년(경덕왕 22) 8월까지 재임하였다.
김옹이 시중에 취임한 지 3개월 뒤 경덕왕의 왕자였던 혜공왕 건운乾運은 3세의 어린 나이로 태자에 책봉되었다.
혜공왕은 아버지 경덕왕이 상제上帝에게 빌어 나라가 위태로워지더라도 얻고자 한 아들이었으므로, 태자 책봉 또한
경덕왕이 간절히 바라는 바였다고 하겠다.
이에 김옹을 친왕파로 보는 견해는 집사부 시중 김옹이 경덕왕을 도와 이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경덕왕과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되어 갔다고 하였다.
더욱이 김옹과 혜공왕의 관계는 771년(혜공왕 7)의 사실을 전하는 성덕대왕 신종 명문에서 확인된다고 보았다.
김옹은 이때 성덕왕을 위한 신종 주조의 책임자로서 당시 최고의 실력자였다.
곧 봉덕사성전의 검교사檢校使인 그는, 병부령으로서 전중령殿中令, 사어부령司馭府令, 수성부령修城府令을 겸하고,
사천왕사四天王寺·진지대왕사眞智大王寺 성전成典의 장관인 동시에 상상上相으로 대각간의 직에 있었다.
김양상 역시 봉덕사성전의 검교사로서 숙정대령肅正臺令 겸 수성부령修城府令, 감은사성전感恩寺成典의 장관으로
각간이었다.
김옹과 김양상은 공동으로 봉덕사성전의 장관이었으나, 김옹이 수석 장관이었다.
이들 모두 시중을 거쳤다거나, 각각 병부령과 숙정대령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경덕왕·혜공왕과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고 보았다.
더구나 이들은 중대 국왕의 원당으로서 봉사기능을 수행했던 사원의 성전 책임자로서 신종을 주조했으므로, 모두 친왕
파라는 것이다.
나아가 김옹은 774년(혜공왕 10) 3월 경까지도 신라 최고의 집권자로 존재하였다.
이는 초기 연구자들이 간과한 『속일본기續日本紀』의 기록에서 실권자 김옹의 새로운 이력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된 사찬 김삼현이 신라의 사정을 설명하면서, 상재上宰였던 김순정金順貞의 뒤를 이어 그의 손孫
김옹金邕은 김순정이 가졌던 자리를 이어 계속 집정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김옹이 당대 최고의 실력자였으며, 나아가 774년(혜공왕 10) 무렵까지 중대왕실을 지탱해 온 것은 바로 김옹·
김양상 세력임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김순정과 김옹의 관계도 ‘손孫’ 자의 해석을 둘러싸고 아들이란 설과 손자란 설이 대립되었다.
이를 손자로 해석하는 견해에서는 김순정-김의충·삼모부인-김옹·만월부인의 계보로 파악함으로써, 김옹이 외척정치의
중심 인물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김옹과 김양상은 혜공왕 체제를 유지시키려 한 핵심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반왕당파가 아닌 왕당파였다고 주장
하였다.
이처럼 김옹과 김양상의 정치적 성격은 서로 상반된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이에 따라 중대 말 정국을 이해하는 방향이 다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현재까지 나타난 자료에 근거한 해석일 뿐이다.
성덕대왕신종 명문이나 『속일본기』의 기록에 주목함으로써 새로운 해석이 가능했듯이, 신자료의 발견이 이루어진
다면 이들의 성격도 더욱 자세히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당시의 정국을 어떻게 파악하든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파악하는가 하는 논증이 필요하다.
특정 인물의 성격을 미리 전제하고 당시의 정국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왜 그러한 성격을 띠었는지 논리적으로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이영호)
최병헌, 1976, 「신라 하대사회의 동요」, 『한국사』 3(고대 : 민족의 통일), 국사편찬위원회.
중대에서 하대로
『삼국사기』 신라본기 말미에 ‘신라인은 시조 혁거세로부터 경순왕 때까지를 삼대三代로 나누었는데, 시조로부터
진덕여왕까지 28명의 왕을 상대上代라 하고, 무열왕부터 혜공왕까지 8명의 왕을 중대中代라 하였으며, 선덕왕宣德王부터
경순왕까지 20명의 왕을 하대下代라 일컬었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상대(서기전 57~서기 654)와 중대(654~780)를 구분하는 기준은 왕통이 성골聖骨에서 진골眞骨로 바뀐 데서
찾는다.
중대의 마지막 왕은 태종무열왕의 후손인 혜공왕인데, 그는 780년(혜공왕 16)에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킨 와중에
시해되었다.
혜공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김양상(선덕왕)은 태종무열왕 직계가 아니라 나물왕 10대손이다.
그를 이어 왕위에 오른 김경신(원성왕)은 나물왕 12세손이고, 그의 후손이 계속해서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일반적으로 중대와 하대(780~935)를 나눈 기준을 왕통이 태종무열왕 직계에서 범나물왕계로 교체된
데서 찾고 있다.
흔히 888년(진성여왕 2)에 각간위홍角干魏弘과 대구화상大矩和尙이 공동 저술한 향가집 『삼대목』을 근거로 하여
선덕왕대 이후에 정치적, 사회적 불안이 계속되어신라 왕조가 쇠퇴의 기미를 보이자, 신라인 스스로 혜공왕과 선덕왕을
경계로 전성기가 마감되고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고 인식한 결과 당대當代를 하대라고 명명한 것으로 이해해 왔다.
근래에는 『삼대목』에서 ‘삼대三代’는 경문왕의 자식들인 헌강왕과 정강왕, 진성여왕의 3대代를 가리키며, 고려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신라의 역사를 상대와 중대, 하대로 구분 인식하였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에 따르면, 신라인 스스로 말세의식末世意識에 입각하여 하대를 혼란기, 또는 쇠퇴기로 인식하였다고 보기 어려우며,
더욱이 하대 전 시기를 무조건 혼란기, 쇠퇴기로 이해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대 155년은 어떤 측면에서는 긴 기간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문제 제기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신라 하대의 역사에 접근하는 관점으로는 유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 및 중대와 비교할 때, 하대에 왕위계승분쟁이 잦았고 지배체제가 크게 문란해졌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거시적 안목에서 신라의 역사를 통찰한다면, 상대와 중대에 대비해 하대를 혼란기, 쇠퇴기라고 규정하는 것도
여전히 유효하다.
원성왕계의 왕위계승과 다툼
원성왕계 왕통의 확립
원성왕은 왕위에 오르고 나서 곧바로 맏아들 인겸仁謙을 태자로 책봉하였는데, 그가 일찍 사망하자 둘째 아들 의영義英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의영마저 곧바로 사망함에 따라 인겸의 아들 준옹俊邕을 다시 태자로 책봉하였다.
원성왕은 왕위계승을 둘러싼 다툼을 미연에 방지하고 또 태자가 다양한 국정 수업과 경험을 쌓은 후에 국가를 안정적으로
경영하도록 하기 위해 태자책봉제를 통한 왕위계승에 이처럼 집착한 것으로 보인다.
원성왕이 재위 기간 시행한 대표적 정책은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의 제정이다.
이는 국학의 학생을 대상으로 하여 유교 경전의 독해 수준에 따라 상품·중품·하품의 3등급으로 나누어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게 한 제도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그 설치 목적은 관리 선발의 공정성과 국학을 강화하고 또 관직을 둘러싼 권력투쟁을 제어하려는데 있었다고
이해한다.
원성왕의 뒤를 이어 준옹(소성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특별한 치적 없이 1년 6 개월만에 사망하였다.
그 뒤를 이어 청명淸明, 즉 애장왕이 왕위에 올랐는데,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삼촌인 언승彦昇이 섭정하였다.
애장왕대에 태종대왕과 문무대왕의 사당을 별도로 설치하고, 시조대왕과 왕의 직계 4대조를 받드는 5묘제로 개편을
단행하였다.
이는 원성왕계 왕통이 확고하게 정착되었음을 알려 주는 이정표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애장왕대에 공식公式 20여조를 반포하였고 사신使臣을 12도道로 파견하여 모든 군읍郡邑의 강역을 분정分定하였다.
또 불교사찰의 창건을 금지하고 오직 수리하는 것만을 허용하며, 금수錦繡로서 불사佛事하는 것과 금은金銀으로 기물
器物을 만드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런 일련의 조치들은 정치 쇄신을 위한 정책과 연결시킬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개혁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을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다.
현재 연구자들 사이에 논란이 분분한 부분은 애장왕이 언제 섭정을 물리치고 친정을 행하였는가이다.
종래에 언승이 계속 섭정하다가 조카인 애장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올랐다고 이해하였으나 근래에 애장왕이 805년
(애장왕 6)에 섭정을 물리치고 친정을 하였고, 그 시기에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기 위해 공식 20여조를 반포하는 등의
여러 가지 시책을 단행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원성왕계 왕통이 확립된 이후 하대의 정치체제와 관련하여 일찍이 상대등으로 대표되는 귀족세력의 소장消長에 초점을
맞추어 신라의 정치 형태가 귀족연합-전제왕권-귀족연립으로 변동되었다고 주장한 견해가 주목을 끌었다.
이에 따르면, 중고기에 귀족세력의 대표인 상대등이 주재하는 귀족회의에서 국가의 주요 사항을 의결하였던 사실을 통해
당시의 정치적 성격이 귀족연합적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는데, 중대에는 상대등의 기능이 약화되었다가 하대에 다시 정치
적 실권자로서 부상하였다.
이러한 상대등의 정치적 성격 변화는 바로 전제정치(전제왕권)에서 귀족연합(연립)체제로의 전환과 유기적 연관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덕왕 이후 신무왕까지의 왕위계승을 에워싼 정권의 변동이 항상 상대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점을 근거로 왕위의 정당한 계승자가 없을 경우에 상대등이 왕위를 계승할 제1후보자였다고 이해하였다.
근래에 상대등에 임명된 존재가 통상 왕위를 계승하였음을 증명해주는 직접적 사료를 찾기 어렵다고 비판하면서 왕위계승에는 현왕과 가까운 혈연관계가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고, 이밖에 골품제 규정 등이 또 다른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고 주장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또 적장자가 없을 경우 태자太子·부군副君을 지명하거나 유조遺詔 또는 국인國人의 추대에 의해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는데, 국인 추대의 경우라도 현왕과의 혈연관계가 중요하게 고려되었다는 견해가 새롭게 제기되었다.
근래에 제기된 견해의 공통점은 하대에 상대등을 매개로 왕위가 계승된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현왕과의 혈연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되 여러 다양한 요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왕위계승이 이루어졌다고 이해한 점에 있다.
김헌창의 반란과 골품제의 변동
809년에 섭정을 하던 김언승(헌덕왕)이 친동생 수종秀宗과 함께 조카인 애장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헌덕왕은 재위 기간 동안 녹진祿眞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공정한 인사 관행을 확립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대체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고 이해한다.
822년(헌덕왕 14) 3월에 웅천주 도독 김헌창金憲昌이 웅진성(충남 공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김헌창은 국호를 장안長安이라고 하고, 연호를 세워 경운慶雲 원년이라고하였다.
웅천주와 무진주(광주광역시), 완산주(전북 전주), 사벌주(경북 상주), 청주(경남진주) 및 국원경(충북 충주), 서원경
(충북 청주), 금관경(경남 김해) 등 5주 3소경이 이 반란에 동조하였다.
김헌창의 반란은 정부군의 신속한 대응으로 곧바로 진압되었다.
『삼국사기』에서는 김헌창이 아버지 주원周元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였다.
이밖에 김헌창이 옛 백제권에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고 보는 견해, 헌덕왕과 그의 동생 수종
및 충공忠恭 3인의 권력 집중에 반발 또는 옛 백제와 고구려, 가야유민의 반발 등에서 찾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반란의 성격과 관련하여 연구자들은 김헌창이 새로운 국호와 연호를 사용한 사실에 주목하여 신라의 지배체제를 전면
부정하고 새로운 왕조의 개창을 적극 모색한 사실과 그것이 궁극적으로 견훤과 궁예의 후백제 및 후고구려 건국의
선구적 역할을 수행하였던 측면을 강조하였다.
한편 김헌창의 반란이 끼친 영향에 대해 종래에 중앙정부의 지방통제력이 크게 약화되어 지방세력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점, 830년대의 치열한 왕위계승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김헌창의 반란은 하대를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는 획기라고 인식될 만큼 신라의 기존 지배체제를 와해시키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헌덕왕이 아들 없이 죽자, 그의 친동생 수종(흥덕왕)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는 834년(흥덕왕 9)에 골품의 높고 낮음에 따른 의복, 거기車騎, 기용器用, 옥사屋舍에 관한 기존 규정을 재천명하는
교서를 반포하였다.
현재 연구자들 사이에 흥덕왕이 이 교서를 반포한 배경과 목적을 둘러싸고 논란이 분분하다.
학계의 통설적 견해는 9세기 전반에 골품제의 사회적 규제가 느슨해지고 귀족층의 사치풍조가 만연하자, 흥덕왕이
백성들의 사치 풍조를 배격 단속하여 해이해진 기강을 바로 잡고, 위축일로에 있었던 왕권을 일거에 회복하려는 목적
에서 시행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 반해 어떤 연구자는 풍속의 정치적 규제, 골품제의 사회적 기초를 구성하고 있는 동족집단同族集團에 대한 정치적
재평가, 지방에 거주하는 여러 집단에 대한 정치적 재편성과 더불어 무엇보다도 중국 황제의 지위에 대응하는 초월적
존재로서의 국왕의 창출을 목적으로 흥덕왕이 교서를 반포하였다고 이해하였다.
또 다른 연구자는 각 신분 사이의 준별峻別, 특히 진골귀족과 6두품을 확연하게 구별할 목적으로 교서를 반포하였다고
이해하였다.
이밖에 김헌창 반란 이후에 지방민을 회유· 포섭하는 정책의 일환으로서 흥덕왕의 교서에 접근한 연구성과도 제기되었다.
이처럼 흥덕왕의 교서 반포 배경과 목적을 둘러싸고 논란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골품제 자체가 점차 붕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음을 시사해 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은 없는 편이다.
하대 골품제의 변동과 관련된 또 다른 자료가 바로 「보령성주사낭혜화상탑비」에 전하는 득난得難이었다.
학계의 통설은 득난을 6두품의 별칭으로 이해하는 것이지만, 1990년대에 6두품의 별칭이 아니라 그것과 구별되는 하나의
독립된 사회신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어 주목을 받았다.
득난을 6두품의 별칭으로 이해한 일부 연구자는 하대에 이르러 국왕과 그 근친왕족만을 제1골, 즉 성골이라고 부르고,
나머지 진골은 제2골이라고 불러 하대에 이르러 진골 사이에 분화가 나타났다고 파악하였다.
득난을 독립된 신분으로 인정하는 견해는 그것을 진골에서 분화된 신분으로 이해하는 견해와 귀성貴姓, 즉 김씨와 박씨를 칭하는 비진골들이 득난 신분을 구성하였다고 보는 견해로 나뉜다.
최근에 후자의 견해를 수용해 9세기 후반에귀성의 6두품이 여타 성씨의 6두품과 차별되어 득난 신분을 형성하였고,
그 결과 5 두품과 4두품은 법제적 사회신분으로서의 존재감을 상실하는 가운데 골품제는 점차 형해화의 과정을 걷기 시작
하였다고 이해한 연구성과가 제출되었다.
왕위계승 분쟁의 격화와 그 원인
흥덕왕은 836년에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사망하였다.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균정均貞과 제륭悌隆이 다투었다.
제륭의 아버지 헌정憲貞은 균정과 함께 원성왕의 셋째 아들인 예영禮英의 자식이었다.
제륭(희강왕)은 인겸태자의 손자인 김명金明과 아찬 이홍利弘, 배훤백裵萱伯의 지지를 받아 균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왕위계승분쟁에서 패배한 균정의 아들 우징祐徵은 얼마 후에 청해진으로 달아나서 장보고에게 의탁하였다.
838년에 김명(민애왕)이 이홍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켜 희강왕을 자살하게 만들고 왕위에 오르자, 김우징(신무왕)이
태종 무열왕계인 김양金陽과 청해진대사 장보고의 도움을 받아 민애왕을 제거하고 즉위하였다.
일찍이 흥덕왕 사후 치열하게 전개된 왕위계승분쟁의 원인을 장기간의 부자 상속父子相續으로 신라 고유의 왕위 추대제
가 무력화된 데에서 찾았다.
현재 학계의 통설적인 견해는 원성왕의 제손諸孫을 각기 시조로 하는 독립된 가계들이 하나의 정치적, 사회적 단위로
기능한 상황에서 그들 각자가 왕위에 오를 권리를 주장하며 대립, 항쟁함에 따라 치열한 왕위쟁탈전이 전개되었다고
이해한다.
이러한 견해를 좀 더 진전시킨 연구에 따르면, 801년 5묘제를 개편한 이후에 원성왕계 혈족집단 내부에서 직계와 방계의
차이를 강조함에 따라 원성왕계 내부의 혈족집단 자체는 점차 가족 단위의 작은 규모로 분지화되었고, 이것이 830년대
이후 전개된 왕위계승분쟁의 원인遠因으로 작용하였다고 한다.
지방세력의 성장과 개혁의 좌절
장보고의 등장과 지방세력의 성장
김헌창의 반란을 계기로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급격하게 약화되고 지방세력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
되었다.
김헌창의 반란 이후에 등장한 대표적 지방세력이 바로 장보고였다.
당에서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으로 활동한 장보고가 828년(흥덕왕 3) 신라에 귀국하여 완도에 청해진 설치를 건의하자,
흥덕왕이 1만 군사를 주어 그것을 건설하도록 허락하였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라이샤워교수는 장보고가 청해진의 군사를 활용하여 해적을 소탕한 이후, 독자적으로 대당매물사
大唐賣物使와 회역사廻易使 등을 파견해 당 및 일본과 교섭한 사실을 주목하고, 그를 ‘해상상업제국(maritime commercial
empire)의 무역왕(merchant prince)’이라고 묘사하였다.
현재 학계에서는 이 견해를 수용하여 장보고가 청해진을 기반으로 신라와 당, 일본 3국의 중개무역을 독점함으로써
단기간 내에 해상왕국을 건설하였다고 이해한다.
종래에 신라정부와 별도의 지배 기반을 가진 장보고 세력의 정치적 성격을 당의 번진蕃鎭과 연결시켜 이해하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다른 군진軍鎭의 책임자를 진두鎭頭 또는 두상대감頭上大監이라고 부른 데 반해 장보고는 대사大使라고 불렀는데,
대사는 신라의 관직체계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대사를 당의 절도사와 비슷한 성격으로 간주하여 장보고 역시 당의 절도사처럼 중앙정부로부터 정치
적으로 독립적인 성격을 지닌 존재로 파악하였던 것이다.
근래에 신라정부가 장보고에게 ‘감의군사感義軍使’, ‘진해장군鎭海將軍’ 등의 작호 및 식읍, 그리고 장복章服을 사여한
사실을 주목하여 신라 왕실이 장보고가 관할한 청해진을 제후 혹은 번진과 같은 존재로 인식하였다고 주장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장보고는 문성왕과 자기 딸을 혼인시키려다 좌절되자, 청해진을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지만, 결국 무주인武州人
염장閻長에게 살해되었다.
『삼국사기』에서는 장보고가 846년(문성왕 8) 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살해되었다고 전하지만, 『입당구법순례행기
入唐求法巡禮行記』나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에서는 841년 11월이라고 전하여 차이를 보인다.
현재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후자의 기록들을 신뢰한다.
신라 정부가 장보고에게 대아찬 이상의 관등을 수여하거나 중앙 행정 관서의 특정 관직을 제수하였다는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신라 정부가 그를 중앙의 진골귀족으로 편제시키지 않았음을 시사해 주는 측면으로 유의된다.
그러나 문성왕과 그 딸의 혼인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장보고의 중앙정계로의 진출 및 중앙귀족으로의 편입을 의미
하기 때문에 진골귀족들이 결사적으로 반대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그 혼인이 무산되자, 장보고가 반기를 들었다고 볼
수 있다.
미천한 해도海島 출신인 장보고가 서남해지역을 근거지로 세력을 키워 중앙정계의 막후 실력자로서 활동한 사실을
주목하여 9세기 중반에 골품제에 기초한 신라의 지배체제가 상당히 와해되었다고 이해한다.
아울러 진골 중심의 신라 지배체제를 극복하려는 장보고의 꿈은 좌절되었지만, 그가 뿌린 씨앗은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나 원신라原新羅의 지방민 출신이나 고구려·백제계 유민이 주축을 이룬 이른바 호족豪族이 역사를 주도하면서 결실을
맺었다고 평가한다.
헌강왕·경문왕대의 개혁
문성왕에 이어 그의 삼촌인 헌안왕이 왕위에 즉위하였다.
헌안왕의 사후에 헌정계憲貞系 희강왕의 손자이며 균정계均貞系 신무왕의 외손자인 경문왕이 즉위하였다.
그 뒤를 이어 경문왕의 자식인 헌강왕과 정강왕, 진성여왕이 잇따라 왕위를 계승하였다.
신무왕 이후 정강왕 재위 시기까지는 간혹 진골귀족의 반란이 일어나기는 하였지만, 왕위계승이 순조롭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대체로 정치적 안정기라 평가한다.
경문왕과 헌강왕대에 정치적 안정이 가능하였던 배경과 관련하여 두 왕이 원성왕계 왕실의 화합을 도모한 측면을 주목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경문왕이 원성왕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서 곡사鵠寺를 중창하고, 헌강왕이 곡사의 이름을 대숭복사大崇福寺로 바꾸고
국가가 관리하는 정법사政法司에 예속시켰는데, 이것을 경문왕과 헌강왕이 원성왕을 추도하는 사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한 것과 연결시켜 이해하고, 이러한 사업을 매개로 원성왕계 왕실의 갈등을 봉합하고자 하였다고 추론한 것이다.
한편 경문왕과 헌강왕은 정국의 안정을 바탕으로 6두품 출신의 유학자들을 근시직近侍職, 문한직文翰職에 적극 등용
하거나 세택洗宅:中事省과 선교성宣敎省 등의 근시기구와 한림대翰林臺 및 숭문대崇文臺를 비롯한 문한기구의 기능을
강화하여 국왕의 국정 장악력을 증대시키고, 골품제적 정치 운영을 극복하려는 개혁을 추진하였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러한 관점은 신라 하대 문한기구 및 당 관제의 수용, 중앙 행정관서의 명칭과 관직명을 전면 한식漢式으로 개정한 사실
등에 대한 치밀한 연구 성과들에 의해 논리적, 실증적으로 한층 더 보완되어 현재 통설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만, 경문왕과 헌강왕대의 정치 개혁은 지배체제를 안정시키려는 노력과 병행하여 추진되지 않았기 때문에 애초부터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고, 게다가 진성여왕대에 왕족과 진골귀족의 반대로 크게 빛을 보지 못하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도당유학생의 증가와 6두품 지식인의 동향
신라가 당에 처음 유학생을 파견한 것은 640년(선덕왕 9)이었다.
이후 신라에서 꾸준하게 유학생을 파견함으로써 당나라 국자감에서 수학하던 이민족 가운데 신라인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837년(희강왕 2)에 당에 유학한 신라인이 216 명이었고, 840년(문성왕 2) 당나라에서 수학 연한이 종료된 학생 105명을
집단적으로 강제 귀국시킨 사례를 통해 하대에 이르러 도당유학생의 숫자가 급증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그 계기는 당에서 외국인을 위해 빈공과賓貢科를 개설한 데서 찾을 수 있다.
821년(헌덕왕 13)에 처음으로 김운경金雲卿이 빈공과에 합격한 이래, 최치원崔致遠, 최언위崔彦撝를 비롯한 58명의
신라인이 급제한 것으로 확인된다.
당나라 희종(873~888)대의 사람인 범려范攄의 문집 『운계우의雲溪友議』는 헌강왕으로 추정되는 신라왕이 빈공과에
합격한 도당유학생을 우대하여 등용하였음을 전해 주목을 끌었다.
신라에서는 신문왕대에 국학을 설치하면서 그 졸업생만을 지방관으로 채용하는 일종의 원칙을 마련하였다.
또 원성왕대에는 독서삼품과를 제정하여 학생의 수학 능력을 평가하여 관리로 등용하기도 하였다.
독서삼품과를 통한 관리 등용은 도당유학생을 관리로 채용하는 관행이 늘어나면서 위축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
적이다.
국학과 도당유학생 출신 가운데 크게 주목을 받았던 것은 6두품 지식인이었다.
중대에 6두품은 전제왕권의 조언자로서 유교정치이념의 확립에 기여하였다고 이해하거나 당문화를 경험한 6두품 지식
인들의 식견이 신라 문화의 폭을 넓히고 세련되도록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하대에 이르러 6두품 지식인들은 골품제에 기초한 신라 사회를 유교정치사상에 입각하여 개혁하려고 노력하다
가 진골귀족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점차 지방 호족들과 연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이해한다.
6두품 지식인의 대표적 인물로 최치원을 들 수 있다.
여러 연구자가 특히 최치원이 당의 빈공과에 급제한 후에 신라에 귀국하여 골품제에 기초한 신라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방안으로 진성여왕에게 시무時務 10여조를 올렸다가 진골귀족들에 의해 거부당한 사실에 주목하였다.
이밖에 견훤과 왕건 등에게 귀부歸附한 최승우와 최언위 등에 대해서도 커다란 관심을 기울였다.
아울러 6두품 지식인들이 골품제에 기초한 신라왕조를 부정하고 유교정치이념에 입각한 중세국가로서 고려의 건국에
깊게 관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문실력에 기준을 두고 관리를 채용하는 과거제도의 시행에도 크게 기여하였음을 주목
하였다.
호족의 대두와 후삼국의 성립
지배체제의 문란과 농민봉기
8세기 후반 원성왕대에 가뭄이 잇따라 들거나 황충蝗虫이 창궐하여 백성들이 굶주렸고, 도적이 많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9세기 전반 이래 냉해冷害와 한해旱害, 황해蝗害 등으로 말미암아 기근이 자주 들고, 농민 가운데 일부는 도적이 되거나
소규모 조직을 이룬 초적草賊이 되어 활동하였다. 더구나 서남해안지역에서 해적들이 횡행하여 신라 양민을 중국에
노비로 팔아넘기는 사례가 급증하였다.
하대에 이르러 농민들이 동요하게 된 일차적 이유는 잦은 자연재해에서 찾을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귀족이나 부호층의 토지겸병이 지나치게 확대되었다거나 잦은 왕위 다툼을 벌인 귀족들이 농민들에게
과중하게 수취를 부과한 것도 농민들을 동요시킨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근래에 통일신라는 모든 토지는 왕의 토지라고 인식하는 유교적 왕토사상王土思想에 입각한 토지지배정책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진골귀족과 사원, 부호층의 토지겸병이 확대되었고, 757년(경덕왕 16) 녹읍을 부활한 이후에 진골귀족
관리의 가신家臣 등이 지방관의 비호 아래 녹읍지에서 과도하게 수취하는 것이 일상화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즉 토지 겸병의 확대와 녹읍주의 과중한 수취 때문에 녹읍민을 비롯한 농민들의 몰락과 유리현상이 만연하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가뭄 등의 자연재해가 잇따라 발생하면서 농민들이 심하게 고통을 받고 동요하였다는 것이다.
889년(진성여왕 3) 지방에서 부세賦稅를 바치지 않아 국가재정이 궁핍해지자,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부세 납부를 독촉
하였다.
이에 전국 곳곳에서 농민들이 도적이 되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후에도 농민들의 봉기는 끊이지 않았다.
그로 말미암아 국가의 통치체제가 완전히 마비되어 신라 왕조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농민봉기의 원인을 둘러싸고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어있다.
일찍부터 진성여왕의 정치적 실정과 과도한 공부貢賦 납부의 독촉으로 말미암아 농민들이 봉기하였다고 이해하였고,
이는 현재까지도 널리 공감을 얻고 있다.
이후 농민봉기의 원인에 대해 구조적으로 접근한 연구 성과들이 제출되어 그에 대한 이해를 한 단계 더 심화시켰다.
먼저 농민봉기의 원인을 녹읍제의 구조적 문제점과 연관시켜 파악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에 따르면, 757년(경덕왕 16) 녹읍 부활 이후 지방사회는 녹읍주, 즉 귀족 관리들의 사적 지배와 지방관을 통한 공적
지배가 관철되었는데, 하대에 이르러 신라의 중앙집권력이 약화되면서 전자의 지배만이 강화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귀족관리들의 자의적이고 과중한 수취가 가능하게 됨으로써 녹읍민들이 도산하거나 유망하는 사례가 늘어났으며,
9세기 말에도 이러한 현상이 크게 시정되지 않자 결국 889년부터 농민들이 신라 정부에 대해 봉기하였다고 한다.
한편 촌 공동체를 기본 단위로 운영된 연수유전·답제烟受有田·畓制의 구조적 모순에서 농민봉기의 원인을 찾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이에 따르면, 본래 전조田租는 실제 경작한 연수유전·답의 면적과 상관없이 촌락문서에 기재된 면적에 따라 정액定額
으로 부과되고 촌민이 공동으로 그것을 납부하였는데, 신라 말기에 이르러 유망민이 급증함에 따라 촌락에 남아 있는
농민들에게 전조의 부담이 과중되어 결국 농민들이 신라 정부에 대항하여 봉기하였다는 것이다.
이밖에 귀족 및 상인들과 농민 사이의 소득 불균형으로 인한 빈부의 차, 공정한 수취와 불균등한 소득 격차의 해소를
염원하는 농민의 자각 등이 농민들이 봉기한 가장 큰 이유라고 지적하거나 신라 말기에 농민들 사이에 말세의식과
미륵신앙이 널리 퍼지면서 현실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이 고조된 데서 농민봉기의 원인을 찾기도 한다.
호족의 대두와 그 성격
889년부터 전국에서 농민들이 봉기하면서 신라의 통치체제가 마비되었고, 이에 농민군이나 초적으로부터 피해를 당하는
계층들도 자구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먼저 무장력을 확보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농민군이나 초적들의 약탈을 방어하는 한편, 서서히 각 지역의 통치권을 장악하여 나갔다.
이들은 스스로 성주 또는 장군이라고 불렀는데, 이때 안정적 농업생산을 하던 부호층들이 이들을 적극 후원하였다.
현재 학계에서 각 지방에서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성주 또는 장군이라고 자칭한 존재들을 호족豪族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나말여초에 중앙정부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려는 강한 의욕을 가지고 있으면서 행정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일정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한 사회세력을 바로 호족으로 규정하였다.
1980년대 이래 호족이란 용어에 대해 다양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비판은 호족을 소위 ‘족단族團’이라는 혈연에 바탕을 둔 지배세력이라고 규정한 견해에 대하여 집중되었다.
이에 따르면, 혈연적인 기반에 바탕을 둔 호족은 일본사와 중국사에서 고대적인 개념으로 사용되었으므로 나말여초
사회변동을 주도한 성주나 장군 등을 호족이라고 부르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호족이란 용어 대신 호부층豪富層, 또는 지방세력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하였다.
한편 호족은 나말여초에 등장한 지방세력을 집단적으로 지칭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지방 유력자 개인을 나타내는 용어로는 적절하지 못하고, 대신 ‘장군’을 포함한 개념으로서 ‘성주’를 유력자 개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견해
도 제기되었다.
호족이란 용어 속에 혈연에 기초한 사회세력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으므로 나말여초에 각 지방의 지배자로 군림한 성주나
장군을 통틀어 호족이라고 개념 정의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단지 호부층 또는 지방세력, 성주라고 부르는 것도 무엇인가 부적절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향후에 나말여초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어 호족을 대체할 수 있는 적절한 용어가 제시되기를 기대해 볼 수밖에 없다.
학계에서는 호족의 기원과 관련하여 촌주村主를 크게 주목하였다.
신라 중대에 혈연소집단으로 이루어진 촌락의 촌주층이 국가권력의 통제를 배제하면서 자기의 혈연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족단을 형성하였고, 하대에 주위의 동일한 집단을 복속시키면서 서서히 세력을 키워 나가 성주나 장군, 즉 호족으로 성장
하였다는 견해가 일찍이 제기되었다.
이 촌주기원설은 촌주층이 지방사회에서 성장하여 나말여초에 호족층을 이룬 다음, 중앙관제를 모방하여 관반조직官班組
織을 갖추었다고 주장한 연구 성과가 제출되면서 보완되었다.
나아가 대호족세력, 중소호족이 같은 통치구조를 갖추고 지배 - 복속관계를 맺은 중층적 구조를 형성하였으며, 그들 관직
에는 일반적으로 대호족의 친족이나 촌락의 수장들이 임명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
호족의 기원을 촌주에서 찾는 견해는 신라 중앙의 진골귀족이나 두품층을 비롯한 원신라의 지배층에게 지배를 받았던
촌주층으로 대변되는 지방의 지배세력이 전자를 타도하고 그들이 주체가 되어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였음을 강조하였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촌주에서 호족으로 성장한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사례가 매우 적기 때문에 연구자들에게 널리 공감을 얻지못하고 있다.
현재 학계에서는 호족의 출신과 관련하여 낙향한 진골귀족, 군진세력, 해상세력, 지방관리, 촌주, 초적 등 여러 유형으로
나누어 살펴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선종의 수용과 불교계의 변동
신라 하대에는 불교계에서 커다란 변동이 나타났다.
그것은 선종禪宗의 도입과 유행에서 찾을 수 있다.
중국에서 성립된 선종은 하대 이전에 전래되었으나 널리 수용되지 못하였다.
도의선사道義禪師가 821년(헌덕왕 13)에 당으로부터 귀국하여 선禪을 전파하였으나 경전을 숭상하고 불타에 귀의하는
법에만 익숙하여 무위無爲한 선종에 관심을 갖지 않고, 그것을 허황한 것으로 여겨 숭상하지 않았다.
이후 수많은 유학승이 당으로부터 귀국하여 선풍禪風을 진작함에 따라 신라 말에 그것이 점차 널리 퍼지게 되었고,
선사들이 각 지역의 선종 거점으로서 이른바 9산문을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일찍이 신라 하대에 5교 양종과 선종 9산문이 성립하였고, 나말여초를 고대에서 중대로의 전환기로 파악하고 선종을
중세지성으로 평가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1970 년대에 들어와 선사들은 대부분 6두품 이하 신분 출신으로서 지방 호족과 연결되었고, 선종 산문은 지방 호족의
도움을 받아 개창되었다는 연구성과가 제출되면서 중세지성인 선종이 새로운 지배세력인 지방 호족의 지원을 받아
유행하였음이 널리 인정되었다.
경전의 이해를 통해 깨달음을 추구하는 이론적 불교였던 교종에 반하여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와 견성오도見性悟道를
표방하면서 구체적 실천수행을 통한 각자의 불성佛性 계발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선종사상은 개인주의적 성향을 지녀, 중앙정부의 거추장스러운 간섭을 배제하면서 지방에 웅거하여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려는 지방 호족의 의식구조와 부합하는 면을 지녔다는 연구 성과가 제출되면서 기존의 입론이 논리적으로 보완되
었다.
이후부터 신라 왕실과 진골귀족은 교종을, 지방 호족은 선종을 후원하였고, 교종은 골품제에 기초한 신라의 기존 질서를
옹호하는 불교사상으로, 선종은 중세지성으로서 6두품과 지방 호족의 지원을 받아 골품제에 기초한 신라의 지배체제를
부정하고 새로운 중세사회의 구축을 지향하는 불교사상으로 인식하는 견해가 보편화되었다.
1980년대 이래 선종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되면서 선종의 후원세력과 9산문의 성립 시기, 선종과 교종과의 관계 등에 대해
새로운 견해가 제기되었다.
먼저 지방호족이 선종을 후원하였다는 통설에 대한 비판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지방 호족이 일부 선종 산문을 후원하기는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일부 산문은 신라 왕실과 진골귀족, 그리고 지방민이
후원하였음을 밝힌 연구 성과가 여럿 제출되었다.
이에 따라 선종이 지방 호족만이 아니라 왕실과 진골귀족의 후원을 받아 유행하였다는 관점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한편 선종 9산문이 지방 호족의 후원을 받아 신라 말기에 성립하였다고 이해한 통설을 비판하며 나말여초에는 9산문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고, 모두 조계종曹溪宗으로 불렀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에 따르면, 9산문은 고려후기 선종계를 반영한 것일 뿐이고, 나말여초 선종계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일부 연구자가 선종 9산문이 하대에 형성되었다는 반론을 폈지만, 9산문의 성립 시기를 둘러싼 논쟁이 아직 활발하게
이루어졌다고 평가하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하대에 전통적 교학불교의 부패에 대한 반발로 선종이 새로운 사상으로 도입되어 널리 퍼졌다고 이해하
거나 화엄종과 법상종 등의 교종이 이전에 비해 크게 위축되었다고 파악하였다.
이러한 종래의 통설에 대해 화엄종을 비롯한 교종의 각 종파가 자신들의 사찰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해 나가면서
선종과 교종이 상호 병립, 공존하였다는 견해가 제기되어 선종과 교종과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가능해졌다.
이밖에 하대에 이르러 현실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경향을 지닌 미륵신앙이 널리 퍼짐으로써 견훤과 궁예 등이 자립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제공해주었다고 주장한 연구성과도 제출되어 주목을 끌었다.
한편 신라 말기에는 풍수지리설과 도참사상도 널리 전파되었다고 알려졌다.
후백제·후고구려의 건국과 후삼국의 정립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甄萱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에 사는 아자개阿慈介의
아들이다.
아자개는 농사를 지어 생활하다가 장군將軍이 된 사람으로 전한다. 견훤은 군대에 입대하여 처음 경주 근처에서 근무
하다가 후에 서남 해안가에서 경비를 섰으며, 모범적 군대생활을 통해 비장裨將에 진급하였다.
견훤은 889년(진성여왕 3)부터 전국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자, 군대를 떠나 전라도지역에서 농민들을 규합한 다음 892년에
무진주(광주광역시)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 완산주(전북 전주시)에 진출하여 백제부흥운동을 제창하고, 마침내 900년에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는 헌안왕 또는 경문왕의 왕자였는데 태어나자마자 왕에게 버림을 받았고, 한동안 세달사世達寺
(영월)에서 선종善宗이란 이름으로 승려 생활을 하였다.
889년부터 농민들이 전국에서 봉기하자, 궁예는 죽주竹州(안성시 이죽면 일대) 기훤箕萱의 부하가 되었다가 후에 다시
북원北原(원주시)의 양길梁吉에게 귀부하였다.
궁예는 양길의 군대를 이끌고 강원도 동해안과 북부지방 및 황해도지방으로 진출하였고, 그 후 자립한 그는 899년에
비뇌성非惱城에서 양길의 군대를 물리치고 충북지방까지 세력을 넓혔다.
궁예는 옛 고구려지역을 대부분 차지하자, 901년에 송악(경기도 개성시)을 도읍으로 하여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고구려
부흥운동을 제창하였다.
이로써 다시 한반도는 신라와 후백제, 후고구려로 분열되었다.
『삼국사기』에서 견훤은 상주 가은현에 사는 아자개의 아들이라고 전하나 『삼국유사』에는 지렁이와 광주 북촌의
부잣집 딸 사이에 태어났다고 전한다.
대체로 견훤이 상주 출신이라고 이해하지만, 일부 연구자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존중해 광주 출신설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상주 출신설을 지지하는 경우, 『삼국유사』의 탄생설화는 견훤이 무진주에 진출한 이후 무진주 토호의 딸과 혼인한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한다.
한편 견훤은 처음에 자신이 근무하였던 서남해안의 군진과 해상세력을 기반으로 세력을 키워 농민들의 적극적 호응을
받았고, 후에 무진주와 완산주에 위치한 여러 공병조직을 흡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주들의 호족세력을 규합하여
후백제를 건국하였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궁예가 헌안왕 또는 경문왕의 왕자라고 전하나 일부 연구자는 궁예가 신라에 대한 반란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스스로 신라의 왕자라고 꾸민 것으로 이해하거나 낙향한 진골귀족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사료상에서 궁예는 농민 또는 초적들을 기반으로 세력을 키웠다고 전하지만, 후에는 패서浿西와 송악지역 호족들의
적극적 지원을 받아 후고구려를 건국하였다고 이해한다.
궁예가 미륵불을 자처하며 폭압적 전제정치를 행하자, 918년에 신숭겸과 복지겸 등이 정변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왕건은 국호를 태봉에서 고려高麗로 고치고 수도를 철원에서 송악(개경)으로 옮겼다.
견훤은 935년 넷째 아들 금강金剛을 후계자로 삼으려다가 장남 신검神劒 등의 반발을 사서 결국 왕좌에서 쫓겨나
금산사에 유폐당하였다가 고려로 망명하였다. 후
삼국의 정립 이후 신라는 경주와 그 주변지역만을 통제할 정도로 국력이 쇠약해졌고, 후백제와 태봉 사이의 대립을
이용하여 겨우 나라의 명맥만을 유지할 뿐이었다.
927년 후백제군의 침략을 받아 경애왕이 죽임을 당하는 등 큰 위기를 맞았다.
견훤에 의하여 왕위에 오른 김부金傅(경순왕)는 곧바로 친고려정책을 추진하다가 마침내 935년에 고려에 항복하였다.
고려는 936년 명주 호족 김순식 등의 도움을 받아 일리천(경북 구미시 선산읍의 낙동강)전투에서 신검의 후백제군을
물리치고 결국 그의 항복을 받아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나말여초 사회변동의 역사적 의의
일제식민지시기에 삼국시대를 노예제사회로 규정하고, 통일신라라는 과도기를 거쳐 고려의 성립과 동시에 봉건적 사회
구성의 기본 특질(봉건 영주 또는 지주와 농노의 생산관계)이 관철되면서도 서유럽 및 일본의 유형과 구별되는 조선
사회의 특수한 아시아적 봉건제가 완성되었다고 주장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에 따르면, 통일신라 시기에 노예제사회가 점차 와해되면서 봉건제사회로의 이행이 진전되었고, 나말여초를 거쳐
토지국유제를 물질적 기초로 하는 아시아적 봉건사회가 성립되었다고 한다.
해방 후 북한에서 고·중세 시대구분론이 활발하게 전개된 결과, 고조선과 부여, 진국을 노예제사회로, 삼국은 봉건제
사회였다는 견해가 북한 학계의 공식적 입장으로 정리되었다.
이에 따른다면 통일신라에서 고려로의 이행은 왕조의 교체와 더불어 일어난 봉건사회 내부에서의 발전 과정으로 평가
할 수 있다.
1960년대 이래 남한에서도 고·중세 시대구분론을 둘러싸고 활발하게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현재 연구자들 사이에 고·중세의 분기점을 각각 통일신라로 보는 견해와 고려로 보는 두 견해가 크게 대립하고
있다.
전자의 견해를 제기한 연구자들에 따르면, 나말여초의 사회변동은 왕조의 교체 및 중세사회의 발전과 연계시켜 이해할
수 있다.
반면에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는 연구자들은 나말여초의 사회변동은 바로 고대사회에서 중세사회로 이행하는 획기를
이룬다고 파악하고 있다.
현재 학계에서 널리 통용되는 견해는 후자이다.
일찍이 친족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족장세력의 정치지배시대였던 고대사회가 통일신라 말에 이르러 해체·붕괴되고,
고려 초기에 유교적 정치이념을 기반으로한 중세사회가 성립되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 견해는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이행하면서 골품제 폐지와 과거제 시행 등에서 상징적으로 엿볼 수 있듯이 정치 참여
층의 범위가 확대되고 정치 운영방식에서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기 때문에 많은 연구자의 공감을 얻었다.
근래에 사회경제사적 측면에서 나말여초의 사회변동에 접근한 연구성과가 여럿 제출되었다.
먼저 통일신라까지 인정人丁과 연烟을 중심으로 수취를 부과하였으나 고려에 이르러 전결田結을 단위로 하여 십일세
什一稅를 부과하는 것으로 수취양식이 바뀌었는데, 이것은 바로 고대적 인신지배 수취에서 전토田土를 기준으로 한
중세적 수취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통일신라에서 호등戶等에 따라 차등을 두고 조조租調를 부과하는 세제, 즉 인호세人戶稅를 기초로 하여
조세체계를 운영하다가 신라 말기에 인호의 도산逃散과 봉기蜂起로 가호 단위로 조세 수취가 곤란해지자, 궁예가 인호세
人戶稅의 비중을 낮추고 토지면적에 따라 전조田租를 징수하는 세제를 시행하는 방향으로 세제를 개편하였고, 고려 태조
왕건은 십일세什一稅 시행을 통해 민심을 수습하였다는 견해가 제기되면서 논리적으로 보완되었다.
이밖에 사회사적 측면에서 나말여초를 고대와 중세의 분기점으로 설정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에 따르면, 중세사회의 가장 보편적인 특징은 분권적 정치구조와 공동체적 질서에서 찾을 수 있는데, 후삼국 시기 지방
사회에서 농정권農政權을 장악한 호족들의 공동체적 질서, 즉 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농경공동체로서의 향도공동체가
바로 중세적 특징을 지녔다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일부 연구자는 불교사적 측면에서 종파불교의 형성을 고대와 중세의 분기점으로 이해한 다음, 나말여초에 여러
산문山門을 중심으로 하는 종파불교가 형성되면서 고대사회는 종결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현재 나말여초의 사회변동을 고대사회에서 중세사회로의 전환과 연결시켜 이해하는 연구자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이러한 시각이 널리 공감을 얻은 이유는 통일신라의 지배구조가 폐쇄적 신분제인 골품제에 기초한 반면, 고려는 골품제에 기초한 지배구조를 극복한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사회경제사적 측면에서 통일신라를 중세의 기점으로 인정하는 연구자들이 적지 않지만, 통일신라의 핵심 지배층이 삼국
시대와 마찬가지로 원신라의 왕경 6부인과 그 후예였기 때문에 많은 연구자가 통일신라기를 중세의 기점으로 파악하는 데 선뜻 동의를 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다고 하더라도 나말여초를 고대에서 중세로 이행하는 전환기라고 규정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다양한 분야에서 좀더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함은 물론이다.
여기에다 고대와 중세, 근대로 구분하는 이른바 3시기 구분법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염두에 둔다면, 시대구분적 방법론을
탈피해 나말여초의 사회변동에 접근하는 새로운 연구방법론의 개발도 긴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향후 다양한 분야, 다양한 시각에서 나말여초의 사회변동에 접근함으로써 새로운 나말여초의 역사상이 정립되기를 기대
해본다.
(전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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